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일과 신앙의 조화
팻 겔싱어 지음 | W미디어
제1장
나의 간증나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부모님은 농사를 지으셨고, 아버지는 아홉 형제 중 일곱째였다. 아버지의 형제들은 성년이 되어 혼기에 이르면서 할아버지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아 독립적인 농장을 시작했다. 일곱째인 우리 아버지 차례가 되었고, 할아버지는 "얘야, 너는 네가 알아서 해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아버지는 형들의 농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농장에는 언제나 할 일이 넘쳤다. 그러나 내 사촌들이 성년이 되자 삼촌들 농장에서 아버지의 역할이 줄어들었다. 나도 농장에서 일했는데, 만약 아버지가 농장을 구입했었다면 나는 이날까지 그곳에서 아버지와 함께 일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아버지는 삼촌들과 함께 농장에서 일하는 한편, 마을의 철강공장에서도 일했고, 나중에는 마을의 도로 건설과 유지를 감독하는 관리인의 일까지 맡았다. 아버지는 가족에게 자신이 자라던 때보다 더 나은 생활환경을 마련해 주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가족과 가까운 친척들은 매주 인근 워너스빌에 있는 그리스도연합교회(UCC)에 다녔는데, 나는 생후 6일째 되는 날 세례를 받았고, 열두 살 되던 해 입교식을 치렀으며, 열네 살에 청년부 회장이 되었다. 겉으로는 어느 모로 보나 모범적인 크리스천 청년이었으나, 실상은 이와는 거리가 멀었는데, 열일곱 살이 됐을 때 나는 이미 그 또래가 빠지기 쉬운 여러 가지 유혹에 빠져 들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나를 보살펴 주셨고, 그 분은 나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기 시작하셨다. 아버지가 자신의 농장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장차 농부가 되지는 않겠다고 마음을 정한 뒤 이런저런 대안들을 생각해 보다가 전자공학을 공부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2학년부터 3학년까지 오후에 버크스 직업기술학교에 다녔다. 내가 우연히 링컨 전문대 전자공학 부문 장학생 선발시험에 응시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 시험은 고등학교 4학년 학생들을 위한 것이었지만, 나는 3학년 때 응시해 2년간 전액 장학금을 따냈다.
장학금과 더 큰 도전에 대한 기대를 품고 나는 고등학교 마지막 1년을 건너뛰고 링컨 전문대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졸업을 위해 기초수학, 영어, 역사 수업은 근처에 있는 레이 밸리 전문대에서 야간에 들었고, 아르바이트도 했다. 이수과정을 단축하기 위해 수강시간을 늘리고, 저녁 수업을 듣는 것도 모자라 밤과 주말에 아르바이트까지 했으니 '저글러'로서의 내 생활은 어떻게 보면 이 때 이미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링컨 전문대에서 컴퓨터를 처음 접하고는 완전히 매료되어, 내가 갖고 있거나 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그 분야에 집중 투자했다. 그리고 링컨 전문대 마지막 학기 때 전자공학 테크니션으로 일하기 위해 면접을 보기 시작했다. 동부로 테크니션을 모집하러 온 서부의 인텔이라는 회사에 면접을 보기로 했고, 나는 당시 인텔의 기술이사였던 론 J.스미스에게 면접을 보았다. 스미스는 나에 대한 소감을 '약간 건방지지만 매우 적극적이고 똑똑함 - 적임자로 사료됨'이라고 적었다고 한다. 인텔이 링컨 전문대로 신입사원을 모집하러 온 것은 오직 그 해뿐이었다. 즉 그것은 내 인생에 몇 차례 있었던 하나님이 내리신 놀라운 우연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나는 1979년 6월에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8월에는 링컨 전문대에서 수석으로 준학사 학위 과정을 마쳤으며, 10월에는 인텔에서 일하기 위해 캘리포니아 주로 떠났다. 굉장한 한 해였다.
캘리포니아로 가다내가 캘리포니아 주에서 아는 사람은 나와 같은 시기에 인텔에 입사한 링컨 전문대 출신 청년 두 명뿐이었다. 그래서 같이 집을 얻어 살자는 그들의 제안을 쉽게 받아들였다. 짐작이 가는 일이겠지만 총각 셋 - 나와 잭과 밥 - 이 사는 이 집에 영성(靈性)이 자리 잡을 곳은 없었다. 캘리포니아 주에 도착한 지 얼마 안돼서, 잭이 내 1966년형 시보레 벨에어를 새로 도장하라고 권했다. 우리는 내 차에 페인트칠을 했고, 나는 캘리포니아 주에서 살기 시작한 첫 주일에 차를 쓸 수 없었다. 그래서 고향에서 다니던 UCC 교회를 찾아보는 대신 제일 가까운 교회에 걸어서 가기로 마음먹었는데, 바로 산타클라라 교회였다. 그 교회에서 첫 번째 예배가 끝나고 그곳의 여자 교인 카렌과 린다가 처음 온 나를 보고 인사하러 왔다. 나는 그 바보 같은 여고생 두 명에게 전혀 호감이 가지 않았다. 나도 그녀에게 호감을 주지 못했는데, 린다는 나를 잘난 체하는 건방진 애송이로 보았다.
이것도 하나님이 만드신 우연 중 하나였다. 나와 룸메이트들은 그다지 가정적이지는 않았지만 추수감사절에 친구 몇 명을 집에 초대하기로 했고 나는 린다를 초대했다. 식사와 설거지가 끝난 뒤, 린다와 나는 집 근처를 산책했다. 산책을 끝내고 집에 돌아왔을 때, 잭과 밥, 그리고 다른 손님들이 거실에서 이상한 향을 내뿜는 물건을 가운데 두고 모여 있었는데, 린다가 그들이 뭘 하고 있는지 물어,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물파이프로 마리화나를 피우는 거야"라고 말했다.
그 후 그녀는 다시 우리 집에 오지 않았고, 내게 새 룸메이트를 구하라고 계속 다그쳤다. 아울러 그녀는 나를 본격적으로 하나님 앞으로 이끌기 시작했다. 결국 산타클라라 교회에 규칙적으로 나갔고 청년부 활동에 참가하면서 일요일을 제외한 나머지 6일 동안의 내 생활에 대해 점점 더 죄책감을 갖게 되었다. 나는 나 자신이 크리스천이라고 믿었고, 린다와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도 않았고, 그분에 대한 믿음도 없었다. 마음속에 이런 자각이 일면서 나는 믿음의 첫 걸음을 내디뎠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자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내 죄를 깨닫고 뉘우치며, 새로운 생활을 추구하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세례를 받았다. 1980년 2월은 내가 거듭난 날, 바로 내 영적인 생일이다.
내가 거듭난 다음 주 어느 날 여느 때처럼 구내식당으로 가던 중에 한 남자가 내게 다가와, "안녕하세요? 밥 매튜스라고 합니다"라고 자기를 소개를 하고, 그는 곧바로 하나님이 자신을 내 룸메이트가 되도록 인도하셨다고 말했다. 밥은 독실한 크리스천이었고, 조용하고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당시 내 룸메이트로는 적격이었다. 린다와 다른 기도 전사들의 기도가 응답을 받은 것이었다. 새로 찾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캘리포니아 주에서 일어난 내 인생의 큰 변화 중 첫째 변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학교내가 인텔에서 처음 일하기 시작한 곳은 마이크로프로세서 부서의 Q&A 파트였고, 출근 첫날 데이비드는 내가 할 일을 설명했다. 실험실 탁자에 앉아 데이비드의 말을 들으면서 내 마음 속에는 내가 직장에서 추구할 목표가 떠올랐다. 그것은 그 탁자의 반대편에 앉는 것이었다. 나는 여가시간 전부를 일에 쏟아 부었다. 내가 인텔에 입사한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공부를 계속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회사의 정책과 내게 유동적인 근무시간을 허락해준 상사 덕분에 나는 1980년 3월 산타클라라 대학교에서 풀타임으로 공부를 시작했고, 그곳에서 3년간 열심히 공부한 끝에 전기공학 학사과정을 마쳤으며, 그 후 곧바로 스탠포드 대학교에 입학해 1985년 6월에는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로부터 1년 후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6년이 넘는 이 기간 동안 나는 하루에 잠을 4~5시간만 자는 생활에 익숙해 있었다. 하나님이 주신 넘치는 에너지 덕분이었다. 학교와 인텔에서의 생활로 캘리포니아 주에서 일어난 내 인생의 큰 변화 중에 둘째 변화가 진행되었다.
린다1979년 10월 캘리포니아 주로 이사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크리스마스가 됐을 때의 일이다. 나는 크리스마스이브에 린다와 그녀의 어머니 셜리, 그리고 할머니 크리스텐센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 초대받아, 그날 저녁 우리는 모두의 기대를 뛰어넘는 좋은 시간을 보냈다. 맛있는 식사를 하면서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고, 여러 가지 게임도 했다. 나는 특히 린다의 할머니와 마음이 잘 통했다. 린다의 할머니는 내가 그 집 현관문을 나서자마자, 린다에게 다가가 "바로 저 사람이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린다와 내가 좀 더 자주 만나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어머니까지 "바로 저 사람"이라며 할머니의 의견에 동조했다. 하지만 그녀가 나에 대해 확신을 가지기까지는 2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당시 나는 린다가 점점 좋아지고는 있었지만, 그녀에게 내 목표와 의지를 확실하게 밝혀둘 필요가 있었다. 린다는 그런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시 일을 시작하셨다. 린다는 수년 동안 자궁내막증을 앓고 있었다. 린다는 우리가 데이트를 시작한 지 1년 반 정도 됐을 때 수술을 받아 한쪽 난소는 완전히 들어냈고, 다른 쪽 난소도 부분적으로 제거해야 했다. 그러자 의사는 그녀에게 아이를 가질 생각이라면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1981년 6월, 린다가 나를 자기 아파트로 불렀다. 린다는 의학 책들을 펼치면서 이번 수술로 자신의 몸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설명하며 의사가 그녀에게 한 말을 모두 전해주었다. 나는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다. 그 때는 이미 내가 린다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두려운 마음 반, 그리고 당장 대답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반으로, 가을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대답을 하겠다고 말했고, 나는 그 해 여름 내내 이 문제를 껴안고 고민해야 했다.
몇 달간의 숙고와 기도 끝에 나는 결론을 내렸다. 가을 학기가 시작되기 바로 전 주에 린다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고, 저녁을 먹은 후, 그녀를 내 아파트로 데려갔다. 집에는 그녀에게 줄 장미 열두 송이를 미리 준비해 놓았었다. 마침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들은 나는 그녀에게 나와 결혼해 주겠느냐고 물었고, 그녀는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채 분명하고 큰 목소리로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결혼한 지 딱 3개월 만에 린다의 남아있던 한쪽 난소 일부와 병과 수술로 만신창이가 된 생식기관에 우리의 첫 아이가 들어섰다. 우리는 첫 딸의 이름을 엘리자베스라고 지었다.
한 사람이 테니스 공 세 개를 가지고 저글링을 한다고 생각해 보라. 그 공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을, 다른 하나는 가족을, 나머지 하나는 일을 상징한다. 그게 바로 내 인생이었다. 나는 그 공 가운데 어느 하나도 땅에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잠시도 멈추거나 쉴 시간이 없었다. 만약 내가 지쳐서 잠시라도 멈춘다면 한 개, 혹은 그 이상의 공이 땅에 떨어졌을 것이다. 약간의 어려움을 겪기는 했지만 다음 몇 해 동안 린다는 둘째와 셋째, 그리고 넷째 아이를 가졌다. 잠깐 저글링 얘기로 돌아가면 이제 아이가 넷이나 되는 가족을 거느린 나는 가족을 상징하던 테니스 공을 소프트볼로 바꿨다. 점점 더 요구가 많아지는 크기가 다른 공들을 저글링하기란 갈수록 어려운 일이었다.
인텔인텔에서의 내 경력도 생각 이상으로 잘 풀렸다. Q&A 파트에서 테크니션으로 일할 때 프로그래밍 작업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품질과 신뢰성에 관한 인텔의 사후 접근 시스템이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내 생각에는 칩이 설계된 후에 품질을 테스트하는 것보다 신뢰성과 테스트 기능을 아예 칩에 내장하면 더 좋을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칩에 테스트 기능과 자가 테스트 회로를 넣어서 설계하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이 생각이 일리가 있다고 인정받아 80286 칩 설계팀과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설계팀에 합류한 뒤 80286 설계의 마무리 작업으로 경험을 쌓았고, 그런 다음 80386 설계팀에서 4순위 엔지니어가 됐다.
낮에는 산타클라라 대학교와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칩 설계를 배웠고, 밤에는 업계에서 가장 중요한 칩들을 실제로 설계했다. 80386 설계팀에 합류하고 나서 1년 뒤에 나는 스키마(결선) 설계를 맡고 있는 테크니션 두 명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그 뒤 나는 칩의 일부인 명령 해독기를 일정보다 훨씬 빨리 완성했고, 그 다음엔 메인 데이터 패스를 설계하는 둘째 과제를 받았다. 이 부분도 완성하고 나서 셋째 과제인 프로텍션과 테스트 로직 설계에 착수했다. 그리고 최종 조립과 '테이프아웃(tapeout)'을 책임지게 되었다. 마침내 80386의 테이프아웃과 디버그가 끝나자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갔고, 나는 80486의 원 설계자로 발탁됐다. 지구상에서 가장 중요한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차세대 제품을 개발하는 1순위 연구원이 된 것이다.
나는 15년 동안 매년 고속승진을 하여, 서른 두 살에 회사 역사상 최연소 부사장으로 승진하는 영광을 얻었다. 또 연간 수백억 달러의 수입을 올리는 회사 최대의 사업본부인 데스크톱 사업본부의 본부장이라는 중책도 맡았다. 서른다섯 살에는 본사의 임원이 되어 인텔의 최고 경영체인 임원회에 합류했고, 그런 다음에는 본사 부사장 겸 주요사업 그룹의 CTO가 되었으며, 2001년에는 인텔 본사 최초의 CTO가 되었다. 그때 내 나이 겨우 마흔 살이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물론 하나님의 손길이 크게 작용했지만, 회사에도 감사 표시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잠깐 저글러의 얘기로 돌아가 보자. 지난번까지 테니스 공 한 개는 직장을, 다른 한 개는 하나님을 상징했고, 가족을 상징하는 공은 이미 소프트볼 크기의 공으로 바꿨다. 이제 직장을 상징하는 공도 테니스공에서 축구공으로 바꿔야 할 형편이 됐다.
교회내 시간의 대부분은 가족과 학교, 직장을 위해 쓰였지만, 린다와 나는 언제나 교회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나중에 내 사명 선언서에서 보면 알겠지만 나는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장로가 되는 일'을 목표로 정했었다. 그것을 쓸 때에는 내가 나이 들고 현명해졌을 때인 쉰 살쯤에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오래 전에 써놓았던 그 목표에 대해 하나님이 신호를 보내고 계셨고, 몇 달 후 나는 장로가 되었으며, 현재 나는 오리건 주 힐스보로에 있는 싱잉 힐스 교회에서 6년째 장로로 일하고 있다.
맺는말이 장을 끝내기 전에 저글러의 얘기로 다시 한 번 돌아가려고 한다. 지난번까지는 가정은 소프트볼, 직장은 축구공, 하나님은 테니스 공으로 상징됐다. 그러나 이제 아이들이 10대가 되고 보니 가정을 상징하는 공을 다시 바꿔야겠다. 10대들은 좀 기묘한 데가 있어서 모양이 독특한 럭비공이 더 적당할 것 같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은 테니스공, 가정은 럭비공, 직장은 축구공 이런 조합으로 저글링을 하게 됐다. 저글링은 최상의 상황에서도 매우 어려운 기술이다. 하물며 모양이 이상하고 크기가 더 큰 공이 섞여 있을 때는 정말 어려워진다.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뒤에 이어지는 7개 장의 실질적인 조언이 도움이 될 것이다.
제2장
개인 사명 선언서사람들은 대개 다른 분야에서는 계획을 세우느라 많은 정력을 쏟는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한정된 우리 자신의 자원인 타고 난 재능과 시간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나는 32세에 회사 역사상 최연소 부사장에 오르면서, 갑자기 '여생에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질문과 씨름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몇 권의 책을 읽으면서 우연히 개인 사명 선언서를 작성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명 선언서를 작성하려면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기도가 필요하다. 여러분이 개인 사명 선언서를 작성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에서 나 자신의 선언서를 발췌해 소개한다. 이것은 내가 성취한 것에 대한 선언이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