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만큼이나 관심 있게 보아야 할 교회 밖 풍경
란 D. 뎀시 지음 | 요단
대개의 글들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의 지역적 분포 및 외형적 특징들을 잘 지적하고 있으나 교회에 오지 않는 사람의 종교성에 대하여는 아무도 언급하질 않았다.
제1장 교회 밖 풍경 1
- 신앙생활의 세속화 현상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현대화와 도시화로 인하여, 세상풍경은 대단히 빠르게 변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많은 교회들은 세상의 풍경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며, 혹시 안다고 해도 고작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하여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는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다. 굳게 닫힌 교회본당은 교회 안의 사람을 교회 밖에서 신속하게 일어나고 있는 변화로부터 고립시키고 있다. 만약 미국사회에서 교회들이 지속적으로 좋은 영향을 주려고 한다면 교회들은 교회 울타리 너머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는 사회풍경의 변화를 인식해야 한다.
그 변화에 반응하여 정신적, 영적 풍경의 변화도 함께 일어나는데 우리는 이 책에서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영적인 풍경변화의 한 부분을 면밀히 조사해 볼 것이다. 그것은 교회 밖 신앙에 관한 것이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신앙심을 가질 수 있을까? 이런 신앙심이 생길 수 있었던 환경은 지난 한 세기동안 세속화의 물결을 타고 우리 사회에서 발전되어 왔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세속화 현상을 신앙의 소멸 또는 쇠퇴로 정의를 하고 있으나 그것은 실상 신앙의 소멸이 아니었고 신앙의 변형이었다. 종교란 사회의 변화에 직면하여 그 변화에 순응하며 변모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로버트 로어가 지적했듯이, "세속화 현상은 종교의 변화를 포함하는 것이지 사라짐을 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교회와 세속화 현상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야겠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이며, 미국사람이 교회를 바라보는 관점에 관한 이야기로서 그것은 "능력"의 원천을 비유로 한 것이다. 이 원천을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생각하시지 말기를 바란다.
아주 먼 옛날, 어느 언덕 위에 큰 성 하나가 있었다. 그 성은 큰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사람들은 자유롭게 성안을 들락날락 했다. 성벽들은 그 성안에 있는 능력의 거대한 원천을 보 존하고 있었다. 이 능력의 원천은 원하는 사람 모두에게 "삶의 의미"를 제공해주었다. 수세기 동안 성벽들은 이 능력의 원천을 보호해 왔다. 그래서 능력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곳으로 달 려갔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그 성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성벽들은 세월의 흐름을 막지 못하고 이곳저곳 무너져 구멍이 뚫렸다. 그 틈새로 능력의 원천은 들판으로, 개울로, 그리고 길로 새 어 흘러나갔다. 곧 그 능력은 주변으로 흘러나가 곳곳에 스며들었으므로 사람은 점점 그 성으 로 찾아오지 않았다. 사람은 무너져 나온 벽돌들을 주워다가 집을 짓게 되었고 심지어 다른 성들을 짓기까지 했다. 원래의 성은 이제 그 명성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 능력 은 어디든지 널려 있기에 더 이상 삶의 의미를 구하고자 그 성으로 가질 않았다. 사람은 어디 에 가서도 그 능력을 자신의 방법으로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미국사람의 인식이 바뀜에 따라 교회를 신앙의 공급처로 생각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교회가 기독교의 유일한 중심기관으로도 여기지도 않고 있다. 미국 사람은 종교는, 심지어 기독교의 신앙도 다른 원천들에서 터득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이 변형은 세속화로 간주될 수 있고, 다른 곳 -능력이 성 밖으로 흘러나와서 다른 곳으로 들어간- 은 사회변화의 세 종류로 구분될 수가 있다: 즉 문화적인 면, 기관 및 단체적인 면, 그리고 개인적인 면이다.
문화적인 면은 사회전반에 걸쳐 일어나고 있는 세속화 현상에 기인된 변화에 접하게 된다. 이 문화적인 면과 관련되는 변화는 사회적 가치관, 사회적 상징들, 국가적 신념, 사회의 응집력 등에 영향을 주게 된다. 문화적인 면에서의 세속화 현상의 과정들은 일반화와 비 신비주의로 나눌 수 있게 된다.
일반화 현상이란 이 지구촌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공통적인 가치, 공통적인 관계성, 공통적인 상징들, 그리고 누구에게나 다 통하는 사상들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사회적 노력을 말하고 있다. 지난 세월동안에는 기독교의 신앙만으로 순수한 미국사회를 하나로 하기에 족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으로 더 이상 안 된다. 미국은 외부로부터 다른 민족의 이민, 유입으로 그들이 갖고 들어오는 다른 문화, 종교로서 문화의 혼합그릇이 되었다. 이러한 일반화 작업으로 인해 신앙의 절대성의 문제가 생겼고 신앙의 상대성이 또한 생기게 되었다.
성곽은 한때 능력의 유일한 원천이었지만, 이제는 그 능력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서 더 이상 사람이 경외심을 가지고 찾는 곳이 아니다. "신비"를 잃어버렸다. 교회는 사람에게 의미를 주는 유일한 원천이 더 이상 아니며 그로 인해 예전 같은 존경심도 상실했다.
기관 및 단체적인 면은 교회에 관련된 것으로, 여기에서 가장 평범한 개념을 가진 교회에 관련된 미국의 기독교를 조사해 보고자 한다. 본 단체적인 면, 즉 교회에 관계된 여기에서의 세속화의 과정은 습관화, 쇠퇴현상, 분리의 과정을 통하여 연구해 보고자 한다.
습관화는 생명력을 상실하고 굳어진 기관의 고질적인 병폐이다. 교회사를 통하여 볼 때 교회는 기독교의 기본가치, 믿음, 가르침을 취하여 이것을 발전시켜 신경, 신조, 규칙, 규정, 성직자 세칙, 프로그램 등을 만들었고 결국 이것을 통하여 근본적인 기독교의 진리를 형식화, 제도화하게 되었다.
성곽이 낡아 무너져 내리는 것은 교회생활에서 습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습관화 현상은 생명이 없는 것을 나타내는데, 기쁨과 성령 없이 그저 교회에서 이 일 저 일을 하는 것을 말한다. 많은 교회에서 기쁨과 영이 없이 그저 돌아가는 것은 교회 생활에서 의미 없이 습관적으로 하는 일들 때문이다.
쇠퇴현상이라 함은 신앙의 기관인 교회에 나오는 사람의 숫자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 초자연적인 경험을 하기 위하여 쓰는 시간, 정력, 그리고 지출이 줄어드는 현상이며, 교회의 힘이 약해지는 현상이기도 하며, 실증을 요구하기 때문에 신앙의 신비한 경험이 없어지는 현상이기도 하고, 특수한 신앙의 의식이 점점 사라지는 현상이다.
개인적인 면의 세속화 과정은 바로 신앙의 개인화 과정이며 세속주의 그 자체이다. 신앙이 개인화되는 현상은 성곽에서 능력의 원천이 빠져나가 그 주변의 고속도로나 작은 골목길로 퍼져나가는 것과 흡사하다. 사람은 능력을 얻기 위하여 그 성으로 갈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어디를 가도 그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디를 가서 얻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사람의 개인적인 데 달렸다.
신앙의 세속주의란 한 개인의 신앙동기, 신앙경험, 또는 믿음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이다. 이런 세속주의가 미국에 편만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아주 적은 부분의 사람만이 자신을 전적인 세속주의자 또는 무신론자들이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자신은 어떤 면으로든지 신앙인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제2장 교회 밖 풍경 2
- 신앙생활의 개인화 현상"당신은 -신자든 비신자든- 교회나 회당에 가지 않아도 훌륭한 그리스도인 또는 유대교인이 될 수 있는가?"라는 1988년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불신자들(88%)은 물론 신자들(67%)도, 교회에 가지 않아도 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신앙의 개인화 현상은 전통적인 공공신앙의 변형인 것이지, 신앙의 부정은 아니다. 이 신앙의 변형된 관점이란 신앙은 그 모양이나 형식을 바꾸어서라도 현재의 변화무쌍한 문화에 적응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미국사회의 모든 구조의 발전은 개인화의 현상이 필요하다는 당위성이나 창조성을 조장해 왔다.
1778년 미국의 제헌국회에서는 미국 국민의 권리장전을 제정했는데, 두 번째 수정안에는 교회와 국가를 정식으로 분리하는 내용이 있다. 그럼으로써 두 가지 이슈가 생겨났다. (1) 종교의 이관, 즉 기독교가 사회생활에서 개인 영역으로 이관됨, (2) 종교가 공공사회에서 밀려난 후 크게 사회에 영향을 주지 못하게 됨이다.
두 가지의 경제적 양상이 신앙에 대한 개인화의 당위성을 부추겨 왔다. : 매스 미디어와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시장의 횡포이다. 사람들은 텔레비전, 비디오, 그리고 세계 웹사이트를 통하여 많은 예배의 형태와 신앙의 교훈들을 받아볼 뿐 아니라 그 중에서 제일 좋은 것을 마음대로 선택하고 즐기게 되었다. 30년 전만 해도 방송프로그램은 이단적이라고 했다.
신앙이 개인화로 되는 데는 이것을 떠받드는 세 기둥들이 있는데, 이 기둥들은 미국의 사회상에서 생겨난 문화적 형태의 기초 위에 서게 된다. 첫째, 사회가 세분화 과정을 통하여 신앙은 사회생활에서 개인적인 문제로 이관되었다. 오늘날 미디어나 법률상의 결정들은 신앙에 관한 주장을 사회에서 나오는 시시한 소리 가운데 하나 또는 부끄러운 소리 중에 하나로 전락시키고 있다. 둘째, 사회가 세분화되면서 종교는 예전에 가졌던 많은 책임과 역할을 상실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신앙의 개인화가 성공적으로 진행될수록 신앙은 가정과 함께 "냉혹한 세상의 은신처"가 되는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이럼으로써 신앙은 사회에 기여하며 공공이익을 증진하게 하는 일을 격려하는 예언자적 기능보다는 사랑 없는 사회에서 희생된 사람을 돌보아 주는 치료제 역할만을 하게 되었다. 셋째, 신앙이란 사적인 행동이 되어야 하고 사적인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다. 문제는 이렇게 개인적인 신앙활동만으로도 충분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교회의 출석이나 신앙의 공적인 실천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신앙의 세계관을 개인화로 변모시키는데 영향을 준 또 하나의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교회가 교인들로 하여금 그 당대의 세계관을 잘 소화하여 그들의 개인적인 신앙생활에 그 세계관을 적용하도록 도와주지 못한 데 있다. 교회는 공적인 세계관을 다음 세대로 넘어가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개인의 삶 속에서 그 세계관이 사회성을 지니며 실현되도록 도와줌으로 그 존재가치를 영구화하는 것이다.
제3장 희미한 스테인드글라스에 비친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의 신앙적 배경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많은 사람은 대학진학을 위해 일찍 집을 떠나 자기의 삶을 선택한다. 또한 부모에 대한 반발심리가 작용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가치를 소화하지 못하고, 자신을 방치함으로 교회의 출석도 중단하게 된다. 또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다른 종류의 사람은 교회와 자기들 사이에는 뭔가 통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전형적인 교회의 구성원 역할을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교회와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은 일반적으로 대학생활이 시작되면서 시작된다. 부모의 간섭이 사라지고, 또 어떤 젊은이들은 당분간이긴 하지만 부모의 "기대"를 일부러 끊어버린다. 이들이 종교를 버렸거나 반종교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새로운 생활의 시도의 과정은, 신앙이나 신앙생활의 활동들이 부모들에 의하여 주도되던 어린 시절의 생활이었다가 나중에 장성한 뒤에는 그 어린 시절의 것을 그만두고 새로운 생활의 경험을 해보려는 것이다. 이렇게 당분간 살아간다 해도 어느 시기에 가서는 다시 본 신앙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교회란 "완벽한" 사람의 기관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믿기를, 교회에 다니려면 교육을 받아야 하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야 하며, 그리고 전통적 가정적인 가치에 기반을 두어야 하며, 나아가 사회에 잘 적응할 줄도 알아야 된다고 한다. 이러한 잘못된 부분에는 교회도 책임이 있다. 오늘날 교회의 사역방향은 두세 자녀를 둔 가장 정상적인 부부가 있는 가정에 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리가 교회에 대하여 생각을 아무리 달리 해보려고 해도 달리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오늘날 교회는 신앙적으로나 또는 사회적으로 다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옛날 중세교회와 똑같이, 교회로부터 추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죄에 대한 꾸짖음과 그 죄인에 대한 사랑을 구별하는 것을 마땅히 배워야 한다.
미국인들은 대단한 소비자들이다. 미국에서 종교는 하나의 문화적인 소비재이다. 대형 할인점인 월마트에서 상품들이 판매되듯 교육과 의료활동도 거래가 되는데 이런 식으로 종교도 취급되어진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에서는 종교 활동이 활발하여 생동하는데, 이와는 다르게 영국에서는 정부에서 종교를 담당하므로 교회가 활발하지 못한 실정이다.
교회들은 우리 동네에서 흔해 빠진 것들이다. 우리는 친절한 교회를 찾고 있고, 우리 애들에게 좋은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교회를 찾고 있다. 사실, 우리 애들이 좋아하는 교회라면 어느 교회든 우리는 갈 것이다. 이와 같이 말한 사람은 리처드인데 그는 부인과 세 자녀를 두었으며, 지금 식구들이 계속 나갈 교회를 찾기 위해 "교회 쇼핑"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들은 실용적인 사람이어서 교회를 볼 때 실용적이거나 공리적인 각도에서 보는 것이다.
교회들은 교회들끼리 서로 경쟁을 하지 말고, 교회가 아닌 다른 기관들과 경쟁을 하여 그 기관에 속한 사람의 시간과 돈, 그리고 충성심을 얻으려고 해야 한다. 교회들은 지금 통신매체 기업들과 경쟁을 하게 되고, 유흥업계, 그리고 교양강좌나 취미 및 문화생활 같은 분야에서도 경쟁을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교회들이 위에 열거한 분야에서 경쟁을 벌일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당신이 교회에 처음 오는 사람이 어떻게 느낄까 이해하고 싶다면, 당신의 교회 전통과 전혀 다른 성당이나, 법당, 또는 최소한 당신의 교파가 아닌 다른 교파의 교회에 출석해보라.
나는 최근 미국의 주류사회가 영적인 부분에 급격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데에 적잖은 충격을 받고 있다. 서적에 많이 팔리고 있는 주제들을 보면 스캇 펙의 『끝나지 않은 길』(The Road Less Tra-veled), 게일 쉬히의 『역정』(Passages)과 『선구자』(Pathfinders), 그리고 최신에 나온 책, 『하늘의 예언』(Celestine Prophecy) 등이 그러하다. 영적인 데로 돌아오는 현상은 교회가 신뢰감을 회복하는 데 유익한 것이 되지만 역시 교회가 잘못하고 있는 데에 대한 비난의 소리를 높게 하는 것도 된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의 분류기관을 반대하는 사람 - "교회로부터의 탈출자"라고 할 수 있는데 한때 헌신했던 교회의 지도급 사람이었다. 그들은 교회의 깊숙한 내면을 너무나 많이 보았다. 그래서 교회가 온통 돈과 물질주의, 그리고 자체유지를 이상으로 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갇혀있는 사람- 이 갇혀있는 사람이란, 한때 교회를 다니다가 그들이 너무 구속과 제약을 당한다는느낌 때문에 교회를 그만둔 사람이다.
떠돌아다니는 사람- 이 사람은 교회사역의 중심으로 들어오지 않고 오직 예배만 드리고 가는 사람이다. 배우자나 친척들의 권유로 나오는 무관심한 사람과 책임 맡는 것을 두려워하여 교회의 요청을 미리 회피하는 변두리 사람이 있다.
쾌락주의자들- 일반적으로 초기 베이비붐 세대의 젊은 사람으로 교회와 교회에서 진행하는 활동들,그리고 헌신의 요구는 자신들의 삶을 위협하는 요소로 여기는 사람이다.
소외된 사람-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은 거의 이 범주에 속한다. 대부분 교회에서는 이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교회로부터 소외당한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 분류에 속한 '거절당한 사람'은 알게 모르게 교회로부터 파문, 멸시, 또는 무시, 그리고 차별대우를 통하여 왕따를 받은 사람이다. 이혼했다는 이유로, 또는 성실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도덕적, 사회적 굴레가 씌워져 교회에서 밀려난 사람이다. '무시당한 사람'은 교회에서 사역의 대상자 가운데서 빠진 사람이다. 결손부모, 독신남녀, 빈민층, 그리고 생활력이 없는 노인들이 이 그룹에 속한다. 또한 동성연애자들과 에이즈 환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