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저 너머에(스캇 펙의 아직도 가야 할 길)
M. 스캇 펙 지음 | 열음사
서문이 책의 제목을 『아직도 가야 할 길: 그리고 저 너머에』라고 지은 것은 나의 첫 번째 저서 『아직도 가야 할 길』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 지난 20여 년 동안 탐색해 온 여러 주제들을 한 데 묶었기 때문이다. '통합(synthesis)'이라는 말이 더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단어는 이 책이 목표로 하는 '넘어섬'의 의미를 담지는 못한다. 마무리 한다는 의미에 덧붙여, 나는 새로운 논의의 장을 만들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올리버 웬델 홈즈 주니어 판사가 말한 한 마디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나는 복잡성의 한 편에 있는 단순함에 대해서는 조금도 개의치 않지만, 다른 편에 있는 단순함을 위해서는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
그의 심오한 감성에 이끌려 나는 이 책을 3부로 나누었다. 1부 '단순함에 대한 저항운동'에서 나는 개인과 사회가 가진 병리현상의 근저에 있는 원시적이고 나태한 단순사고를 비판했다. 2부 '일상생활의 복잡함과의 투쟁'에서는 우리가 훌륭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되풀이해야 하는 복잡한 선택의 문제를 다루었다. 3부 '복잡성이 가진 또 다른 세계'에서는 적절한 지적과 감정적 대가를 치르고 났을 때 우리가 어떤 곳에 다다를 수 있는가에 대해서 썼다. 복잡함을 넘어선 '또 다른 세계'에는 궁극적으로 모든 존재는 신을 향한다는 사실을 겸손한 태도로 인식하게 되는 일종의 단순함이 존재하는 것이다.
제1부 단순함에 대한 저항운동1장 생각하기한 개인으로서 또는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우리가 직면하는 심각한 딜레마 중의 하나는 너무나 단순하게 사고한다는 것, 또는 아예 사고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는 단순히 우리가 갖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우리가 시급히 풀어야 할 문제이다. 진지한 사고가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점점 복잡해지고 있는 세상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결정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라도 진지하게 사고하기를 시작하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 모두 파멸로 끝나 버릴 가능성은 너무나 커보인다.
사고한다는 것은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며 결코 단순하지 않다. 사고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따라 가야 될 길 또는 방향이 있어야 하고, 시간이 필요하며,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이기에 그 길이 항상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과정을 거쳐야만 우리는 사려 깊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자주 인용되는 햄릿의 대사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는 인생의 궁극적이고 실존적인 문제이나, 나는 이 대사를 떠올릴 때마다 이렇게 바꾸고 싶어진다. "생각할 것인가, 생각하지 않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죄'란, 생각하기 싫어하는 게으름, 두려움, 오만 등과 같은 원죄의 복합적 의미이며, 그런 요소들은 인간의 잠재적 가능성이 극한까지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막아 버린다.
'이성이 진정한 자아를 갖도록' 한다는 것의 의미는 우리의 진정한 자아가 가능한 무엇이든 될 수 있도록 허용하며 가능성의 극한까지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의 핵심은 뇌, 더 구체적으로 전두엽을 신뢰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런 인체기관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뇌는 우뇌와 좌뇌로 나뉘어져 있는데 이 두 부분을 연결하고 있는 것이 섬유질로 구성된 흰색 물질인 코퍼스 캘로섬(Corpus Callosum)이다. 이 연결 고리를 제거한 뇌 분리 환자에 대해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면서 인식론의 영역에 괄목할 만한 진전이 이루어졌다. 좌뇌는 연역적 추리 활동에 관계되어 있고, 우뇌는 주로 귀납적 추리 활동에 관련되어 있으며, 우리 인간은 구체적인, 그리고 추상적인 두 가지 중요한 형태의 사고를 동시에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여성은 우뇌 지향성인 것 같고, 남성은 좌뇌 지향성인 것 같지만, 나는 남녀양성적 사고의 절대적 옹호자이다. 양성적 사고를 한다고 해서 남성성이나 여성성을 상실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남녀 공히 양성의 특성을 동시에 보이며, 이 경우 사고는 구체적이고 추상적인 실체를 통합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
일차원적인 단순사고를 정상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믿게 만들어 버리는 데는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끼치는 영향이 크다. 단순사고는 사회에 유행처럼 퍼져 있어서, 일부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정상적인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그런 것은 문화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문화가 낳은 규범들 중에서도 문화적 무질서를 만들어내는 규범들은 재고해 보아야 한다. 이들은 온갖 치장을 하고 있어서 매력적인 것으로 보이기도 하나 그 껍질을 벗기고 속으로 들어가 보면 곧 그 부정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그것을 부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성장을 저해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위선적 진실이나 분명한 거짓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심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우리를 조종하고 볼모로 만들어 버린다.
영국의 시인 테니슨의 말처럼 "진실을 가장한 거짓은 가장 사악한 거짓이다."
우리 사회의 여러 집단들이 만들어내는 가장 큰 거짓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목적은 항상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래서 행복하다고 생각되지 않을 때 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것은 물신주의와 광고가 만들어내는 거짓이다. 한 시대의 유행은 광범위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때로 단순사고의 과정을 거쳐 많은 사람들을 순응주의로 이끌 위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믿을 것과 믿지 않아야 될 것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것'이 무엇을 의미해야 하는 것인지 알기 위해 단순사고의 논리에 도전해 보아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은 비판적 사고를 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가장 우선되어야 할 일은 생각하고 학습해야 할 가장 중요한 대상이 무엇이며, 중요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우리 자신의 자존심, 두려움, 게으름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보다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는 일이다.
가장 보편적이고 때로는 가장 파괴적인 추론은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고정관념이다. 사실 추론이나 고정관념, 그리고 그에 따른 상투적인 분류방식에 너무 집착하게 되면 우리는 사실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길로 들어서게 되고, 사람들을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의 틀 속에서 바라보게 된다. 극단적인 경우 고정관념은 파괴적인 행동을 불러일으키거나 또는 잠재적인 파괴적 행위를 정당화시켜 줄 수 있는 가설을 만들어내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자신들이 속해 있는 교파만이 유일하게 신을 이해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신은 가장 본질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어떤 표지를 달고 있느냐에는 관심이 없다. 사람과 사물에 표지를 달고 이름을 붙이고 분류를 하는 데는 보이지 않는 위험이 항상 존재한다.
사고장애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는 '범죄적인' 생각에 빠져드는 경우도 왜곡된 사고가 아니라 단순하고 일차원적인 사고에서 비롯된다. 이런 사고 형태를 보이는 사람들은 항상 자신들을 희생자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 또, 시간에 대한 감각이 없는 사람들은 주로 현재의 시점에만 존재하며, 미래나 그들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에 대한 고려는 하지 않는다.
한편 범죄집단이 아닌 사람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한 측면은 소유권에 대한 태도이다. 자신이 그럴 권리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거나, 또는 그들의 재산을 침해하는 일을 정당화 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열등 콤플렉스'에 기인하며, 이들은 오히려 스스로를 무력한 존재, 심지어는 희생자라고 여기기도 한다. 자신들의 사고방식이나 삶의 방식에서 다른 대안을 찾아보는 일에 태만했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한다. 반면 '우월 콤플렉스'에서 기인된 자만심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자신의 인종적, 경제적, 가족적 배경 때문에 항상 1등을 해야만 된다고 믿는다. 그것이 비록 남들에게서 빼앗는 것이 될지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항상 최상의 교육을 받고, 좋은 직장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자신과는 다른 사람들이 그런 최상의 것을 원한다면 기분 상해하기도 한다.
물론 자신의 인생에서 최상의 것을 원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이 문제가 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는 동일한 권리와 기회를 주지 않으면서 차별이나 착취, 억압 등의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때이다. 이 모든 것은 단순사고의 부산물일 수 있다. 이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분모는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다. 때로는 우리가 올바른 생각을 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우리에게 해를 입히려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사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말하고 느끼며 진정한 주체적 존재가 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만약 우리가 주체적으로 생각하기를 선택한다면, 그에 대한 반발에 대비해야 한다. 우리는 평생에 걸쳐서 조금씩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선택의 문제이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당신이 생각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라는 말은 진실이다. 그러나 당신이 생각하고 있지 않는 것도 당신의 한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의 사고와 감정을 측정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우리가 아무 것도 알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꺼이 이해할 수 있는가의 여부이다. 이것은 자기성찰이면서 동시에 의구심을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의심해 본다는 것은 지혜를 쌓아 가는 출발점이다. 정신분석의로서 활동하면서 나는 많은 사람들이 어린 시절에 가졌던 확실한 신념에 고집스럽게 집착하고 있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그런 사람들은 확실성이 없다면 성인으로서 제 구실을 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마침내 의심과 불확실성이 나타나고 커다란 공허감을 느끼게 되었을 때, 그리고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그들에게 구원의 은총이 임한다.
우리는 무엇이든 생각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나 이 자유에는 우리의 사고와 감정을 훈련시킬 책임이 수반된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무엇을 생각하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우리 삶에서 최상의 것을 얻어내기 위하여 우리의 사고력을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스스로 물어야만 한다. 이를 위해 때로 속도를 늦추고, 시간을 내어 깊이 있게 생각도 하며, 명상과 기도도 해야 한다. 이것은 보다 의미 있고 효율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서 가야 할 유일한 길이다. 내가 좋아하는 기도에 대한 정의는 신에 대한 언급조차 없는 매튜 폭스의 정의이다. 그는 기도를 '인생의 미스터리에 대한 근본적 대응'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므로 기도는 사고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대응할 수 있기 전에, 근본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잘 생각한다는 것은 가장 근본적인 인간행위인 것이다. 또한 기도가 의미 있는 행위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나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폭동, 동성애, 낙태 등에서부터 빈곤, 질병, 악, 전쟁과 같은 복잡한 사안들에 대해 단순한 해석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이런 사람들은 모든 것에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손쉬운 해결책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주의와 지적 편협성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전체 상황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여러 차원의 측면들을 종합해 볼 수 있어야 한다. 잘 생각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의 차원에서 대상을 바라본다는 의미이다. '성실(integrity)'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전체, 완전, 완성을 의미하는 명사 'integer'이다. 성실하게 생각하고 궁극적으로 성실하게 행동하기 위해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단순한 환상과 추론을 뛰어 넘어 무엇이 빠져 있는지를 찾아내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만약 전체 그림에서 한 조각도 빠지지 않고 모든 부분들이 다 통합되었다면, 당신은 아마도 역설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모든 진실은 역설적이다. 반면 어떤 개념이 전혀 역설적이지 않다면 전체 중 몇 가지 측면을 통합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엄격한 개인주의 윤리가 그 한 가지 예이다. 나라는 존재는 단순한 한 개인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인 존재이다. 개인임과 동시에 개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진실을 추구한다는 것은 서로 분리되어 있고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 얽혀 있고 연관되어 있는 것들을 통합하는 것이다. 아마도 가장 신비스럽고 역설적인 진실 중의 하나는 인생이 우리에게 고통도 주지만 그 고통 뒤에는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이 수반된다는 점일 것이다.
역설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서로 모순되는 개념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양면의 진실 중 어느 한쪽을 부정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마음 속에서 서로 모순되는 생각들을 가지고 곡예를 하는 정신적 곡예술이다. 그러나 이해하기 힘든 사실 -예를 들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악은 선과 공존한다는 사실 - 을 부정하고 싶은 강한 충동이 일어날 때, 환상, 반쪽의 진실, 명백한 거짓을 구별해내는 과정에서 역설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리들 대부분은 역설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정도 차이는 지능지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고력의 연습량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가 역설적 사고 능력을 많이 사용하면 할수록, 그 능력은 더욱 더 확장될 것이다.
오래 전 읽었던 글귀처럼 "일단 우리의 정신세계가 진실로 확장되면, 그것은 결코 이전 의 상태로 되돌아오지 않는다."
2장 의식생각을 한다는 것은 더 의식적이 되는 것이며, 문제 해결의 선행조건이다. 그렇다면 의식이란 무엇인가? 또 왜 그것이 중요한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잘 알려진 명제가 있지만, 나는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의식은 결정을 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게 한다. 무의식은 의식의 표면 아래에 존재하며, 우리의 자연적 인지 영역을 넘어서는 내용에 대한 정보도 가지고 있다. 의식 아래에 은폐되고 의식되지 않는 것들을 우리는 알 수 없으며, 그래서 신비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의식은 계발 가능하다.
오랫동안 신경정신과 의사들은 '고정망상'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정신분열증 환자들에게 뇌전두엽 절제술을 해왔다. 수술 절차는 간단한데, 전두엽의 앞부분과 나머지 뇌의 연결 부분을 절단하는 것이다. 이 수술을 함으로써 가장 발달되어 있고 가장 인간다운 기능을 하는 뇌의 일부분의 기능을 없애 버리는 것이다. 이런 환자들은 분별 있는 판단력을 상실하게 된다. 수술은 그들의 고통을 없애 주었지만, 자아 인식의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정서적 반응 영역이 크게 제한되어 버리는 후유증을 남긴다.
인류학과 신경해부학에서 강력하게 제기되는 것은 인류의 진화 방향이 전두엽과 의식의 발달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성서의 신화도 인간 의식의 진화에 대한 많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 인간성에 대한 가장 복잡하고 다차원적인 신화 중 하나인 창세기 3장의 선악과 사건은 인간의 진화가 의식의 발달로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것은 단순히 죄의식이나 수치심보다 더 심오한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