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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아 주심

옥한흠 지음 | 국제제자훈련원
1부 삶에 지친 당신에게



당신의 눈물을 보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누가복음 7:11-17

나인 성 여인관을 따라 쭉 이어진 장례 행렬 속에 울고 있는 한 여인이 보입니다. 나인 성에서의 일입니다. 아마 처녀 때는 아름다운 여인이었겠죠? 그녀는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나서 사랑하게 되었고, 결혼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아마 인생에 있어서 가장 달콤한 시기가 있다면, 갓 결혼해서 자녀를 낳았을 때일 것입니다. 아이들이 재롱부리는 것을 보면서 젊은 부부가 오순도순 살아가는 그때가 가장 행복한 시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이 여인도 그랬습니다. 행복한 앞날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부푼 꿈에 가득 찬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느닷없이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행복했던 이 여인은 하루아침에 과부가 되었습니다. 요즘 세상과는 달리, 당시에는 여자가 남편을 잃었다는 것은 앞날에 엄청난 시련과 극심한 가난, 혹독한 고독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하루하루를 보냈겠습니까? 그래도 그녀에게는 한 가닥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어린 아들이었습니다. 그녀는 고생인 줄도 모르고 최선을 다해 아들을 키웠습니다. 예수님이 과부의 죽은 아들을 향해 "청년아"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녀의 아들은 성인에 가까운 나이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장성한 아들을 보며 어머니로서 얼마나 마음이 든든하고 큰 꿈에 부풀었겠습니까? '이제는 기대고 살 만한 기둥이 생겼어" 하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 아들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여인은 남편을 잃고, 그녀의 모든 꿈이었던 아들마저 잃는 설상가상의 화를 당했습니다. 아들을 잃은 슬픔 앞에 그녀는 울고 싶어도 더 짜낼 눈물이 없을 만큼 많이 울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여인을 보고 있습니다. 동네사람들은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모여들었습니다. '이 여자, 무슨 죄가 많길래 남편 먼저 보내더니 이제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 떠나 버렸담." 다들 수근거렸을 겁니다. 청년의 장례 행렬은 동네를 지나 성문 밖으로 빠져나갑니다.

이때 예수님은 많은 무리를 이끌고 나인 성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성 가까이 이르렀을 때, 마침 장례 행렬은 성문을 빠져나오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봅시다. 생명의 주, 하나님의 아들이 많은 무리를 이끌고 나인 성을 향해 오고 있습니다. 그 반대편에는 죽음의 사신인 사탄이 이끄는 죽음의 행렬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두 행렬이 마주칩니다. 생명과 죽음의 만남입니다. 이것은 과연 생명과 죽음의 대결입니다. 이 얼마나 의미 있는 대결입니까!

생명의 주이신 예수님, 죽음을 정복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구세주 예수님이 과연 이 순간에 어떻게 하셨을까요? 피하셨을까요? 아니면 청년의 장례 행렬이 지나가도록 길가에 비켜서서 기다리셨을까요? 예수님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정면 대결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관 뒤를 따라오며 슬피 우는 과부에게 머물렀습니다. 그 자리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울고 있는 과부를 주목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가장 먼저 주목하셨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슬픔을 당한 자들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자들,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들입니다. 실패한 자들입니다. 병든 자들입니다. 4복음서를 살펴보면 '예수께서 보셨다'는 말이 한 40번 정도 나옵니다. 그때마다 주님의 눈길이 머무는 곳에는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늘 그렇듯이 예수님은 먼저 이 과부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생의 고통을 안고 씨름하는 자에 민감하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항상 사랑의 만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다가 만조를 이루면 온 해변이 바닷물로 덮이는 것처럼 우리를 향해 만조를 이룬 예수님의 사랑은 고통당하는 자들을 가장 먼저 덮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고, 그 아픔을 그대로 느끼셨습니다.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과부의 처지를 다 알고 계셨고, 과부의 괴로움과 아픔에 자기 마음을 내주셨습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울고 있는 과부를 보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울지 말라." 예수님의 위로는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그 과부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씻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는 마치 예레미야 선지자가 대언하는 하나님의 음성과 비슷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울음소리와 네 눈물을 멈추어라… 너의 장래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예수님은 지금 이 여인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어 예수님이 청년의 관에 손을 대시자 관을 메고 가던 자들이 그 걸음을 멈추어 섰습니다. 예수님이 명령하십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그러자 죽었던 청년이 관 속에서 일어나 앉습니다. 예수님이 그 청년을 과부에게로 이끄십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눈물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셨고,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슬픔의 근본을 해결해 주심으로 그녀를 위로하셨습니다.

생명의 주인나인 성 과부 이야기는 참으로 아름다운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이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 주고자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중에는 남편을 먼저 보내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 잃고 비탄에 잠긴 과부와 같은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설혹 그런 사람이 있다 해도 예수님이 당장 그 아들을 무덤에서 일으켜 주시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나인 성 과부와 같은 일이 지금 우리에게 모두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알려 주시고자 하는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의 어느 한 구절도 그냥 기록해 놓으신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이런 기적을 일으키셨을까요? 이 이야기에는 근본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문 앞에서 죽음의 사자들과 만났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죽음의 사자들 앞에서 생명의 능력을 보이셔야 했습니다. 그냥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온 세상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음을 이기신 생명의 주시오,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는 것이 이 사건의 주된 목적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온 세상을 향해서 "나는 죽음을 이기었노라, 나는 생명의 주가 되느니라"고 선언하는 큰 사건이었습니다.

죽음의 사자인 사탄은 장례 행렬을 이끌고 나오며 의기양양했을 것입니다. 죽은 청년의 시체를 끌고 나올 때, 사탄은 자신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힘있는 군주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청년아 일어나라"고 선포하셨을 때 사탄은 아무 손도 쓸 수 없었습니다. 청년을 붙들 수도, 죽음에 그대로 묶어 둘 수도 없었습니다. 주님이 명령하시자 관 속에 누워 있던 청년은 죽음을 이기고 일어났습니다. 사탄은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경은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또 "(주가)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친히 스스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사실상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육신의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옮기기 위한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먼저 사랑하는 남편을 하나님 앞으로 떠나보냈거나 어린 자녀를 하나님 앞에 먼저 보낸 분이 있다면, 우리는 인간이기에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없다는 사실로 슬퍼할 수 있지만 먼저 간 그들은 죽은 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보고 항상 '죽지 않았다'고 하시며 '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받아 누리며 하나님 품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도 다 그곳으로 갈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놀라운 생명의 주이심을 선포하는 것이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사건의 목적이었습니다.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이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 어찌 남은 인생을 마음 놓고 살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시는 그분께 우리 인생을 모두 맡겨야 합니다. 이미 죽음을 정복하신 그분께만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는 자를 눈여겨보시다이뿐만이 아닙니다. 이 사건으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성품 두 가지를 보여 주십니다. 그 첫 번째는 예수님이 울고 있는 과부를 주목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울고 있는 우리도 눈여겨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단 한 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고 세상을 살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위대한 설교자 스펄전은 이런 재미있는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녀를 두신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죄 없는 자녀를 두신 일은 한 번 있습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런 예수님도 세상에 계실 동안 몇 번을 우셨습니다.

혹자는 인생을 '고통의 바다'라고 합니다. 인생은 고통과 슬픔의 파도가 몰아치는 먼 항해 길과 같습니다. 어찌 눈물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울음으로 인생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죽을 때는 두 눈에 눈물이 고인 채 숨을 거두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눈물을 부끄럽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눈물 흘리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 문화 이면에는 우는 것을 천시하는 경향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문화입니다. 슬퍼도 슬프지 않은 척 노력하는 것은 가식이고, 힘들어도 힘들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울고 싶을 때는 맘껏 울어야 합니다. 우는 것은 인생 본연의 모습 중 하나입니다.

이 세상을 봅시다. 구석구석을 살펴보면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처참한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내가 아무리 평안하다 해도, 어려움이 없다 해도, 형통한 인생을 산다고 할지라도 눈을 돌려 고통당하는 내 주변, 내 이웃들, 그리고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아도 생각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도 세상에 계실 때 우셨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눈물 없이 살기란 참 어렵습니다.

일제 강점 하에서 고달픈 신앙생활을 하던 우리 조상들은 예배당에 모였다 하면 울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통성기도를 시작하면 어느새 그 기도는 통곡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6.25사변이 터져 비참하게 하루하루 살아가던 우리 부모들은 조상들이 울던 그 장소에서 또다시 통곡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은 울기 위해서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들 안에는 눈물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니 예배시간이 울음바다가 되는 일은 다반사였습니다. 설교를 듣고 은혜받아 우는 것보다 인생의 무거운 짐이 너무 괴로웠기 때문에 그 슬픔과 한을 주님께 풀어놓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울고, 찬송하면서 울고, 기도하면서 울고, 서로 붙들고 울고, 그러면서 위로를 받았고, 그러면서 주님의 손길을 체험했습니다. 그 힘을 가지고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갔습니다.

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눈물을 귀히 여기십니다. 우는 자를 주목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남모르게 우는 사람이 참 많을 것입니다.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울고 있을 때, 주님이 여러분을 주목하십니다. 다 보고 계십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참 재미있는 기도입니다. 참 인간적인 표현입니다. 다윗은 젊은 나이에 10년이 넘도록 많은 수모와 모함과 고통을 당하며 쫓겨다녔습니다. 그의 삶은 매일 울다시피 하는 인생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시편을 통해 다윗의 우는 장면을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윗은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다. 사람들은 나의 눈물을 보지 않는다 할지라도 주님은 나의 눈물을 반드시 보고 계시고, 관심을 갖고 소중히 여기실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울었습니다. "주여, 내 눈물을 잊지 마소서."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셨고, 다윗의 눈물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셨다는 해피앤딩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을 때 그 광경을 보는 부모의 마음은 내 아이가 흘리는 눈물의 이유에 쏠리게 됩니다. 자녀의 눈물에 부모의 마음이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울고 있으면 하나님의 마음이 움직입니다.

갈대가 상해서 꺾이면 사람들은 아무도 그 갈대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무심코 꺾인 갈대를 밟고 지나갑니다. 우리는 40대에든 50대에든 아니면 30대에라도 상한 갈대처럼 꺾일 수 있습니다. 아마 그 순간에 세상이 얼마나 야박한 곳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꺾여 버린 자에게 쌀쌀맞게 등을 돌립니다. 비정하게 그를 밟고 지나갑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으로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주님은 상한 갈대와 같은 우리를, 다 꺼져 가는 심지와 같은 우리를 품에 안으시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달래 주십니다.

눈물을 씻어 주시는 분아파하는 이들에게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주님의 방법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고통당하는 우리를 위로하시는 두 가지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는 말씀입니다. 긍휼이 많으신 주님은 나와 나의 필요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아시기 때문에, 정확한 때에 도와주시기 위해 늘 은혜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주님께 간구하면, 때를 따라서 채우시며 위로해 주시는 손길이 항상 우리 곁에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울고 있는 당신을 주목하시고, 당신의 눈물을 소중히 여기시며 "울지 말라"고 위로하십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아시고, 정확한 때에 필요한 은혜를 허락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눈의 눈물을 씻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은 굉장히 큰 그림을 말합니다. 이 그림은 우리가 금방 알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정신을 차릴 수 없고 해답을 알 수 없지만, 우리의 인생을 큰 그림을 가지고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께 주목해야 합니다. 이 큰 그림을 완성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은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에 시달릴 때도 있습니다. 우리 당대에서 보지 못하고 다음 세대로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아름답고 선한 뜻과 큰 계획을 갖고 계신다는 것을 신뢰해야 합니다.

룻기에서 보듯이 나오미에게 그런 끔찍한 비극이 없었다면, 다윗 왕의 할아버지인 오벳이 그 가족 가운데 나올 확률은 전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같은 비극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다윗 왕의 혈통을 조성하고 계셨습니다.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가 탄생할 구원의 길을 닦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엄청난 계획이었기 때문에 나오미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이 비밀에 대해 당시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가운데 선한 뜻을 품고 계셨고, 그 계획을 이루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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