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최고의 축복 3:16
맥스 루케이도 지음 | 두란노
내 생애 최고의 축복 3:16
맥스 루케이도 지음
두란노 / 2008년 3월 / 212쪽 / 10,000원
1. 사랑하기 전에 꼭 알아야 할 것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니고데모는 자기 집 2층 창가에 앉아 올리브 잎 차를 마시며 해 지는 광경을 바라본다. 이 시간 예루살렘 풍경은 아주 황홀하다. 지는 햇빛에 돌로 쌓은 거리들이 연하게 물들고, 하얀 집들은 금박을 입힌 듯 반짝거리고, 완고해 보이는 성전 건물이 유난히 돋보인다. 니고데모는 오늘 아침 성전 안뜰을 거닐었다. 내일 아침에도 그럴 것이다. 종교 지도자들과 한데 모여 그들이 하는 일을 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 논하는 일, 즉 하나님께 다가가는 법,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법, 그리고 하나님의 분노를 가라앉히는 법에 대해 논하는 일 말이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니고데모는 그들과 한자리에 앉아 있다. 논쟁하기, 생각하기, 수수께끼 같은 문제풀기, 딜레마 해결하기, 안식일에 신발 끈을 묶어도 되는가,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 밥을 줄 것인가, 아내와 이혼해도 되는가, 부모의 명예를 더럽히는 자를 어떻게 할 것인가…. 니고데모는 알아야 한다. 그것이 그의 직업이다. 그는 거룩한 사람이고, 거룩한 사람들을 지도한다. 그의 이름은 율법학자들의 엘리트 명단에 올라 있다. 그는 율법에 일생을 바쳤고, 유대 최고 법정을 구성하는 일흔한 명 중의 한 사람이다. 니고데모는 신임 받는 사람이고, 그에게는 영향력이 있다. 그런 그가 의문을 품고 있다.
갈릴리 대중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이 사람에게 가서 의문을 풀려고 한다. 졸업 증서도 없는데 사람들이 모여드는 이 보잘것없는 교사. 대중들에게는 얼마든지 시간을 내주면서 성직자나 고고한 상류층 사람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는 이 사람. 그는 마귀를 쫓아낸다고 한다. 죄를 사해준다고도 한다. 성전을 깨끗케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니고데모도 의심이 없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솔로몬의 행각을 정결케 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그의 분노를 보았다. 그는 채찍을 휘두르면서 비둘기들을 날려보냈다. "내 집에서 주머니를 불리지 말라!" 예수님의 분노가 폭발했다. 소동이 가라앉고 허공에 날아다니던 동전들이 땅에 떨어질 즈음, 성전에서 벌어지는 매매 행위로 부정 이득을 보던 성직자들은 그를 뒷조사하고 있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밤에 움직인다. 동료들은 이 만남에 대해 알지 못한다. 알아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그들이 이해해줄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다. 도성 안에 어둠이 내려 덮이자 그는 길을 나선다. 남들의 눈을 피해 좁은 길로 접어들어 어느 소박한 집 문 앞에 이른다. 듣기로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이 집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니고데모는 문을 두드린다.
그가 들어서자 시끌시끌하던 방 안이 갑자기 조용해진다. 방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선창 일꾼들과 세리들로, 율법학자가 속한 교양인 세계에서 익숙지 않은 이들이다. 그들이 자리를 마련해준다. 예수님은 손님에게 앉으라는 시늉을 한다. 니고데모는 자리에 앉아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대화를 시작한다. "랍비여,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님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다면 선생님이 행하신 그런 표적들을 아무도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도 당신 얘기를 들었소, 니고데모."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VIP 신분이나 그의 선한 의도, 학문적 자격 등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연산법에서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렇게만 선언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성경의 대륙 분수령, 신앙의 국제 날짜 변경선을 보라. 니고데모는 이편에 서 있고 예수님은 건너편에 서 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차이에 관해 사정을 봐주지 않으신다. 니고데모는 선한 시도, 성실한 몸짓, 각고의 노력이 통하는 땅에 살고 있다.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면 그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주신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은? 네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너의 공로는 아무 효과가 없다. 네가 멋들어지게 노력해도 별 의미가 없다. 거듭나지 않는 한 너는 하나님이 과연 무엇을 어느 정도까지 해주실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우리 모두의 마음을 대변하듯 망설인다. "다시 태어난다고요? 나이가 들어 늙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나겠습니까? 농담이시죠? 삶을 거꾸로 돌리라고요? 모든 걸 다시 시작하라고요? 사람은 다시 태어날 수 없답니다." 사실, 할 수만 있다면 우리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가? 다시 한 번 하기, 다시 한 번 시도해보기, 재장전. 우리가 지나온 자리를 따라 마음이 상했던 일들과 놓쳐버린 기회들이 흔들거리고 있다. 없었던 걸로 해주세요, 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정말 멋질 것이다. 하지만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이때 한바탕 바람이 불어, 열린 창문으로 나뭇잎 몇 장이 날려 들어온다. 예수님은 바닥에 떨어진 잎사귀 하나를 주워 올리신다. 하나님의 권능은 저 바람처럼 역사하신다고 예수님은 설명하신다. "새로 태어난 심령은 천국에서 태어난다. 너는 그걸 노력해서 얻을 수도, 창조할 수도 없다. 새로운 탄생?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일은 시종일관 하나님께 달린 일이다."
니고데모는 방 안의 제자들을 둘러본다. 그들의 얼빠진 표정 역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당혹스러움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사람에게서 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다시 태어난다? 탄생은 수동적인 행위다. 태 속에 들어 있는 아이는 분만에 기여하는 게 없다. 어머니가 탄생의 대가를 치른다. 아기는 탯줄의 도움이 없으면 새 생명으로 가는 길을 찾아나가지 못하는 것은 물론 숨도 쉬지 못한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역시 그러하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그럴 능력이 있는 아기가 아니라 그럴 능력이 있는 부모가 필요하다.
이 부모가 누구인가? 많고 많은 단어 중에서 '다시'라는 단어가 정선되었는데, 이 단어를 전략적으로 점검해보라. '다시'라고 번역된 헬라어에는 두 가지 쓰임새가 있다. 팔린palin; 어떤 행위를 반복하는 것, 전에 했던 것을 다시 한다는 의미다. 아노텐anothen; 역시 반복된 행동을 뜻하기는 하지만, 이 행동을 반복하기 위해서는 원래 그 행동을 했던 존재가 있어야 한다. 이는 '위로부터, 더 높은 곳으로부터, 천국이나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처음에 이 일을 했던 존재가 이것을 다시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의미를 선택하셨다. 이 두 단어의 차이는 다빈치가 그린 그림과 내가 그린 그림의 차이만큼 크다. 나 루케이도가 다시 그린 <모나리자>는 피카소 그림처럼 불균형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 번째 헬라어인 '아노텐'을 채택하셔서, 원래 그 행동을 했던 존재가 그 행동을 다시 할 것을 요구하신다. <모나리자>를 예로 든다면, 다빈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기가 막혔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호프 다이아몬드(인도에서 발견된 사파이어 빛 보석으로, 세상에 알려진 가장 큰 다이아몬드라고 한다)라고 할 수 있는 말씀으로 그를 인도하신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이 51글자로 이뤄진 소망의 퍼레이드, 하나님으로 시작하여 생명으로 끝맺음하며, 우리에게도 그렇게 할 것을 권면하는 말씀, 냅킨에 옮겨 적을 수도 있고 잠깐이면 외울 수 있을 만큼 짤막한,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바로 이 말씀에서부터 시작하라. 성경을 통달한 사람이라면 다시 이 말씀으로 돌아오라. 우리 모두에게는 진리를 일깨워줄 말씀이 필요하다. 인간 문제의 핵심은 바로 인간의 핵심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문제를 어떻게 위로하시는지 그 처방이 요한복음 3장 16절에 나와 있다. 우리가 믿든 안 믿든,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그리스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위해서는 이 말씀을 거쳐야 한다.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은 은혜의 철자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소망의 목차로,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보석함을 품고 있다. 이 말씀을 큰 소리로 천천히 다시 한 번 읽어보고, 눈길을 끄는 단어에 주목해보라. 심장을 멈추게 하고 정신이 산란해질 만큼 강렬하며 판을 성사시키기도 하고 깨트리기도 하는 요한복음 3장 16절의 주장은 이것이니,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하나뿐인 아들을 주셨다'는 것이다.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육체를 입은 하나님이다. 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시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주셨다는 말이 된다. 이유가 뭔가?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도 어떤 이들은 고집을 피운다. 결국 어떤 이들은 멸망하고 어떤 이들은 산다. 무엇이 그런 차이를 만드는가? 삶과 죽음은 믿음으로 판가름 난다.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
마르틴 루터가 세상을 떠날 무렵 심한 두통으로 몸져누웠다. 통증에 시달리는 그를 보고 주위 사람들은 그 불편함을 덜어줄 약을 복용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그는 약 먹기를 마다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머리와 마음을 위한 최선의 처방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는 말씀입니다." 머리와 마음을 위한 최선의 처방. 그 처방약 한 봉에 효험을 보지 못할 사람 누구인가?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니고데모도 효과를 보았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이 신학자는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은 경의를 표했고, 예수님을 장사 지냈다. 당시의 반 기독교적 풍토를 고려할 때 이는 대단한 일이었다. 혹시 아는가,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나와 다시 활동하신다는 소문이 저잣거리에 퍼졌을 때, 니고데모가 남몰래 미소 지으면서 그날 밤 대화를 떠올렸을지?
다시 태어난다고? 니고데모 자신이 먼저 그렇게 될 것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2. 사랑하는 만큼 헌신한다 "독생자를 주셨으니"
나의 세 딸 중 둘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사우스존에서 태어났다. 우리는 노스존에서 살고 있었고, 사우스존의 병원과는 터널이 뚫려 있는 산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아내가 임신 중일 때 우리는 자주 그 병원으로 차를 몰고 가곤 했다. 나는 아내를 데리고 병원에 갈 때마다 길을 잃었다. 웬일인지 자꾸 방향이 헛갈렸고, 이 길이 그 길 같고 그 길이 이 길 같을 때가 많았다. 300년이나 된 도시이다 보니 되는 대로 뚫린 도로 때문에 그러잖아도 방향 감각을 잃은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고, 길을 제대로 찾아다닐 가망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예수님이었다. 말 그대로 예수님, 구속의 주 그리스도상 말이다. 그 조각상은 높이가 38미터에 양 팔의 길이가 거의 3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크기로 도시를 수호하고 서 있다. 강철 자재가 1천 톤이 넘게 들어갔고, 턱에서 머리끝까지의 길이만도 3미터다. 해발 700미터의 코르코바도산 위에 자리 잡은 이 고공 예수상은 시내 어디에서나 보인다. 특히 예수상을 찾는 사람 눈에는 더욱 잘 띈다. 길을 잘 잃는 사람인 탓에 나도 이 예수상을 자주 쳐다보았다. 뱃사람이 등대를 찾듯 나는 늘어진 전화선과 지붕들 사이로 이 낯익은 얼굴을 찾았다. 예수님 얼굴을 찾으면 내가 있는 위치도 알 수 있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이와 동일한 약속을 제시한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공기조차 희박한 높은 곳으로 들어올려 가장 당당한 호칭으로 면류관을 씌우니 그것은 '독생자'라는 호칭이다. 헬라어로 '모노게네스'라고 표현되는 이 말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특별한 관계를 조명하는 말이 된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아버지이시긴 하지만,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에게서 나신 유일한 아들이시다. 이는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유전자 또는 하나님과 똑같은 유전적 조성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리고 계시며, 아버지께서 다른 어느 누구와도 나누지 않으시는 상호 관계를 맺고 계시다. 또한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하나님을 알려주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고 말씀하시면 그렇게 믿으라. 예수님은 아신다. 그곳에서 사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많은 참새들보다도 더 귀하다"라고 말씀하시면 그대로 믿으라. 예수님은 아신다. 그분은 모든 피조물들의 가치를 다 아신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아시는 분"이라고 선언하시면 정말로 그런 줄 알라. 실제로 그분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예수님께서는 아들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하신다.
하늘 문에는 한 열쇠가 있고, 예수님이 그 열쇠를 갖고 계시다. 예수님은 권세 있는 분답게 가르쳤다. 그분은 하나님에 대해 유일무이하고 독특하고 비할 데 없는 지식을 갖고 계시며, 자신의 그 지식을 우리에게 나누어주고 싶어 하신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사람이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이 택해 계시해준 사람들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마 11:27). 예수님은 그 지식을 나누고 싶어 하시고, 그 지식을 베푸시며, 계시하신다. 그분은 영원 세상의 비밀을 우리에게 계시하신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초청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모든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할 것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는 내 멍에를 메고 내게서 배우라. 그러면 너희 영혼이 쉼을 얻을 것이다"(마 11:28-29). 그분은 말씀하신다. "너를 두렵게 하는 물질의 어려움, 주일 저녁을 우울하게 하는 월요병, 골치 아픈 시댁 식구나 처가 식구들을 대하는 지혜를 내가 가르쳐줄게. 사람들이 왜 싸우는지, 죽음은 왜 찾아오는지, 용서가 왜 중요한지 내게서 배우지 않으련? 그리고 무엇보다 도대체 왜 네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가르쳐주고 싶구나."
꼭 배워야 할 것 같지 않은가? 우리는 아주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아는 게 별로 없다. 정보화 시대는 혼돈의 시대이기도 하다. 뭔가를 하는 방법은 많이 아는데 그것을 왜 하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우리에게는 해답이 필요하다. 예수께서 바로 그 해답을 주신다. 하지만 그분을 과연 신뢰할 수 있는가? 그걸 아는 방법은 단 한 가지. 내가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했던 대로 하라. 그분을 찾는 것이다. 눈을 들어, 예수님을 목표로 삼으라. 잠깐 흘긋거리거나 어쩌다 한번씩 쳐다보는 것 가지고는 안 된다. 예수님을 당신의 북극성으로, 판단 기준으로 삼으라. 혼잡한 거리와 그림자를 드리우는 지붕들 사이로 예수님의 얼굴을 찾으면, 그분에게서 눈을 떼지 말라.
3. 믿는 만큼 전도한다 "그를 믿는 사람마다"
"그냥 저만 믿으세요." 로프를 잡고 있는 대학생 나이의 그녀는 쾌활한 목소리로 나를 안심시켰다. '나를 믿으라'는 건 15미터 절벽에서 로프가 달린 멜빵을 메고 뛰어내리라는 의미였다. 모든 건 나를 꼬드긴 친구들, 그리고 산 정상에 서보고 싶다는 내 어리석은 자존심 탓이었다. 높은 산에서 로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