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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받지 않으시는 하나님

노만 그럽 지음 | 두란노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 궁극적 실재




지난 30여 년 동안 내 삶의 근본적인 관심은 줄곧 하나님의 진리 전체가 과연 내게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이제 내 나이 65세에 이르러, 비로소 문제의 핵심이 잔잔한 표면 위로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어떤 것들에 관해서는 극단적으로, 그러니까 성경에서 종종 그렇게 하는 것처럼 절대적인 용어까지 밀고 가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야 우리 의식에 새겨질 만한 진리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요. 이런 진리는 배를 항구에 머물게 하는 닻처럼 내 영을 든든히 붙잡아 주는 닻이 됩니다. 나는 이런 역할을 하는 근본적인 '극단'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을 찾지 못한 사람은 끊임없이 굶주립니다. 그러나 이 궁극적인 실재를 소유한 사람은 항구에 자기 영혼의 닻을 내렸기 때문에, 때때로 길을 벗어나 방황을 하더라도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 또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압니다.

이 '극단'이란, "이 우주에서 무언가 뒤바꿀 만한 능력을 가진 존재는 단 한 분, 인격이신 하나님 자신뿐이다"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으면 다소 지나치다는 느낌에 부딪힐 것입니다. 우리 속에서 이와 명백히 대립하는 어떤 생각과 마주치기 때문인데,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도 인격이며 따라서 자신의 의지가 무시된다는 느낌을 받는 까닭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우리도 의지를 행사하는 인격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부차적인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이러한 갈등이 생기는 것은 타락 이후 인간 자아의 기능에 대한 개념이 완전히 왜곡된 채로 세상을 지배하고 또 세상을 눈멀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 거짓을 파괴하고 진리로 그 자리를 대체하기 위해서는 인간 자아를 쓰레기통에 내던져 버리는 방법밖에 없으며, 우리가 제대로 된 관점을 회복할 때만이 우리의 자아는 진정한 제자리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런 관점을 갖게 된 것은, 성경이 겉보기에는 수많은 각종 은사들과 은혜들을 가지고 그것을 내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소유하시는' 하나님이 아닌 '존재하시는' 하나님 자신(성부, 성자, 성령)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 이후였습니다. 성경은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시라, 그리스도는 우리의 거룩이시라'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부르는 어떤 것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어떤 것들이, 실제로는 우리들 안에서 하나님 자신이 그것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나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좀 쓸모 있는 일꾼이 되려고 많은 은사들과 은혜들을 찾아 구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얻은 대답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다. 너에게 줄 '무엇'이란 것은 아예 있지도 않다. 이런 것들은 인격이신 하나님의 모든 성품들이며, 온 우주 안에 계신 한 분 인격적인 하나님의 면면이다. 그것들은 실상 그분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네 스스로 가질 수 없고 너에게 따로 떼어 줄 수 있는 무엇도 아니다."

이런 결론에 나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선 인간 자아의 위치와 기능에 대한 나의 잘못된 생각부터 뒤흔들어야 했습니다. 나 자신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치장하기 위해 그분께로부터 얻어 가지려고 했다가 느끼게 된 배타성, 말하자면 절대자의 위엄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감사하기 어려운 조건이었습니다. 어쩌면 너무 극단적으로, 또는 전혀 진리가 아닌 것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나 자신의 사고 체계로부터 끌어내야 했던 사실은, 궁극적인 생명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나'이며, 또한 나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니, 더 극단적으로 말해서 삶이란 단지 하나님의 삶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우선 순위에 두는 삶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사시는 삶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과 사물들은 무엇입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되신다면 이 우주 만물과 사람들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성경에 따르면, 만물은 하나님을 드러내는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이 원래의 목적입니다. 만물은 곧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 드러남의 차원에서 보면 만물은 하나님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어느 한 장소에 가두고 이른바 '종교 생활'에 만족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삶, 우주 존재 전체입니다. 자신의 놀라운 창조 세계, 그 다양함을 통해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계십니다. 숲길 위로 적당히 흩어져 구르는 낙엽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어떤 예술가가 그런 작품을 그리겠습니까? 색깔들이 서로 어울리는 아름다움을 보십니까? 조화로운 음정들의 화합에서 기쁨을 느끼십니까? 우리는 그런 데서 하나님을 보며 하나님을 듣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이 하나의 원자로 환원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그 원자의 기원은 무엇입니까? 과학자들은 인간들이 그 원자의 기원을 결코 알 수 없을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격이신 하나님입니다. 사도 바울은 2천 년 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7). 인간의 이성이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을 믿음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히 11:3).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이제 눈을 뜨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무엇을 보든 거기서 여러 모양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계신 하나님을 보십시오.

내가 범신론자가 아니냐구요? 세상에, 하나님이 원자란 말입니까? 원자가 하나님이란 말입니까? 하나님이 빨간 색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바이올린 소리입니까? 바이올린 소리가 하나님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이십니다. 인격은 어떤 사물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물들은 그분을 나타내는 형태들입니다. "온 땅에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함이여!" 그분은 '만물을 충만케'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사물이 아니라, 만물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께 경배드릴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삶 전체에 대한 설명입니다. 만물을 말씀으로 지으시고 붙드시며 거기서 자신을 보이시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삶 말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하나님입니까? 이제 우리는 원점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받고 또 구원받지 않은 모든 인간에 대하여 아주 대담하게 선언합니다. "우리가 그분을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이 얼마나 강력한 선언입니까! 그분이 우리를 만드셨고 우리는 그분의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어느 정도 그분과 분리된 생명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그분 '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자연적인 생명과 생각과 행동들은 모두 그분의 표현이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의 것이거나 아니면 어디 다른 곳에 있거나 피조된 모든 것들, 그러니까 사탄과 천사들까지 포함해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 없이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지어진 모든 것들은 영원히 '그분 안에' 있습니다. 그분 자신이 이 모든 존재의 생명을 붙들고 있는 감추어진 능력입니다. 이 모든 존재들의 자아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자아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께로부터 분리된다는 것은 더 이상 피조물일 수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즉각적으로 따라옵니다. 세상에 있는 악도, 악한 사람들도 모두 하나님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까? 이제 우리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딜레마로 여겨지는 것과 씨름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이 세상의 악한 일들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까?

- 하나님의 딜레마




우리가 인격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자유를 의미하는 자의식(self-consciousness)을 부여받은 존재를 말합니다. 창조주가 인격이시고 그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인간 역시 인격입니다. 이것은 같은 형상이라는 점에서 서로 닮은 것이면서 인격적 의지라는 점에서는 아주 딴판이 될 가능성을 애초부터 갖고 있는 것입니다. 자아의 중심에는 그것이 인간의 자아이든 하나님의 자아이든 어떤 갈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인간의 자아는 자신을 기쁘게 하며 자신을 표현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즉, 자기를 내어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중심으로 삼는 것이 모든 활동의 동기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가장 근원적인 하나님의 자아는, 성부는 자기 사랑의 대상으로 성자를 낳으셨고, 성자는 성부의 사랑을 받고 또 돌려드리며, 성부와 성자의 성령은 모든 피조물 안에서 그 동일한 사랑을 계속해서 드러냅니다. 우리가 자의식을 가진 자아라고 말할 때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서로 상반되는 이 둘을 감지할 수 있는 어떤 인격적 주체를 뜻합니다.

영원 전부터 삼위(三位)로 계시면서 서로 완전히 사랑하며 섬기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중심에는 십자가가 있었고 또한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자아가 내어 주는 형태로 고정되었음을 의미하며 그것이 근원적 자아의 본질임을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자아 됨에서 나오는 모든 능력들은 자신을 내어 주는 섬김에 쏟아 부어졌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그분은 인간 자아가 갖는 모든 열망의 성취점을 보여 주고 계십니다. "그가 자신 속에 두신 그 선한 기쁨을 맛보아 알지어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쁨이 되십니다. 평화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그분의 자아가 우리를 향하여 내어 주는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자아를 내어 놓으라고 하시면 그것은 그분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근원적 자아의 본질이요, 성취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인격을 드러낼 수 있는 존재는 사람뿐입니다. 인격이신 한 분 하나님은 인격인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며, 우리는 그분을 인격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중심에 하나님과 동일한 근원적 자아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두 가지 대안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두렵고 놀랍게 창조되었는가에 대하여 각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롭고 사랑스러우며, 또 지적인 존재로서 전 우주에 한 분이신 인격적인 하나님을 담을 수 있도록 지음받은 존재들인 것입니다.

스스로 사랑이신 그분이 신적 자아의 본성을 인격적 자아인 우리 안에서 드러내실 때, 우리는 그분이 존재하는 것처럼 존재하며 그분이 사시는 것처럼 살고 그분이 사랑하시는 것처럼 사랑하면서, 창조된 우리 존재의 본질에서 솟아나는 완전한 만족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기를 사랑하며 자기를 기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유로운 존재임을 안다는 것은 상당히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인격이시며 사랑의 구조를 가진 근원적 자아로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분을 밀어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엄청난 균열과 고통이 따를 것입니다. 우리는 잘 알 수도 없고 드러나지도 않는 방법으로 자기 중심주의를 좇아가며 창조된 원래 의도를 거절할 뿐 아니라, 자기 만족을 우상으로 섬길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비극은 이미 일어났습니다. 성경은 루시퍼의 타락과 아담의 범죄를 기록합니다. 피조된 존재는 영원토록 하나님 안에서 그분을 힘입어 살며 기동하고 있지만, 그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하나님을 정면으로 대항하는 쪽으로 달려갑니다. 자신을 내어주는 모든 선 대신에 자기 중심주의의 모든 악으로 자신을 내어 주는 일을 아주 자랑스럽고 대담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심지어는 사탄마저 그런 류로 불렸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자식들이며, 어둠의 자식들이며, 사랑과는 정반대의 것을 경험하고 있는 아들들입니다.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은 거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능력은 그들을 죄악으로 넘기우며 그들의 마음을 돌처럼 굳게 하고 파멸에 합당한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제 질문에 대답할 차례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도 하나님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까? 이 세상의 악한 일들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까? 이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해 다시금 완전한 지혜와 사랑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 그분에게 돌아가 봅시다. 그분은 자신의 자유 의지에 따라 모든 일을 이루시며, 우리를 그분의 형상에 따라 지음으로써 그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 자유는 하나님께로부터 허락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피조물인 한, 그런 자유를 가진 인격으로 살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능자 안에 자유가 있고 우리는 그를 힘입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 자유를 우리 스스로 만든 것이라면 우리는 창조주가 허락하신 영역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반대편에 설 자유도 주셨지만, 동시에 우리는 자유를 주신 하나님의 영역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모순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계획과 궁극적인 섭리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피조물에게 요구되는 것은 겸손한 믿음 외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은 자유를 갖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습니다. 또 그렇게 행동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자유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세우신 목적과 능력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선과 악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누가 이런 모순을 소화해 낼 수 있겠습니까? 믿는 사람들뿐입니다!

인간은 왜 있습니까?

- 인간의 유일한 기능




에덴 동산의 타락 사건은 매우 치명적인 것이어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의 일그러진 자아를 실현하는 것을 자아의 정당한 기능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런 활동은 진행되면 될수록 우리가 속해 있었던 인간의 원래 위치를 생각나게 만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듯이,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의 자리이며, 바울의 비유대로 머리와 연결되어 있는 몸의 위치가 바로 그것입니다. 인류는 수많은 세월 동안 자신이 자율적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 거의 정신 착란 증세를 일으킬 만큼 몰두해 왔으나 기독교는 다시 칼로 베듯 선언합니다. '활동하는 자아'에 대한 환상은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 '수용적인 자아'로 돌아가라고 말입니다. 제 위치를 벗어나 다른 지위를 찬탈한 인간 자아에게 기회를 주기 전에 이것을 분명히 해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일단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고 완전히 동의한다면 그때는 그 이상이라고 믿어도 좋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담고 있는 그분을 그저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아주 밀접하게 생명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릇은 그 안에 담긴 물과 하나 되지 못하지만, 주께서 살아 계신 인격이듯 우리도 살아 있는 인격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담을 때 우리는 하나입니다. 우리는 포도나무와 가지처럼 주님과 연합되어 있고, 우리 안에 주님으로부터 흘러오는 수액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한편 바울이 들었던 비유는 우리로 한걸음 더 나아가게 해줍니다. 우리는 머리에 연결되어 있는 몸입니다. 몸은 전적으로 머리의 명령에 의존하며 머리는 몸이 없이는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 23절에서는 몸은 머리의 완성이라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능동적인 자아' 개념으로 한 바퀴 돌아온 셈입니다. 이 자아는 한 번 죽었고 부활했으며 승천하여, 본질적으로 자신을 다른 존재를 담는 그릇으로서 그리고 그 존재에 의해서 살아가는 자로서 영원히 인식하는 자아입니다. 그 존재는 우리를 통해 그의 삶을 살며,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드러냅니다. 우리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자유롭게 행동하며, 생각하고, 일하고, 웃고, 말하는 등 정상적인 사람이 정상적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활동들을 하면서 살지만 한 가지 다른 것이 있습니다. 신자는 불신자, 즉 스스로 수용성의 존재임을 확인할 수 없는 사람들과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인 그리스도께서..."(골 3:3-4).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인격으로서 움직이고 의지를 갖고 행동하지만,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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