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투르니에의 치유
폴 투르니에 지음 | CUP
1부 성경에서 인간을 만나다
두 가지 진단, 인간 이해의 길잡이어느 날 동료 의사의 부인이 제네바까지 나를 만나러 왔다. 제발 남편을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무언가 두렵고 이상한 고민에 빠져 고통 받고 있으며, 얼마 전 패혈증으로 몇 달 간 입원했을 때는 그를 치료하던 의사들이 왜 치료가 잘 되지 않는지 의아해 했고, 간신히 병이 호전되자마자 이전보다 더 심하게 일에 몰두하고 있다고 했다. 이대로 간다면 또 재발될 거라고 호소하는 부인에게, 내가 그에게 편지를 쓰겠다 약속했고, 며칠 후 다행히 그 친구는 매우 반가운 마음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는 자기 인생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학창 시절 저질렀던 한 실수를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으면서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게 되었고, 결국 일을 올바르게 처리하는 능력을 상실했다. 그것으로 인해 결혼 후에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는데, 아내에게 말할 수가 없어 항상 쉬지 않고 일에 몰두함으로써 곤란한 상황을 회피하려 했다. 그가 환자에게 합당한 치료비를 받으려 하지 않는 것도 어떤 의미로 보면 잘못된 속죄 행위이며, 혹은 자기로부터의 도피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입원했을 당시의 이야기도 해주었다. 별로 심각하지 않은 질환이 급속하게 악화되어 심각한 패혈증이 된 것으로, 이 질병은 마치 그가 치러야 할 빚과 같은 의미로 다가왔다. 또한 이 사건으로 그때까지 자신을 사로잡고 있던 지옥의 고통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질병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회복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는 주치의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회진할 때마다 궁극적인 치료에 도움이 안 되는 혈액 배양에 관한 이야기만 나누다가 나갔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다 해주었고, 나는 아무 말 없이 들었다. 말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과학에 관한 문제라면 우리는 가르치고, 충고하며, 지도해야 한다. 그러나 영적 삶에 대한 문제라면 우리는 귀 기울여 주고, 이해하고, 사랑하며, 기도하면 된다. 응답하실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긴 침묵 후에 나의 친구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요구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삶 속에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질서가 회복되기 위해 자신이 고쳐야 할 것들을 간단하고 분명하게 얘기했다.
몇 주 후, 그 친구는 매우 감명 깊은 한 통의 편지를 내게 보냈다. 그가 받은 축복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찬송의 시였다. 친구는 내 연구실에서 한 결심을 실행에 옮겨 고해성사를 했고, 아내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휴가를 보낼 예정인데, 마치 두 번째 신혼여행과 같은 설렘을 느낀다는 감격을 전했다.
모든 질병은 두 가지 진단을 요구하는데, 하나는 과학적이고 질병 분류학적이며 병리학적인 진단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영적이며 질병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진단이다. 사물의 의미, 질병과 치료의 의미, 삶과 죽음, 세계와 인간과 역사의 의미에 관해 과학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설명해 주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을 말해 주는 것은 바로 성경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사가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과학을 연구하는 것만큼이나 가치 있는 일이다.
평신도 의사, 성경에서 길을 찾다우리는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성경으로 관심을 돌려야 한다. 파스칼은 이렇게 말했다."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삶과 죽음을 알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생명과 죽음,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며, 하나님과 우리 자신의 본성에 관해서도 이해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의사는 실질적인 사람이다. 만약 의사에게 성경을 연구해 보라고 권하면, 아마 그는 이런 연구가 환자를 잘 돌보는 데 도움이 되느냐고 물을 것이다. 나는 날마다 그런 실제적인 사례와 씨름하는 사람이다. 환자들의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우리가 사용하는 방법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강하게 느낀다. 그래서 나는 성경 전체를 읽으면서 의학과 심리학, 질병, 그리고 삶의 처신과 관련된 모든 성경 구절을 노트에 적어 놓기로 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성경 내용이 놀랄 만큼 풍부하다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 삶의 드라마이며, 열광할 만큼 흥미로운 책이다. 그리고 성경은 대단히 인간적이다.
성경의 두드러진 또 하나의 특징은 사실성이다. 성경은 인간이 지닌 온갖 고민과 위대함, 모든 확신과 의심, 고상한 뜻과 비열함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성경의 극단적인 사실성은 종종 우리를 매우 난처하게 만든다. 인간의 모순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사실상 성경은 인간의 마음을 비춰주는 거울이며, 인간의 마음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은 모든 종류의 인간을 그분의 드라마에서 제외시키지 않으시며, 그 드라마 속에 거하신다. 성경은 아무것도 회피하지 않는다.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죽지 았었던가?"하는 욥의 고통스런 탄식에서부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십자가상에서 부르짖으신 예수님의 죽음의 고통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모든 감정과 공포와 열망을 표현하며, 또한 갈피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라는 선언이 들어있다.
보세이의 에큐메니칼 협회에서 국제적인 의사 회의가 조직되었을 때, 우리는 그곳에서 의사에게 적합한 성경 연구 방법을 발견하게 되었다. 의사로서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들을 일일이 성경에 비추어서 검토하였다. 즉 인격, 삶과 죽음, 질병과 죄, 치유의 의미와 목적, 신유의 은사, 환자와의 관계, 공동체 의식, 성, 사랑, 결혼과 독신, 건강법 등의 문제들을 다루었다. 나는 변호사나 예술인, 사회학자, 실업가, 농부, 교사, 주부들도 각각 자기 분야에 대해 성경에서 해답을 탐구하려는 의욕을 느끼게 되기를 기대한다.
과학은 하나님의 선물많은 사람들이 성경과 과학이 근본적으로 대립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다. 성경은 과학과 인간의 능력을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묘사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께 복종하는 마음으로 이 선물을 다루어야 한다. 실상 과학 때문에 생겨나는 큰 재난은 과학의 산물이 아니라, 자기 능력을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여 사용하는 길들여지지 않은 인간 마음의 산물이다. 하나님의 선물인 과학 그 자체를 신격화할 때, 과학이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킬 때, 성경은 크게 책망한다.
과학은 환자를 더 잘 돌보라고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다. 그러나 진정한 겸손 없이 과학과 의학은 존재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마음이 공존한다. 첫 번째는 표면적인 마음으로. 듣고 이해하며 자기 견해를 바꾸기보다는 자신의 한정된 지식으로 조언하기를 더 좋아한다. 한편 또 하나의 마음은 신비감을 느끼는 마음으로, 이러한 마음은 자신이 가진 지식의 결함과 한계를 의식하며 모든 사람들을 결코 완전하게 설명할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로 본다. 이 두 가지 마음 중 보다 과학적인 것은 두 번째 마음이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교만하게 만드는 지식'의 위험에서 자유롭다고 우쭐댈 수 없다. 성경은 아무리 박식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께 대면하여 자신이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성경적인 관점은 '신앙'을 실제적인 세계로부터 단절된 것이 아니라 인간 생활과 사회생활을 형성하며 구체화시키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율법을 그 문구 자체보다 전체적인 흐름에 놓여 있는 원리를 적용한다. 오늘날의 상황에 어떻게 적용할지 찾아보고, 하나님이 주신 보편적인 영감으로 건강하게 사는 법, 결혼, 성, 심리에 대해 배우게 된다. 예를 들어 시편 32편은 정신 분석의 시편이라고 부른다. "내가 입을 다물고 죄를 고백하지 않았을 때에는 온종일 끊임없는 신음으로 내 뼈가 녹아 내렸습니다"(시 32:3). 또한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우리 삶에 필요한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는 말씀에서 '의'라는 말은 신과의 바른 관계와 사람과의 바른 관계, 자연과의 바른 관계, 즉 신의 목적과 일치하는 관계를 뜻한다. 행복의 법칙이 담긴 이러한 구절들은 정신 상담실에서 지속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의미 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다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사건들의 맹목적인 연쇄가 있을 뿐 의미를 찾을 수 없다. 그런데 성경적 관점으로 보면 모든 일은 의미를 지닌다. 무의미하게 발생하는 사건은 없다. 세계의 창조와 그 종말도, 역사 속에서 일어난 가장 작은 사건과 인간의 삶에서 발생하는 어떤 일도 의미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일은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일어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 또는 "아니오"로 반드시 대답해야 하는 질문을 주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모든 상황에서 영적 투쟁을 하게 하신다.
일단 이러한 사고방식에 눈뜨게 되면, 사람은 인생의 참맛을 발견하게 된다. 모든 것이 가슴이 뛸 정도로 흥미롭게 느껴진다. 어떤 환자가 누군가에게 선물받은 책인데,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며 모리악의 『예수의 생애』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이 책을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아요. 부모님이 살아 계시는 동안에 안정감을 느꼈지만, 그분들이 돌아가신 지금 많은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제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그런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기 위함인 것 같아요." 이처럼 모든 것은 하나님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부르심을 찾는 기회가 된다. 하나님은 멀리 떨어져 계신 접근하기 어려운 우주의 지배자가 아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말씀하시며, 또한 적어도 우리의 모든 상황을 이야기할 때 들으시는 그런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물론 우리가 사물의 참된 의미를 찾아내는 데 있어 결코 실수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의 마음은 참으로 좁고, 지혜는 우둔하며, 우리의 시각도 어둡다. 또한 우리의 귀조차 너무 어두워서 하나님은 종종 집중적인 징표를 통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우시기도 한다. 심지어 그럴 때에도 우리가 이 징표를 이해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므로 사물의 의미를 탐구하려면 경각심이 요구된다.
하나님은 마음으로 이해해야 한다. 겸손을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큰 실수를 하는 위험에 빠지는 때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그 순간이다. 사물의 의미나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은 우리의 실수나 의심을 막아주는 것은 아니며, 우리 운명의 신비나 창조주의 섭리, 또는 삶 속에서 생겨나는 모든 사건들을 해결해주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 삶에 새로운 의미를 준다. 비록 잘못되었다 해도,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노력한다면 보다 더 하나님과 가까워진다고 성경은 말해준다.
나는 환자들에게서 이것을 분명히 느낀다. 회의적인 환자들은 삼중의 고통을 받는다. 질병의 고통과 그 질병이 그들에게 무의미하다는 생각으로 고통스러워한다. 게다가 그들은 질병 때문에 죽을까봐 괴로워한다. 그러나 반대로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의 신앙이 비록 그를 질병에서 해방시키지 못하고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감소시켜 주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 이상으로 열심히 살아간다. 그에게 있어 삶이란 하나님을 찾고 그의 음성을 듣는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에게 매우 풍요로운 경험이 되기 때문에 자신의 질병을 감사하게 된다. 회의론자들은 질문할 것이다. "만일 이 질병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면 당신은 왜 내게 그 질병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기를 원하는 겁니까?" 그의 논박에는 비난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의 승리는 무익하다. 그리고 그의 마음속의 비통함은 그의 회복을 위태롭게 할 것이다.
창조는 우리를 향하신 사랑의 표현사물의 의미에 대한 깨달음을 회복할 때 비로소 자연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순전히 과학적인 관점에서만 자연을 본다면 세계는 비합리적으로 보인다. 비합리적인 세계는 우리의 적처럼 느껴진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추위와 더위, 바람, 비, 태양, 세균, 독극물, 인간, 사회, 심리적 콤플렉스 따위로 마치 적의 군세에 쫓기는 것 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가? 그들은 짜증을 내고, 불평하며, 자신들을 방어하고 두려워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곤혹스러운 상황과 계속되는 위협 아래에서 산다는 말이다. 결국 우리는 이러한 영향으로 육체적 건강과 정신 건강에 초래된 비참한 결과를 보게 되었다.
현대인들은 대부분 자기 운명에 대한 책임감을 잃어버리고 있다. 다시 말해, 외부의 적 앞에서 부득이하게 도망치거나, 그렇지 않으면 외부로부터의 도움을 소극적으로 기다린다. 그가 갖고 있는 이런 잘못된 태도는 주로 과학으로부터 얻은 세계관의 영향이다. 과학은 현대인에게 메커니즘만을 보여 주고, 내적 의미를 보여주지 못한다. 과학은 중력, 화학적 관계, 박테리아, 유전, 그리고 심리적인 합성물을 현대인을 둘러싸고 있거나 현대인 안에서 끊임없이 배회하는 맹목적이고 불변하며, 자동적인 에너지라고 본다. 이러한 일반화된 결정론은 비록 그것이 자신의 몸 안에서 작용될 때조차도 비인격적이고, 외적이며, 이질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것은 끝없는 원인과 결과의 고리일 뿐이다.
그러나 사물의 의미를 탐구하려는 사람들은 이러한 부정적인 모습 배후에 있는 위대한 긍정적 영감, 즉 정의와 사랑, 이해, 그리고 참된 삶에 대한 영감을 느낀다. 그것이 바로 요점이다. 의사인 친구가 어느 날 죽어가는 노부인이 누워있는 병상으로 나를 불렀다. 그녀는 눈에 초점이 없었고 이미 움직이지 않는 사물처럼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태까지 여러 의사들의 손을 거쳤으며 그녀의 심장은 여러 가지 강력한 강심제로 치료를 받아왔다. 동료 의사는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고 부드럽게 말했다. "부인, 당신은 의학만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부인 자신이 있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의사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나는 그에게서 진실로 인간다운 모습을 보았다. 의학의 모든 기술적인 진보에도 불구하고 위대하며 언제나 변하지 않는 근본적 진리로 그녀를 불러들였다. 그 부인은 놀란 모습으로 이 의사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를 심장병 환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 대해 준 최초의 의사였다. 그녀는 자신의 수동적인 태도에서 깨어나기 시작했고, 다시 한번 질병과의 싸움에서 자기가 맡은 역할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녀는 그 말 한마디로 한 사람의 인간이 된 것이다.
카렐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과학은 일상생활의 어려움과 불편함을 기적적으로 없애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러한 한계가 요구하였던 창조적이고 인격적인 노력도 함께 사라지게 했다." 청년 의사 시절에 나는 치료학 교수 위키 박사의 조수였는데, 그분은 늘상 이렇게 말했다. "만일 그 약이 해가 없다는 말을 듣는다면, 그것은 또한 아무런 치료효과도 없다는 말로 생각해도 좋다."
의술과 자연, 적인가 동지인가?처방이나 주사, 수술 등 여러 가지 기술 의학에 반대하는 자연주의자, 동종요법파, 신히포크라테스 학파가 있다. 기술 의학은 자연을 우리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수단으로 생각하여 공격하고 지배해야 하는 적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이 학파들은 인간을 자연과 유기적으로 결부시키는 감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