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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예수

마이클 프로스트 지음 | IVP
1장 진짜 예수님 일어나세요!



우리는 복음서 저자들이 제시한 원래의 예수님을 재발견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새롭고' 혁신적이라고 여길 만한 매우 놀라운 관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예수님을 바보라고 생각하는 것이 충격적인 관점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바보짓을 하는 그분을 복음서에서 발견한다(그것은 사실 기독교에서 가장 잘 지켜진 비밀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전설적인 특성에 익숙해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항상 엄숙하고 신비적이며 초연한, 그래서 거의 유령 같은 분으로 여기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정보에서 너무나 동떨어져서 실재한 인물에 대한 현실감을 잃어버렸다고 말하고 싶다. 예수님은 바보였다. 그리고 그분이 바보라는 사실이 그분을 가장 매력적이게 한다.



예수님을 바보, 다시 말해 비극과 파괴를 향해 가지만 새롭고 역동적인 삶의 방식을 고안하는 떠돌이 음유시인으로 가장 특징 있게 묘사한 사람이 바로 누가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함께 여행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자 그 여행을 헛되지 않게 만든 동료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에서 만나는 예수님은 항상 우리를 멀리 쫓아내신다. 그것은 그분이 혐오감을 일으키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을 초월한 분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그리고 그와 유사한 구절들)은 '경외'(awe)로 가장 잘 번역될 수 있다. 어떤 것에 경외감을 품는 것은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과 아주 다르다. 두려움은 사람을 쫓아내지만 경외감은 사람을 끌어당긴다.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던 것을 바로잡아 이미지를 새롭게 조정해야 한다. 예수님도 인간이셨다. 더할 나위 없이 인간적이셨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우리에게 영감과 격려의 거대한 원천이 되시며 정말 닮을 만한 가치가 있는 분이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이미지들 중 하나는 사실 복음서에 있다. 서정적인 갈릴리 바닷가가 배경이다. 죽음에서 일어나 다시 사신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신 것일까? 하늘의 광채로 빛나고 계신 걸까? 삶과 죽음의 비밀을 가르치고 계신 것은 아닐까? 아니다. 그분은 그저 아침 식사 때 먹을 생선을 굽고 계신다. 상상할 수 있겠는가? 바위에 찰싹거리는 파도와 지글거리며 익고 있는 생선 냄새를…. 예수님은 귀를 간질이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조그만 장작불 옆에 쪼그리고 앉아 아침 식사를 위해 생선을 굽고 계셨던 것이다!



2장 여기 탐식자와 주정뱅이가 있다



이스라엘 선지자들은 전통적으로 무섭고 정열적이며 거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 특유의 문화인 물질주의와 불신앙을 거부했으며 이스라엘의 본래 이상으로 돌아갈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금욕적이고 엄숙한 근본주의자들이었다. 사실 예수님은 이런 특성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사역 기간 동안 무시당하고 최악의 경우 모욕을 당했던 이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선지자'의 임무를 받았다고 자임하는 모든 사람들의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틀에 맞지 않았다.

세례 요한과는 달리 예수님은 금욕주의자가 아니셨다. 그분은 먹고 마시는 것과 유대 문화의 중요한 부분인 수다스럽고 소란한 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좋아하셨다. 그러니 누가 탐식자와 술주정뱅이를 진지하게 고려하겠는가? 누가 창녀, 걸인, 강도, 반역자들의 친구를 현 체제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존재로 여겼겠는가? 이 모든 이야기들은 우리가 예수님을 진지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예수님이 종교-정치 지도자에게 기대되는 모습과 너무 달라 사람들이 그분은 거의 바보 취급했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들을 속였다는 말은 아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강요된 기준을 깨뜨렸고 그 결과가 꽤 뜻밖이었던 것이다.



3장 어릿광대 예수님



예수님이 바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거기엔 두 가지 측면의 의미가 있다, 첫째, 성공, 위신, 영향력이라는 이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예수님은 (비록 훌륭하지만) 실패자이자 잘못된 길로 간 바보였다고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측면은 더욱 도발적이다. 사실 예수님이 그분의 사역을 강화하기 위해 바보 행세를 했다는 것이다. 나는 둘 다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바보가 되어야 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바울은 분명히 여기서 예수님의 어리석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당신도 예수님의 어리석음을 논증할 수 있다. 이 세상의 기준에 의하면 예수님은 거의 이루신 것이 없다. 그는 개인적으로 재산을 전혀 모으지 못했고 두루두루 여행을 다닌 것도 아니었다. 예수님은 교육을 많이 받지도 않으셨다. 자신의 이름을 물려줄 아들을 남기지도 않으셨다. 그분은 짧은 인생을 평범하거나 어떤 경우에는 매우 달갑지 않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 소비했다. 예수님은 백성들에게 소외당했으며 보통 범죄자들을 처리하는 방식에 따라 로마 당국에 의해 고문 받고 젊은 나이에 처형되었다.



이 점에서 예수님은 바보였으며 그분이 전한 평화와 선의의 메시지는 그 분의 비극적 삶에 비추어 볼 때 무척 애처로워 보일 정도로 순진함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세련됨의 부족은, 단순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관계하는 방식에 신선한 솔직함을 제공한다.



선지자로서 예수님은 의도적이고 전문적인 바보 역할을 하셨고 이는 매우 놀라운 효과를 발휘했다. 전문적인 어릿광대는 궁정에서 독특하고 영향력 있는 일원이었다. 그는 말할 수 없는 것, 즉 궁정의 어느 신하도 감히 입 밖에 낼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다. 그는 자연스럽게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었고 군주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면서 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국사의 방향을 지시할 수 있었다. 그것은 사실상의 권력이었던 것이다. 왕이 궁정의 고상한 분위기 속에서 자기만의 생각이나 확신에 빠져 있을 때, 변함없이 왕의 인식을 재구성하고 상황을 보는 다른 방법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주는 사람은 바로 그 어릿광대다. 물론 그는 재치와 웃음이 주는 친밀함 속에 자신의 메시지를 은폐하여 그런 성과를 달성했다.



역사를 통틀어 전문적인 바보들이 단순한 풍자가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그들은 그 사회의 '기형아들', 정신적으로 뒤처진 사람들, 육체적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들, 감정적으로 상처가 있는 사람들을 잔인하고 불공평하게 대했다.



예수님은 전혀 이와 같지 않으셨다. 사실 예수님은 어느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한 일을 하셨다. 그분은 공동체에서 소외되고 억압받는 구성원들을 껴안으시고 그들을 존엄과 자기 존중으로 채우신 것이다. 그러나 여러 면에서 예수님은 대단한 어릿광대였다. 나는 뮤지컬 "가스펠"(Gospel)을 통해, 예수님과 제자들이 억압받는 사람들의 삶에 명랑함과 유머를 불어넣으며 여행하는 일단의 음유시인들이라는 시각을 얻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순한 풍자가가 아니시듯 단순한 어릿광대도 아니시다. 마태복음 21:12의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부패한 환전업자들을 쫓아내신 유명한 사건은, 예수님이 상당한 내적 힘과 끗끗함을 가진 사람, 결단력을 가진 사람, 진지하고 사려 깊은 믿음의 사람임을 잘 드러내고 있다. 우리가 이런 예수님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에게 커다란 폐를 끼치는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자연적인 바보와 의도적인 바보를 구분했는데, 예수님은 재미있게도 양쪽 모두에 해당되신다. 자연적인 바보로서 예수님의 단순함과 순진함은 신선하고 자극적이다. 그 이유는 그 분이 자기가 속한 사회의 위선과 냉소적인 자기 이익 추구 방식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단순한 정직성은 매력적인 동시에, 사람들을 격분 시킨다. 예수님은 또한 당시(그리고 지금 우리 시대)의 틀에 박힌 지혜를 슬쩍 피하면서, 오히려 거기에 일격을 가하는 전문적인 어릿광대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정치 또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천치가 아니셨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었다.

인간사의 궁정에 있는 어릿광대처럼 예수님은 우리가 자기에게 매몰되어 현실과 유리되는 것을 허락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가 자신의 권력에 취해 영향력 있는 지위에 열중할 때 우리를 나무라신다. 그분은 반복적으로 우리의 실패와 단점을 상기시킨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이렇게 행동하시는 것이 개인적인 이해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그분의 어리석음이 가진 가장 큰 영향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분은 오직 진실과 정의에 관심이 있으셨다. 개인적으로 내게는 이것이 예수님의 사역에서 가장 충격적인 측면이다.



이것은 조정, 강압, 종속에 익숙해진 세상에서 정말로 어리석은 짓이다. 매력있고 쾌활하셨던 예수님에게는 사고의 명확성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었다. 예수님은 미움 받는 사마리아인을 영웅으로 만드심으로써 인종적 편견을 솜씨 좋게 공격하셨다. 예수님은 여성들을 믿음의 본으로 자주 세우심으로써 그들의 위상을 높이셨다. 그분은 주변의 권위적 구조를 비판하시며 저돌적인 용기와 대담한 자유분방함을 보여 주셨다. 그분은 세상을 어떻게 다른 눈으로 봐야하는지를 가르쳐 주신 이상하고 놀라운 분이셨다.



당신은 예수님에게서 귀여움 이상의 명랑함과 매력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우리의 피곤하고 냉소적이며 독선적인 세계가 삶을 바라보는 방식을 재구성할 수 있는 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만약 당신의 힘이 소진되었고 당신이 돈보다 적게 가지고 있는 것이 오직 영적 확신이라고 느낀다면, 바보 예수님은 당신이 찾고 있는 바로 그 재구성의 힘을 제공해 주실 수 있는 분이다.



4장 재구성의 기술



나는 '재구성'(reframe)이라는 용어를 이미 몇 차례 사용했으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다. 복음서의 예수님은 계속해서 실재를 재구성하셨다. 재구성은 사건의 의미를 변화시키기 위해 사건을 인식하는 틀(frame)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의미가 변하면 그에 대한 사람의 반응과 행동도 변한다.



다윗 왕에게 나단이 든 비유를 기억하는가? 고대 중동 왕국의 권력에 심취한 궁정의 맥락에서 보면, 첩을 왕의 침실로 끌어들이는 것은 수용할 수 있는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 여성의 헌신적인 남편과 그의 아내에 대한 사랑의 맥락에서 본다면 그것은 비열하고 이기적인 행동이 된다. 나단의 이야기는 자신의 행동이 가져오는 진정한 결과를 볼 수 있도록 돕는 재구성을 제공한다.



의미의 재구성이란 무엇인가? 나는 청소를 안 하고는 못 배기는 여자와 상담했던 상담자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녀의 증상은 너무 심해, 가족들은 그녀와 함께 살기 위해 수많은 예외를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도 카펫에 난 발자국에 대한 그녀의 태도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카펫 위에 사람이 걸어간 자국이 남아 있는 것을 볼 때마다 그녀는 꼭 사람들이 발을 내디딘 부분을 다시 진공청소기로 청소했다.



당신은 직장에서 집으로 돌아와 마치 징검다리를 밟고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현관문에서 가장 가까운 거실 의자로, 또 다음 장소로, 온 집 안을 껑충껑충 뛰어다니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 강박증에 빠진 여자는 그것이 가정을 파괴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상담을 받으러 왔다. 상담자는 그녀에게 눈을 감고 발자국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카펫을 상상해 보라고 했다. 그녀는 기쁨을 느꼈다. 아마 상상속 광경에 미소를 짓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이것이 당신이 전적으로 혼자라는 것을, 그리고 당신이 돌보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느 곳에도 없음을 의미한다는 걸 깨달았으면 좋겠어요"라고 치료사가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매우 괴로워 보였다. 그 때 상담자는 그녀에게 카펫 위에 몇 개의 발자국이 있는 것을 상상하고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제 다시 그녀 주위에 있음을 보라고 말했다. 이 훈련으로 그녀는 강박증에서 자유로워졌다.



이것이 의미의 재구성이다. 그녀를 가족으로부터 소외시킨 광적인 결벽증의 의미가 바뀐 것이다. 내용, 즉 카펫 위의 발자국은 그대로 있지만 발자국에 부여된 의미가 변한 것이다.



많은 경우 예수님은 오늘날 양극화 반응(Polarity response)이라고 부르는 것을 끌어내기 위해 이야기나 비유 형태를 사용하신다. 양극화 반응은 반대 방향으로 급격하게 되돌아가게 하기 위해 특정 입장을 과장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교회에서 정말로 의기소침한 어떤 사람을 대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나는 시험삼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당신은 의기소침해 있군요! 당신은 가장 우울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에요. 당신은 평생동안 그런 상태로 있었을 거예요. 당신은 이처럼 우울해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경험도 해 보지 못했어요. 절대로요." "아니에요, 평생 동안은 아니라고요. 지난주에 이러저러한 일이 일어났을 때 저는 기분이 아주 좋았어요." 그들의 입장을 과장함으로써 당신은 양극화 반응을 얻어낼 수 있다. 예수님은 몇몇 이야기를 통해 이와 같은 효과를 내셨다.



예수님은 이 기술을 반복해서 사용하셨다. 다음 장에서 보게 되겠지만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느냐는 질문에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 즉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이 파하러 오셨다고 생각한 바로 그 율법에 충실하라고 대답하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은 극적인 양극화 반응을 이끌어내셨다.



재구성 기술의 또 다른 변용은 '처방'이다. 예수님도 몇 번 직선적인 처방을 내리신 적이 있었다. 한번은 한 부자 청년에게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하셨다. 강력한 재구성을 이끌어내신 것이다. 매우 효과적이고 영감을 주는 처방은 상황을 완전히 재구성할 수 있다. 요한복음 5:2-18에는 매우 우스꽝스러운 멍청구리짓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바로 베데스다 연못가에 수년 간 누워 있었던 한 가난한 절름발이 남자에 관한 것이다. 그는 혼자서 몸부림치며 기어서 연못 안으로 들어가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당연히 항상 누군가가 그보다 먼저 도착했다. 이 광경이 그려지는가? 연못 옆에 38년 동안이나 누워 있었다니 불쌍하기 그지없다. 예수님은 옆에 오셔서 그에게 낫고 싶으냐고 물으셨다. 그리고 쉽게 따를 수 있는 처방을 내리셨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즉시 그는 일어섰다. 예수님은 이 남자의 상황을 재구성하셨다. '만약 네가 옆으로 기어서 연못까지 갈 수 있다면 나를 신뢰함으로써 일어날 수는 왜 없겠느냐?' 이것은 너무 단순해서 효과를 일으키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는 훨씬 더 복잡한 계획에 거의 40년 동안이나 매달려 왔던 것이다.



기적들이 하나님 나라가 임재함을 증거하기 위해 행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수님이 그분이 치료하는 사람들 안에 더 큰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재구성의 전략을 사용하실 수 있다고 믿는다.

또 다른 예로, 내가 '뜻밖의 의견'(occasional comment)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정기적인 만남에서 남자는 매주 내 친구목사에게 자기 아내에 대해 투덜거렸다. 처음에는 아내의 좋은 점을 보게 하려고 노력했으나 거의 효과가 없었다. 그 다음에는 아내에게 모질게 구는 것을 그만두게 하려고 애를 썼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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