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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죄와 구원의 덕

도널드 캡스 지음 | 한국장로교출판사
대죄와 구원의 덕

도널드 캡스 지음

한국장로교출판사 / 2008년 / 242쪽 / 9,000원




제1부 대죄



전통적인 '일곱 가지 대죄'는 단테의 『신곡』의 "지옥편"과 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 같은 중세기 문학에 묘사되어 있다. 강단에서 설교로 선포되고, 도덕 철학 강의로 다루어지며, 고해실에서 활용되어 왔다. 현대극, 문학과 신비 소설, 영화 등에서 자주 인용되기도 했다. 전통적인 7가지 대죄의 목록은 대부분 다음과 같은 순서로 거론되고 있다. 교만(pride), 시기(envy), 분노(anger), 나태(sloth), 탐욕(greed), 탐식(gluttony), 색욕(lust)이다. 원래의 목록에서 빠진 여덟 번째의 죄는 우울 또는 비탄(tristitia)였는데 이것은 냉담(apathy) 또는 무감각(acedia)과 융합되어 영어권에서 '나태'를 나타내는 죄의 목록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책의 주안점은 어떤 기적적 치료(갑작스런 회의 체험에 의하여)가 아니라 덕성의 개발을 통해 대죄가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네 가지 주요 또는 자연적 덕성(정의, 신중, 절제, 용기)과 바울의 세 가지 신학적 덕성(믿음, 소망, 사랑)을 조합한 목록인 다양한 전통적 덕성의 목록이 있다. 에릭 H. 에릭슨의 덕성의 목록에는 희망, 의지, 목적, 능력, 충성, 사랑, 배려, 지혜가 포함되어 있다. 이 덕성들은 모든 인간이 잠재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선천적인 힘이라는 관점에서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계획과 노력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우리들이 덕성을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안에 우리를 위하여 창조된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들을 함양할 수 있으며 우리 삶에 보다 효과적인 힘이 되도록 도모할 수 있다.

35년보다 더 이전에, 에릭 H. 에릭슨은 사람이 여덟 단계의 생의 주기를 겪게 된다고 제안했다. 각 단계에서 우리들은 자신들의 지속적인 발달을 위하여 중대한 위기를 경험한다. 에릭슨은 각 단계의 위기 처리를 위한 이상적인 조치는 '부정적' 축(불신, 수치, 의심, 죄책감 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 축과 부정적 축 사이의 적절한 비율을 찾는 것에 있다고 보았다. 건강한 성장을 위해 긍정적 축이 우세해야 하지만, 부정적 축의 자리가 전혀 없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은 적당한 불신감(세상이 그토록 믿을 만한 곳이 아니기 때문에)을 가져야 하고, 적당한 수치(아니면 몰염치한 사람이 될 것이므로), 죄책감(아니면 양심이 결여될 것) 등을 지녀야 한다.

필자는 전통적인 죄의 목록과 에릭슨의 생의 주기 단계가 밀접한 연결점이 있음을 발견했다. 각 단계마다 대죄가 하나씩 있는데, 한 가지의 죄는 그 단계 고유의 것이며, 그 시기의 도덕적, 영적 삶에 현저한 요소이다. 연결의 기본 원리는 한 단계에 부과된 죄는 그 단계의 역동에서부터 성장한다는 것이다. 단지 행동적인 면만 아니라 기질적인 면과 함께 죄는 부정적 역량 또는 잠재 능력으로 그 죄가 부과된 단계의 위기 상황으로부터 발달한다. 더 나아가서 죄는 긍정적 축의 극단으로부터도 발달할 수 있으므로 단순히 주어진 단계의 부정적 축으로부터만 발달한 것이 아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죄는 긍정적, 부정적 축들의 복잡한 상호작용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모든 전통적 대죄의 기질적 뿌리는 반항, 인격적 굴레, 고립(소외)에 근거하고 있다. 탐식을 예로 들자면, 탐식이 무분별한 신뢰에서 기인할 때는 우리 몸에 해로운 물질에 의해 우리가 통제 당하는 인격적 굴레가 우리 안에 조성된다. 반면 탐식이 미래의 상실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되었을 때 필요한 것보다 더 확보해야 한다는 의식은 지지와 영양이 결여된 결과이다. 또한 탐식이 우리들이 매우 의지하고 있는 사람들로부터의 심각한 고립감에서 연유되었다면, 탐식은 몸이 지니고 있는 선천적인 한계에 대항하여 싸우는 자기 파괴적이며 성과 없는 전투를 벌이는 반항을 보이게 된다.

분노 역시 이 세 가지 죄의 뿌리를 지니고 있다. 행동적 측면에서 분노는 반항의 형태를 취하나, 태도나 기질적 측면에서는 인격적인 굴레로부터 발생하여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소외로 나아간다. 분노는 우리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던 사람들에게서 긍정적 찬사와 확신을 얻지 못하는 무능력 또는 인격적인 실패와 굴욕의 경험들로부터 생겨난다. 따라서 분노는 인격적 굴레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우리들의 자기 이미지에 가하는 공격에 대해 내면적인 격노로 전환되는 결과를 낳는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자기 조절 감각과 적절한 자존감, 인격적인 존엄성을 획득할 수 있게 하는 진정한 자율성의 경험을 통해 인격적인 굴레를 극복하지 못하면, 분노는 세 번째 죄의 뿌리인 소외를 반영하게 된다. 그때부터는 더 이상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들을 단지 비판하고 저주하는 자들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분노는 인격적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데에 필수적인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피하게 만드는 악순환이 된다.

제2부 구원의 덕



에릭슨은 '선천적인 능력'을 표현하기 위해 '덕'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므로 이것은 '기운'(spirit)이라는 단어와 교환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도덕성이 단순한 도덕주의가 되거나 우리의 윤리가 나약한 선이 되지 않고 인간의 삶에 생명력과 활력이 넘치는 자질을 부여하는 능력은 어떤 것일까? 여기서 관심을 집중하여 살펴보려는 자원은 에릭슨이 생의 주기 단계 이론에 적용했던 덕성들이다. 각각의 대죄들마다 그것을 제압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 줄 수 있는 한 가지(또는 더 많은) 덕이 있다. 대죄와의 전투를 위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원들이 무엇이며, 그것들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사용할 것인지 알아야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이 덕목들은 부과된 단계에만 제한되어 있지는 않다.

희망과 의지와 용기의 덕



희망과 의지와 용기의 덕은 세상과의 긍정적인 관계를 구현한다. 희망은 실현 가능성이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의지는 상호 협력의 정신으로 세상과 관계를 갖는다. 그리고 용기는 세상이 자신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 때문에 세상과 관계를 단절하도록 버려 두지는 않는다. 생의 주기의 첫 두 단계에서 죄와 덕 사이의 각축전은 아이가 세상을 향한 긍정적 방향이나 또는 부정적 방향 중 어느 방향으로 인도될 것인가가 결정되는 투쟁이다.

에서나 모세는 세상과의 관계가 왜곡되고 오도된 삶의 이방인들이 아니었다. 동시에 그들은 덕성의 전형이 아니었다. 에서와 모세의 성경 이야기는 덕이 관습적인 교범이나 도덕적인 정결이 아닌 것을 볼 수 있도록 해 준다. 도리어 덕은 세상을 거부하는 태도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보이는 경험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향한 긍정이다.

목적, 헌신, 능력, 훈련, 충성의 덕



희망과 의지와 용기 등이 세상과 관련되는 특성을 지닌 구원의 덕성들이라고 한다면, 이 덕들은 덕을 지닌 삶을 특징짓는 연속성과 일관성이라고 할 수 있다. 목적을 가지고 집중해서 하는 활동, 능력과 훈련된 마음으로 실행하는 생산적인 작업,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향한 성실성을 통해 우리들의 삶이란 별개의 분리되고 고립된 경험이 아니라 계속되는 과정이라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배운다. 이 단계들을 통과하면서 우리가 하고 있는 것에 대한 관심을 유지할 수 있게 되고, 분별할 수 있는 특징과 능력과 관심을 지니고 있는 존재로서 우리 자신에 대해 점차로 눈을 뜨게 된다. 일관성 또한 세 번째 단계의 헌신에서 시작되어 다섯 번째 단계의 성실에서 정점에 달한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삶을 통해 적어도 변화되지 않고 남아 있는 우리의 욕구를 알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와 또한 그것이 확고부동하다는 것을 배운다.

우리는 목적을 가지고, 헌신되고, 능력 있고, 훈련된 성실한 존재로 자신을 경험함으로써 스스로가 도덕적임을 깨닫게 된다. 발람과 사울과 요나의 이야기가 명시해 주는 것처럼 이 단계는 자기 정체성이 가장 위험에 처한 시기이다. 우리가 그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다루는 문제는 다름 아닌 도덕적 자기의 해체에 맞서는 도덕적 자기의 형성 이야기라는 것이다. 발람과 요나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이 간여하신 사건은 애송이 선지자들의 도덕적 성숙을 보호하고 양육하려는 의도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사울의 비극적인 말로는 그의 도덕적 타락이 너무 진행되어 하나님의 간섭에 전혀 반응할 수 없었던 것을 그리고 있다.

사랑, 돌봄, 지혜의 덕



삶의 주기에 따른 덕성들의 공통적인 특성은 생명력이다. 특히 사랑과 돌봄과 지혜의 덕은 삶을 충만하게 살 수 있는지 관심을 갖게 하는 덕성이므로 이들을 가리켜 생명의 힘이라고 한 에릭슨의 시각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색욕과는 대조적으로 사랑의 덕과 같이 우리가 덕이라고 부르는 모든 생명력은 어느 누구나 다가설 수 있으며 성별과 관계가 없다. 따라서 사랑의 덕은 인간의 생명과 구원의 덕을 본질적으로 연결한다. 이와 유사하게 삶의 주기에서 남은 두 가지의 덕목은 개인적인 생명력을 나타낸다. 냉담의 죄가 인간을 쇠퇴시키는 것에 대항하여 돌봄의 덕은 심오한 차원에서 영적으로 살아 있음을 의미하는 성인기의 생산성에 관여한다. 삶을 파괴하는 무관심의 죄에 대항하여 지혜의 덕은 마음의 활력을 불러일으킨다. 생명력이란 전체성(온전함)을 말하며 신체적, 영적, 정신적으로 살아 있다는 지각과 관련되어 있다.

초기 성인기에 대체로 신체적 영역 특히 성적 만족과 생식 능력과 연관해서, 우리 자신이 참으로 살아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데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알게 된다. 장년기에 우리는 영적인 영역, 즉 우리 안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이 함께 거하시고 있다는 것이 우리가 참으로 살아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가를 발견한다. 또한 노년기에 우리는 참으로 살아 있다는 감각이 얼마나 우리 마음의 활력에 의존하고 있는가를 알게 된다. 사랑과 돌봄과 지혜가 있으면 삶은 풍성해진다. 죄의 뿌리는 반항과 인격적 굴레와 고립이다. 그에 반해 덕의 뿌리는 연속성과 일관성이며, 세상과 함께하는 생명력과 참여 정신이다. 우리는 돌봄과 아세디아와의 변증적인 성경의 예를 전도서의 저자로 알려진 코헬렛에게서 볼 수 있으며, 지혜와 우울의 변증적인 성경의 예는 욥에게서 볼 수 있다.

제3부 구원의 은혜



구원의 덕이 대죄에 대항할 수 있는 우리의 가장 강력한 방어 수단이라고 한다면, 구원의 덕성이 어떻게 하면 우리 삶에 활성화될 수 있는지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대단히 중요하다. 사실상 유대-기독교 전통의 한 가지 중요한 특징, 즉 성서적 세계관은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삶을 변화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에릭슨은 예수님의 갈릴리 어록에 대한 논문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참된 신앙'을 위한 사람들의 자질을 말씀하고 확증하고 있다고 보았다. 에릭슨이 발췌한 치유 이야기("네 믿음이 너를 온전케 하였느니라")에 나오는 말씀처럼 팔복은 믿음에 관해 하는 이야기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 믿음을 자라게 하고 힘 있게 하는 것이다.

많은 저자와 설교자들은 '복'(beatitude)이라는 단어가 '태도'(attitude)라는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말은 팔복이 관심하는 바는 오고 가는 행동에 있지 않고 더욱 강하게 견디면서 성장하는 태도에 달려 있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팔복은 단순히 어떤 태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신앙이 담아야 하고 지녀야 하는 '영'(spirit)이란 단어를 더 많이 사용해야 한다. 팔복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성령 충만한 삶의 이미지를 우리에게 주고 있다.

제1단계 : 기대의 영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에릭슨의 생의 첫 단계의 역동성인 신뢰는 우리를 돌보는 사람이 함께하고 있을 때 형성된다. 우리를 안아 주고 이름을 불러 주며 돌보아 주는 사람과 어린아이 간에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는 만남'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모든 차후의 경험들의 원형이 된다. 우리 영혼 또는 동기의 내적 정직성(integrity)으로 표현되는 마음의 청결함은 우리 안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을 기초로 하는, 하나님을 향한 기본적 신뢰에서 비롯된다. 청결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그 안에 소망의 근거를 가지고 있으므로 불안을 극복하며 살아간다. 이 '마음의 청결함'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자 하는 간절한 욕구 외에 다른 동기가 없는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이므로, 기대의 영을 나타낸다.

필자는 여기에서 기대의 영이 인간의 희망의 힘을 유지할 수 있는 참된 신앙의 요소라는 것을 제안한다. 우리의 영혼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보고자 하는 기대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희망의 핵심은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주는 어떤 것에 근거한 기대(탐식에서 그러하듯이)가 아니다. 희망은 돌보는 사람의 출현을 기다리는 어린아이를 지탱하게 해 주며, 또한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기다릴 때에 순수한 마음으로 지탱하게 해 준다. 그들이 기다리는 동안 기대하는 사람이 돌아와서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해 줄 것이라는 확신에 의해 견딜 수 있게 한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보기를 열망하며, 또한 하나님도 이와 동일한 기대의 영을 함께 지니고 계심을 직감한다.

제2단계 : 자기 조정의 영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 요"

히브리어로 온유함이란 다른 이의 지도를 순종하는 태도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헬라어로는 '조정하에 처한다'는 뜻을 갖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와 같은 조정은 무모와 비겁이라는 양극단 사이에서 중간을 의미했다. 온유함이란 용기의 형태를 갖는다. 그리고 분노가 일어나는 상황에 가장 잘 나타난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온유함을 "책망과 경멸을 적절히 견디는 능력으로 성급하게 복수하려 하지 않고, 성을 쉽게 내지 않지만 마음에 평온과 안정감을 가지고 비판과 다툼으로부터 자유로운 태도"로 정의하고 있다. 플라톤은 온유함을 지각과 관대함의 조합으로 보고 있다. 이것을 토대로 바클레이는 온유함이 자기 조정 또는 자기 조절의 영을 반영한다고 결론을 맺고 있다.

자기 조정으로서의 온유함에 대한 관점은 생의 주기의 두 번째 단계에 잘 어울린다. 유아기를 지나면서 아이는 의지와 신체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한다. 부모와 아이와의 의지의 충돌은 다반사이며 때로는 분노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 단계의 어린이들은 자신들이 새롭게 얻게 된 의지의 능력을 조정하고, 다른 사람들의 뜻과의 마찰을 조정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과도한 조정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그런 종류의 온유함으로 가게 되나, 적당한 자기 조정은 팔복이 말하고 있는 온유함을 만들어 낸다.

팔복이 말하는 온유함은 관대한 정신을 지닌 온유함이다. 특별히 분노가 일어날 때에 성급하게 다투지 않는다. 대신에 책망을 당하거나 멸시 당할 때에 평온하고 안정된 태도와 용기를 가지고 반응한다. 이 복은 스스로 약해지거나 무능해지지 않도록 자기 조정을 연습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동시에 모든 일에 이기기 위해 싸울 필요가 없으며, 자신을 높이고, 자기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 스스로 안정되어 있으며, 자신에게 권세가 있다고 느끼고자 할 필요가 없다. 그들의 권세는 자기 조정의 영, 즉 자신을 스스로 조정할 수 있다는 인식에서 나온다. 이 자기 조정의 영은 인간 의지와 용기를 유지하는 참된 신앙의 요소이다. 이 영을 가짐으로써 우리들은 무모한 변덕과 비겁한 억제의 극단적인 태도를 피하게 된다.

제3단계 : 평등의 영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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