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 캔필드의 선물
잭 캔필드 외 지음 | 프라임
잭 캔필드 외 지음
프라임 / 2005년 11월 / 291쪽 / 9,500원
영혼의 치유를 위해 떠나는 여행
우울과 분노의 롤러코스터은색과 검은색이 칠해진 커다란 버스가 LA 카운티 교도소를 나와, 산 페드로 근처의 재판소로 가는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수갑과 족쇄를 찬 탑승객들에게는 바깥 풍경을 구경할 기회와, 수갑을 함께 찬 옆 사람과 이야기할 기회가 생겼다. 키 160센티미터에 쉰두 살인 나는 언뜻 생각하면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죄수였다. 전직 승마 기수였고, 이클립스 어워드를 수상한 저널리스트였고, 성공적인 TV 프로덕션 스튜디오의 소유주였던 내가 이 버스에 타고 있었으니 말이다. 향정신성 약물을 끊기로 결심하고 폭음을 하다가 거의 50시간 동안 잠을 자지 않은 조증 상태에서 나는 여자 친구를 폭행했다. 캘리포니아 주 법과, 나 스스로도 그런 행동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감금된 지 6일째를 맞아 나는 약물중독과 패혈성 인두염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시간을 잊기 위해 나는 수갑을 함께 찬 젊은이와 대화를 시작했고, 우리를 그 자리에 있게 한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이 버스만큼이나 새카맸다. 내 머릿속을 선명하게 차지하는 기억들 대부분은 버지니아 남서부의 작은 시골집 계단에 앉아서 들었던 어머니의 비명소리였다. 어머니는 위암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모르핀을 놓아 줄 간호사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외할머니가 나를 키웠지만, 외할머니마저 6개월 후에 갑자기 돌아가시고 말았다. 나는 재혼한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친지 중 한 사람으로부터 2년 이상 성적 학대를 당했다.
열여섯 살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두 달 후 아버지가 준 단돈 40달러만 들고 켄터키 주, 렉싱턴으로 향하는 기차에 억지로 태워졌다. 렉싱턴에서 나는 좋은 말을 기르는 농장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3년 후 나는 성공적인 기수가 되어 볼티모어 시내의 고급 아파트에 살게 되었다. 첫해 경주에 나가서는 아버지가 12년 동안 철도 감독관으로 일하며 번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기도 했다.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일과 성 학대 때문에 내 가슴속에서 들끓던 분노는 시속 65킬로미터로 달리는 승마 경기와 썩 잘 어울렸다. 19년간 13번 뼈가 부러지고 1200번의 승리를 거머쥔 후에 기수직을 은퇴했다.
기수 일을 하는 동안 나는 글 쓰는 것을 좋아했고, 내 글은 뉴욕 타임스와 일요매거진을 포함해서 미시시피 동부의 모든 주요 신문에 실린 적도 있었다. 은퇴 후에는 '달라스 모닝 뉴스'에 일주일에 한 번씩 기사를 기고하는 일을 맡았다. 8년 후 사임할 때는 내가 쓴 기사 덕분에 이클립스 상을 손에 들고 있었다. 다음에는 자수성가한 백만장자에게 위성 텔레비전 제작회사에 투자하도록 설득해, 개인 고문을 해주는 조건으로 회사 지분의 20퍼센트를 갖게 되었다. 나의 분노는 야망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고 점점 일 중독자가 되어갔다. 그리고 내가 쓴 다큐멘터리로 텔레비전 제작 분야에서 다시 한 번 이클립스 상을 수상했다. 남들보다 더 성취하지 않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내 성공에 따른 희생의 제물은 14년간의 결혼 생활과 온전한 정신이었다. 양극성 장애, 즉 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고 자살을 시도했다가 친구가 의식불명인 나를 발견해 이틀 동안 정신병원에 처음으로 입원하기도 했다.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있다는 생각은 오랫동안 억눌러 왔던 성 학대의 기억을 불러내고 말았다. 2년 동안 매주 치료를 받았지만 정신과 의사도 결코 완전히 밝혀내지 못한 이유들 때문에 나는 양성애자의 삶을 살았다. 외가의 강한 종교적 배경 탓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삶이었지만 떨칠 수 없는 삶이기도 했다.
약물치료를 하는 동안에도 조울증은 계속되었다. 성공에 관계없이 내 기분은 참담했다. 잘나가는 회사 일에 신이 나서 한순간 머리끝까지 기쁨에 들떠 사무실로 들어갔다가 곧 눈물을 쏟아 내곤 했다. 나는 두 번째로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이혼한 뒤 열흘 만에 재혼했던 다른 여자-내 첫 아내의 생김새와 이름이 무척 비슷했다-와는 6년 만에 또 이혼했다. 별다른 대안이 없었던 내 파트너들은 내게서 손을 뗐고, 나는 호화로운 라구나 해변에서 2년 동안 인생을 낭비하며 살았다. 텍사스에서 경마에 관한 텔레비전 쇼를 제작하기도 했지만 실패로 끝났고, 나를 이성애자로 되돌려 놓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이국적인 댄서와의 연애질도 실패했다. 캘리포니아로 돌아온 나는 좌절과 우울과 분노의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한 여자와 함께 살았다. 항우울증 치료제로 10년을 보낸 것도 소용없이, 조증과의 긴 승부 끝에 나의 분노는 여자 친구를 향한 폭행으로 나타났고, 이렇게 LA 교도소의 검은색 버스에 무료 탑승하게 된 것이다.
산 페드로 법정에 도착한 우리는 구치소에 머물렀다. 구치소 안은 벽을 따라 시멘트로 만든 좌석 선반을 제외하면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공간이었다. 나이 든 수감자 한 사람이 자신이 교회 장로인데 어떻게 감옥에 오게 되었는지 설명했다. 아들과 함께 낚시를 하다가 그의 낚시 허가증을 조사한 수렵감시관이 12년짜리 영장을 들이밀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나이 든 장로는 판사를 보자마자 풀려날 것이 확실했다.
죄수들이 한 사람씩 출두하러 법정에 인도되었고,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돌아와 바닥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버스에서 내 옆자리에 앉았던 친구가 그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남자는 지금 막 25년형을 선고받았다고 했다. 젊은 아내의 면회도 금지되었고 어린 두 자식이 크는 것도 보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내 버스 친구는 남자와 함께 앉아 기도하기 시작했다. 장로라던 사람이 설교를 시작했고, 내 버스 친구는 일어나 하나님에 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성서를 펼치고 야고보서의 첫 장을 읽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귀를 기울이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모든 죄수들이 콘크리트 좌석 선반을 제단처럼 하여 맨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를 하거나 울고 있었다. 나 역시 울었다. 처음에는 지금의 내 인생에 대한 슬픔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내가 저지른 모든 일과 내가 상처를 입힌 사람들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그러자 곧 용서받았음이 깨달아졌고 기쁨의 눈물이 흘러나왔다. 전기 소켓에 손가락을 집어넣은 것처럼 한줄기 빛이 내게 흘러들어 온 기분이었다. 방 안의 열두 명 가량 되는 사람들 모두가 일어나 손을 맞잡고 그리스도가 우리 인생을 바꿔 주실 것을 기도했다.
나는 지금도 가끔은 1996년 12월 16일의 그 순간이 그때 함께 있었던 다른 죄수들에게도 유사한 영향을 끼쳤는지 궁금하다. 그 이후로 나는 영원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8년이 흐르는 동안 나는 술과 마약과 향정신성 약물에 손대지 않았다. 나는 좋은 교회를 찾아냈고, 악명 높은 LA 남부에 텐트를 치고 개혁 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멕시코의 고아들을 위한 기금을 모금했다. 마케팅 관련 직업도 얻었지만 목사가 되기 위해 그만두었다. 나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 페드로의 아파트를 팔고 LA 드림 센터에 있는 독신자 방으로 이사했다. 예전에 1400개의 병실을 가진 병원이었던 LA 드림 센터는 희망을 위한 전초기지로 변해 있었다. 나는 한밤중에 할리우드 거리로 나가 성전환 매춘부들과 집 없는 젊은이들을 인도했다.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인생을 되살리기 위해 드림 센터로 돌아왔다.
목사가 되기 위해 성경 공부를 하면서 나는 샌디를 만났다. 7개월 후 우리는 드림 센터의 교회에서 결혼했다. 이제 나는 산타 아니타 경마장 근처의 작은 교회에서 부목사로 일하고 있다. 구치소에서의 그날, 나는 나를 학대한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성과 관련된 모든 문제들과 함께 나의 분노는 사라졌다. 그건 기적이었을까? 그렇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기 위해 나는 여전히 투쟁하고 있는가? 그렇다. 나는 유혹을 뛰어넘었는가? 아니다. 내 삶의 기적에도 불구하고 치유는 매일 이어지는 과정으로 남아 있다. 나의 치유는 용서하는 초자연적인 힘으로 시작되었지만, 감사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계속되고 있다. 기적은 일어난다. 기적을 구하는 사람은 치유된다. 인생은 영원히 바뀔 수 있다. 치유는 단지 길이 아니라 이유이기도 하다.
- 에드 도넬리 목사
법안을 구한 빌2000년 4월, 우리는 캘리포니아 주 입법부 의원들, 로비스트들, 법률가들로 꽉 찬 방에 함께 앉아 있었다. 열 살인 아들 빌은 내가 긴장하고 있음을 느끼고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하늘빛 푸른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면서 안심시키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다시 한 번 이렇게 아름답고 사랑스런 아이를 가져서 얼마나 운이 좋은지를 생각했다. 우리가 있는 곳은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 시청사의 상원의원실이었다. 민주당의 웨슬리 체스브로 상원의원은 건강보험회사들이 약물 남용 환자들에게 치료를 제공할 것을 요구하는 법안을 밀고 있었고, 나는 알코올과 마약중독의 효과적인 치료에 대해 개인적인 증언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중독자였다가 치유의 길을 걷고 있는 내 인생은 2년 전, 캘리포니아의 비교적 큰 건강관리기구인 카이저 퍼머낸테에서 치료를 받으면서부터 완전히 바뀌었다. 마약중독 치료를 지원해 주는 건강보험을 갖고 있던 나는 운이 좋았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운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내 차례를 기다리며 앉아 있는 동안, 보험회사 대표들과 로비스트들의 법안에 반대하는 증언이 이어졌다. 치료는 비싸고 비용 면에서 효율적이지 않다는 그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었다. 그리고 위원회의 논평으로 보건대 법안이 통과되지 못할 것이 자명해 보였다. 내 아들 역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때, 빌이 내 손을 꼭 쥐더니 속삭였다. "엄마, 나도 말하게 해주세요." 나는 어리둥절해서 아이에게 물었다. "네가 지금… 이 사람들 앞에서… 저 연단에서… 말하겠다는 거니?"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말하고 싶어요." 나는 놀라서 물러나 앉으며 속삭였다. "무슨 말을 하려고?" "곧 알게 되실 거예요." 빌은 내 지갑에서 연필을 꺼내더니 종이 뒤에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내 차례가 되었다. 빌은 나와 함께 연단으로 가겠다고 고집했다. 나는 2분간의 증언을 마치고, 아들이 몇 마디 할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허락을 구했다. 아이는 너무 작아서 간신히 마이크에 닿을 정도였다. 빌은 위원회의 위원들을 한 명씩 바라본 다음, 종이를 한편으로 치우고 말을 시작했다. "제 이름은 빌 리이고 열 살입니다. 제가 일곱 살 때까지 우리 엄마는 마약에 중독되어 있었습니다. 가끔은 엄마를 깨울 수도 없었어요. 배가 고파도 혼자 음식을 만들어 먹어야만 했지요. 한때 엄마와 나는 집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엄마는 진짜 내 엄마가 아닐 거야. 엄마 속에는 외계인이 들어 있을 거야.' 하고 생각했던 것도 있습니다. 나는 그게 마약 때문이라는 것을 몰랐어요."
위원회는 모두 빌에게 관심을 보였고, 아이의 얘기는 계속되었다. "나중에 마약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엄마는 치료를 받고 있기 때문에 나아질 거라고 했어요. 모든 것이 달라질 거라고 약속하셨죠. 그리고 오늘 제 인생은 달라졌어요. 이제 엄마는 저를 돕기 위해 항상 제 옆에 있어요. 우리는 어디든지 함께 가요. 저를 워터월드에 데려가기도 하고, 스키를 타러 가기도 해요. 엄마는 제 숙제를 도와주고, 제 축구경기는 모두 와 보세요. 무얼 하든 우리는 즐겁고 웃음이 나요."
마지막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빌은 잠시 말을 멈췄다. "나는 그 무엇보다 엄마를 사랑합니다. 엄마가 치료를 받지 않았다면 엄마는 아마 죽었을지도 몰라요. 그럼 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치료를 필요로 하는 엄마나 아빠를 가진 아이들이 저 밖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여러분이 이 법안에 찬성표를 던지기를 바라는 이유는, 필요하다면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엄마 아빠가 모든 아이들에게 있어야 하기 때문이에요. 이상입니다. 고맙습니다."
잠시 사람들로 꽉 찬 방에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모두가 일어나서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질렀다. 나는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이건 정말 결코 잊지 못할 굉장한 순간이었다. 이날까지도 나는 빌의 용기와 그날 사람들 앞에서 말하게끔 그를 이끈 놀라운 힘에 감탄한다. 체스브로 상원의원은 빌이 법안을 구했다고 선언했다. 그날 빌은 정말 해냈다!
- 트레이시 리 코엔
때로는 눈물도 상처를 치료한다
천사의 속삭임집에 얼른 가서 술을 마시는 것으로 나를 달래기 시작한 것이 습관처럼 굳어 알코올의존증으로 번져 버렸다. 나는 점점 무너져 가는 자신을 증오했다. 총명하고, 지적이고, 교양 있고, 의학 교육까지 받았다고 하는 내가 싫었다. 지식은 충분치 않았고, 친구들의 도움도 충분치 않았다. 남편의 인내도 충분치 않았고, 겁을 먹은 아이들도 나를 막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일단 술에 손을 대기만 하면 계속 찾게 되었다. 엄마이자 주부로서 교회에 열심히 나가고, 고등학교에서 청소년 기독교 교육 프로그램을 맡고 있던 나는 가까스로 체면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말씀과 다르게 살고 있는 나는 위선자였다. 아이들에게는 하나님에게 의지하라고 하면서 나는 포도주에 의지했고, 더 이상 술 없이는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술을 끊는 대신 예배와 관련된 일을 그만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단체 모임에 참석해 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리고 12단계 치유 프로그램의 첫 단계로 작문 숙제를 받았다. 쓰는 데 5일이 걸렸고 길이는 8페이지나 되었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알코올중독자라고 고백할 수는 있었지만, 줄리아나에 관한 이야기는 할 수가 없었다. 그게 바로 내 문제의 핵심이었다. 내가 슬픔으로 치르고 있는 대가가 무엇인지, 내 아픔이 무엇 때문인지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보였지만 내 입으로 말할 수가 없었다.
1995년 12월 18일에 나는 넷째 아이 줄리아나를 낳았다. 줄리아나는 심장에 세 개의 구멍이 난 채로 태어났고 무게는 4파운드도 되지 않았다. 몇 주 후에 집으로 데려올 수 있을 정도로 몸무게가 늘긴 했지만 건강하지 못했다. 이후로 줄리아나는 심장 질환은 벗어났지만 청력을 상실했고, 발작성 장애를 보였으며 급성호흡곤란증후군까지 있었다. 돌이 지났을 때는 염색체 상실로 인한 일종의 간질 질환까지 나타났다. 예후가 아주 좋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신체 치료, 작업 치료, 언어 치료를 도와주는 유아 담당 선생님과 청력 보청기를 체크해 주는 전문가가 집을 방문했다. 줄리아나는 밝은 분홍색 휠체어를 타고 돌아다녔다. 이 모든 걸 겪으면서도 줄리아나는 평화롭고 만족하는 아이였고, 우리가 자기 옆에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아이는 미소 짓기 시작했고 '엄마'라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가끔 작은 웃음소리를 들을 수도 있었다. 너무나 값진 순간들이었다. 아이는 나보다 더 자신의 짧은 삶을 잘 받아들였고, 하루에 한 번은 그걸 인정하도록 우리 가족을 가르쳤다.
줄리아나가 죽기 전날 밤, 우리는 의사로부터 아이가 매우 아프고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아이의 온몸 구석구석,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작은 신음소리가 스며 있었다. 줄리아나 없이 내가 어떻게 살 수 있을지. 이 아이 없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나는 두려움에 떨었다.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