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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매달림

토미 테니 지음 | 규장
하나님을 정말 그냥 보낼 것인가?



당신은 하나님께서 종종 숨으신다고 느낀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는가? 나 역시 그렇게 느꼈다. 그러던 어느 주일 아침 예배 시간, 하나님께서는 단순하지만 충격적인 깨우침으로, 목회자인 내 삶에 개입하셨다. 하나님은 나에게 이렇게 속삭이셨다. "토미, 네가 드리기 원하는 예배와 내가 받기 원하는 예배는 다르다. 너는 예배를 마치고 만족하며 떠나간다만 네가 떠날 때, 나는 여전히 목마르구나!"



내 생애를 완전히 바꾸어놓은 그날, 그것은 지워지지 않는 잉크로 쓴 것같이 나의 기억 속에 또렷이 각인된 경험이었다. 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아내에게 말했다. "일찍이 하나님을 이렇게 가까이 느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소." 나중에 깨달은 사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배를 마치고 예배당을 떠날 때 예배 시작 무렵보다 더 갈급하고 목말라해야만 기뻐하고 만족하신다. 이런 사실을 왜 좀 더 일찍 깨닫지 못했을까? 이런 경험을 하기 전, 약 9개월간 나는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을 채우기 위해 무던히 주께 매달렸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긴밀함을 지속하고자 하는 욕구를 느낄 때마다 야곱이 얍복 나루에서 겪은 좌절감을 똑같이 맛보곤 했다.



그러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 32:20)라는 구절에서 나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갈망, 하나님께 매달리는 그 순수한 열정을 느낄 수 있었고, 주님은 주님께 매달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나에게 알려주셨다.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이 예배 전보다 후에 더 간절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의 감격은 절정에 달했고, 아직까지 나는 그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다.



나는 딸 셋을 키우면서 술래잡기 놀이를 많이 해보았다. 만일 꼬마 술래가 나를 찾지 못하고 계속 헤맨다면, 나는 조심스럽게 단서를 제공한다. 벽장 뒤에 숨어 있을 때면 나를 발견하도록 벽장 문 옆으로 슬쩍 발 한 짝을 내밀어준다든지, 소파 뒤에 숨었으면 머리끝을 살짝 내밀어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간단하다. 내가 딸과 술래잡기 놀이를 하는 핵심 목적은 '숨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찾는' 데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술래잡기하는 아빠와 똑같으시다.

다윗은 시편에서 최소 열한 번 이상이나 "하나님은 숨으신다"는 표현을 썼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숨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알기로, 하나님은 죄와 교만으로 가득한 인간에게서 숨으신다. 그 이유는 죄와 교만으로 꽉 찬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면 필시 죽을 수밖에 없으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때문에 숨으시는 것만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보내어 죄의 문제를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해결해 주셨으며,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는 누구나 그 은혜를 알게 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인간에게서 숨으시는가? 성경은 그 답을 심판보다는 오히려 기쁨과 더 밀접히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다.



기나긴 복음전도 여행이 끝나갈 무렵이면 나는 어김없이 딸들이 보고 싶어진다. 그럴 때면 잠을 조금 못 자는 한이 있어도 아이들 하교시간에 맞추어 비행기를 예약하고 일찌감치 집에 도착하여 통학버스에서 내리는 아이들을 문 앞에서 맞이하곤 했다. 나는 막내딸과 현관에서 재회하던 장면을 가장 아름답게 기억한다. 딸은 친구들에 둘러싸여 조잘거리면서 걸어온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현관 앞에 서 있다. 딸이 나를 발견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를 본 순간 막내딸은 친구고 뭐고 다 잊고 크게 소리친다. "아빠, 아빠, 아빠!"



가방에 걸쳐두었던 스웨터가 땅에 떨어지고, 가방까지 땅에 내팽개친다. 몇 주 동안 아빠의 사랑을 그리워하던 아이가 필사적으로 내 품안에 뛰어 들어온다. 잔뜩 흥분한 딸의 얼굴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해낼 수 있다. 아빠의 깜짝 등장에 아이는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한다. 아이를 번쩍 안아 공중에서 몇 바퀴 돌리면 아이는 소리지르고 깔깔거리며 좋아한다. 딸을 바닥에 내려놓자, 아이는 나에게 뽀뽀하려 달려든다. 바로 그 순간, 나는 딸에게서 몸을 돌린다. 무엇 때문에? 내가 돌아서서 집으로 들어가면, 딸이 부리나케 쫓아와 더 강렬하게, 더 많이 뽀뽀해주기 때문이다. 이 점을 노렸으니, 이것은 일종의 치밀한 작전인 셈이다. 나는 결코 딸에게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더 큰 기쁨을 맛보기 위해 잠시 돌아설 뿐이다.



나에게 뽀뽀하려고 굳게 결심한 딸아이를 피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나는 큰 몸집을 잽싸게 움직여가며 이리저리 딸을 피한다. 아빠는 피하고, 딸은 쫓는 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마침내 몇 분이 지나자 딸은 지친다. 그러면 그 애는 더 이상 나를 쫓지 않고 제자리에 서서 애원한다. "아빠, 제발!" 아이는 이 한마디로 나를 쉽게 사로잡는다. 아이는 나를 붙잡을 수 있을 만큼 빨리 달리지 못하지만 내 가슴을 금세 사로잡은 것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시다. 하나님은 늘 우리 주변에서 서성이고 계신다. 만남의 기쁨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주일 아침, 잠깐의 짧은 뽀뽀만으로 만족하지 않으신다. 어쩌면 하나님이 숨으신다고 해도 당신은 하나님의 집에 사는 것으로 만족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날 이후로 그럴 수가 없다. 나는 하나님의 무릎 위에 앉고 싶다! 이것은 사실 당신의 영혼도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그러나 인간이 어찌 숨으신 하나님을 찾을 수 있을까? 찾을 수 없다는 데 반론을 제기할 생각은 없다. 그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하나님의 길은 인간의 길과 너무도 다르다. 인간이 아무리 육체적으로 노력하고, 정신 수련을 쌓고, 영적으로 분발한다 해도 하나님을 잡을 수는 없다. 인간의 행위로는 하나님을 잡을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간절하게 매달릴 경우 사정이 달라진다. 우리가 완전히 절망하여 자포자기 상태에 빠졌을 때, 막내딸이 그랬던 것처럼 "아빠, 제발!"이라고 말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잡혀주신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잡을 수 없던 하나님의 마음이 이 말 한마디에 녹아버리는 것이다. 일단 이 단계에 도달하기만 하면, 당신이 쫓던 그분이 이제는 거꾸로 당신을 쫓으실 것이다.



이런 술래잡기 과정의 상황을 역전시키는 것이 바로 '예배'다. 예배드리는 사람은 술래가 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찾는 술래가 되시기 때문이다. 당신이 간절한 마음으로 예배드린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추적하고 잡으실 것이다. 바울과 실라가 그랬던 것처럼 만일 당신이 빌립보 지하 감옥 깊은 곳에 족쇄가 채워진 채 갇혀 있다고 해도 하나님은 예배드리는 당신을 찾아내실 것이다. 당신이 예배드린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위치를 추적하여 당신을 찾아내신다. 신령과 진정을 다하여 예배드릴 때, 당신은 하나님의 마음을 당신에게로 움직일 수 있다. 당신이 드리는 예배는 본질상 '사랑의 덫'에 하나님을 걸려들게 한다. 또 하나님은 우리가 놓은 사랑의 덫에 걸리기를 즐겨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성경은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시 27:8),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시 55:6)라고 말씀한다. 이것은 나에게 가장 중요한 깨달음이었다.



나는 세 딸의 아빠로서, 사랑하는 딸들에게 가능한 한 많은 뽀뽀와 포옹을 받기 위해 지금도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우리가 영적으로 교만하다는 점이다. 잠시 잠깐 주의가 흐트러져도 우리는 자신이 신앙적으로 어느 정도 성숙했다고 느끼고 하나님께 매달리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영적 교만이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열정을 빼앗는다. 하나님은 때로 자신을 숨기신다. 하지만 오로지 숨기 위해, 찾지 못하도록 숨으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잘 발견하도록 조심스럽게 숨으신다는 점을 잊지 말기 바란다.



예배가 그분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하나님은 먼 곳에 숨어 계시지 않는다. 우리 가까이에 숨으신다. 그분을 발견하는 관건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매달리는 열망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바로 이 열망이 우리가 있는 곳으로 하나님을 끌어들인다. 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좇는 과정에서 내가 절망했던 여러 요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었고, 그 운명적인 느낌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깨달았다. 내가 비록 자포자기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나의 찬양과 예배를 받으시며 오히려 나를 찾아오신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이 얼마나 큰 위력을 지니는지 서서히 알아갔고, 인간만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역시 우리를 찾고 계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글렌 클라크가 쓴 『God's Reach』에 나오는 다음 문장은, 우리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성에의 가장 보편적인 특징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이런 아름다운 형체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에 영구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러다가 차가운 공기와 만나 결정을 이루면 우리 눈에 보인다. 이 형태는 특정 장소에 국한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장소를 불문하고 모든 곳에 나타난다. 결정체가 만들어지는 조건만 갖추어진다면 즉시 그 모습을 나타낸다."



자연계에서 발생하는 이런 현상 속에는 중요한 진리가 숨어 있다. 성에의 형태로 나타나는 수분 결정체들은 성에가 되기 이전에도 늘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만 일정한 조건이 충족되어 성에로 나타나기 전까지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에 편재하신다. 우리 영에 온도 변화가 있는 바로 그 순간, '우리 주변에 있었지만 눈에 보이지 않던 무엇'이 비로소 우리의 현실 가운데 그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이를 하나님의 갑작스러운 등장, 즉 '방문'이라 부르고 싶다.

이사야는 이전에도 수없이 많이 성전을 드나들었을 것이다. 예배를 마치고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며 "믿을 수 없을 만큼 은혜로운 예배였습니다"라는 이야기를 나눴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이 실제로 모습을 나타내셨을 때, 이사야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주께서 임재하실 만한 조건이 갖춰졌을 때 -교만과 불순종을 범한 웃시야 왕이 문둥병에 걸려 죽고 그를 의지하던 이사야가 장례식을 마치고 성전에 들어와 상한 심령으로 애통하고 있을 때- 그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목격한다.



이사야서 1장부터 5장까지는 이사야 개인과 이스라엘 민족의 죄에 대한 책망과 심판에 대한 경고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사야서 6장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을 만난다. 그리고 이후 60장에 걸쳐, 그는 강력한 예언적 선포의 내용을 수없이 전개해나간다. "우리 모두에게 화가 임했다"는 내용 대신,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내용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나기 전후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만나면 모든 것이 변화된다는 점이다. 이전에 몰랐던 어떤 것을 깨닫는다. 비록 유리창에 성에가 끼지 않더라도 성에를 형성하는 잠재적 요건들이 주변에 산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며, 성에가 끼는 현상이 발생하도록 나름대로 영적 온도 변화를 모색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좇는 것인가? 그렇다. 이것이 하나님을 붙잡는 것인가? 그렇다. 당신이 하나님의 마음을 사로잡아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것이다.

나는 막내딸이 밖에서 씩씩하게 뛰놀 때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들리거나 아픔을 호소해오면 나는 즉시 아이에게 달려간다. 적어도 우리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관심을 갖지 않으신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고 애쓰지 말라. 하나님께 매달려라. 그 다음, 당신 앞에 어떤 일이 전개되는지 확인하라. 당신이 하나님께 매달린다면 당신은 분명 이사야와 같은 체험을 할 것이다.



열정에는 인간적인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논리'는 향유 옥합을 들고 온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럴 필요 없어! 값비싼 향유 옥합을 깨트릴 필요는 없다고!" 하지만 마리아의 '열정'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이렇게 하기 원해!" 마리아는 주님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날, 제자들은 예수님이 방에 앉으신 것을 보았지만 오직 눈으로만 보았다. 반면에 마리아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놓았다. 적절한 온도의 변화가 생겼고 그 결과 주께서 그분의 영광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오로지 우리가 적절한 환경을 조성하기만을 기다리신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마음의 온도 눈금을 '갈망'에 맞추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오실 것이요,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창문에 성에가 가득 낀 것처럼 확연히 보일 것이다. 하나님과의 만남, 이것은 단연코 당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당신이 장례식을 치르고 돌아왔을 때 발생한다. 내 생각과 이상, 내 방법을 버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신다는 말이다. 자아를 버리고, 야망을 포기하고,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께 매달릴 때, 우리는 어느 순간 하나님과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것을 보았다. 그리고 많은 은혜를 체험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 한 가지를 더 갈망해야 한다. 모세처럼 "주님, 주님의 영광을 보여주소서"라고 간절히 애원해야 한다.



간절함은 당신이 가진 가장 큰 매력!



나는 우리가 느끼는 만족감이 교회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가장 큰 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명령하셨다. 하나님을 좇는 과정을 우리의 일정표에 맞추지 말라는 의미이다. 영적인 균형을 이루는 유일한 길은 모든 것이 잘되어 아무 문제가 없다는 듯한 태도를 버리는 것이다. 사탄의 계략 가운데 하나가 우리에게 만족감을 주는 것이다. 우리가 마치 무엇인가를 이루었고 어디인가에 다다른 것 같은 만족을 준다. 그러나 그 순간에 우리는 시궁창으로 처박히고 만다. 하나님의 임재의 강물은 급속히 마른 바닥을 드러낸다.



물론 그렇다고 하나님께 감사하지 말자는 뜻은 아니다. 감사는 그리스도인의 필수 요건이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우리는 영적인 배고픔을 호소하며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려야 한다. 영적으로 허기진 사람이 당연히 경주에서 1등을 할 것이며, 하나님을 좇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에스라는 유대인들이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여 그 기초를 봉헌하던 날의 광경을 매우 흥미롭게 묘사하고 있다. "서로 찬송가를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가로되 주는 지선하시므로 그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전 지대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족장들 중에 여러 노인은 첫 성전을 보았던 고로 이제 이 전 지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며 여러 사람은 기뻐하여 즐거이 부르니 백성의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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