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충돌하라
A.W. 토저 지음 | 규장
1부 세상의 비웃음과 따돌림을 두려워하지 말라1장 세상과 타협하며 미지근하게 살지 않는다지금 내가 당신에게 말하려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5:18)는 짧고 단순한 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 나는 내가 발견하고 깨달은 것만을 이야기하겠다. 또한 이것은 이 세상에서 복음주의적 교회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이 자리에서 다시 거론하는가? 그 이유는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을 우리의 체험으로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충만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나의 솔직한 판단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는가?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해야 한다. "하나마나한 얘기를 왜 굳이 하는가?"라고 물을지 모르겠다. 마귀는 선하고 정직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푸른 초장(草場)에 뱀이 있다고 겁을 주고 있다. 육신의 정욕을 따르는 이상하고 섬뜩한 사람들과 마귀가 성령 충만에 대해 완전히 잘못된 개념을 퍼뜨리기 때문에 우리는 겁을 집어먹고 "나 같은 사람은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없어. 그것은 신앙이 뜨거운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야"라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 같은 사람도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성령님이 계시다. 만일 성령님이 계시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靈)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성령 충만의 정도가 다를 뿐이지 모든 그리스도인들 안에는 성령님이 거하신다.
그런데 단순히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거기에는 우리의 성령 충만도 포함된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비정상적 상태이다. 성령 충만이 왠지 섬뜩하고 이상한 것이라는 편견은 우리 머릿속에서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 충만을 허락하시도록 하나님을 설득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우리의 성령 충만을 원하신다고 이미 선포하신 마당에 우리가 그분께 부탁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당신이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원한다면,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의에 굶주린 사람들을 대하셨듯이 당신을 친절하게 대하실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령 충만을 갈망할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성령 충만은 그저 머릿속을 스쳐가는 희망사항 정도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만큼 거룩해진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령 충만을 갈망하는 만큼 성령으로 충만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5:6)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배부른 자에게는 산해진미(山海珍味)가 다 소용 없고, 배고픈 자에게는 음식이 한없이 들어가지 않는가?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딱 한 가지이다. 그것은 '우리가 성령 충만을 갈망하지 않는 것'이다.
온유하고 겸손하고 친절한 성령님은 당신의 삶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성령님을 통하여 주인의 권리를 행사하신다. 당신은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원하지만 여전히 당신이 당신의 삶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닌가? 성령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셨을 때 그분은 무엇을 원하시는가? 그분은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또한 우리의 '자아'(自我)에서 나오는 모든 죄들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예를 들면, 그분은 우리의 자애(自愛), 자기의(自己義) 또는 방종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세상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길과 세상의 길은 함께 나란히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서로를 가로지르며 상대를 잘라버린다. 이 과정에서 마찰과 적대와 갈등과 심지어 핍박이 생길 수 있다. 교회는 세상의 적대적 태도를 두려워하여 움츠러들지만, 성령님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신다.
교회의 역사를 보라. 성령님의 뜻에 따라 거룩하게 살려는 교회는 언제나 핍박을 받지 않았던가? 한때는 교회가 세상을 향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3:6)라고 말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떤가? 오늘날 교회는 "제발, 우리는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면에서 당신들과 똑같습니다"라고 말한다. 오늘날 기독교가 그 많은 시간과 돈과 노력을 쏟아 부으면서 세상에 전하는 것은 무엇인가? 성경적 기독교와 세상을 섞어 놓은 기독교, 즉 '혼혈(混血) 기독교'를 전하지 않는가?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아시기 때문이다(롬7:18 참조).
성령 충만의 경험을 한 사람은 그런 경험이 있기 전에 누구나 '자기를 비우는 단계'를 거쳤다. 이 단계에서 그들은 불안, 동요, 그리고 공허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우리에게 불안과 공허감이 찾아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에 찾아오셔서 쟁기질을 하시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그분이 우리의 영혼에서 쟁기질을 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옥토가 되어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함이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나는 이제 성령 충만과 관련된 네 개의 성경본문을 제시하려고 한다. 이 말씀들을 붙잡고 깊이 묵상할 때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로마서 12:1-2너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는 말씀은 "너희를 빈 그릇으로 드리라. 다른 것으로 가득한 그릇이나 더러운 그릇을 드리지 말라"는 뜻이다.
누가복음 11:9,11-13교회의 역사에 이름을 떨친 수많은 성자, 개혁가, 선교사, 전도자, 및 목회자는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간구했기 때문에 성령 충만을 받았다. 그들은 "주여, 저를 비웠나이다. 저를 채우소서"라고 기도하여 큰 능력을 받아서 큰 일을 이루었다.
사도행전 5:32 당신은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한 것이 성령 충만에 대한 신학적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느끼는가?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학적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3:2 오직 믿음만이 성령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이다. 믿음은 '듣는 것'을 통하여 생기는데, 아무것이나 듣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님이 우리를 '점진적으로' 충만하게 하신다고 믿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분은 조금씩 우리를 충만케 하시는 것이 아니다. 성령님이 점진적으로 임하셨다는 기록이 구약성경에 나오는가? 그런 기록은 없다. 신약 성경에도 물론 없다. 그분은 한 번에 '완전히' 충만케 하신다. 그러나 이 말을 오해해서는 안된다. "한 번에 완전히 충만케 하신다"는 말이 신자에게 평생 단 한 번만 성령 충만이 주어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신앙생활하는 중에 성령 충만은 반복적으로 일어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
2장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한다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 이사야에게 주신 말씀이 이사야서 8장 13,14절에 기록되어 있다.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하나님의 백성은 앗수르의 침략을 목전에 두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몇몇 나라들과 동맹 관계를 맺음으로써 앗수르에게 대항할 궁리만 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았다. 오직 이사야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어떤 시대이든 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은 소수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위험과 재앙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이 세상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이 '거룩한 피할 곳'이 되어주실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한 이사야의 이름은 아직도 살아 있지만, 이스라엘과 동맹을 맺은 민족들의 지도자들의 이름은 모두 잊혀졌다. 여기서 이사야는 능력을 얻을 수 있는 비밀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내가 비밀이라 함은 이것을 알고 있거나 알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극소수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우리가 능력을 얻을 수 있는 비밀은 바로 '여호와를 거룩하다 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지 않으시면, 과감히 버려라.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절대적으로 선하고 옳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성경을 전한다. 개인적 체험없이 성경만을 아는 것은 하나의 지식으로 끝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마음 안에 모시려고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실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이신 하나님'(God as Christ)을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로서 이 땅에 오셔서 행동하고 느끼고 일하셨다.
엘리야는 아합 왕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여호와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왕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내가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나를 해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를 감옥에 가둔다 해도 나를 해칠 수 없다. 나의 재산을 강탈한다 해도 나를 해칠 수 없다. 나의 목을 자른다 해도 나를 해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것들은 나를 해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를 하나님에게서 영원히 떼어놓는 것만이 나를 해치는 것이다.
사람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라!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들을 추종하는 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또한 아첨에 넘어가지 말고 그들의 비판에 흔들리지 말라. 다만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들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칭찬하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그 분은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시다. 우리의 인생에서 그분이 해결하지 못하실 문제는 없다. 우리가 그분을 온전히 의지한다면 그분 이외의 어떤 다른 것도 필요 없다.
우리는 불쌍하게도 너무 무지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지혜가 되셨다. 우리의 지혜는 정작 중요한 일에서는 철저히 무능하다. 우리의 지혜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쓸데없는 일에 몰두하여 시간만 보내다가 세상을 떠나게 만들 뿐이다.
그리스도는 본질적으로 '뒤틀어진' 우리에게 의(義)가 되신다. 예수는 우리의 거룩함이 되셨다.(고전1:30)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의 영생이시기 때문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아는 것'은 '교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생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지만, 영원한 죽음은 하나님에게서 영원히 분리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모든 것이시다. 당신은 예수님을 찾았는가? 예수님이 당신의 주인이신가? 이제 예수님에게 당신을 온전히 바치지 않겠는가?
3장 깨끗한 인격으로 성령과 동행한다나는 '성령님과 동행하는 법'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 아모스 3장3절에 "두 사람이 의합(意合)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느냐."에 그 답이 내포되어 있다. 두사람이 동행하려면 최소한 몇 가지 중요한 점들에서 동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첫째, 그들은 가는 방향에 대해 합의해야 한다. 둘째, 그들은 목적지에 합의해야 한다. 셋째, 어떤 길을 택할 것인지에 대해 합의해야 한다. 넷째, 속도에 피차 동의해야 한다. 다섯째, 그들은 서로에게 동행할 의사가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이 원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예수님과 교제하는 것에도 적용된다.
신앙과 세상의 경계에 있는 회색지대에 속하는 문제들에 대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나는 "당신의 영적인 진보를 방해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버려야 한다"는 원리를 제시할 뿐이다. "존 스타인벡(John Stinebeck, 1902∼1968. 1962년 노벨문학상을 받았으며, 대표작으로 『분노의 포도』가 있다)의 책을 읽어도 좋을까?"라고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당신이 음란의 호수에서 헤엄치고 싶다면, 존 스타인벡의 책을 읽어라. 그는 외설의 원액(原液)을 그의 펜에 듬뿍 묻혀서 책을 쓴 사람이다. 그 원액이 배어 있는 책들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가 유명 작가가 되었을 뿐이다. 그는 음란한 사람이다. 나는 그의 책을 한 권 읽었지만, 앞으로는 읽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나의 마음이 그의 외설스러운 상상력이 만들어 놓은 어두운 뒷골목을 배회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혹시 당신은 "토저 목사님, 지금 목사님은 제가 이제까지 즐기던 것들을 끊으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건 좀 불공평한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제가 안 하면 이상한 사람이라고 비웃음을 당할 겁니다"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겁쟁이가 되어버렸는가?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야고보는 칼로 죽임을 당했으며, 사도바울은 목이 잘렸고, 요한을 제외한 모든 사도들이 순교했고, 요한도 결국 밧모섬에 유배되었다. 교회의 역사는 냉대와 핍박과 순교의 역사가 아닌가?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가 이런 교회의 역사를 뻔히 알면서도 사람들의 따돌림을 두려워하는가?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우리는 성경말씀 안에서 그분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범하기 쉬운 잘못 중의 하나는 묵상보다 연구를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머리로써' 성경에 접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으로써' 접근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 현재 교회의 문제는 '그리스도인의 진리'를 강조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을 강조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려면, 하나님이 주신 책을 깊이 묵상해야 한다. 우리는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늘 바쁘다. 그러나 나침반이 북극을 향하듯이 하나님을 향하라.
2부 성령의 힘으로 세상을 제압하라4장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권능을 받는다"너희가 권능을 받을 것이다"(행1:8)라는 이 짧은 말씀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제자들에게 주 예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이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초자연적 영적 능력은 그들의 내부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외부에서 그들에게 임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살아본 적도 없고 체험한 적도 없는 세계로부터 그들에게 찾아오게 될 능력이었다. 이 힘을 받을 때 우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