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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에 이르는 다리

카린 D. 케다 지음 | 눈과마음
다리



용서는 걷는 길입니다.

그 길에는 디딤돌들이 있습니다.

상실, 분노, 받아들임, 배움, 용서, 회복.



그 길을 걷다 보면 다리를 만나게 됩니다.

그 다리에 발을 디디면 다리는 당신을 이끌고 떠받치며

당신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삶의 저편으로 안내합니다.



용서는 영원한 여정입니다.

무수히 많은 다리를 건널 것입니다.

다리 하나를 건널 때마다 당신은 상실한 것을

조금씩 회복합니다.



그럼 시작할까요?



선택



사랑과 두려움

삶은 선함과 아름다움이 넘치는 사랑이 가득 든 질그릇과 같습니다. 삶이란 사랑과 미움, 둘 가운데 하나를 택하는 것처럼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당신의 삶이 사랑과 두려움, 둘 중 하나를 택하는 과정이라고 상상해 보면 어떨까요?



두려움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두려움은 풍족하고 조건 없는 사랑을 갖지 못한 마음입니다. 영혼의 눈으로 본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두려움입니다. 사랑이, 그리고 선함이 벽에 부딪힐까 두려워하고, 그 본질을 알 수 없는 미스터리와 마주칠까 두려워하고, 잡고 있던 손을 놓칠까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두려움이 씻은 듯 사라질 때 사랑이 그 빈자리를 채워줄 겁니다. 하나님, 영혼, 믿음, 신, 거룩함, 그리고 사랑은 모두 같은 말이며 무한합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당신에게 얼마만큼의 사랑이 있느냐가 아니라 당신이 매순간 두려움보다 사랑을 택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세상은 사랑의 숨은 힘을 담은 질그릇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 질그릇 속에서 사랑하고, 두려워하고, 방향을 틀며 길을 걷습니다.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깊고 보이지 않는 원천이 지켜주는 사랑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용서는 두려움보다 사랑을 택하는 것입니다.

부름

당신의 삶 어두운 저편에서 당신을 부르는 목소리는 선함과 내면의 평화에 눈을 뜨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 소리를 외면하거나 듣고도 의미를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그 소리의 수수께끼 같은 암호로 인해 혼란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위대한 의미와 진실의 한복판에 가지 못하고 돌아누워 잠에 빠집니다. 용서는 한밤중의 신비한 부름과 같습니다. 그 부름은 당신의 영혼 안에 깊이 잠들어 있는 것을 흔들어 깨웁니다.



상실



상실이 곧 시작입니다.



공격은 상실을 낳습니다.

신뢰의 상실, 자신감의 상실, 안전의 상실……

상처는 더 큰 상실을 낳습니다.

자아의 상실, 믿음의 상실, 희망의 상실,

내면의 빛의 상실……



잃어버린 것을 인정할 때에

비로소 당신은 그것을 다시 찾는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감정의 문제가 아닌 용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용서를 말할 때 자신을 공격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는데, 이는 불행한 일입니다. 마치 용서가 다른 영혼을 구원하는 일인 것처럼, 그 사람의 행위를 대충 용인한 후에 삶을 계속하며 망각하는 일인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만일 공격을 가한 사람이 뉘우치지 않으면 어떡할까요? 공격을 가한 사람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어서 화해조차 불가능하다면 어떡할까요? 그 사람이 더 이상 당신 삶의 일부가 아닌데도 그와 있었던 일이 당신의 가슴속에 계속해서 응어리로 남아 있으면 어떡할까요? 이처럼 공격을 가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다 보면, 우리가 상실한 것을 구원할 기회는 손에서 빠져나가고 맙니다.



사실 우리의 삶은 위험부담이 크기에 그만큼 상실할 수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신뢰와 믿음,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소신을 모욕과 공격을 당할 때마다 상실하고, 삶이 본질적으로 선하고 공평하다는 순진무구함 또한 상실합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이처럼 상실해 가는 것들을 되찾고 처음의 온전함을 회복하는 과정으로, 삶을 달게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용서는 모든 사악함과 상처를 즉각적으로 지워주는 특효약이 아닙니다. 다만 의도와 목적, 그리고 비전이 용서 속에 있으며,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용서란 노력하고 실천하면 얼마든지 유지할 수 있는 방식이며, 반드시 타인 혹은 당신을 공격한 누군가에 한하여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참다운 용서란 상실한 것을 되찾고, 온전함을 회복하고, 내면의 빛을 구원하는 일로서 상실과 받아들임, 고통과 이해, 분노와 축복, 사랑과 믿음을 회복하는 내면의 과정을 말합니다.

움츠러든 빛

태초는 창조, 곧 탄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둠, 물, 모양을 갖추지 않은 텅 빔 가운데 하나님의 기운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마치 자궁과도 같던 온 세상이 새로이 태어났습니다. 모두가 한결같이 묘사하는 이 빛은 아직도 우리 곁에서 에너지로, 입자로, 파동으로, 인간 가슴속 깊은 곳의 선함으로 살아 있습니다. 그 빛은 수학 공식을 통해 발견되거나, 망원경의 렌즈에 비치거나, 은유법 속에 드러나거나, 혹은 인간의 경험과 스치는 만남 속에서 조우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빛을 찾아 끝없이 이어지는 길을 가는 중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세요. 부모님과 하나님의 손길이 신비롭고 성스러운 뜻으로 힘을 합하여 당신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상상해 보세요. 부모님은 당신에게 육신을, 하나님은 영혼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재하고 행동하며, 창조자와 동업하기 위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당신이 태어났다고 상상해 보세요. 이 땅에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마음을 심기 위해,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치유하기 위해, 부서진 세상을 고치지 위해, 사랑과 희망과 믿음과 보다 나은 세상을 비추는 내면의 빛으로 온전하게 살기 위해…….



당신의 영혼은 창조의 그날부터 전해 내려온 유산이며, 이성을 통과하여 정수를 뚫고 가슴속을 관통하는 한줄기의 눈부신 빛입니다. 그 빛은 당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숨쉬며 살아가는 동안, 그리고 세상을 뜬 후까지 당신의 삶에 거룩함과 선함을 위한 공간을 마련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 안에는 당신이 그토록 발견하고자 하는 위대한 미스터리, 바로 당신이 태어난 이유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신이 주신 영혼은 순수한 영혼입니다"라는 아침 기도의 낭송을 믿을 때 삶이 어떻게 달라질지 생각해 보세요. 복잡한 여정을 걷는 당신은 불완전한 존재들 사이에서 살아가며 모퉁이를 돌 때마다 고장난 것들과 맞닥뜨립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당신은 상처를 받습니다. 걸으려고 하면 넘어지고, 손을 뻗으려고 하면 누가 밀고, 울음을 터트리면 아무도 쳐다보지 않습니다. 산다는 것은 시작부터가 미녀와 야수 사이의 싸움입니다. 왜 그런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산다는 것은 때로 그런 것입니다.



공격과 비난은 당신의 가슴속을 관통하는 한줄기 빛을 위축시키고, 내면의 빛이 가물가물해지면 당신은 크나큰 상실감에 빠집니다. 혹시 당신의 빛은 어떤가요? 어둡거나 산산조각 났나요? 내면의 빛을 회복하기 위한 모든 행동들은 구원을 향해 한 발짝 다가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영혼의 여정이며, 삶이 존재하는 이유이자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본떠 태어났다는 것은 당신이 속한 작은 세계에서 창조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이 치유하고, 사랑하고, 발명하고, 기쁨을 만들고, 창조하고, 가르치고, 그리고 다시 사랑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참되고, 강하고, 그럴 만한 충분한 권한이 있습니다.



어둠 속의 텅 빈 세상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습니다. 우리 모두가 오늘날까지 기다리는 그 빛은 지금 당신 안에 있습니다. 당신 안에서 구원을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용서는 그 본래의 모습을 찾은 빛입니다.



분노



분노할 정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분노하지 않을 정당한 이유도 있습니다.



분노는

둑을 넘고

만나는 것은 닥치는 대로 빠트리고 파괴하는

강이 될 수 있습니다.

혹은 당신의 영혼 속을 흐르며

버릴 필요가 있는 모든 것들을 씻어 내리는

강이 될 수 있습니다.



분별력이 있다는 것은

언제 분노하고

그 화를 언제 놓아줄지 안다는 뜻입니다.



용서와 사악함: 사고의 틀 옮기기

사악하고 용서할 수 없는 행위들은 우리에게 커다란 고통과 괴로움을 초래합니다. 그런 행위들은 당신의 영혼 위에 어둠을 떨어뜨립니다. 이 순간 당신이 용서라는 마음의 상태를 택하면 당신은 고통과 두려움의 짐을 벗고 내면이 평온한 상태로 돌아갑니다. 한때 현실이었던 어둠을 떠나 다시 그 영혼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어둠은 악의 영역이고, 당신의 삶을 조종합니다. 그 붙드는 힘은 지칠 줄 모르고, 끈질긴 태풍만큼 파괴적입니다.



한편, 당신의 마음이 용서의 상태에 있을 때에는 빛이 당신의 현실이 됩니다. 당신은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 이 행성에서 걷는 방식에 대한 결정권을 되찾습니다. 용서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지금의 지옥은 과거에게 주고, 평온함을 현실로 초대하세요. 당신의 영혼을 억압하는 사악한 자들을 용서하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용서하세요. 적을 잡은 손을 놓는 것은 구원의 행위입니다. 그들로부터 당신의 영혼을 해방시키면 당신은 어둠에서 빛을 회복합니다.



용서는 묵인도 망각도 아닙니다. 선함이 악함을 이긴다는 메시지입니다.



받아들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기 가치 아래로 물러서거나 만족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현실과의 타협점을 찾고, 과거사로부터 의미를 재발견하고, 사건을 재정의하는 일입니다. 삶의 경로는 당신을 받아들이고 껴안은 사람과의 일들에 의해서 이어지지만, 당신이 가는 길을 훼방 놓은 사건에 의해서도 이어집니다. 삶은 경이로움, 신바람, 실망, 아름다움, 사랑, 외로움, 고통, 힘, 그리고 존엄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어떻게 묘사하느냐에 따라 삶을 지각하는 방식은 현저하게 달라집니다.



배움과 온전함으로 가는 모험 여행인 것처럼 당신의 삶을 묘사하세요. 당신은 선한 이야기의 삶을 살고 있으니, 그 안의 모든 부정적인 사건과 저주는 결국 당신을 복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동정심: 도덕적 우위의 인정

어느 우아한 식당에서 우리는 강이 내다보이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나는 연어 요리를 시켰고, 내 친구 빌은 하우스 스페셜을 시켰던 것 같습니다. 시내에서 회의가 있을 때면 우리는 가끔 만나서 사는 이야기를 나누곤 했습니다. 나는 '내게 심한 짓을 했던' 한 여자 동료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내 짐작대로, 내 눈앞에서 듣기 좋은 소리만 하던 그 여자는 내 등뒤에서는 말도 안 되는 험담을 일삼으며 나를 궁지에 몰아넣으려 했던 것입니다. 변호사인 빌은 상냥하면서도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가만히 제 이야기를 듣다가 포도주를 한 입 마시고는 더없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습니다.

"동정심이 도덕적 우위에 있다는 점을 잊지 마."



저는 그의 말에 멍해 있다가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우린 포도주를 한 잔씩 더 주문한 후 계속 이야기꽃을 피웠고, 해는 강 너머로 뉘엿뉘엿 넘어가며 장엄한 부드러움을 온 세상에 뿌리고 있었습니다. 불덩어리의 마지막 자취가 밤의 아름다움 속으로 사라질 무렵 저는 생각에 잠겼습니다. '하지만 그 여자의 그런 짓은 참을 수가 없어. 그녀의 행동은 틀렸어.' 그리고 잠시 후 답이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게 핵심은 아니지 않을까?' 다시 강을 내려다보았습니다. 해가 완전히 지자 노을도 희미해졌습니다. 어느 것 하나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어느 날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데, 삶의 기쁨을 앗아가는 감정에 집착할 필요가 있을까요?



밤하늘에 별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별자리처럼 영혼의 우주에도 지도가 있어서 갈림길을 만날 때마다 도로 표지판으로 우리를 안내해 주면 어떨까요? 한 팔에는 진실과 정의, 다른 팔에는 진실과 동정심이 있는 양팔저울이 있다면 어떨까요? 저울에서 정의는 동정심이 있는 탓에 치우치지 않고, 동정심은 정의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진실은 양팔 모두에 있습니다.



"정의, 그대는 올바름을 추구할지니."

"동정심, 그대는 사랑과 친절한 행위로 온 세상을 떠받치리니."



우리는 이 두 외침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고 배웁니다. 하지만 그렇게 사는 방식은 혼란스럽습니다. 양팔의 진실을 중재하다가 우리는 그 모순에 정신이 혼미해지고 미칠 지경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옳고 그름은 흑과 백, 곧 화해할 수 없는 두 가지 절대 원리라고 배우지만,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정의에는 하나의 방침, 하나의 감정적 대응, 하나의 도덕적 의무가 필요한 반면 저울의 다른 팔, 곧 동정심의 측면에서는 다른 방침, 다른 감정적 대응, 다른 도덕적 의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도덕적 우위를 논하지 말자는 것은 나쁜 행위를 정당화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말에 의해서가 아닌 당신 스스로의 비전, 세상을 위한 온전함의 비전으로 자신과 세상을 정의하세요. 판단하려 들지 마세요. 저울의 동정심 편에 서세요.



저는 영혼의 지도를 펼치고 이 지역을 늘 살핍니다. 어떨 때는 정의 편에 저를 기울게 하고, 또 어떨 때는 동정심 편에 저를 기울게 합니다. 그러나 용서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수록, 저는 점점 더 동정심 쪽으로 기우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정의와 처벌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공정한 세상을 추구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동정심도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의 가슴에 상흔을 남긴 혹독한 세상에서 동정심을 가지기란 쉽지 않겠지만, 동정심이 많은 세상은 보다 아름다운 세상이 되고, 그 아름다운 세상을 사는 것은 우리들입니다. 모든 난관을 뚫고 더 많은 사랑을 베푸는 것, 바로 그것이 핵심입니다.



그날 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몇 년 후, 빌은 어느 한적한 미네소타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때도 빌은 회의가 있어 시내에 나오는 길이었습니다. 해가 반드시 뜨는 것처럼 지는 때도 반드시 옵니다. 삶이 짧다고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 까요? 삶은 정말로 짧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삶이 얼마나 더 짧을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는 모두 죽을 운명이라는 차디찬 현실은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에 드리워져 있습니다. 이 짧은 삶에 빛을 비출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선택하기만 한다면 삶은 충만함으로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도덕적 우위를 인정한다는 것은, 삶과 우리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는 뜻입니다.



"친절과 동정심을 잃지 말고 사뿐히 걸어보자. 그리하면 사는 내내 선함의 길을 갈 수 있으니."

하나님과 싸운 야곱

우리의 조상 야곱은 깜깜한 밤에 하나님의 전령 천사와 씨름을 했습니다. 고전 끝에 야곱은 부상을 입었습니다. 아침 해가 뜰 무렵까지 씨름은 멈추지 않았고, 천사는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고 떠났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이라는 뜻으로, 한밤중에 하늘에 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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