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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능력에 관한 솔직한 대화

빌 헐 지음 | 국제제자훈련원
빌 헐 지음

국제제자훈련원 / 2007년 10월 / 399쪽 / 14,000원

1. 예수께서 하신 일


모든 기독교 교사들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그 말뜻을 알고 가르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들의 가르침을 분석해 보면 세대주의적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의미가 많다. 우리 문화와 분위기에 어울리는 예수님을 우리는 원한다. 우리는 원수가 진을 치고 있는 위험한 언덕으로 인도할 그런 리더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이쯤에서 질문을 하나 던져 보자. 우리는 정말 예수님처럼 되고 싶은 것일까? 정말 예수님이 가셨던 그 길을 걷고 싶어 하는 것일까?



우리에게 있는 가장 큰 두려움은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어야 한다는 데 있다.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것은 그분의 용기를 사랑하는 것이고 그분의 가르침을 분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씀하신다. 제자가 되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은 그저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그분의 기적을 목도하는 것 이상의 것이다. 진정한 부르심은 예수께서 하신 일을 우리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다!

10만 명이 넘는 아프리카 흑인들이 기도받으러 몰려나올 때에는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오랄 로버츠 목사님은 한쪽 발을 심하게 저는 한 여인의 지팡이를 낚아채더니 던져 버렸다. 지팡이를 빼앗긴 그 여인이 갑자기 방향을 바꿔 나에게 걸어오는 바람에, 나는 너무 당황해 정말 기절할 뻔했다. 로버츠 목사님이 집회를 인도하던 케냐의 나이로비는 7월의 열기로 덮여 있었고, 수십만 명이 운집한 집회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울부짖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기도를 받으러 앞으로 나온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앞줄에 서 있는 사람들은 압사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경찰의 도움으로 그 많은 사람들이 열을 맞춰 섰으며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그리스도인이 된 지 6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아프리카 흑인들 머리에 손을 얹으며 그들의 치유를 위해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한번은 벙어리 된 자를 위해 안수 기도를 했는데, 그가 정말 듣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임재는 분명했으며 가장 강한 형태로 역사하셨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그분의 임재를 나타내셨고 사람들을 고치셨다는 것이다.



큰 음악 소리와 수천 명의 기도 소리 때문에 정신이 없는데 누군가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빌, 빌 헐 이쪽으로 빨리 와!" 로버츠 목사님의 목소리였다. "네, 목사님, 부르셨어요?" "내가 하는 일들을 잘 보고 있지?" 나는 목사님과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네, 목사님!" "좋아. 내가 하는 걸 잘 보고 너도 가서 따라해.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을지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고침을 받을지어다!" 나는 목사님의 말을 암기했다. "거기서 뭐해? 빨리 가서 내가 하는 대로 하라니까!" 목사님이 재촉했다. 나는 얼떨결에 통역관도 없이 목사님이 하는 대로 따라했다. 10만 명이 넘는 인파 앞에서, 텔레비전 카메라가 밝은 조명을 비추는 가운데, 그 엄청난 기대감의 압박 속에서 나는 가공할 만한 경험을 하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전혀 겁나지 않았다. 로버츠 목사님은 무엇인가 나에게 분명히 말씀하고 싶었던 것 같다. 병을 고치는 것은 안수하는 자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말이다. 많은 학식을 가지고 있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의 기도보다 무식하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의 기도가 더 강력하다는 말은 진리이다. 나는 단순 무식한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그로 인해 복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때 나는 성경을 가감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오랜 신앙생활로 인해 흔히 보이게 되는 타협이란 것이 내게는 없었다. 또한 예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는 신학적 해석을 달 줄도 몰랐다. 성경에 예수님이 행하셨던 기적들은 오늘날에도 똑같이 재현된다는 것밖에는 알지 못하는 신앙인이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신앙의 경륜이 쌓인 지금은 이런 일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단순하고 순수한 믿음이 현실이라는 말뚝에 꼼짝없이 매인 바 된 것이다. 기도했지만 병이 낫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을 봐 왔다. 고통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 너무도 일찍 이 세상을 떠난 사람들, 나의 기도는 솔직한 어느 아버지의 기도와 같은 것이 되었다. "주여! 믿고 싶습니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 그러나 그때 들었던 로버츠 목사님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내가 하는 것을 잘 보고 가서 그대로 해!"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바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란 것을 성경에서 발견하고 깜짝 놀랐던 기억도 생생하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한복음 14:12).



2. 예수님은 어떻게 행하셨을까?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있어서 그분의 가르침과 원칙에만 국한시키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역이 전적으로 어떤 기술, 혁신, 혹은 지혜와 지식의 은사로 말미암아 이뤄질 수 있다고 본다. 이들이 예수님의 능력 행하심을 사역에 포함시키지 않는 이유가 있다. 기적은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께서 하셨던 일을 따라 하고자 함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약속을 주셨고 우리가 그 약속을 이행하기를 바라고 계신다.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의 믿음과 사역의 본질이라는 두 가지 위험이 있을 수 있다. 이 두 가지 위험은 각각 다르지만 비극을 초래하는 것에는 같다.



첫 번째 비극은 예수께서 하셨던 일을 '우리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믿음을 포기하는 것이고, 두 번째 비극은 결코 이뤄질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사역을 시도조차 않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비극은 같은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쌍둥이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예수께서 하신 일을 행하지 않음으로써 그분의 창조 세계를 도우시려는 하나님의 열망을 묵살하고 있다. 이것이 비극의 결과다. 처음 사람은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오류를 범했다. 두 번째 사람들은 예수님의 일을 시도도 해보지 않는 오류를 범했다.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명하셨던 일을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를 성경을 통해 배우면서 이러한 오류들을 제거해야 한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일에 대해 종교 지도자들이 시비를 걸어 왔을 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한복음 5:17). 이런 말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 사이에서 심각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셨던 모든 일들에 대해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요한복음 5:19-20)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이었던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을 미리 알지 못할 수도 있단 말인가? 정말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가르침의 받아야 했으며, 보내심을 받아야 했으며, 명령을 수행하셔야 했을까?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전능성과 전지성은 늘 그분 안에 있었다. 바다에서 태풍으로 제자들이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예수님은 바람을 꾸짖으셨고, 그분의 명령에 바람은 잠잠해졌다. 우리는 기도하고, 간구하고, 애걸하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명령하시기에, 제자들은 그 광경 앞에서 그토록 놀랐던 것이다. 같은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과 5천 명을 먹이신 일, 죽은 나사로를 살려 내신 일 등이다. 제자들은 이러한 기적을 일으키는 주체가 예수님 자신이었음을 보고 그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기 시작했으며 그분을 예배의 대상으로 생각했다. 만약 예수님의 기적들이 그분의 신적인 능력에 근거하지 않았다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처음이요 끝이다"라는 말씀과 영원한 존재인 자신을 통해서만 아버지께로 갈 수 있다고 하신 주장은 어리석은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웨인 그루뎀은 신-인에 관해 "자연에 관한 모든 일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라고 말했다. 예수님의 모든 인성적인 면들은 그분의 신성과 똑같이 진리라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 그분의 의지로 신적인 면들을 내려놓으셨지만 신격을 포기하신 것은 아니다. 항상 신적 능력을 사용하셨던 것은 아니지만 신격 자체를 포기하신 것은 아니다. 그분은 아주 특별한 때에만 신적 능력을 사용하셨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과 삼위의 긴밀한 교제, 그리고 예수님의 신-인의 본질은 분명 우리의 지혜로 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을 닮아 가야 하며 그분께서 하셨던 일을 해야 하는 사명을 지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몇몇 부분들을 우리들을 위해 모델로 보여 주셨고 우리에게 그대로 할 것을 명하셨다.



예수께서 하셨던 일을 제한적으로나마 현실 가운데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은사로 말미암아 온전치 못한 영들과 예언들을 분별하여 성도들을 도울 수 있다. 내가 병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 그들 가운데 40퍼센트밖에 치유를 경험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치유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보다 40퍼센트 많은 응답을 얻는 길이다. 우리가 예수님이 하신 일을 행할 때 우리 믿음의 단계는 결코 예수님의 단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불완전하고 약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 믿음을 가지고 계속 앞으로 전진해야 한다.



3. 기록된 말씀의 올바른 이해

성경을 읽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성경의 역사, 문화, 그리고 언어의 이해 없이는 그 뜻을 잘 분별해 낼 수가 없다. 그러나 신학교에서 역사, 문화, 언어를 더욱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신학적 편견을 가지고 있는 교수들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는 성경 해석학의 한 입장을 취하게 되며 그 신학적 입장으로 성경을 읽기 시작한다. 시중에는 성경을 해석해 놓은 성경공부용 성경책들이 많이 나와 있는데, 이런 성경들의 한 가지 단점은 읽는 자가 스스로 성경을 상고할 기회를 빼앗아 간다는 것이다. 우리의 관점은 결국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체계의 산물이다. 그 관점이 우리의 성경에 대한 이해를 장악한다.



'성도의 견인'이란 주제에 관해서는 두 가지 큰 해석학적 관점이 있다. 신학생들은 이 관점들 중 하나를 선택해서 성경의 어려운 부분들을 해석해야 한다고 권고받는다. 이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두 관점 모두 성경적 증거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의 은사에 관해서 은사주의자들과 은사중단주의자들의 상반된 주장들도 이런 이유 때문에 힘든 것이다. 두 부류의 신학자들은 나름대로 성경의 증거들을 가지고 있고 각각의 성경관을 따르는 엄청난 무리들도 그 정통성을 인정받고 있다.



나는 은사중단주의자들의 신학에 설득 당해 수년간 그들의 입장에 서 있었다. 하지만 몇 가지 사건들로 인해 나의 입장을 재고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성경 본문들을 거듭 연구한 결과 나에게 신학적인 편견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성경은 정말 이것을 가르치고 있는가?"라는 간단한 질문 하나를 던지며 성경을 새로이 연구하기 시작했다. 특정한 가정 없이 성경을 연구한 결과 은사중단주의자들의 입장은 내 삶에서 깨끗이 사라지게 되었다.



<성경적 이신론자의 고백>이라는 글을 읽기 전까지는 내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입장의 이름도 몰랐다. 미국 헌법의 기초를 놓은 사람들은 신학적 가치를 추구했던 이신론자들이었다. 그들은 자연적 이성을 토대로 한 종교적 도덕성을 믿었다. 그들은 신적 계시를 부정했으며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셨지만 태엽을 감아 놓은 시계처럼 우주 스스로 진행하게 만드셨다고 가르쳤다. 이들은 많은 부분에서 자연적 이신론자들과 비슷하다. 자연적 이신론자들은 인간의 이성을 숭배했던 반면 성경적 이신론자들은 성경을 숭배할 뿐이다. 물론 이것이 성경적 이신론자들의 의도된 신앙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와 성경은 하나였다. 나도 이런 신앙을 오랜 시간 간직했던 사람으로서 이 부류의 문제를 잘 이해하고 있다. 자신이 성경적 이신론자임을 스스로 알고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이 문제는 고백의 문제가 아니라 막연히 가지고 있는 신앙의 문제이고, 그렇기에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성경적 이신론자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성경을 아는 것의 구분을 잃어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사용하는 모토의 핵심은 "성경적인 사람이 되십시오"이며 영적 성장의 유일한 방법은 더 많은 성경 지식을 소유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예수님을 따라가기보다는 성경 말씀에 얼마나 순종했는가를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데 있다. 그래서 순종이라는 행위가 비인격적인 때가 대부분이다. 물론 성경적 이신론자들이 예수님과 비인격적 관계를 맺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예수님보다 쓰인 글에 더욱 집착하며,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교회와 대화하는 권위의 말씀이다. 나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기록된 성경 원본에 오류가 없다는 사실을 믿는다. 모든 감동과 환상과 예언들이 성경의 권위 앞에 점검 받아야 한다고도 믿는다. 그러나 성경과 하나님과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우리가 심각하게 논의를 해봐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분과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허락하신 하나의 도구이자 하나님과 우리의 이야기다. 관계가 있는 곳에는 그 관계를 생동하게 하는 신선한 의사소통이 있어야 한다. 만약 결혼하는 날, 내가 신부에게 내 신조, 희망, 잠언이 적힌 두꺼운 책을 선물하면서 "나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생각날 때마다 이 책을 읽어보기 바라오"라고 말한다면 내 신부는 항거하며 말할 것이다. "책도 필요하지만 우리는 대화하며 서로를 알아 가야 하잖아요?" 우리는 하나님의 두 가지 의사소통 방법을 다 수용해야 한다. 우리는 떡을 가질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먹을 수도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바울의 가르침을 이미 기록된 구약에 국한시킬 수도 있으셨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울을 다메섹 도상에서 치셨고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셨다. 바울은 비전과 꿈들을 많이 보았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확증하시려고 많은 기사와 이적을 나타내 주셨다. 왜냐하면 바울이, 교회가, 그리고 그것을 보고 있는 세계가 기사와 이적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에는 원래 이런 기적들이 없었다는 가정으로 연구를 시작했다. 불트만과 같은 현대 신학자들은 기적이란 의미를 재정의하면서 이러한 작업을 했다. 복음주의자들은 기적들을 믿으며 연구했지만 결과론적으로 그 기적들을 하나의 상자에 모두 담아 버렸으며 그것들은 그 상자에서 다시 나올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그 상자를 다시 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상자를 다시는 닫을 수 없도록 자물쇠를 없애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읽으며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 우리는 이 말씀이 우리의 삶 가운데 활발하게 역사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은사들을 통해 그 말씀을 우리에게 항상 신선하게 또한 연관성 있게 증거하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배우려는 열린 마음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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