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유진 피터슨 지음 | 청림출판
제1부 부활의 경이
1장 부활이 신앙생활의 중심이다.언젠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제3세계 지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서구의 국가들에서 발전의 모델을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만들 줄은 알지만 그 만든 것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모릅니다. 그들은 지적으로 고도의 기술을 갖게 되었지만, 정작 자녀를 기르는 법은 잊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을 저술하게 된 정황이다. 이런저런 것들을 확보하고 만들어내는 데는 분주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영혼에는 무관심한 문화가 지금 우리의 문화다. 영성형성, 곧 성령의 도움을 통해 '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삶'을 사는 것은 교회가 감당해야 할 큰 책임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대부분 교회는 이 책임을 소홀히 여기고 있다.
영성을 위한 프로그램들은 차고 넘치지만, 대개는 다른 중요한 일들의 언저리에 놓여 피상적인 것으로 그치는 일이 많다. 오히려 교회보다는 뉴에이지 영성이나 심리적 자기 계발 같은 세속적 흐름들이 영성 훈련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성에 대한 이 세상의 교사나 안내자들의 관심이 아무리 멋지다 해도 이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 없이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자리에 남겨둔 채 이루어지는 것들이다. 결과적으로 가장 중요한 요소, 곧 부활이 빠지고 만다.
내가 굳게 믿는 바는 교회는 하나님이 이 세상의 중심을 바로 잡기 위해 이 세상 중심에 세워놓으신 공동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중심 잡기의 중요한 한 차원을 영성 형성이라 부를 수 있다. 곧 일생에 걸쳐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형성해가는 과정이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매우 시급한 사안에 속한다. 우리 주변의 문화가 영성 형성의 개념을 끊임없이 세속화시키고 있는 상황 때문에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내가 속하여 살아가고, 글 쓰고, 가르치고 하는 교회조차 주변 문화와 대항하기는커녕 오히려 동질화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영성'에 관한 관심은 대단하지만, 이런 관심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성 형성과 함께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것은 길고도 복잡한 매일 매일의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영성 형성은, 마음의 태도나 습관을 훈련함으로써, 그저 하나의 희망, 욕구, 공상 혹은 기분 전환 거리에 지나지 않던 영성이라는 말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실제적 삶으로 바꾸어가는 과정을 말한다.
이 책을 통해 내가 시도하려는 것은 부활이라는 중심을 회복하고, 이 부활의 터전에서 자라나는 영성 형성의 전통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는 예수님의 부활이 가진 세 가지 차원들을 차례로 다룰 것이다. 이것은 부활을 살아가는 신앙에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주고, 우리에게 필요한 힘을 제공해줄 것이다. 그리고 부활의 삶을 우리 문화에 깃든 일반적인 습관이나 전제들, 곧 우리로 하여금 부활을 잊게 하고 그냥 지나치게 만드는 것들과 비교해보고자 한다. 나는 이것을 '부활의 해체'라고 부를 것이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하면 부활을 실천하는 삶을 살 수 있을지 실제적인 방법들을 제안하고자 한다. 그것은 합당하고 책임 있는 모습으로 그리스도께서 살아 다스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2장 복음서에 나타난 부활 이야기우리가 읽는 사복음서들은 모두 예수님의 복음에 관한 기록을 부활 이야기로 끝맺고 있다. 부활로 이어지는 구체적인 과정이 모두 다르고, 부활 이야기에도 소소한 차이들이 있지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한 가지가 있다. 곧 경이로움, 충격, 놀라움의 요소다. 구약 성경 여기저기에 몇 가지 암시가 있고, 또 세 번에 걸쳐 명시적으로 언급되었지만, 막상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는 아무도, 정말 아무도, 그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최초로 얽혀 들어간 이들은 모두 그분의 죽음을 수습하는 데 깊이 관여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180도 태도를 바꾸어 죽음 아닌 생명을 수습해야 한다. 그들이 놀라움에 사로잡힌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마태복음에는 일요일 아침 일찍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찾는 이야기로 부활사건이 시작되고 있다. 그들이 무덤에 가까이 갔을 때 갑자기 땅이 흔들렸다. 지진이었다. 이어서 번개가 번쩍했는데, 알고 보니 천사였다. 로마 병사들은 지진이 나고 번개가 치자 잔뜩 겁에 질린 채 두려움에 떨었다. 그들은 마치 죽은 것처럼 땅에 바짝 엎드러지고 말았다.
하지만 여인들은 넘어지지 않고 서서, 천사가 직접 그들에게 건네는 두 마디 말을 들었다. "두려워 말라"는 것과 "그가 살아나셨다"는 것이었다. 너무 놀랍고 기쁜 마음으로 이 소식을 어서 빨리 제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달리고 달렸다. 그런데 도중에 길을 막고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 있었다. "잘 있었느냐?" 그 인사에는 반가움이 묻어 있었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앞에 그들이 보인 첫 반응은 경외하는 마음으로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어느 정도의 친밀함도 담겨 있었다. 감히 예수를 만지고 또 그의 발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그들은 그분에게 "경배"하였다.
놀라서 까무러친 로마 병사들과 환희에 넘치는 두 여인의 대조적인 모습은 내게 너무나 인상적이다. '두려움', 하지만 같은 두려움은 아니다. 병사들의 두려움은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두려움인 반면 여인들이 느낀 두려움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감정, 주변 상황에 집착하고 있는 자신을 끌어내어 경이의 세계로 이끄는 것이었다. 곧 자신을 자신 밖으로 끄집어내어 하나님의 행위 한가운데로 인도하는 것이다.
마가는 주일 아침 무덤을 방문한 사람들의 목록에 마태가 언급한 두 명의 마리아 외에 살로메라는 여인을 추가하고 있다. 그리고 부활의 경이로움을 더 강렬하게 만드는 몇몇 세부 사항들을 덧붙인다. 마가는 이 세 여인들이 무엇을 할지 미리 준비하고 왔다는 것을 알려준다. 예수님의 몸에 향료를 바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무덤에 가까워지면서 그들은 한 가지 문제로 심각하게 고심하게 된다. 어떻게 무덤 안으로 들어가 향료를 바를 것인가 하는 것이다. 무덤 입구는 아주 큰 돌로 막혀 있는데 약한 자신들이 그 돌을 옮긴다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막상 무덤에 도착해보니 돌이 한쪽으로 굴려져 있는 게 아닌가? 아주 큰 문제를 해결해야 할 줄 알고 왔는데 정작 도착해보니 아무 문제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향료를 바르는 매우 중요하고 요긴한 일을 하리라 생각했는데 정작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의 놀라움은 무덤 안으로 들어갔을 때 다시금 증폭된다. 한 청년이 거기 앉아서 여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여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뒷걸음을 친다. 그러나 그 청년은 여인들을 안심시키며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말하고 제자들에게 전할 메시지를 알려준다. 마가는 이처럼 투박하고 간결하게 마가복음을 마치면서 여인들이 느낀 엄청난 놀라움을 더욱 강하게 드러낸다.
누가는 부활 기사의 첫 장면에 두 명의 마리아와 살로메 외에도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다른 여인들을 함께 등장시킨다. 누가는 여기에 네 번째 여인을 추가로 소개하고 있는데 바로 요안나다. 이들은 장례를 위해 예수의 시신에 바를 향품을 들고 나타난다. 그러나 무덤에는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소중히 여겼고, 그 죽음을 애도했던 분에게 마지막 사랑 깊은 섬김을 표현할 준비를 끝마쳤는데 그들에게 벌어진 상황은 예상과 너무나 달랐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바로 그때 그들 앞에 두 남자가 나타났다. 그들의 옷에서는 밝은 빛이 흘러나왔다. 천사들임에 틀림없다. 여인들은 너무 겁에 질려 엎드러졌다. 무덤 안에 선 두 사람은 그들을 안심시키며 이렇게 말한다. "살아 계신 분을 왜 무덤 안에서 찾고 있습니까?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습니다. 그가 이전 갈릴리에 계실 때 자신이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고 삼일 만에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지 못합니까?"
물론 여인들은 그 말씀을 분명히 들었고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결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이해는 되지만 그들은 분명히 방향을 잘못 잡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천사들이 전해준 말을 통해 그 말만큼이나 엄연한 현실을 인식하게 된다.
누가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덧붙인다. 이 부활의 경이로운 장면에 남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베드로를 등장시킨 것이다. 모든 제자들이 한 결 같이 여인들의 말을 믿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누가는 베드로가 벌떡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갔다고 말한다.
우리가 실재를 다루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이해하는 것과 활용하는 것이다. 이해한다는 것은 새로운 체험이나 지식의 단편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다른 모든 것들과 맞추어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활용한다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나 정보가 실제 삶 속에서 어떻게 쓰일 수 있는지 또는 쓰여야 하는지 검증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이 중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부활을 인식하는 데서 이해와 활용은 경이로움과 경악과 놀라움 등으로 대치되고 있다. 처음엔 여인들이 그랬고, 이제는 베드로도 당황하고 있다. 여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목격한 상황에 당혹스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은 종종 그렇듯이, 다른 복음서 기자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부활의 경이로움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린다. 그는 주일 새벽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도착하는 장면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녀는 자신이 목격한 상황을 완전히 오해하고 만다. 무덤이 빈 것을 보고는, 어쩌면 당연하다 싶은 결론을 성급히 내린 것이다.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다는 것이다.
마리아는 이를 알리기 위해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에게 달려간다. 아마 요한이었을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즉시 일어나 무덤을 향해 달려간다. 그들은 무덤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무덤이 정말 비었다는 것을 확인한 뒤 마리아와는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린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그들이 이런 결론까지 이른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나중에야 분명해진 사실이지만, 요한은 사소해 보이지만 매우 중요한 단서 하나를 포착한다. 예수님의 머리를 감았던 수건이 몸을 감싸고 있던 천들과 따로 놓여 있었다는 것이다.
요한은 특유의 탐정다운 명민함으로 도굴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추론한다. 시체를 훔치는 자들이 수건을 일부러 풀었을 리는 없다. 설사 무슨 이상한 습성이 있어 수건을 풀었다 하더라도 차분하게 접어 한 곳에 놓아두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요한은, 놀라울 만큼 침착한 논리로, 그 순간의 감정을 다스리며 그 한 가지 단서의 중요성에 주목함으로써 결국 사실로 밝혀지게 될 결론을 이끌어냈다. 바로 부활이었다.
부활에 관한 이 네 이야기를 묵상하노라면, 부활에 대한 경이로움은 더욱 더 커진다. 이 경이로움은 점점 축적되고 점점 높이를 더하는 그런 종류의 느낌이다. 이들 네 이야기들은 간결하고, 축약되어 있으며, 매우 효과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여기에는 어떤 화려한 문체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이처럼 간결한 이야기에서도 몇 가지 분명한 사실이 드러난다. 우리의 영성 형성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사실들이다.
3장 부활이 신앙생활의 중심이다.영성 형성은 부활의 분위기 속에서 이뤄진다. 부활의 분위기란 또 다른 무언가가 있는 상황이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의 핵심을 간파하지 못하는 불안감을 감수하려는 자세, 놀람으로 인해 갖게 되는 경외심과 같은 반응을 일궈내야만 하는 상황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영성이 형성되는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선택은 압도적 경외감으로 이에 응답하는 법을 배우거나 혹은 사태의 핵심을 놓치는 위험을 감수하거나 둘 중 하나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관한 표현들이 겉만 그럴듯한 상투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다. 하지만 부활의 이야기에는 경이감이 스며들어 있다. 그래서 부활이 경이로운 것이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들로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해본 다섯 가지 다양한 요소들, 곧 예측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 전문가들이 있을 수 없다는 점, 소외된 인물들이 두드러진 역할을 한다는 점, 조용하면서도 일상을 벗어나는 면이 있다는 점, 두려움 등은 우리가 경험하는 경이감이라는 직물을 촘촘하게 짜고 있는 씨실과 날실이다. 여기서는 우리의 기대대로 움직이는 것이 하나도 없다. 특히 우리가 스스로 중요한 것, 삶을 바꿀 만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내가 확신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이 영성 형성의 중심이라면, 이 과정을 규정하는 가장 큰 요소 중 하나는 경이로움의 느낌이다. 우리는 영문을 모르고, 경악하고, 놀란다. 지금 바로 이곳에서, 예수 안에서, 당신 안에서, 그리고 나 자신 안에서 하나님은 일하고 계시는 것이다.
4장 일터에 계신 하나님일터야말로 영성 형성에 있어서 가장 큰 위협이 되어왔다. 우리가 경이감을 별로 느끼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경이감은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다. 일터에서는 우리가 유능하게 일을 잘하고 있든지, 아니면 지루해하거나 산만해 있든지 둘 중 하나다. 더구나 오늘날과 같은 문화에서는 우리 삶에 경이감이 사라진다는 사실이 함축하고 있는 위험성이 예전보다 훨씬 더 심각한 수준으로 다가오고 있다.
기독교적 조성 곧 영성 형성이 끊임없는 부지런함을 요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일터는 우리가 우상숭배와 격투를 벌이는 경기장과 같다. 여기서 우상숭배라는 적은 늘 새로운 형태로 우리를 통제하기 위해 기술과 전략을 발휘할 수 있는 물건과 시스템을 제공해준다. 그럼으로써 끊임없이 자기 위상을 높이는 것이다. 경이감, 곧 깜짝 놀라 선뜻 하던 일을 멈추고, 가만히 서서 활짝 열린 눈과 벌린 손으로 '예상을 넘어서는, 예상과 다른 것'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자세는 그런 일터에서는 생기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하는 동안에는 영성 형성의 과정을 멈추었다가 일을 마친 후나 주말에 다시 그것을 시작해야 한다는 말인가? 물론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여기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이 있다. 예수님의 부활 장면이 다름 아닌 일터를 배경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은 일을 하러 가는 도중에 예수님의 부활과 마주쳤고 그 부활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감히 부활에 의한 영성 형성의 일차적 무대는 바로 우리 일터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의 일터에서 일하고 계신다. 이것을 볼 수 있고 이것에 대해 경이감으로 반응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일터로부터 어느 정도 마음의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마음의 거리를 확보할 수 있을까? 바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과 분리하여 안식일의 성격과 의미를 이해할 수는 없다. 안식과 일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안식과 일은 유기적으로 엮어진 전체의 부분들이다. 둘 중 어느 것도 다른 하나로부터 분리되는 순간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우리의 일 속에는 일 이상의 의미가 있다. 곧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다. 일을 완성하신 하나님, 쉼을 즐기는 하나님, 복을 내리는 하나님,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이다. 일터가 우리 삶의 전부일 수는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