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가르치는 것만 남는다
김요셉 지음 | 두란노
1부. 나는 어떻게 교사가 되었는가 : 조건 없는 사랑의 통로나는 아직도 칼 파워스 상사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아버지의 촉촉한 눈가를 잊을 수 없다.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을 만큼 아버지의 집안은 가난했다. 철도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보러 서울로 가는 날 6.25 동란이 터졌고, 아버지는 미군부대가 있었던 수원으로 다시 내려와야 했다. 한 미군이 뭐라고 손짓발짓을 했는데 용케도 아버지는 그것이 나무 해 오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논두렁의 말뚝을 뽑아갔다. 그것을 기특하게 여긴 미군이 하우스보이로 취직을 시켜 주었고, 성실한 아버지는 미군들의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전세에 밀려 미군과 함께 경산까지 내려갔을 때, 그곳에서 칼 파워스 상사는 아버지에게 뜻밖의 제안을 했던 것이다. "빌리 김, 미국에 가서 공부하지 않을래?" 아버지는 처음에 그의 말을 의심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가 부자였던 것은 아니었다. 칼 파워스 상사는 아팔레치아 산맥의 한 탄광촌에서 태어났고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한국 전쟁이 터져서, 가난 때문에 군에 지원했던 것이었다.
칼 파워스 상사는 아버지를 미국의 유명 기독교 사립 고등학교인 밥 존스 고등학교에 입학시켰고 자신은 돈을 빨리 벌려고 사립대를 포기하고 2년제 교대에 입학했다. 아버지가 공부를 끝마치고 다시 한국에 돌아간 뒤에야 칼 파워스는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를 통해 아이들에게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학교를 은퇴한 지금까지도 그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그 산골에서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 주는 일을 하고 있다.
아버지에게 값없이 은혜를 나눠 주는 통로는 교육이었다. 칼 파워스의 삶을 쏟아 부은 교육, 그것은 우리 집의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다. 누구든 아버지 김장환 목사님처럼 유명한 사람이 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든 칼 파워스 상사가 될 수는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미국인 엄마의 손을 붙잡고 학교에 간 첫날, 나는 스타덤에 올랐다. 아이들은 동물원의 사자나 원숭이가 나타난 것처럼 나를 쳐다보았다. 학교를 다니는 내내 나는 놀림을 받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나는 온돌방에 엎어져서 잤다. 그렇게라도 하면 코가 납작해질 것 같아서였다. 머리카락이 까매지고, 눈동자가 까매질 수 있다면, 피부가 노랗게 될 수 있다면…….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을 때, 선생님은 이제부터는 도시락을 싸 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날 나는 엄마와 함께 수원영동시장에 갔다. 반짝반짝 빛나는 양은 도시락을 사고 보니 마치 내일 소풍이라도 가는 것 같았다. 다음날 엄마는 양은 도시락을 신문지로 싸서 내 가방에 넣어 주셨다. 드디어 점심시간, 모두가 들떠 있었다. 함께 모여서 도시락을 열어 보기로 했다. 콩자반과 단무지, 김칫국물에 물든 꽁보리밥, 가뭄에 콩 나듯 멸치와 계란프라이가 등장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도시락을 들 때 조금 가볍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뻤다. 김밥인 게 분명했다. 내가 뚜껑을 열자마자 친구들이 일제히 말했다. "어! 저건 뭐야? 역시! 양코쟁이는 먹는 것도 달라!" 내 양은 도시락에 얌전히 담겨 있는 것은 햄앤에그 샌드위치였다. 아이들의 눈총이 화살처럼 꼭꼭 박혔다. 창피해서 도저히 교실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교실을 뛰쳐나갔다. 뒷산에서 수업이 끝날 때까지 내려오지 않았다. 울면서 집에 돌아왔다. 엄마를 보자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엄마는 나를 가만히 안아 주셨지만, 나는 엄마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엄마, 친구들이 그럴 줄 알았으면서 나 샌드위치 싸 준 거지? 내가 놀림 받을 거 알면서 한국 학교에 보낸 거지? 엄마 왜 한국에 있어? 엄마 왜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한국 사람이랑 결혼했어? 우리 미국에 가서 살면 안돼?" 내 원망 섞인 하소연을 잠잠히 들어주시던 어머니는 날 꼭 껴안아 주시며 이렇게 대답하셨다. "Because of Jesus! 예수님 때문에!" 엄마의 그 말을 들었을 때 내 마음의 살갗이 벗겨지는 듯 아팠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해 여름이었다. 우리 가족은 어머니의 고향 미시건으로 여행을 떠났다. 미시건에 있는 한 크리스천 스쿨에 입학했다. 처음 보는 미국인 학교 정문이 점점 가까워지자 가슴이 콩닥콩닥 튀었다. 4학년 교실에 배정되었다. 부모님을 뒤로 하고 교실에 들어서니 또다시 심장이 쿵쾅거렸다. 첫 시간은 스펠링 수업 시간이었다. 걱정이 태산이었다. "난 들을 줄만 알지 스펠링은 모르는데, 어떡하지!" 선생님이 물어보는데 내가 아는 단어는 하나도 없었다.
점점 내 차례가 다가왔다. 나는 그만 숨어 버리고만 싶었다. '어떻게 하지? 하필이면 스펠링 수업이 첫 시간일 게 뭐람! 앞으로 창피해서 학교를 어떻게 다니지? 정말 어떻게 해' 고개가 점점 수그러졌다. '어쩌면 전학 왔다고 선생님이 봐 주시지 않을까?' "김요셉! 앞으로 나와 봐!" 내 기대는 무참히 깨졌다. 봐 주기는커녕 칠판 앞으로 불러내시다니!
주먹을 움켜쥐고 눈을 내리깐 채 칠판 앞에 섰다. 선생님은 단어 카드를 들고 내 옆으로 다가 오셨다. 바지에 오줌을 싸기 직전이었다. "너희들, 이야기했지? 한국에서 온다는 선교사님 자녀 말이야. 얘가 바로 그 요셉이야. 요셉이는 한국이라는 곳에서 태어나서 우리와 다른 말을 배우며 자라나서 한국어를 아주 잘한단다. 요셉아, 선생님 이름을 한국말로 써 줄래?" "네?" 난 내 귀를 의심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한국어로 쓰라고? 영어가 아니고? 그것도 달랑 이름 하나를?' "선생님 이름은 샤프야!" 나는 칠판에 선생님의 이름을 한글로 또박또박 적었다. "샤 프" 까짓 식은 죽 먹기였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탄성과 환호가 터져 나왔다. "내 이름도 한국말로 써 줘! 내 이름은 탐이야!" "나도, 나도! 나는 메리야!" "나는 수잔!" 이름을 적을 때마다 아이들은 감탄사를 내뿜으며 박수를 쳤다. 근심과 두려움이 순식간에 기쁨과 자신감으로 바뀌었다. 아이들은 내게로 몰려들어 자신의 이름도 한국말로 써 달라고 했다. 소동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날 수업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그때는 고등학교도 시험을 치러야 했다. 나는 수원의 신흥 명문으로 떠오르고 있었던 미션스쿨인 유신고등학교를 지원하기로 했다. 입학원서를 내러 온 날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모집 정원은 7백 명인데, 자그마치 2천여 명이 넘는 학생들이 응시한 것이다. 순간 아찔해졌다. 드디어 입학시험 당일, 시험지가 배부되었다. "시험지 뒤집어!" 선생님의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아이들이 문제 푸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나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마치고 시험 문제를 풀어 내려갔다. 다음 시험 시간에도 마찬가지로 5분 정도 기도를 드렸다. 마지막 시간까지 기도를 한 뒤 시험을 봤다.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 나는 가느다랗게 실눈을 뜨고 내 이름을 찾았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내 이름이 없었다. 혹시나 하고 처음으로 다시 올라갔다. 그런데! 맨 처음에서 두 번째에 흔하지도 않은 내 이름 석 자가 똑똑히 적혀 있었다. 2등이었다. 4문제만 틀려 2등으로 합격한 것이다!
발걸음도 가볍게 벌판 가운데 우뚝 선 고등학교에 들어섰다. 신설 학교라 그런지 선생님들의 열의가 대단했다. 학교는 성적이 우수한 아이들을 따로 모아 강훈련을 시켰다. 일명 명문대 진학반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었다. 전체 2등으로 입학한 나는 자연히 우등반에 배정됐다. 우등반 아이들은 중학교 때 친구들과는 사뭇 달랐다. 이제 갓 입학한 학생들답지 않게 공부를 알아서 척척 해 나갔다. 친구들과 친해지려고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아이는 나뿐이었다. 우등반은 정말 재미없는 반이었다.
2학년이 되었다. 학교의 입시반, 우등반 프로그램이 없어졌다. 학부모들의 원성과 나라의 평준화 교육 제도 때문이었다. 신이 났다. 우등반에 들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이 사라졌으니까, 또 재미없게 악착같이 공부하지 않아도 되니까 좋았다.
3학년이 되니까 취업반이 생겼다. 학교 편에서 보면 진학을 포기한 아이들을 취업반으로 빼서 학교 전체 진학률이 조금이나마 오르니 좋고, 학생 편에서 보면 하루라도 빨리 자기 길을 찾게 해 주니 좋았다. 우리들은 그 반을 돌반이라고 불렀다. 그럼에도 돌반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그것은 오후 2시면 수업이 모두 끝난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 나는 그 반에 들어가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딱 꼬집어서 말하면 '공부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는 당장 선생님을 찾아가 말씀드렸다. "부모님과 얘기가 다 됐어요. 전 대학은 미국으로 가기로 돼 있거든요. 저는 입시를 치르지 않으니까 그냥 취업반으로 보내 주세요." 선생님의 허락 하에 나는 당당히 돌반에 입성했다.
돌반에서의 생활은 아주 짜릿했다. 돌반에는 공부도 못하고, 별 볼 일 없는 문제 아이들 투성이었지만 그곳에는 '한 번 친구는 영원한 친구'라는 인간적인 의리가 있었다. 나는 거기서 깊은 사랑이 싹트는 진정한 공동체를 체험했다. 평생을 같이한 친구를 만난 것도 돌반에서였다. 만약 내가 돌반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면, 나도 성공을 위해서 남을 이용하는 관계를 쉽게 생각했을 것이다. 진정한 앎은 관계에서 비롯된다. 상호 협동과 타인에 대한 배려는 공동체에서 길러지기 때문이다.
2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 기도아버지가 학교 건립을 위해 마련해 주신 돈은 30억 원이었다. 땅을 판 돈을 손에 쥐게 되었을 때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십일조 먼저 드리고 시작해야지." 전체 건축 예산의 절반이나 모자라서 여기저기 돈을 꾸러 다니던 때라 기분이 좀 상했지만 나는 꼼짝없이 십일조 3억 원을 드렸다. 솔직히 강제로 떼인 기분이었다. 건축을 시작하다 보니 문제가 하나둘이 아니었다. 산을 다듬어야 했고, 진입로를 내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십일조를 하고 한 달쯤 지났을까. 갑자기 한국전력 직원 몇 명이 찾아와서 뜻밖의 제안을 했다. "고압선을 지중화하려면 땅이 필요한데 저 산 위의 땅을 저희 측에 팔면, 철탑도 없애고 고압선도 지중화시키고 진입로도 내 드리겠습니다." 아무튼 그 제안 덕분에 우리의 골칫거리였던 서너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었다. 나중에 계산해 보니 약 30억 원 정도의 효과를 본 셈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한 십일조였는데 하나님은 그것의 10배인 30억 원으로 되돌려 주셨다.
선생님 모집 공고를 냈다. 전국의 교대에서 선생님들이 몰려들었다. 선생님들을 뽑을 때의 기준은 단 하나였다. "하나님께 교사로서의 소명을 받았는가?" 개교 준비를 하면서 선생님들과 나의 고민은 말할 수 없이 커졌다. 정말 기독교 교육다운 교육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런 와중에도 개교일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목사님, 어쩌죠? 마무리 공사를 하는데 2~3일은 더 걸린다는데요." 겨우 몇일 때문에 한 학기를 미룰 수가 없어서 선생님들과 상의한 끝에 서울 구로동에 있는 기도원에서 전교생이 함께 수련회를 하기로 했다.
나는 아이들의 가려운 데를 어떻게든 긁어 주려고 했다. 재미있고 화려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달콤한 음식을 먹였다. '말씀이나 기도는 어른이나 할 수 있는 거니까, 애들은 그냥 잘 놀면 되지.' 그런데 하루는 여름성경학교 마지막 날 인형극을 하던 중에 새로 오신 여전도사님이 갑자기 아이들에게 회개 기도를 강력하게 요청하면서 통성기도를 30분이나 시키는 게 아닌가. 그 전도사님의 갑작스러운 진행에도 놀랐지만, 나의 가슴을 더 먹먹하게 만들었던 것은 아이들의 기도 소리였다.
"아버지, 사랑해요. 아버지 저를 구원해 주셔서 감사해요." "아버지, 저의 약함을 고백합니다. 저는 보잘것없지만, 주님이 쓰시겠다 하실 때 어린 나귀처럼 언제나 예수님께 순종하기를 원해요." 아이들에 대한 나의 판단은 착각이었다. 아이들은 기도할 수 있었다. 나는 아이들을 어리석게 보고 과소평가한 미련함을 회개했다. 그 일을 계기로 혹시 어른들의 어떤 기준이나 교육 태도가 아이들의 영적 체험을 제한하고 있지는 않은지 늘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듯 예기치 않게 우리 학교는 기도 속에서 출발했다.
개교를 하면서, 학교가 소송에 휘말리는 일까지 벌어졌다. 우리 학교는 이혼 경력이 있는 사람은 교직원으로 뽑지 않는다. 그런데 선생님 한 분이 이혼하신 사실을 감춘 것이 들통 난 것이다. 내가 그 선생님을 만나 학교 측의 입장을 전달했는데 그분은 우리의 제안을 거절하고 소송을 걸었다. 인권과 종교적 특수성의 대립이라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게다가 전례가 없는 사건이기도 했다.
재판이 열리는 날, 상대편 변호사의 변론은 아주 명쾌했다. 한순간 우리 학교는 몰인정하고 배타적이며 종교만을 강요하는 이기적 집단처럼 돼 버렸다. '우리가 지겠구나' 싶었다. 우리 측 변호사는 우리 학교가 사립학교이므로 설립 이념에 따라 학교 행정을 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나는 손바닥에 식은땀이 다 났다. 드디어 판사의 마지막 판결만 남았다. 판사는 카랑카랑하지만 엄숙한 어조로 판결문을 읽었다. "이 사건은... 불평등 고용이냐 학교의 특수성이냐에 관한 사안으로서, 이 학교는 기독교 학교이기에 성경적 가치로 행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학교의 결정 사항은 적어도 이 학교 내에서는 적법한 것으로 인정한다. 탕탕탕!"
개교한 지 4년이 될 무렵, 학교는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1999년 여름, 나는 서울외국인학교 기독교사대회에 참석했다. 대회가 끝나자, 나를 만나겠다고 사람들이 줄을 섰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러시아 등에서 온 외국인학교 대표들이었다. 그들은 나를 보더니 거두절미하고 대뜸 이렇게 말했다. 한국 선교사 자녀를 위한 한국인 교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속으로는 이런 걱정을 하고 있었다. '우리 학교 선생님들이? 그럼, 당장 우리 아이들은?' 하지만 돌덩이 같은 것이 마음 한구석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교사회의 시간에 지나가듯 한마디 던졌다. "우리 학교에서 MK(Mission Kids)를 위한 교사 선교사를 보내는 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선생님들의 반응은 나와 너무 달랐다. "와! 드디어 기도에 응답하셨네요. 우리 학교가 선교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학교 설립 초기부터 무려 5년 동안이나 기도해 왔거든요!"
너무 인간적인 생각만 앞섰던 내 모습이 민망했다. 결국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 앞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순종하기는 싫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니 싫어도 순종할 수밖에. 선생님들과 함께 선교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의논했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교사를 십일조 하는 것 어때요?"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나는 곧바로 MK 선교사를 모집한다고 발표했다.
그날 바로 누군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네, 최형석입니다." 이름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이 선생님은 안 되는데, 설마 선교사 지원하려고?' 최형석 선생님은 초등학교에서는 보기 드문 남자 선생님이었고 두고 볼수록 알맹이가 꽉 찬 열매 같았다. 어떤 일을 맡겨도 늘 활기차게 빈틈없이 해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기도가 우선이었다. '흠, 아무리 봐도 교장감이야.' 이렇게 생각하고 점찍어 둔 선생님이 바로 최형석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그가 지금 난데없이 쳐들어와 선교사로 보내 달라고 생떼를 쓰고 있는 것이다. 기가 막혔다. "목사님, 저어, 제 꿈은……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 가서 복음 전하며 살다 죽는 것입니다.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