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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사람에게로 향한다

김기석 지음 | 청림출판
김기석 지음

청림출판 / 2007년 9월 / 267쪽 / 10,000원

1부 공동체의 길



모든 사람과 함께 가라


선생님, 백운동 계곡을 선생님과 함께 걸었을 때에 계곡 사이에 틀어박힌 작은 마을, 사람과 자연이 한 덩어리로 아름답게 뒤엉켜진 이 마을 공동체가 부스러져가는 모습을 보시고, 천박한 자본주의가 이 산간 마을에도 들어와 마을 공동체를 파괴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셨지요. 돈은 어느 곳을 가든 사람을 갈라놓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돈을 '맘몬'이라고 하신 것이겠지요. 마을 공동체가 무너진다는 것은 삶을 삶답게 하는 생활 조건으로서 정신적 귀소(歸巢)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마을 공동체에서 인류의 미래를 보았습니다. 마을 공동체는 모두 한 가족이었습니다.집안의 대소사를 모르는 이가 없고,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었으니까요. 산이 깎여져 나가고 바다가 메워지면서 우리 가슴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던 삶의 이야기와 공공의 기억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삶이란 인생길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사건들, 그리고 풍경들이 우리 가슴에 아로새긴 무늬가 아니겠습니까? 이 땅은 인간들의 거주 공간이기도 하지만 수많은 생명들의 삶터라는 사실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간중심적인 세계관과 생명주의적 세계관 사이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둘 사이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마커스 보그라는 예수님의 삶을 자비의 정치학이라는 말로 설명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경건한 종교인들의 '거룩의 정치학'과 구별되는 것이었습니다. '거룩'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정확히 둘로 나뉩니다. 정결과 부정, 순결과 더러움, 성스러움과 속됨, 유대인과 이방인, 죄인과 의인, 남성과 여성의 양극성이 그것입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주변인들을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주목한 것은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거룩의 정치학을 벗어난 땅의 사람들, 세리와 창녀와 죄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거룩의 잣대를 버리고 자비의 에토스를 가지고 사람들과 만나셨습니다. 거룩은 나누게 하지만 자비는 하나 되게 합니다. 지금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자비의 에토스가 아닐까요?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성지 순례란 이름으로 레바논에 다녀왔습니다. 그 옛날 이 땅을 지나셨던 예수님과 사도들의 발자취를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1975년 4월 레바논에 내전이 벌어졌습니다. 이 내전에 시리아가 개입하고 이어 이스라엘이 개입하면서 점점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다가 10만 명이 희생된 가운데 1990년에야 막을 내렸습니다. 그곳에 가서 깨달았습니다. 저를 소환한 것은 여전히 평화의 꿈이 난폭하게 짓밟히고 있는 분쟁의 땅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이 흘린 피였습니다. 저마다 평화를 가르치고 때가 되면 금식을 하고 기도를 하는 종교인들이 서로 화합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복잡하게 얽혀 있는 국제 정치적인 맥락이 있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혹은 알라의 이름으로 서로를 적대시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어느 편이 되었던 으뜸 되는(宗) 가르침(敎)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것이 그 땅의 문제만은 아닐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그 분의 은총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생명의 외부는 없습니다. 모두가 내부일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금을 긋거나 담을 쌓아 너와 나를 가릅니다. 송기숙 선생은 『마을, 그 아름다운 공화국』(화남출판사)에서 사람이 모여서 '더불어' 사는 최소 단위인 동네는 이 세상의 축소판이라면서 다섯 부류의 사람이 어느 동네나 있는 사회의 구색이었다고 말합니다. 첫째, 동네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동네 어른, 둘째, 늘 말썽만 피우거나 버릇없는 후레자식, 셋째, 일삼아서 이 집 저 집으로 말을 들어 물어 나르는 입이 잰 여자, 넷째, 틈만 있으면 우스갯소리로 사람을 웃기는 익살꾼, 다섯째, 좀 모자란 반편이나 몸이 부실한 장애인. 마을은 그처럼 다양한 사람들을 말없이 품어 안았습니다. 간디가 마을 공동체의 회복을 통해 인도를 바꾸어 나가야 한다고 한 말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나날의 삶이야말로 너희의 사원이며 종교"라는 칼릴 지브란의 말을 인정할 수만 있다면 우리 삶은 변화할 것입니다. 사람들의 욕망이 만나고 부딪치는 저잣거리나 생선 비린내가 배어 있는 시장 골목조차도 사원과 종교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엇이든 신에게 가지고 가면 그것은 신성한 것이 됩니다. '쟁기와 풀무', '망치와 피리' 무엇 하나 신 앞에서 속된 것이 없습니다. 삶에서 부득이 경험하게 되는 어둠과 부끄러움조차도 다른 이름으로 명명할 생각을 버리고 그분께 가져가면 그것은 빛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기억을 나누어 드립니다

아름다운 기억만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슬프고 고통스러운 기억도 소중합니다. 인생은 어쩌면 즐거운 기억과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엮은 실을 씨실로 삼고, 보이지 않는 돌봄의 손길을 날실로 삼아 짜내려가는 테피스트리(tapestry)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로시 하샤냐(Rosh Hashana)는 유대인들의 설날입니다. 그들은 설날을 욤 하지카론(Yom Hazikaron)이라고도 부르지요. '기억의 날'이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기억하라는 뜻일까요? 자기들의 살아온 지난날을 참회하라는 뜻이 아닐까요. 동시에 뿌리를 잊지 말라는 뜻일 것입니다. 기억은 그런 의미에서 동일성의 뿌리입니다. 시간 속에서 살아가면서 우리는 시대나 가까운 이들과 불화를 겪게 마련이지만, 그런 과정에서 만들어낸 기억의 응축을 통해 자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즉 "과거는 현재의 기억이요. 현재의 현재는 목격함이요. 미래의 현재는 기다림"이라는 것입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엘리 비젤(Elie Wiesel)은 『흑야』, 『새벽』, 『팔티엘의 비망록』, 『예루살렘의 거지들』, 『벽 너머 마을』 등의 소설을 통해 유명해진 인물입니다. 그는 199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엘리 비젤은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들이 앞서 죽어간 이들에 대해 증언할 책임이 있다고 말합니다. 희생자들의 고독과 슬픔, 거의 미쳐가던 어머니들의 눈물, 불붙는 하늘 아래서 드리는 불운한 이들의 기도 등을 말입니다. 이 기억을 통해서 피가 맺히도록 아우성 쳤던, 실존의 고함소리를 말입니다.



그들은 엄마 뒤에 숨어서 아주 부드럽게 '지금 울어도 돼요?'라고 물었던 소녀에 대해 말해야 한다. 그들은 굳게 잠긴 짐칸에서 동료들에게 바치는 선물인 냥 노래를 시작한 병든 걸인에 대해 말해야 한다. 그리고 할머니를 껴안으면서 "두려워하지 마세요. 죽는 것을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 나는 두렵지 않아요"라고 속삭였던 어린 소녀에 대해서도. 두려움 없이, 후회도 없이, 자신의 죽음을 향해 나아갔던 어린 소녀는 겨우 일곱 살이었다.(1996년 노벨 평화상 수상 연설 일부. 사역)

기억을 기록하는 행위는 우리가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내가 무엇을 위해 사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때,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엄펑스럽게 우리를 끌고 다니는 시간, 때로는 가혹하게 시린 등을 밀어젖히는 시간 속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는 것은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2부 주체적 정신의 설자리



한 사랑이 스쳐 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뜻하는 compassion이라는 단어 속에는 사랑하기에 함께(com) 아파하는(passion) 그분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아픈 사랑이 물적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작가 이외수는 "사랑을 달콤하다고 표현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진정한 마라톤 선수는 달리는 도중에 절망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의 절교 선언이나 배신행위에 개의치 말라. 그러나 마라톤에서의 골인 지점은 정해져 있지만 사랑에서 골인 지점은 정해져 있지 않다. 경우에 따라서는 한 평생 달려도 골인 지점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 사랑은 그대의 반평생을 아무 조건 없이 희생하는 것이다. 그러기에는 자신의 인생이 너무 아깝고 억울하다고 생각한다면 역시 진정한 사랑을 탐내기에는 자격미달이다.(이외수 『내가 그대를 향해 흔들리는 순간』. 해냄)



사랑의 집은 사랑하는 이들이 함께 겪어낸 시간이 덧쌓여 이뤄낸 건축물입니다.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따뜻함과 차가움, 사랑과 미움, 감사와 원망이 뒤섞이며 이뤄낸 아늑한 공간, 그곳이야말로 창조적 생명의 뿌리일 것입니다.



자기를 열어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며 살다보면 상처받기 쉽습니다. 상처가 두려워 마음의 빗장을 지르고 사는 사람들도 있지요. 하지만 어차피 살아간다는 것은 상처를 주고받는 것이고, 또 그것을 치유해가는 과정일 텐데 상처를 받아도 좋다는 열린 마음으로 살아가야 속이 편안할 것 같아요. 선택의 여지도 더 많이 생길 것이고요.



칼 구스타프 융은 사람은 나(자아)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통하여 바깥세상과 어울릴 뿐 아니라, 나를 통해 자기 마음 깊은 곳을 살핀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자아의식 속에는 '우리'라는 집단적 견해, 집단적 가치관 또는 행동 규범이 들어와 있답니다. 사람들은 집단이 개인에게 강요하는 가치관이나 행동 규범을 마치 자기 것인 냥 착각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거지요. 이렇게 집단 속에서 살아가는 가운데 집단이 요구하는 태도, 생각, 행동, 규범, 역할을 분석심리학에서는 페르소나(persna, 가면)라고 부릅니다.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여러 가지 페르소나를 썼다 벗었다 하면서 집단에 적응해 나갑니다. 자아의 어두운 면인 그림자는 자아로부터 배척되어 무의식에 억압되어 있던 성격입니다. 자아의식의 한쪽 면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그림자는 그만큼 반대편 극단을 나타낸다지요? 지나치게 도덕적인 사람의 내면에는 일탈의 욕망이 들끓고 있을 가능성이 많다고 봐야 할 겁니다.



선생님 너무 착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마세요. 자기의 이미지에 집착하며 살다보면 겉으로는 그럴싸하게 보여도 내면은 황폐하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내적인 여백이 적을수록 작은 상처에도 큰 신음소리를 내게 됩니다. 사랑은 상처받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면서 자기의 취약점을 드러내는 용기가 아닐까요?



반항하는 정신

선생님, 믿음이란 날마다 애굽에서 탈출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노예적 안일함을 박차고 일어나 자유를 향해 길 떠나는 것, 바로 그것이 청년 정신이 아니겠습니까? 사유하지 않는 젊은이, 불온하지 않는 젊은이, 기존 질서에 순치된 젊은이, 소비사회에 투항해버린 젊은이를 바라보는 것보다 슬픈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사실 비판적 성찰이란 귀찮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안일하게 통설에 기울고 맙니다. 결국 그들은 '조작하기 좋아하는 대중'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나는 우리 젊은이들이 만만치 않는 사유의 힘을 바탕으로 우리 시대의 논리와 정신을 꿰뚫어 보면서 자기 삶을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어 튀모스(thumos)는 사람이나 동물 속에 깃든 어떤 요소를 지칭하는 말인데, 예컨대 위협을 받을 때에 맞서 싸우도록 하는 힘을 뜻합니다. 개가 자기 영역을 지키려고 으르렁거리는 것이나, 사람이 자기 가족과 종교, 자기의 삶의 원리를 지켜내기 위해서 결연히 일어서는 힘이지요. '호기呼氣'라고 번역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문제는 부드러움과 호기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입니다. 경직된 마음으로 '아니오'라고 말하면 누군가를 변화시키기보다는 상처를 입히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진실은 실종되고 대립하는 두 성격만 남게 됩니다.



하지만, 하지만 말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타락했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낮춤으로 남을 살리던 예수의 정신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갈릴리의 밑바닥 사람들의 삶 속에 화육했던 예수, 열병 걸린 이들의 손을 붙잡고 마음 아파 눈물을 글썽이던 소박한 예수의 모습은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카타콤 시대에 양을 어깨에 메고 있던 그리스도의 이미지는 콘스탄틴 대제 이후 우주의 주관자인 판토크라토르 그리스도로 대체되고 말았습니다. 꿩 잡는 매라고, 암암리에 교회의 크기가 목회자들의 영성을 평가하는 척도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많은 목회자들이 평화의 문제도, 생명의 문제도 한쪽으로 밀쳐놓고 오로지 교인 수 늘리는 데만 몰두합니다. "목사님, 왜 믿음이 좋은 사람일수록 편협할까요?" 그 물음에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합리와 정리 사이에서

선생님, 저는 합리合理와 정리情理의 경계선상에서 서성이고 있습니다. 저는 처세에 능하지 못합니다. 종종 융통성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원리원칙주의인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분리의 담을 헐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셨는데,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이들이 오히려 분리의 장벽을 높이 쌓아가는 것은 부끄럽기 이를 데 없는 일이 아닐까요? 공적인 일에는 '정리'보다는 '합리'라는 척도가 사용되어야 할 겁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도심 중앙의 광장인 아고라(agora)에 모여 공동체의 문제를 논의하곤 했습니다. 그곳은 어떤 견해라도 개진될 수 있는 열린 광장이었습니다. 적어도 그들은 공적인 일을 밀실에서 처리하지는 않았습니다. 아고라의 주인은 로고스였습니다. 조직 또는 집단에 대한 충성이나 귀속감이 로고스를 억압하는 곳에서는 주체적인 정신이 발생할 수 없습니다. 서열관계를 중시하는 집단 속에서 합리적 사고를 하는 사람은 버르장머리 없는 사람으로 인식되기 일쑤이고, '조직의 쓴 맛'을 볼 때가 많습니다. 주체적인 정신이 보편적인 정신에 동참하지 못한 채 사사로운 '우리' 속에 함몰될 때 영혼의 타락은 불을 보듯이 뻔한 일입니다. 세상에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 많지요. '합리'의 배를 타고 건너기엔 삶의 너울이 너무 압도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리'의 배 한 척을 더 마련하고 살아갑니다. 탕자의 귀환을 반기는 아버지의 태도는 합리가 아니라 정리이겠지요. 상처 입은 사람들을 보듬어 안는 예수님의 다정함은 합리적인 태도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백성을 품어 안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다점함을 '정리'라는 말에 담기도 어려울 듯합니다. '합리'와 '정리'를 종교적으로 확장하면 '미쉬팟(mishpat)'과 '째다카(tsedakah)'라는 개념과 통할 수 있겠는지요. 미쉬팟이란 재판관이 내린 판결을 뜻합니다. 정의, 규범, 법령, 법적 권리, 법률 등의 뜻을 포함하는 것이지요. 째다카는 의(righteousness)로 번역될 수 있는데, 박애, 친절, 관용 등 인격적 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의가 법적인 것이라면, 의는 억압받는 자에 대한 동정과 연결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두 개는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서로 절묘한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정신의 독립군

사람은 누구나 익숙한 것에 대해서 호감을 느끼게 마련이고, 낯선 것에 대해서는 본능적으로 두려워하거나 불편한 것으로 여기곤 하지요. 어쩌면 그게 생명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발전시켜온 내재적 태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낯선 것과의 만남이야말로 자기 확장의 기회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은 '타자'라는 거울 앞에 있을 때뿐입니다. 반성이란 정신의 자기복귀라지요? 거울에 비친 자기 이미지를 바라보면서 자신을 새롭게 규정해가는 과정이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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