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손
옥성석 지음 | 국제제자훈련원
1장 삼손의 복음서사사기 13장을 보자.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삼손이다. 성경은 그가 태어날 때의 상황을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을 보면 삼손은 결코 우연히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와 뜻 가운데서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이 아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도 말씀하신다.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란 어떤 존재일까? 레위기 6장을 보면 '나실인'은 세상 사람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도록 '부름받은 자'를 말한다. 그래서 저들은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않았고, 머리도 깎지 않았으며, 또 시체나 그 밖의 부정한 것도 만지지 않았다. 삼손이 살았던 사사 시대는 죄악과 혼돈의 시대, 즉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져 버린 때였다. 법도 양심도 없었다. 모두가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행했다. 바로 이러한 시대에 '나실인', 즉 저들과는 다른 구별된 삶을 살도록 택함을 받고 태어난 사람이 바로 삼손이다. 이렇게 볼 때 '나실인 삼손'은 하나님의 영적인 자녀로 거듭난 우리 모두의 '그림자'라 할 것이다.
삼손이 태어났을 때, 하나님은 크게 기뻐하셨다.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감동하셨고 성령이 그와 함께하셨다. 삼손의 엄청난 힘의 근원은 하나님의 영, 즉 하나님 자신이었다.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그 순간, 우리는 '가장 강한 사람' 바로 삼손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삼손의 스토리는 의외로 실패와 상처투성이의 인생 이야기다. 넘어지고 흔들리는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들릴라라는 여인의 무릎에 누워 머리가 빡빡 깎기는 삼손, 그래서 원수들에게 붙잡혀 눈까지 뽑힌 뒤 비참하게 짐승처럼 맷돌을 갈고 있는 모습. 이런 스토리들로 인해, 삼손에 대한 일반적인 선입견은 대단히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에 대한 지금까지의 선입견을 잠시 유보하고, 성경이 삼손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살펴보자. 아니,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보시는가를 주목해 봐야 한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이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믿음의 반열에 삼손이 당당히 언급되고 있다. 기드온, 다윗, 사무엘과 같은 믿음의 사람들과 같은 위치에 그를 올려놓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자세히 보아도 삼손을 예외로 취급하고 있지 않다. 기이한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의 약점들을 언급하지도 않으며 더 나아가 삼손이 여타 다른 믿음의 조상들보다 부족하다는 뉘앙스도 전혀 풍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선한 충격이다. 따라서 우리도 지금까지의 삼손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하나님의 시선으로 삼손을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왜 하필이면 삼손을 믿음의 반열에 올려놓으셨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삼손 스토리를 통해서 성령께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시는지 발견해야 한다.
나실인으로 태어나 하나님의 복을 받은 그가, 한때 성령에 충만했던 그가, 힘이 최고였던 그가 아무런 실패 없이 완벽하게 성공한 영웅의 삶을 살았다면 이 삼손 스토리는 오늘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삶과는 그 어떤 접촉점도 없기에 감동도, 도전도, 용기도 주지 못할 것이다. 삼손은 실패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실패자까지도 용서해 주시고, 기다려 주시고, 덮어 주시고, 그의 부르짖는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삼손 스토리의 마지막은 놀라운 회복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이야기를 구약의 복음서, 아니 삼손의 복음서라고 부르고 싶다. 이처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이 풍성히 나타난 기록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성경을 펼치는 사람은 누구든지 성경 속의 사람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 사람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성경은 완벽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성공한 사람들, 힘이 센 영웅들의 이야기도 아니다. 성경은 실패하여 쓰러진 사람들이 다시 일어서고, 회복되어지는 이야기이다. 즉 실패한 사람들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일깨워 주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삼손에게서 꼭 하나 배워야 할 것이 있다. 실패했다고 결코 포기하지 않는 자세이다. 그는 최후의 순간에도 성전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을 부여잡고 기도했다. 실패할 때에 영적 도해를 잘해야 한다. 지금 당신 안에 약점, 한계, 아픔이 있는가? 하지만 그 속에 성령께서도 함께하심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분은 가장 강하신 분이다. 삼손 드라마는 결국 누가 이겼느냐의 이야기다. 최후의 승리자는 하나님이 함께하신 삼손이었다. 그가 강할 때, 그래서 자신의 힘을 의지할 때 그는 어이없이 실패했으나, 실패한 이후의 삶에서 자신의 실패와 약함으로 지금까지의 그 실패를 일거에 만회하게 된다.
미래의 경영자들에게 있어서도 실패보다 더 중요한 자산은 없다. 경영 사상가인 톰 피터스의 '실패 예찬론'에 따르면 "우리에겐 훨씬 더 많은 실패와 보다 빠른 실패가 필요하다. 우리가 국민 총 실패율을 높일 수 없다면 우리는 매우 어려운 상태에 처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실제로 경제의 가장 밝은 지표는 실패의 증가다. 오늘과 같은 변화와 혁신의 시대에는 실패율을 높이는 것, 즉 보다 많은 실패를 보다 빠르게 하는 것이 결국 성공확률을 높이는 것이다."
2장 삼손만 같아라사사기 14장은 삼손의 부도덕한 행동들을 적나라하게 노출하고 있다. 첫째, 그는 이방 나라, 그것도 원수 나라인 블레셋의 한 여자를 위해 아내로 삼으려 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 특히 나실인으로서는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었다. 둘째, 부모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있다. 셋째, 블레셋 아내의 강권에 못 이겨 자기가 낸 수수께끼의 답을 알려줘 버린다. 넷째, 아스글론이라는 곳에 내려가 그곳 사람들 삼십 명을 쳐 죽였다. 다섯 째, 수수께끼 게임으로 화가 났기 때문인지 갓 결혼한 아내를 버려두므로, 그의 장인이 삼손 아내를 삼손의 친구에게 줘 버리는 실수를 하게 만든다. 한때 삼손의 아내였던 이 여인은 삼손을 얼마나 원망하며 살았겠는가. 이 모든 행동이 성경의 가르침과는 상반된 행동들이다.
그러나 지금 다루려는 주제는 '삼손만 같아라'이다.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꼭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무대 위의 사람 혹은 그 사건이 아니라 그 사람을 쓰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 사건 뒤에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모든 것을 컨트롤하시는 분이 계시다. 그 분을 보며 그분의 뜻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삼손이 한 행동들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요는 표면 위에 나타난 일련의 행동을 도덕적인 잣대를 가지고 판단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결혼에 관련하여 삼손은 부모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뜻을 꺾지 않고 막무가내로 행동한다. 그런데 이런 삼손의 행동 뒤에는 누구의 뜻과 의지가 작용하고 있었다고 성경은 밝히고 있는가?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삿 14:4).
사사 시대의 특징은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가 다 자신들의 기분, 즉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시대에 유일하게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는 자가 있다. 누구인가? 바로 삼손이다. 삼손은 하나님의 뜻, 그분의 의지를 좇았다. 더 나아가, 그는 부모의 권위보다 하나님의 권위를 더 높이 두고 행동하고 있다. 자기 안에 끊임없이 역사하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권위를, 나를 낳아 주신 내 부모의 권위보다 더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문맥을 통해서 그가 블레셋 여자를 뜨겁게 사랑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결혼을 빌미로 블레셋을 징벌하시려는 하나님의 뜻, 그 권위 앞에 삼손은 순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삼손만 같아라'인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내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좇아,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감동하심에 순복하는 삼손을 본받아야 한다. 진정 삼손만 같아라.
3장 일곱 번의 고비, 이것을 넘어라'블레셋'이 어떤 민족인가를 살펴보는 것은 삼손 스토리가 주는 영적인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블레셋은 '촌에 거하는 자'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 오늘날의 팔레스타인이란 말도 블레셋에서 파생된 말이다. 그들의 원래 고향은 지중해 그레데 섬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지중해 섬에서 빠져나와 애굽을 침략하려다 실패하고(람세스 3세, B.C.1205-1174), 돌아오는 길에 욥바를 중심으로 한 해변에 정착하여 이스라엘 땅을 넘보는 이스라엘 민족 최대의 숙적이 된다. 그러다 이 블레셋이 삼손 시대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이스라엘을 속국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 후 무려 40년 동안이나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지배를 받는다. 저들은 이후에도 사무엘 시대, 사울 왕 시대를 거쳐 다윗 시대에 이르기까지 끈질기게 이스라엘을 괴롭힌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블레셋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들의 대적자, 즉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민족으로 묘사되고 있다.
삼손이 결혼하려는 여인은 바로 이 블레셋 족속의 딸이었다. 이에 반해 삼손은 어떤 사람인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사사다. 사사란 왕, 제사장, 선지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삼손과의 결혼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결혼이 있은 후에 수수께끼 사건이 일어난다. 물론 그것도 삼손이 블레셋을 공격할 빌미를 위해 만들어 낸 것이었다. 수수께끼를 7일째가 되어도 풀지 못하자 블레셋인들이 삼손의 아내를 찾아온다. 그리고 그녀에게 온갖 협박과 회유를 가한다. 결국 삼손의 아내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항복하고 만다. 삼손에게 떼를 써 수수께끼의 해답을 기어이 알아내 원수들에게 넘겨 주는 우를 범하고 만다. 그 결과, 그 여인은 어떻게 되었는가? 삼손의 친구에게 준 바 되고, 결국 나중에는 블레셋 사람들이 그 여인과 그의 아버지를 불살랐다.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조금만 더 견뎠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성경에서 '일곱'이란 숫자는 '완전'이나 '다 됐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성경 잠언에서는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잠 24:16)라고 말한다. 당신은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가? 헤어날 수 없는 깊은 웅덩이에 빠져 있는가?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잠잠히 바라보라. 그분이 넉넉히 피할 길을 주실 것이다. 우리의 시험은 '일곱째 날'의 시험이다. 조금만 참으면 끝날 시험이요, 그 날이면 해결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당하지 않는다.
이 과정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옛 주인 사탄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주는 것이다. 야고보서는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2, 13)라고 말씀한다.
4장 여호와의 영이 임하시면수수께끼 사건으로 속상했던 삼손은 아내를 버려둔 채 집을 나갔다가 얼마 후 다시 아내를 찾아온다. 그런데 그 사이 장인이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줘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 삼손은 불같이 화가 난다. 그래서 여우 삼백 마리를 붙들어 그 꼬리와 꼬리를 묶고, 묶은 부분에 홰를 달아 불을 붙여 원수들의 논밭에 풀어 버린다. 꼬리에 불이 붙어 미쳐 날뛰는 여우들에 의해 밀농사는 다 엉망이 된다. 이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이 유다로 쳐들어오게 되었고, 삼손은 나귀 턱뼈로 블레셋 사람 1,000명을 쳐 죽인다. 삼손의 충동적이며 돌출적인 행동이 극치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건을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를 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그의 팔 위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그의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삿 15:14). 여기,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라는 말씀을 다른 성경에서는 "여호와의 영의 권능이 세차게 덮치매"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영으로 삼손과 함께하셨다는 뜻이다. 삼손의 이해할 수 없는 돌출적 행동을 하나님께서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삼손의 행동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심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지금 삼손을 신뢰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삼손의 어떤 모습을 귀하게 보신 것일까? 우리는 우선 이 사건과 관련하여 블레셋이란 나라가 등장하고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블레셋은 영적으로 어둠의 세력, 하나님 백성의 원구, 곧 사탄의 권세를 뜻한다. 그런데 바로 이 블레셋을 대하는 태도에서 삼손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패배주의와 현실 안주적인 사고를 보이고 있다. 이스라엘 전체가 이런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눈여겨 보라. 이렇게 무서워 떨게 만드는 블레셋 군사의 수는 겨우 1,000명이다. 이에 비해 이스라엘은 무려 3,000명이나 된다. 그런데 저들을 대항하여 싸울 생각은 안 하고, 오히려 블레셋을 대항하고 있는 삼손을 잡아 묶어서 마치 조공을 드리듯 저들에게 넘겨주기까지 하고 있다. 블레셋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의도이다.
이런 상황에서 삼손은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모두가 포기하려 할 때 그는 혈혈단신으로 블레셋과 대적한다. 당당히 맞서고 있다. 3,000명이나 되는 주변사람들이 토해 내는 부정적인 성토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붙잡혀 꽁꽁 묶인 상황에서도 결코 주눅 들지 않고, 혼자 무려 1,000명의 원수들과 싸우기 위해 용감하게 일어난다. 삼손의 바로 이 모습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셨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그를 절대적으로 지지하기 위해 '여호와의 영'으로 임하신 것이다. 삼손의 이러한 태도는 마치 골리앗 앞에서의 다윗과 같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임한 것은 언제였는가?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라고 했는데 여기서 레히는 블레셋 사람이 진을 치고 있는 장소이다. 포승줄에 묶인 몸이지만 저들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고 있는 바로 그때, 그 위기의 순간,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임했다. 그리고 상황을 완전히 역전시킨다. 그래서 믿음의 한 발자국이 중요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 앞에 섰을 때 제사장들이 한 발자국을 강물을 향해 내딛는 순간 강물이 갈라지는 역사가 일어났다. 풍랑이 요동치는 바다 위로 베드로가 '한 발자국' 내딛었을 때, 물 위를 걷는 기적을 맛보았다. 열 명의 문둥병 환자들이 믿음으로 몸을 돌이켰을 때 병이 낫는 기적을 체험했다. 한 발자국이 정말 중요한 것이다.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임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두 가지 복을 받는다. 첫째, 결박이 풀어지는 은혜이다. 여호와의 영이 임하시면 당신을 얽어매고 있는 그 줄이 어떤 줄이든지 마치 불탄 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