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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필립 얀시 지음 | 청림출판
1부 하나님과 한결같이 동행하는 일

"기도란 모든 이들이 체험하는 지극한 행복과 끔찍한 고통, 초자연적인 권능과 서정적인 친밀감들에 인간이 보이는 특별한 반응이다." - 패트리샤 햄플



내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참다운 내가 주께 고하게 하소서. 그리고 참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모든 기도보다 앞서야 할 기도가 바로 이것이다." - C. S. 루이스



기도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 가운데 말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낮은 게 아닌가 싶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여기에 제대로 답할 수 있다면 굳이 말을 많이 하지 않더라도 깊은 기도를 드릴 수 있다. 기도는 방어벽을 바짝 낮추고 다른 누구의 모습도 아닌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이미 모든 걸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 최대한 보여드리는 과정을 말한다.



복음은 도덕적 품성에 형편없이 못 미치는 인간들에게도 깊은 안식을 제공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물 같아서 차츰 아래로 흘러 결국 가장 낮은 곳까지 이른다. 우리의 결점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어떻게 은혜를 실감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당시 세리와 창기, 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고 손을 내밀었다. 반면, 신앙적으로 한 경지를 이루었다고 자부하던 이들은 주먹을 단단히 말아 쥐었다. 선물을 받는 데 필요한 조건은 손을 펼치는 것, 그것뿐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나 개인적으로도 여러 차례 이 확실한 말씀으로 인해 힘을 얻었다. 그러나 누구나 이렇게 자신의 결점으로 인한 상한 심령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도대체 언제까지 하나님 앞에서 실패를 거듭해야 한단 말인가? 주께 다가가기 위해 누구나 공통적으로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모습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참다운 자아'를 드러내고 진실한 기도를 드릴 수 있는가?



죄의식

기도에 관해 가르치는 책들은 한결같이 고백하는 행위를 강조한다. 하지만 허울을 벗어던지고 진리의 밝은 빛에 자신을 내어맡기며 진실한 자아를 드러내는 과정을 더할 나위 없이 고통스럽게 느끼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고백이 그토록 필요하다는 것인가? 이는 초라하고 비참한 느낌을 갖고 싶어서가 아니라, 새카맣게 잊고 지내던 실체를 상기하려는 몸부림이다.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는 순간부터 우주는 질서를 회복한다. 고백이란, 피조물이 창조주를 바라보면서 자기 자리를 제대로 잡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일 뿐이다.



고백은 신학적인 중요성을 떠나서 정신적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는 척도다. 여느 남편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부부 사이에서 벌어지는 문제는 억눌러놓는다 해서 없어지는 게 아니며 도리어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라는 진리를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배웠다. 대수롭지 않은 상처나 오해라도 몇 주, 몇 달 동안 방치해두면 어디부터 손대야 좋을지 모를 만큼 심각한 상태로 증폭되기 일쑤다. 살갗에 가시가 박힌 정도는 쉽게 치료할 수 있지만 깊은 곳에 생긴 감염을 무시하면 건강, 더 나아가 생명까지 위험할 수 있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신앙적인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허상을 여지없이 깨트리신 예수님을 가능하면 멀리하고 싶어 했다. 진실은 그토록 뼈아픈 법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단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치료는 불가능하다. 주님은 인간의 실체를 낱낱이 꿰뚫고 계신다. 인간은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고 받아들일 때에야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외쳤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 139: 23-24). 스스로 속이고 속는 악순환을 극복하려면, 모든 걸 아시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이기심과 교만, 거짓과 무정한 마음 따위의 죄악을 직시해야 한다.



나는 영적으로 발전이 없어서 낙담할 때마다 바로 그런 좌절감이 발전하고 있다는 증거임을 새삼 떠올린다. 주님이 무엇을 바라시는지, 그걸 채워드리기에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 더 선명히 인식할수록 하나님으로부터 너무도 멀리 떨어져 나왔음을 더욱 잘 감지하게 되는 법이다. 자신의 연약함을 절감하고 자포자기에 가까운 심정이 되는 순간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와 치유를 향해 돌이키기에 가장 적합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무기력

노르웨이 신학자 할레스비는 '무기력'을 하나님이 인정하는 대표적인 기도의 마음가짐으로 꼽는다. "말로 표현하느냐 마느냐는 인간의 관심사일 뿐, 하나님께는 의미가 없다. 오직 무기력한 인간만이 진정으로 기도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요 15:5)고 말씀하셨다. 지극히 명백한 사실인 동시에 인간들이 한사코 부정하려는 진리다. 헨리 나우웬은 이렇게 말한다. "기도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온전한 빛 속을 걸어가며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저는 인간이고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일이다. 바로 그 순간 변화가 일어난다. 관계가 정상적으로 회복된다. 인간은 가끔 실수를 저지르는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 역시 가끔씩 용서를 베푸는 창조주가 아니다. 인간과 하나님의 정의가 잘못됐다. 인류는 총체적으로 죄인이며 하나님은 총체적으로 사랑이시다."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시 105:4). 누구와도 비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한 의사 앞에서 인간이 취해야 할 가장 적절한 행동은 상처를 보여드리는 것뿐이다.



겸손

고대 그리스 로마 문명권에서는 성취와 자기 신뢰를 높이 평가하고 찬양하며, 겸손의 가치는 낮춰 보았다. 현대사회도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대니얼 호크는 인간의 모든 문제는 "신이 있다면 그건 바로 자신"이라는 생각에서 시작된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강력한 개선책이 필요한데, 내게는 기도가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께 다가가는 데 겸손이 그토록 중요한 까닭은 무엇인가? 진실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기준으로 자신이 우주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겸손이다. 당연히 인간의 왜소함이 분명해지는 동시에 하나님의 광대하심이 드러나지 않겠는가.



회의

밭에서 보화를 찾은 농부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가장 짧은 축에 든다. 나는 이 비유를 설명할 때마다 보물이 땅에 묻혀 있었고, 이를 캐내려는 노력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기독교 신앙 가운데 상당 부분은 눈에 띄지 않는다. 하나님은 아기 예수를 구유에 숨기셨고, 굴곡진 역사를 살았던 유대인들이 작성한 거룩한 문서들 속에 메시아를 감추셨다. 그뿐 아니라 아예 한술 더 떠서 별달리 거룩할 것도, 뛰어날 것도 없는 교회라는 조직으로 덮어두셨다. 허다한 인간들은 물론이고 하나님 자신도 처절한 고통을 겪었다면,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을까? 차라리 타락한 천사들을 구원하실 것이지 어째서 인간이라는 하찮은 종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던 것일까? 지구라는 별 위에서 수십 년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영원이라는 시간을 어떤 모습으로 살게 될지가 정녕 결정된다는 말인가?



일본을 방문했던 때, 한 목회자가 내게 물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99퍼센트의 일본인들에 대한 고민이었다. 단지 예수님에 대해 무지하다는 이유로 지옥에 떨어져서 영원히 고통받아야 하는가? 신학자들 가운데는 죽은 뒤에 다시 한 번 구원받을 기회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 않은가? 심지어 베드로전서에는 예수님이 '옥에 있는 영들에게' 말씀을 전파하신다는 불가사의한 구절까지 있다. 이 목회자에게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생각에 잠겨 혼자 중얼거리듯, 창조주께서는 선인과 악인에게 골고루 햇살을 비추시며 누구도 멸망당하길 원치 않으신다고 말했다.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는 원수들을 위해 가장 간절한 기도를 드리셨다. 그러나 끝까지 구원의 손길을 물리치는 이들에게는 마지못해 말씀하셨다. "네 뜻대로 될지어다."



마침내 오랜 대화를 마무리하며 말했다.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러나 마지막 때는 누구도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서지 못할 겁니다.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도 없고요. 그렇지만 인류 역사를 매듭짓는 순간에는 하나님의 자비가 공의보다 앞설 겁니다." 욥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관찰과 논쟁이 아니라 만남을 통해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회의론자들에게 묻고 싶다. 볼테르, 데이비드 흄, 버트란트 러셀 등 이름난 불가지론자들이 하나님께 제기한 문제 가운데 하박국서, 시편, 전도서, 예레미야 애가, 특히 욥기 같은 성경책에 들어 있지 않은 게 있는가? 그곳에는 상처와 배신,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인생, 보살펴보시지 않는 건 고사하고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 등 인간이 겪는 뼈아픈 갈등이 모두 담겨 있다. 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이런 고민과 비난이 모두 기도의 형식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기도는 회의와 불만을 꺼내놓고 그것들을 눈앞이 캄캄해질 만큼 환하게 쏟아지는 진실의 빛에 비춰볼 무대를 제공한다. 설령 진실을 이해할 수는 없을지라도 신뢰하는 법은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기도는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다. 기도를 들으시는 분에 대해 더 깊이 알아갈수록 회의는 다른 모습으로 부상하게 마련이다. 우리는 얼마나 오랫동안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비유의 핵심을 놓치고 있었던가! 농부는 밭에 묻힌 보화를 찾기 위해 수고했지만, 결국은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들였다. 그렇다면 농부가 땅 파는 일을 고단하게 여겼을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정직

기도는 아무에게도 말 못하는 비밀의 방문을 조금씩 열어나간다. 방안에는 외부로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틀어막은 수치심과 후회가 가득하다. 하지만 엄연한 사실은, 주님이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는 것이다. 어쩌면 기도하면서 생각하고 느끼는 하나하나가 말보다 더 절실한 기도일지도 모른다. 사실 모든 생각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떠오르고 사라진다. 주님 앞에서 그 비밀들을 쏟아내면 신비롭게도 영혼을 찍어 누르던 힘이 스르르 풀리면서 어느 결에 그것들이 사라져버린다.



캐나다에 살고 있는 내 친구가 편지를 보내왔다. 철들고 나서부터 줄곧 슬픔이나 두려움, 분노 따위의 부정적인 감정을 품고 산다는 걸 부끄럽게 여겨왔다고 했다. 물론 억눌러 보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부정적인 느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진실이 아니었다. 분명히 느끼고 있으면서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가장하는 꼴에 지나지 않았다. 마침내 친구는 결론을 내렸다. "하나님 앞에서 그런 짓을 벌인다는 건 시간낭비더라고. 그래서 부끄러워하거나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기보다 차라리 부정적인 감정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정직하게 내어놓기로 했어. 원색적인 감정들을 아예 갖지 않는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지. 나라는 인간이 본래부터 그렇게 만들어졌거든. 감성이 풍부한 편이지. 그러니 어쩌겠어. 감정이 요동치는 한복판에서도 제대로 균형을 잡고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지. 하나님이 가르쳐주실 거라고 믿어."



노출

기도할 때 가장 깊고 은밀한 부분까지 남김없이 드러내고 있는가? 그렇기만 하다면 참다운 자신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 그 무엇도 실체를 드러내는 하나님의 광선을 약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빛 아래 서면 그동안 쌓아왔던 이미지와는 다른 자신과 주변 인물들이 또렷하게 보인다. 마치 발가벗고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모든 행동 뒤에 감춰진 이기적인 동기나 독사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욕망과 야심, 완벽해 보이려고 안간힘을 쓰게 만드는 치유되지 않은 상처 따위는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계신다. 기도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삶 전체를 들고 나와서 정결하게 씻어내고 제 모습을 되찾으라고 초청하는 안내장이다. 자신의 참 모습을 노출하는 바로 그 순간, 켜켜이 때를 뒤집어쓰고 망가진 채 버려졌던 예술작품이 나타난다. 하나님이 그토록 손대고 싶어 하시는 바로 그 걸작품이다. 삶의 시시콜콜한 구석을 모두 보여드리는 것 자체가 주님께는 기쁨이다. 진정한 자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게 하는 것이야말로 기도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





2부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주님은 분명히 들으신다. 귀를 만드신 분이 듣지 않으실 리가 있겠는가?" - 조지 허버트



기도가 하나님 뜻을 바꾸는가

"기도란 다른 방법으로는 불가능한 역사를 일으키는 권능이다." - 앤드류 머레이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말 3:6).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 11:8). 이 모두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종종 독자를 헷갈리게 만드는 구절들이다. 하나님이 변치 않으신다는 구절은 이것 말고도 부지기수다. 물론 마음을 바꾸신다는 말씀도 그만큼 많다. 결코 변치 않는 주님께 기도한다는 게 대단히 역설적이라는 점에 처음으로 착안한 학자는 오리겐이었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오리겐의 뒤를 따랐다. 임마누엘 칸트 같은 철학자는 인간의 기도가 거룩한 뜻을 굽게 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불합리하며 건방진 망상이라고 단정했다. 신앙이 깊었던 조나단 에드워즈는 탄원하는 기도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대로 움직이거나 마음을 정하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경의 관점

하지만 성경적인 역사관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며 잊지 않고 응답하시는' 인격적인 분으로 보면 어떻게 될까? 하나님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르시는 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셔서 역사하신다는 성경의 선명한 가르침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었던 자크 엘룰은 "기도는 산산이 깨져 흩어진 창조 세계의 파편들을 다시 끌어모아 맞춰나가는 일이다. 역사를 존재하게 하는 동력인 셈이다"라고 고백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간절히 기도하며 부르짖은 뒤에 일어났다.



성경은 시종일관 하나님을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인간으로부터 깊이 영향을 받으시는 분으로 묘사한다.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시 147:11) 하나님이시다. 동시에 예언자들이 지적하듯, 불순종하는 자녀들 때문에 속을 태우시고 인내의 한계를 느끼는 분이기도 하다. "내가 오랫동안 조용하며 잠잠하고 참았으나 내가 해산하는 여인같이 부르짖으리니 숨이 차서 심히 헐떡일 것이라"(사 42:14). 신약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 또한 자녀들의 기도가 하나님과 세상을 변화시킨다고 강조한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마 7:7).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5-16).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벧전 3:12).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약 4:2).



이처럼 아낌없이 주시겠다는 약속들을 제시하면서, 성경은 예언자와 사도들에게 육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심지어 주검이 다시 살아나게 해주시길 구하라고 가르친다. 사라, 리브가, 라헬, 한나, 엘리사벳은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서, 세 친구들은 불구덩이 속에서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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