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펠러
이채윤 지음 | 미래사
Ⅰ. 어린 시절자유분방했던 존의 아버지에 비해 신앙심이 무척 깊었던 어머니는 어린 존에게 도덕적이고 엄격했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에게 항상 이런 가르침을 주었다. "무절제한 낭비는 비참한 가난을 부른다." 록펠러가 여섯 살이 되던 해 어느 날, 어머니가 존을 불러 말했다. "존, 너도 이제 여섯 살이다. 오늘부터는 혼자서 교회에 다니도록 해라." 그러면서 어머니는 존의 손에 난생 처음으로 20센트의 용돈을 쥐어 주었다. 그리고 기뻐하는 존에게 어머니는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존, 이 20센트는 분명 엄마가 너에게 준 거야. 하지만 너는 이 돈을 함부로 써서는 안 돼. 이 안에는 네가 하나님께 바쳐야 할 몫이 있거든. 20센트 가운데 십분의 일인 2센트는 하나님 몫이란다."
어머니는 2센트를 따로 떼어 헌금 봉투에 담아 주었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그것이 '십일조'라고 하는 것이고, 앞으로 돈이 생기면 가장 먼저 하나님께 드릴 십일조를 반드시 따로 떼어 두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존은 그날 혼자 교회에 가서 십일조를 드리고 예배를 드렸다. 찬송을 부르고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동안 어린 그의 가슴에 왠지 모르게 기쁨이 솟구쳤다. 그 후로 존은 교회에 가는 것과 십일조 드리는 것을 가장 큰 기쁨 가운데 하나로 여기게 되었다.
록펠러가 일곱 살 때였다. 어느 날 농장 덤불에 칠면조 암컷이 드나드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는 몰래 뒤를 따라가 둥지와 알을 찾아냈고 칠면조를 붙잡아 알과 함께 헛간으로 가져왔다. 어머니는 존에게 칠면조를 길러서 팔아보라고 했다. 늘 근검절약을 강조하던 어머니는 아들의 자립정신을 일깨웠고 그렇게 해서 록펠러의 첫 번째 돈벌이 사업이 시작되었다. 야생 칠면조는 헛간에서 알을 품었고, 얼마 후 예쁜 새끼들이 알을 깨고 나왔다. 가을이 되어 새끼들이 다 자라자 존은 그것을 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칠면조 암컷을 몇 마리 사다가 더 많이 알을 부화시켜 차곡차곡 돈을 모았다.
존은 어머니가 거실의 궤짝 위에 놓아 둔 푸른 사발에 동전을 모았는데, 3년 동안 칠면조를 길러 모은 돈이 50달러나 되었다. 그는 그 돈을 아는 사람에게 빌려주고 6개월 뒤 3달러 50센트의 이자를 받게 되었다. 3달러 50센트라는 돈은 그가 열흘 동안 하루에 10시간씩 감자를 캐야 벌 수 있는 액수였다. 그 때 존은 돈이 어떻게 이익을 만들어내는지를 깨달았다. 훗날 록펠러는 자서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그때 나는 돈을 위해 일할 게 아니라 돈이 나를 위해 일하게 해야겠다는 가르침을 얻었다."
당시 가족의 생활은 힘겨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골드러시를 좇아 서부로 간 아버지가 무일푼이 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형편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맏아들인 존이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해야만 했다. 존은 학교에 다니면서 집안 살림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존은 때때로 방과 후에 부두를 거닐며 교역이 이루어지는 현장을 바라보곤 했다. 하루는 한 친구가 존에게 물었다. "존, 너는 장차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소년 록펠러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나는 10만 달러의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난 꼭 그렇게 될 거야." 열네 살이 되던 해 록펠러 가족은 클리블랜드로 이사를 했다. 당시 클리블랜드는 새로운 철도가 생기면서 도시 전체가 활기를 띄고 있었다. 록펠러는 새로 개교한 센트럴 공립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록펠러는 학구적인 학생은 아니었지만, 사물을 진지하게 보고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표현할 줄 알았다. 당시 그는 이리 스트리트 침례교회에 다니고 있었는데 교회활동이나 봉사에 매우 열심이었다. 록펠러의 어린 시절과 관련해서 '어머니와의 세 가지 약속'이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 일화는 그가 대사업가로 성공한 뒤 발표한 자서전에서 고백한 것인데, 존은 자신의 성공비결로 어렸을 때 어머니와 한 세 가지 약속을 평생 동안 지킨 것을 꼽았다. 그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십일조 생활을 해야 한다.
2. 교회에 가면 맨 앞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린다.
3. 교회 일에 순종하고 목사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는다.
Ⅱ. 일찍 시작한 사업1855년 8월, 고등학교를 졸업한 열여섯 살의 소년 록펠러는,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클리블랜드에 있는 '휴이트 앤드 터틀'이라는 곡물 위탁판매회사에 경리로 취직했다. 그는 매일 아침 6시 30분에 출근해 밤 10시가 넘어서야 퇴근했는데, 사장과 동료들은 록펠러의 성실하고 헌신적인 태도에 모두 놀랐다. 하지만 그가 받은 월급은 일한 것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었다. 그럼에도 록펠러는 일을 배울 수 있다는 것 자체에 만족했다. 그는 매일 밤 집에 돌아와서 하루 일과를 되새겨보고 자신을 훈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858년에 이르자 휴이트 앤드 터틀 회사는 곡물에서부터 대리석까지 거의 모든 상품을 취급하며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할 만큼 성장했다. 회사의 회계장부를 도맡아 처리했던 록펠러는 성장해 나가는 회사의 업무시스템을 배우는 일이 무척 즐거웠다.
1859년 3월, 록펠러는 3년째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위탁판매 회사에서 경리로 일하던 모리스 클라크와 함께 각자 2,000달러씩 4,000달러의 자본금으로 부둣가의 허름한 창고 건물에 '클라크 앤드 록펠러'라는 간판을 내걸고 위탁판매업을 시작했다.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록펠러는 내심 자신감으로 가득 찼지만, 하나님께 겸손함을 달라고 기도했다. "
저 자신을 돌아보고 조심하지 않으면 실패하게 됩니다. 항상 겸손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록펠러는 사무실에서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오하이오와 인디애나의 농장을 돌아다니며 직접 거래할 작물들을 골랐고, 농부들과 친분을 쌓아갔다. 록펠러는 매사에 조심하는 유형이었지만, 때때로 투자를 할 때는 무모해 보일만큼 과단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클라크 앤드 록펠러 회사는 첫 해에 4,400달러, 다음 해에 1만 7,000달러의 흑자를 기록하며 급성장했다. 더욱이 1861년 4월에 시작된 남북전쟁은 그들의 사업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록펠러는 상품의 구매와 판매 등 영업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고, 클라크 앤드 록펠러 회사는 클리블랜드에서 가장 신용 평가가 높은 회사 중 하나로 성장했다. 록펠러는 열아홉 살에 이리 스트리트 침례교회의 집사가 되었다. 그는 주로 교회 사무를 보며 교회 재정의 관리 등 행정적인 일에도 깊이 관여했다. 해가 바뀔 때마다 록펠러의 헌금 액수는 놀랄 만큼 늘어났다. 그가 운영하는 회사가 엄청난 규모로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벌어들인 돈의 십분의 일을 정확하게 계산해서 십일조를 드렸고, 그것이 상당한 액수였기 때문에 교회 재정의 정상화에 큰 힘을 실어주었다.
록펠러가 클라크 앤드 록펠러 사를 차린 후 미국은 남북전쟁에 휘말려들었다. 하지만 미국 사회에는 그 미증유의 혼란 속에서 골드러시에 이어 오일러시라는 강력한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1859년 펜실베이니아 타이터스빌에서 에드윈 드레이크가 최초로 석유 시추에 성공한 지 1년 만에 미국에서는 50개 이상의 유전이 발견되었고, 다시 1년 후에는 유전이 100개를 넘어섰다. 유전지대의 땅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고 피츠버그, 필라델피아, 보스턴, 뉴욕, 클리블랜드 곳곳에서 수를 헤아리기 힘들만큼 정유회사가 많이 생겨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석유에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운데 록펠러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진짜 돈'은 석유를 생산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운송과 정유를 담당하는 중간상인들이 차지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타이터스빌의 유전이 발견되고 4년이 흘렀을 때, 클리블랜드에 획기적인 일이 벌어졌다. 클리블랜드에서 뉴욕, 그리고 석유지대의 중심지와도 직결되는 철도가 놓이게 된 것이다. 록펠러는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 그는 예측이 불가능하고 실패할 확률도 높은 유전개발보다는 정유업의 전망이 더 밝다고 내다보았다. 록펠러는 동업자인 클라크, 새뮤얼 앤드류스와 함께 8,000달러를 투자해서 정유회사를 설립했다. 그들이 차린 정유공장은 몇 대의 증류기, 용광로가 전부였고 기술력도 일천했지만, 그곳에 곧 철도가 들어설 예정이라는 장점이 있었다. 새로 영입된 앤드류스는 화학을 독학한 사람으로 석유에 관해서는 독보적인 지식을 가진 달인이었다. 그는 석유를 걸러내고, 끓이고, 농축해서 물과 가성소다, 황산으로 정화해 등유로 분리시키는 정유 시스템을 개발했다.
1864년 3월, 록펠러는 로라 스펠먼과 약혼했다. 록펠러는 스물다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클리블랜드의 유력한 사업가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고, 고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로라와는 진작에 결혼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로라의 집안은 든든한 정치적·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로라는 젊고 아름다웠다. 록펠러는 사업이 궤도에 오르자 로라에게 청혼했고, 그해 9월 8일 두 사람은 로라의 집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록펠러는 평소 과묵한 편이었지만, 로라와는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나누었다. 아내는 아내대로 완벽한 배우자가 되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했다. 그녀는 돈 버는 일에만 전념하던 남편의 관심을 예술이나 문화, 사교활동 등에까지 넓혀 주었다. 그리고 경건하고 착실한 교육을 통해 아들 록펠러 2세를 록펠러 가문의 손색없는 후계자로 키워냈다.
1865년 초, 잘나가던 회사가 불화로 분열될 위기에 처했다. 클라크는 회사 부채가 거의 10만 달러나 된다면서 불만이 많았고, 록펠러는 사업을 이해하지 못하는 클라크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록펠러는 새로운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서는 계속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할 필요를 느꼈다. 1865년 2월, 록펠러는 7만 2,500달러에 클라크로부터 회사를 인수했고 그 날 이후 회사는 '록펠러 앤드 앤드류스'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는 추진력이 뛰어난 동생 윌리엄을 회사에 끌어들여 두 번째 정유소를 열었다. 그로부터 제3, 제4, 제5의 정유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미 록펠러 앤드 앤드류스는 클리블랜드 최대의 정유사가 되어 있었고, 2위 업체에 비해 곱절인 하루 500배럴의 정유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록펠러는 젊은 나이에 백만장자가 되었으나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하며 절제 있는 삶을 꾸려 나갔다. 회사일이나 교회일을 하지 않을 때는 반드시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록펠러의 아이들은 자신들이 백만장자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별로 느끼지 못하며 자라났다. 아이들은 용돈을 벌기 위해 집안일을 도와야 했고,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각자의 회계장부를 작성해야 했다. 록펠러는 가족을 이끄는 일은 사업체를 운영하는 일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늘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회사를 운영하고 돈을 버는 것 자체가 '가족을 위한 것' 아닙니까?"
Ⅲ. 일생을 바친 석유사업록펠러는 모든 일에 꼼꼼하기로 유명했지만, 한 번 사람을 믿으면 이따금 무모할 만큼 모든 것을 내주는 사람이었다. 1863년, 그때까지만 해도 석유사업의 진가를 잘 알지 못했던 그에게 친구 한 사람이 광산업을 권유했다. 그는 친구의 말을 믿고 거금을 들여 탄광을 인수했다. 하지만 그곳은 이미 폐광이나 마찬가지로 쓸모없는 광산이었다. 아무리 캐고 들어가도 광산에서는 돌덩어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임금이 밀리자 광부들은 폭도로 변해서 아우성을 쳤다. 그들은 록펠러를 탄광 안에 가두고 임금 지불을 요구했다. 록펠러는 폐광에 엎드려 처음으로 정신없이 눈물을 흘리며 통곡의 기도를 올렸다. 그러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깜박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그는 어떤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너무나 피곤해서 그만 발걸음을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몇 번을 시도하다 결국 한쪽으로 쓰러지고 말았는데 난데없이 어떤 큰 손이 다가와 그를 붙들어 일으켜 세우는 것이었다.
문득 정신이 든 록펠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여전히 차디찬 폐광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바로 그때, 그의 귓가에 어떤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갈 곳에 이미 이르렀느니라. 때가 되면 열매를 거두리라. 네가 있는 곳을 더 깊이 파라." 록펠러는 밖으로 나와 광부들에게 다시 한 번 부탁했다. 그의 눈물어린 호소에 몇몇 광부가 마지막으로 한번 록펠러를 믿어보겠다며 폐광을 더 깊이 파기 시작했다. 그런데 땅을 파내려간지 얼마 안 되어 갑자기 석탄 대신 '검은 물'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그것은 석탄보다 값진 석유였다. 록펠러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하나님, 저에게 이렇게 석유라는 값진 선물을 주신 것은 평생 그 일에 전념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후 록펠러는 석유 이외의 어떤 사업에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록펠러는 많은 사람을 사귀지는 않았지만 한번 믿은 사람에게는 전폭적인 신뢰와 권한을 주었다. 그는 의심하면서 사람을 부리면 그 사람의 장점을 살릴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석유사업으로 세계를 제패할 꿈을 착착 진행해 나갔다. 하지만 혼자 힘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록펠러는 동업자 새뮤얼 앤드류스와 협의해 또 한 사람의 협력자를 맞아들였다. 그 사람은 록펠러와 평생 동지로 지내게 된 헨리 M. 플래글러였다. 플래글러가 회사에 합류하면서 사업은 일취월장해 1870년, 그 유명한 회사인 '스탠더드 오일'을 탄생시키고, 미국 석유 시장의 95%를 점유하는 초유의 글로벌 기업을 만드는 초석을 다지게 되었다.
헨리 M. 플래글러는 사업에서나 사생활에서나 록펠러와 평생 우정을 함께 나눈 몇 안 되는 친구였다. 나중에 자서전에서 록펠러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플래글러와 나는 비즈니스에서 비롯된 우정을 나누었다. 그는 그것이 우정에서 비롯된 비즈니스보다 더 좋다는 말을 자주 했는데, 나는 경험을 통해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스탠더드 오일도 초창기에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록펠러의 기업 확장 정책에 따라 정유소의 수가 늘어난 반면, 기술 부족과 부주의로 화재가 자주 발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록펠러는 특유의 리더십으로 많은 어려움을 이기고 회사를 반석 위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록펠러는 무엇보다도 석유사업의 미래를 정확히 내다보는 직관력을 가지고 있었다. 록펠러는 물류비용에서 경쟁자보다 우위를 점하는 것이 석유사업에서 성공을 거두는 열쇠라고 확신했다.
그는 철도회사와의 운임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주변의 정유공장을 흡수 합병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마침내 클리블랜드 최대의 정유기업 집단을 이룩함으로써 운임협상에서 철도회사를 압도하는데 성공했다. 록펠러는 강력한 경쟁자들이 사라지자 일일 생산량을 500배럴에서 1500배럴로 늘려 나갔다. 록펠러는 클리블랜드에서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석유의 생산·선적·도매 등 석유산업 전반에 걸쳐 모든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전 미국, 나아가서 전 세계 석유 시장을 장악할 계획을 세워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원유의 채취는 물론 그것이 소비자들의 손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과정 중 핵심 과정을 장악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스탠더드 오일은 록펠러의 치밀한 계획에 따라 원유 시추에서부터 정유 시설, 나아가 운송과 유통을 장악하기 위한 작전을 전격적으로 펼쳤다. 그 일은 1871년 12월에서 1872년 3월까지 석 달 동안 펼쳐졌다. 그 결과 스탠더드는 클리블랜드의 27개 경쟁업체 중 세 곳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스탠더드 오일은 미국 최초의 주식회사였다. 투자자들은 회사의 부채에는 책임을 지지 않는 주식회사 제도에 매료되어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록펠러는 스탠더드 오일의 설립 초기부터 능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