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워주심
이상혁 지음 | 규장
이상혁 지음
규장 / 2007년 7월 / 247쪽 / 10,000원
프롤로그: 혼자 거두기 힘든 하나님의 채워주심지구촌에는 260여 개 나라, 2만4천여 개 종족, 약 66억 명의 인구가 6천 9백여 개 언어를 쓰며 살아간다. 나는 그중에 미국 애리조나 주에서 살아가는 '호피'Hopi라는 이름의 부족 1만2천 명을 제대로 만났다. 그들을 변화시키지 못해 조바심치는 내게 호피 미션스쿨 교장직을 은퇴한 제인이 해준 말이 있다. 그녀는 크리스천이란 이유로 평생 부족 안에서 왕따로 살아온 여인이다.
"호피는 신체적 특징이 인종적으로 동일한 부족 집단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닙니다. 민족적 개념도 아닙니다. 호피는 종교적 개념입니다. '호피 인디언 성인식'을 거친 사람에 한해서만 호피가 됩니다. 성인식을 거치지 않으면 호피 사람에게서 태어나 호피 땅에 살더라도 그 사람은 호피가 아니라 이교도일 뿐입니다. 호피는 삶의 방식이자 세례식 자체입니다. 따라서 성인식을 거친 사람이 기독교 세례를 받는 것은 호피로 사는 것을 포기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선교사님이 바라는 세례가 결코 쉽지 않을 겁니다."
두려움과 의심으로 출발했던 병아리 선교사 시절을 어느 정도나 벗어난 것일까…. 여전히 나는 수시로 깨지고 비틀거리며 나아간다. 어떻게든 나를 쫓아내려는 저들 틈바구니에서 좌충우돌한 지 5년째다. 저들의 '진'은 생각보다 견고했다. 내가 가진 빛나는 기독교적 자산에 대해서 저들은 단 1원의 견적도 쳐주지 않았다. 미국 개척 초창기 시절의 선교사들이 초토화시키며 지나간 십자군적 선교의 흔적은 인디언의 땅 여기저기에 뚜렷하게 남아 있다. 그들이 쓸고 지나간 자리엔 원주민의 적개심과 공허감만이 남았다. 내가 지나간 자리조차 더 황폐해지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고 또 돌아본다. 그러다가 가끔씩 절망한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채워주시는 은혜주일 아침 11시가 다 되어가는데 교인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다. 교인들은 지난주에 미리 "다음 주일에 우리 마을에서 대규모 행사가 열리기 때문에 교회에 못 올 것"이라고 목사인 내게 말했다. 나는 호피 부족의 전통 종교의식이 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안다. 그렇지만 예배 시간에 잠깐만이라도 참석하고 가라고 신신당부를 해둔 터였다. 선교사가 눈물로 호소하기 일보직전에 이르자 교인들은 그러겠다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일주일 내내 내심 불안했는데, 정말 단 한 명도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
니만 댄스는 호피 땅의 토착신 '카치나'를 섬기는 의식 가운데 절정에 해당하는 중요한 의식이다. 호피 사람들은 해마다 2월초에 호피 마을로 강림한다는 카치나가 이 행사를 마지막으로 자신의 고향인 샌프란시스코 픽으로 돌아간다고 믿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인 것이다. 호피 부족은 카치나가 돌아가기 전에 마을 사람들에게 복을 다 빌어주고 떠난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 복을 받기 위해 신령한 춤, 니만 댄스를 추면서 카치나를 환송하는 것이다. 전통에 따라 남자들은 화려한 옷을 차려입고 분장을 하고 마을 처녀들까지 고운 옷을 차려입고 머리도 힘껏 꾸미고 나오기 때문에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보니 이미 예배 시작 시간 20분 후.... 아내에게 교인들을 찾아보겠다고 말하고 의식이 열리는 마을 광장으로 갔다. 광장 어귀에서부터 축제 분위기가 역력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우리 마을 주민들이 전부 모인 것 같았다. 여기저기서 교인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그 중 교인 하나가 나를 발견하고 이리 오라며 손짓한다. 광장 한가운데 신당 주변에는 각종 음식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그 순간 카치나로 분장한 사람들이 둥둥 북소리에 맞춰 광장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들은 춤을 추기 전에 광장 중앙에 쌓여 있는 음식물을 관람객들에게 던져준다. 음식물을 받으려는 사람들의 즐거운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진다.
호피 사람들은 카치나 분장을 한 사람들이 춤을 추는 동안에 정말로 신적인 존재로 변한다고 믿는다. 단조로운 리듬을 한동안 들으니 묘한 최면의 효과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카치나 의식에 참여하는 인디언 부족의 한 사람이 된 듯했다. '태양이 이리 뜨거운데 오늘은 몇 명이나 쓰러지려나.' 시계를 보았다. 11시 45분이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하는 자각이 들었다. 그러자 엘리야 생각이 났다. 엘리야 혼자 850대 1로 싸웠던 갈멜산이 꼭 이런 분위기였을까. 이 순간에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전체 시선이 집중될 분위기다. '일어나, 말아? 미친 척하고 앞으로 가, 말아?' 나는 일어나지도, 나가지도 못한다. 그날 나는 오도 가도 못한 채 맨 앞줄에 앉아 다음 휴식시간까지 꼼짝없이 두 시간을 앉아 있어야 했다.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왕상 18:24
엘리야는 정말 일찍 죽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분위기의 열 배가 넘는 상황에서 영적 맞장을 제안했던 그는 미쳤거나 죽음을 각오했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도대체 엘리야는 어느 정도로 하나님의 권능에 사로잡혀 있던 것일까. 그는 갈멜산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이방 신들의 제사장들과 맞선 빛나는 영적 엘리트였다. 엘리야에 비하면 나는 그의 발뒤꿈치도 따르지 못할 위인이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했다간 그야말로 주변에 수도 없이 널린 돌에 맞아 죽게 될 것이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얼굴과 팔뚝은 물론 머리 속까지 시뻘겋게 익던 그날, 나는 완전히 부서지고 으스러졌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교인 없는 주일, 오전 11시 예배를 드리지 못한 주일을 보냈다. 교인 없는 목사의 심정을 제대로 느껴본 날이었다.
나는 이 날의 경험을 가슴 깊이 간직하기로 했다. 그리고 결과에 따라 일희일비하지 않기로 했다. 우선 나 자신이 성령충만한 전신갑주로 무장하고 있는지 살피기로 했다. 내가 경험한 낙심, 좌절, 무기력의 감정은 이미 열조들이 경험한 것들이며, 별로 새로운 것도 없다. 그분들이 겪은 것에 비하면 부끄러워 어디 내놓을 만한 이야기도 되지 못할 것이다. 나의 인디언 선교는 이처럼 바닥을 치는 경험과 함께 시작되었다. 나는 내 스스로 믿음도 있고 능력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선교지에 와 보니 그간의 경험이란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허약하기 짝이 없는 것에 불과했다.
나는 엘리야보다 갑절의 능력을 구했던 엘리사 선지자의 심정을 이제는 이해할 것 같다. 엘리사는 자신의 연약함을 잘 알았던 사람이다. 동시에 그는 싸움을 이기게 하는 능력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제대로 알았던 사람이다. 하나님의 채워주심을 간구하고 그 힘으로 서는 자만이 가장 오래 버틸 수 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사역의 출발선상에서 내 능력은 제로로 판명되었다. 문제 해결은 하나님께 달렸다. 하나님의 채워주심으로 나를 얼마만큼 충전시키느냐에 따라 추후 승패가 결정날 것이다.
'진흙 묻은 발'이라 불리는 인디언 선교사호피 마을에 처음 와서 예배 장소로 이용한 곳은 마리에타라는 할머니네 집 거실이었다. 전임 선교사 때부터 사용하던 집이라고 했다. 내가 예배를 인도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비와 관련된 설교를 한 적이 있었다. 비 이야기를 하니까 다들 갑자기 눈동자들이 호기심 가득하게 반짝반짝 빛났다. 아무튼 이 사람들은 비 이야기만 하면 눈과 귀가 번쩍 뜨이는 사람들이다.
"여러분은 비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카치나 의식이 기우제와 관련이 깊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비는 절대적이죠. 저도 농사를 짓고 사는 나라에서 온 선교사이기 때문에 비가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여러분처럼 비를 기다립니다. 여러분이 간절히 기다리는 것처럼 저도 여러분 못지 않게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립니다. 여러분이 기다리는 비는 아마 옥수수밭에 내릴 겁니다. 그러나 제가 기다리는 비는 옥수수밭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의 마음속에 내립니다. 여러분이 기다리는 비는 아마도 카치나가 보내준다고 믿는 비일 겁니다. 그러나 내가 기다리는 비는 성령님께서 보내주시는 진정한 비입니다. 성령님은 곧 하나님입니다. 이 비는 메마른 저와 여러분의 마음을 적셔줍니다. 이 비가 우리 마음 밭에 내리면 우리의 성품 속에서 사랑, 기쁨, 평화, 오래 참음, 자비, 선행, 충성, 온유, 절제라는 이름의 열매들로 주렁주렁 열리게 됩니다. 기독교에 대해 닫힌 여러분의 마음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게 만드는 비, 성령의 비가 바로 제가 기다리는 비입니다! 제가 한국에 있었을 때에 즐겨 부르던 노래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비를 부르는 노래입니다."
이렇게 말하고서 사람들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천천히 찬송가 '빈 들에 마른 풀같이'를 한국말과 호피말로 불렀다.
반가운 빗소리 들려 산천이 춤을 추네
봄비로 내리는 성령 내게도 주옵소서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 생명 주옵소서
찬송을 부르고 나니 교인들이 박수를 치며 환하게 웃는다. 예배 후에 어떤 분이 나를 불러세웠다. 나의 외할머니를 똑 닮은 할머니였다. "이제부터 목사님을 '주까꾸꾸'라 불러야겠어. '진흙 묻은 발'이란 뜻인데, 그이는 '비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야. 우리 '물 문중'에 속한 이름 중에 최고로 좋은 이름이지. 이 목사님은 성령의 비를 몰고 오고 싶어 한다니까 썩 잘 어울리겠는걸?" 그날 이후, 우리 교인들은 나를 주까꾸꾸 목사라고 부른다. '늑대와 춤을'이라는 이름보다 훨씬 고상하고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인들로부터 이런 이름을 얻고 보니 내가 감당해야 할 소임이 더 확실하게 보였다. 나는 사실상 미전도 지역이나 다름없는 인디언 땅에 성령의 비를 몰고 와야 할 북미 인디언 선교사다. 내 발은 늑대와 춤추는 발이 아니다. 성령의 임재를 기원하는 발이다. 나의 인디언 이름은 곧 내 사역의 목표다. 이름값을 해야 한다. 메마른 이 사막 땅에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오게 해야 한다.
인디언들은 백인들로부터 땅을 빼앗긴 사람들이다. 저들의 심령은 거북이 등처럼 갈라진 대지만큼이나 메말라 있다. 움켜쥘수록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물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푸석한 심령들.....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살아가는 저들의 심령은 찢길 대로 찢겨 있고, 상할 대로 상해 있다. 목마른 그들에게 때로는 소나기 같은 비도 필요하고 가랑비 같은 잔잔한 사랑도 필요하다. 이 땅을 고치시는 하나님의 역사의 시작, 성령의 충만한 비가 이 땅 가득히 채워지기를 소원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을 간구하는 자에게 응답해주실 것을 확신한다.
심령의 매임 없이는 성령의 뜻에 매일 수 없다선교사 발령을 받고 2002년 10월 27일, LA에 도착한 우리 가족은 10월의 마지막 밤 12시간이 걸린다는 호피마을을 향해 출발했다. '나는 지금 어디로 끌려가는 것인가.' 뒤를 돌아다보니 아들과 아내는 부둥켜안은 채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얼마쯤 갔을까, 안내하시던 이중재 목사님이 말씀하셨다. "이 지점 어딘가에서 두훈이가 죽었을 거야...." 장두훈 선교사님은 후원이 부족했던 탓으로 고물차에 값이 싼 재생 타이어를 끼고 다니셨다고 했다. 한 해 평균 14만 4천 킬로미터를 운전하고 다니면서 자동차 연료비도 감당하기 벅찼을 그 분에게 새 타이어를 끼우고 다니는 것은 아마도 사치였을 것이다. 나는 장 선교사께서 다니셨다는 선교지를 지도를 펴놓고 보다고 깜짝 놀랐다. 그 지역을 재생 타이어로 달리다니 그건 거의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그분은 전에도 교통사고를 당해 물리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 와중에 블랙메사 지역에 사는 70명의 나바호 인디언 교인들이 목사 없이 예배를 드린다는 병원 관계자의 말을 듣고, 왕복 960킬로미터의 추가 운전을 간단하게 결심하셨다. 그때부터 물도 전기도 전화도 없는 그곳을 격주로 다니셨다. 선교사의 말을 기쁨으로 들어주며 굴뚝처럼 믿는 선교지 가족들이 있는데 어찌 쉽게 철수할 수 있겠는가.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소리가 들리고,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데 어찌 선교사가 도울 사람들을 찾아 나서지 않을 수 있겠는가. 14만 킬로미터가 아니라 140만 킬로미터라 할지라도 기꺼이 다니셨을 장 선교사님에게 교통사고는 어찌 보면 예고된 것이었다. 1998년에 쓴 선교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다.
".... 사람들이 나를 보고 그만 좀 다니라고, 작작 좀 다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제 선교지의 작은 공동체와 함께, 하나님이 허락하신 마지막 구원의 한구석을 헤매고 다니며 주님의 일을 수행하고자 합니다. 대한민국의 몇 배나 되는 이 지역에 잡초처럼 방치되고 버려진 영혼들을 매일같이 만납니다. 그들의 생명을 잘 가꾸어 하나님 보좌에 올려 드리는 것은 주님께서 명령하신 거룩한 제 의무입니다...."
해발 2,100미터에 위치한 시골 마을 플래그스태프에 도착하니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장 선교사를 도우셨다는 김성곤 집사님을 만났을 때는 먹구름 사이로 간간이 햇살이 비치다가 쌍무지개도 떴다. '무슨 놈의 날씨가 이리 변덕이 심한가.' 앞으로의 심란한 여정을 암시하는 듯했다. 김성곤 집사님은 우리 가족이 살 집이며 전화 등을 미리 마련해 놓고 기다리셨다. 아내와 아들을 텅 빈 아파트에 내려두고 김 집사님의 차로 갈아탔다. 다시 1시간 40분을 더 들어가야 '인디언 보호구역'이 나온다고 하셨다. 황량한 사막 길 양쪽 끝으로 거대한 전함이 침몰한 듯 우뚝 솟은 '메사'(테이블 모양의 독특한 탁상지형)가 마음을 어지럽혔다. 낯설기 짝이 없는 이 길을 앞으로 4년간 오고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착잡했다. 이런 길에서 이런 속도로 달리다가 사고라도 나면 그냥 끝이겠구나 싶었다.
인디언 보호구역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들른 곳은 장두훈 선교사님의 묘지였다. 무덤 앞에 꽃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고 앉았다. 눈을 감고 주님의 이름을 불렀는데 정말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묘지가 생각보다 초라했기 때문일까,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으시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선교의 위대한 유산을 물려준 장두훈 선교사, 여기 잠들다!" 그 묘비를 보는 순간, 내가 선교사로 왔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장두훈 선교사님, 신고합니다! 제 이름은 이상혁입니다. 제가 오늘 부로 선배님이 하신 일들을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이루어 놓으신 업적을 잘 계승할 수 있을지, 아니면 망쳐놓게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구해주십시오. 후배를 긍휼히 여겨달라고 말입니다."
장두훈 선교사님은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원 재학 중에 인디언 선교사로서 소명을 받으셨다. 그 분은 공인 유도 3단의 풍채가 당당한 청년이었는데, 인디언 선교를 가슴에 품고 기도하시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셨다. 1991년, 미국에 선교사를 보낸다는 것 자체를 의아하게 생각하던 때였으나 서른의 나이에 그는 몬태나 주의 '블랙푸트' 인디언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거기서 한 기간을 마친 다음 1997년에 선교지를 옮겼는데, 바로 이곳 애리조나 주의 호피 인디언 마을이었다. 장 선교사님은 끊임없는 영토 분쟁으로 사이가 극도로 나쁜 나바호 부족과 호피 부족을 두루 다니며 신교하셨는데, 그의 나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