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고통보다 깊은

폴 투르니에 지음 | IVP
서문: 고아에 관한 수수께끼 "고아가 세계를 주도한다."



이 책의 출발점은, 제네바의 피에르 렌취니크 박사가 「의학과 위생학」지에 발표한 "고아가 세계를 주도한다"라는 놀라운 제목의 논문이었다. 그는 세계사의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정치가들의 전기를 읽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 모두가 고아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이 놀라운 발견으로부터 '정치적 권력 의지의 기원에 관한 새로운 이론'을 이끌어냈다. 정서적 좌절로 인해 생긴 불안정이 이 아이들에게 이례적인 권력 의지를 불러일으켰으며, 이러한 의지로 그들은 정치계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세계를 변화시키고', 가능한 한 크게 성공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말이다.



나는 태어난 지 두 달만에 아버지를 잃고 다섯 살 때 어머니마저 잃은 고아이기에 이 논문에 특히 더 관심이 갔다. 그 때는 아내가 죽은 직후였기 때문에, 지금 생각하니 세 번째로 고아가 된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항상 내 자신이 평화적이고 타협적이라 생각해 온 나는, 혹시 무의식적으로라도 전혀 평범치 않은 권력 의지에 이끌렸을 수도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나는 정치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지만, 학창 시절에는 정치적 사안에 상당히 민감했다. 최근에 전차를 타고 가다 우연히 옛 친구를 만났는데, 두 정거장을 지나는 동안 즐거웠던 옛 시절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나누던 그 친구가 먼저 내리면서 길에 서서 나를 향해 외쳤다. "우린 모두 자네가 언젠가 스위스 대통령이 될 거라 장담했었다네!"



어쨌든 나는 의사가 되었고 의술은 '제 4의 권력'이라고 불리울 만큼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내 소명은 단순히 의술만은 아니었다. 렌취니크 박사에게 나의 종교적 소명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가 한 말을 기억한다. "위대한 종교 지도자들 역시 고아였네!" 모세는 버려진 아이였으며, 부처 역시 고아였고, 마호메트는 한 살도 되기 전에 부모를 여윈 사람이었다. 어떤 사람이든지 신의 이름으로 말하라는 부르심을 느끼고, 자신이 신의 대변인으로서 말하는 것을 사람들이 경청한다면 그에게 어떤 권력 의식이 생길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철학자로서 진리를 가르칠 때도 그런 의식이 생길 수 있다. 고아였던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장 폴 사르트르의 저서 『말』을 보면 위대한 설교자와 철학자가 줄곧 어떤 특권을 누려 왔는지, 그리고 그것이 단순히 그들의 영감 있는 가르침 때문만이 아니라 지도자로서의 자질 때문임을 알 수 있다. 공자는 한 살 때 아버지를 잃었고 루소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데카르트는 한 살 때, 파스칼은 세 살 때 각기 어머니를 잃었다.



결국, 무의식적인 권력 의지가 대다수 저명한 인물들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그들이 이 의지로 하나님과 사람들, 문화에 봉사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는 좋은 면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 사이에 의견 일치를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자신을 지고한 진리의 수호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타협적이며 관용적일 수 있겠는가? 그래서 종교 전쟁과 이데올로기적 혁명이 가장 맹렬한 싸움에 속하는 것이다. 신학적 광기는 이러한 오랜 역사를 표현한다. 권력에 대한 갈증은 이 세상의 위대한 인물들을, 또한 우리 각자를 가장 고귀한 행동으로 이끌기도 하고 가장 비열한 행동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



1장 창조성으로 이어지는 상실

"좋은 날씨를 정말로 즐기려면 그 전에 나쁜 날씨가 오랫동안 계속되어야 한다."



렌취니크의 글을 보충한 정신 분석학자 앙드레 에이날 교수는 자신의 글에 "고아와 연관시켜 본, 상실에 관한 정신 분석학적 고찰"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나는 이 논문을 열정적으로 탐독했다. 이 글은 정신 분석학이 명철하고 지혜롭게 이용되기만 한다면 고아의 삶을 변화시킬 수도 있는 정서적 기제를 이해하는 데 얼마나 유익한지를 보여 주었다. '상실'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여, 본 논의에 매우 새로운 차원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고아는 한 부모나 모두를 상실한 사람이다. 하지만 인생에는 다른 '상실'이 많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고통이 존재하는가!



여기서 끌어낼 수 있는 추론은 분명하다. "모든 사람이 고아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고아로 태어난다. 고아는 단지 인간의 근원적인 경험을 다른 사람들보다 좀더 강렬하게 겪을 뿐이다." 그렇다. 이것은 우리 모두와 관련이 있는 상실과 유한성의 경험이다. 우리가 직면해야 하는 인생의 모든 시련과 연관되는 것이다.



렌취니크 박사는 고아들의 사례를 통해 권력 의지를 언급한 반면, 에이날 박사는 창조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창조성을 부여받은 정치가가 지도자가 된다." 권력 의지의 역할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도움이 되는 힘 정도로 여기는 것이다. "삶이란 변화이며 인간은 변화를 두려워한다. 그렇다면 지도자는 사람들이 변화에 적응하도록 돕는 사람이다. 그것은 항상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에 관한 문제다." 과학계에서도 천재는 새로운 개념을 발견하는 사람이며, 이는 주로 창조적 직관의 기능이다. 그래서 에이날 박사가 제시한 창조성을 발휘한 인물의 예를 살펴보면, 렌취니크의 목록보다 예술가나 작가들이 훨씬 더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사별, 손실, 상실의 과정과 창조성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확신한다고 말한다. 창조적인 예술가들 가운데 고아의 비율이 높은 것을 보면 깊은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사생아였고 바흐는 고아였다. 몰리에르, 라신, 스탕달, 보들레르, 카뮈, 조르주 상드, 키플링, 에드가 엘런 포우, 단테, 알렉상드르 뒤마, 톨스토이, 볼테르, 바이런, 도스토예프스키, 발자크 등도 모두 고아였다.



역사적인 예들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다. 창조성이라 하면 우리는 먼저 르네상스를 떠올리게 된다. 매력적인 명칭, 그리고 그와 결부되는 온갖 귀중한 산물들로 인해 우리는 르네상스를 일종의 황금기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 시대 전문가인 콜레지 드 프랑스의 장 들뤼모는 이 시기를 역사상 가장 불길하고 무서운 위기에 처한 시대 중 하나로 묘사한다. 르네상스는 터키족, 페스트, 무장한 패거리들의 약탈, 마녀 사냥, 잔인한 종교 전생의 위협이 있던 시기였다. 카톨릭과 개신교 신자들 모두가 묵시적 종말이 임박했다고 생각했다. 공포가 전 유럽을 휩쓸었지만, 근대 사상의 기초가 세워지고 생산적인 과학적 방법론이 발전하며 예술가들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은 것은 바로 이런 절망스러운 분위기에서였다.



마찬가지로 그리스 사상의 최고 전성기였던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는 아테네의 전성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시대는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비참하게 패하여 운명의 종말을 고한 이후였다. 예레미야가 등장한 시기도 예루살렘을 파괴하려는 외세의 침략이 임박할 무렵이었다. 이사야 선지자의 노래가 나온 것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절망적인 포로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으며, 에스겔이 마른 뼈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외친 것도 그 때였다. 예수님 또한 가장 가혹한 정권기인 외세의 야만적 점령기에 태어났다.



우리는 질병, 노화, 죽음, 상실, 인생의 갖가지 시련에 부딪힐 때 우리 자신의 깊은 관심사 앞에 홀로 서게 된다. 우리는 여기에 어떤 의미가 들어 있는지, 아니면 이런 불행이 일련의 운명적인 사건일 뿐인지 묻는다. 가장 엄청난 불행과 가장 귀한 축복 사이의 관계, 그 낯설고 혼란스럽고 부당한 연관성에 대해 곰곰이 생각할 때도 우리는 혼자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다소 불편한 감정을 느끼면서도 이 둘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즉 개인의 삶에서든 국민 전체에게든 인간에게 닥친 불행과 그들이 누리는 유익, 그들의 발전과 창조성이 관계가 있다는 것을 어떤 식으로든 의식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가 인과 관계임을 시사한다면, 그로 인해 제기되는 문제가 얼마나 어렵고 복잡하고 위험하고 무시무시하기까지 할 것인지도 모두 느끼고 있다. 고통이 결국 유익을 가져온다고 생각하면 고통에 대항해 힘껏 싸우고자 하는 우리의 결의가 약해지지 않겠는가?



2장 위장된 축복?

"고통은 그 자체로는 결코 이로운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시련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는가이다."

최근 몇 세기 동안 물질적 결핍에 대항하는 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져 승리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삶의 시련과 실패 앞에서, 그리고 질병과 죽음 앞에서 영적 상실감이 커져 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이것은 또한 서구의 비기독교화로, 내적 삶과 신앙심의 고갈로, 삶의 의미 상실로, 고통과 죽음 앞에서의 더욱 심한 좌절로, 리즈만이 말하는 '군중 속의 고독'으로, 그리고 리쾨르가 말하는 '산업 사회의 권태'로 귀결되었다. 번창하는 이 물질주의 세상은 건강과 부와 성공을 치켜세우며 고통과 상실의 가치를 무시했다. 반면에 종교계는 고통과 상실의 미덕을 일깨우다가 지나치게 비약하여 큰 위험에 빠질 여지가 있다. 여하튼 모든 종류의 상실에 필사적으로 대항하는 불신자 진영과, 단념을 강조하는 신자 진영이 나뉜 것 같다. 엄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유익을 위해 고통을 가한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심지어 무신론자들도 진보를 위해 인간이 고통당하는 것이 자연과 운명의 법칙이라며 종종 막연하게 생각한다.



물론 여기서 어떤 철학자도 풀지 못한 악의 기원에 관한 문제를 다루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어릴 때는 선과 악이 뚜렷이 구별되는 것처럼 보인다. 부모와 교사들은 어린아이들에게 이 점을 인식시키고자 최선을 다한다. 전설과 동화는 용감한 사람들과 악의 화신 같은 인물을 어김없이 대치시킨다. 그러나 결국에는 이러한 환상이 깨지고, 우리는 악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심지어 악은 우리의 가장 고상한 행위 안에도 교묘하게 스며들어 있다. 사랑 안에 숨겨진 이기심이 얼마나 자주 속박이나 학대로 바뀌어 버리는가! '선행' 속에 얼마나 큰 자만심이 들어 있을 수 있는가! 가장 이타적인 정치사회 운동 속에 얼마나 많은 증오가 도사리고 있는가!



예수님은 인간 정신의 무의식적 영역을 꿰뚫어 보실 수 있었다. 그분은 '의인'의 죄를 준엄하게 비판하셨다. 그 죄는 겉으로는 덕의 형태를 취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이 견지에서 복음과 현대 심리학이 일치한다. 우리가 자신의 생각이나 행위의 동기를 조사해 보면, 우리가 숨쉬는 공기에 들어 있는 산소와 질소처럼 최상의 것과 최악의 것이 뒤섞여 있다는 것을 즉시 알게 된다. 성경은 그 사실을 선포하고 우리 경험은 그것을 확증한다. 예수님은 알곡과 가라지 비유에서 이 둘이 섞여 있음을 상기시키시며 추수할 때까지는 둘을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선과 악 사이에는 그 어떤 혼동도 있을 수 없다. 혼합은 있을 수 있으나 혼동은 있을 수 없다. 알곡은 하나님이 뿌린 것이고 가라지는 '원수'의 소행이다. 가라지 씨에서 어떤 곡식의 이삭도 나오지 않으며, 알곡에서 어떤 가라지도 자랄 수 없다. 선은 선에서 나오며 악은 악을 낳는다. 악이 선의 원인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실 혹은 고통과 창조성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언뜻 보기에 그것은 선과 악의 관계로 여겨진다. 그러나 조심하라. 관계와 원인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성숙하고 발전하고 더욱 창조적으로 변했다면, 그것은 상실 자체 때문이 아니라 시련 앞에서 적극적으로 반응했기 때문에, 즉 올바르게 싸웠으며, 도덕적으로 극복했기 때문이다. 도덕적 견지에서 선과 악은 사물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늘 인격 속에 존재한다. 사물과 사건은 행운에 속하든 불행에 속하든 그냥 존재하는 것일 뿐, 도덕적으로 중립적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것에 반응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어떤 사건을 통제할 수 있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를 도와주는 사람들과 함께 우리의 반응에 책임을 진다. 여기서 자유의지라는 논쟁적 주제를 철저히 규명할 의도는 없지만 우리가 사건에 반응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할 때 거기에는 이미 그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그 시점에 우리는 자유로운가, 그렇지 않은가? 그것이 문제다.



끝으로, 나는 지금까지 직업 경력을 통해, 사람이 심각한 정신적 충격의 결과를 외부의 도움 없이 스스로 극복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었다. 상실을 별로 겪지 않은 특권은 퇴보를 의미하지만 사랑의 도움이 없는 상실은 파국으로 끝나고 만다. 인간 정신에서 상실이 열매를 맺게 하는 결정적 요인은 사랑이다. 그것이 바로 내게 일어난 일이다. 내 운명을 바꾸고 고아라는 불리한 조건에서 해방시켜 준 것은 나를 입양한 가정과 그리스어 선생님, 그리고 내 아내와 다른 많은 사람들, 무엇보다도 옥스퍼드 그룹 친구들의 진정하고 인격적인 사랑이었다. 이 모든 것에서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그분은 그분의 사랑을 전하는 도구로 많은 사람들을 쓰시어 나에게 도움의 손길을 베푸셨다.

그렇다. 의사인 내가 환자를 진료하면서 깊이 감동받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아프거나 시련을 당한 사람이 내게 속사정을 털어놓았다고 하자. 앞서 고아의 사례에서 살펴보았다시피, 어떤 반응은 역사 가운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고, 어떤 반응은 실패한 삶으로 끝날 것이다. 또한 적절한 시기에 적절히 주어진 도움은 한 사람의 인생 행로 전체를 좌우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눈덩이 효과(snowball effect)'와 같아서, 용감하게 행동하면 새로운 힘과 희망이 솟아나고 다음 번에 더 쉽게 승리하게 된다. 반면 좌절하게 되면 한 번 좌절할 때마다 계속 더 움츠러들게 된다.

3장 승리인가, 패배인가?

"치료의 기회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해도 성장할 기회, 인생의 성공을 거둘 기회는 남아 있다."

환자 앞에는 늘 두 가지 가능성이 기다리고 있다. 회복될 것인가, 아닌가? 시련 속에서 성장할 것인가, 아닌가? 환자에게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면, 의사에게는 두 가지 임무가 있다. 의사는 치료 행위를 하며, 또한 파스칼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환자가 자신의 병을 선용하도록 도와야 한다. 의사라는 직업에 '치유와 인격 성장을 돕는 임무'라는 인도주의적 의미가 부여되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한계 상황'에 빠진 사람들을 늘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한계 상황이라 함은 병이나 다른 불행이 갑자기 그들의 일상에 침범하여 자신의 운명과 대면하게 되는 긴급한 순간이다. 사별, 신체 장애, 결혼 생활의 갈등과 같은 다른 상실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은 우리 자신의 고통보다 더 견디기 힘들다.



나의 친애하는 동료 의사들이여, 과학적 객관성의 벽에서 빠져나와 환자에게 인격적인 방식으로 말하라. 그대의 삶에서 가장 어두웠던 시간들, 그대가 오랫동안 치러야 했던 투쟁, 그대의 저항, 그대가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도와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라. 그것은 행복한 경험이기도 하다. 서구 문명권에 밀어닥친 심리적 장애의 큰 파도는 전문적인 심리치료사 홀로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내가 의학계에서 목격하듯, 우리 시대의 불행은 많은 진보를 가져다 준 전문화가 아니라 전문가들이 점점 더 폐쇄적으로 활동한다는 사실이다. 내가 주창한 '인격 의학'은 또 하나의 전문 분야가 아니다. 이 의학의 태동을 위해 심리학, 사회학, 신학, 철학 지식을 의사 양성 과정에 보태면 된다. 환자는 의사가 보여 준 지대한 관심에 감동한다.



진료와 관련된 아주 세부적인 사항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치료는 생물학적인 현상, 그러니까 생리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