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행동을 극복하기 위한 내가 누구인지 이제 알았습니다
닐 앤더슨 외 지음 | 죠이선교회
이 책을 읽기 전에미국의 권위 있는 메리암-웹스터 사전(Merriam-Webster's Collegiate Dictionary, 10th ed.)에 따르면, "중독(addict)"이란 "어떤 일에 습관적으로 또는 강박적으로 자신을 몰입하거나 거기에 항복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앞으로의 논의를 위하여 우리는 중독자를 '습관적인 죄에서 스스로 벗어날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이해하자.
또한 메리암-웹스터 사전은 "자유"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자유로운 상태 혹은 그러한 속성; (1)선택이나 행동에 있어서 어떤 강요, 강압, 강제가 없는 상태. (2) 예속, 구속, 타인의 지배 등으로부터의 해방, 독립. 이 정의는 자유의 두 가지 면을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선택의 자유이다. 선택의 자유가 주어질 때, 우리는 자칫 방종이나 율법주의 중 어느 한 극단으로 치닫기 쉽다. 자유의 다른 한 면은 해방으로서의 자유이다. 해방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다. 그들은 이제 그리스도께 구속된 그리스도의 종이다.
들어가는 말 중독성 행동을 보이는 사람들은 왜 파멸의 길에 머물러 있는가? 술이 모든 것을 파괴하는 줄 알면서도 왜 계속 술을 목구멍에 들이붓는가? 혈관에 주사바늘을 꽂는 사람들은 그것이 분명 죽음의 길인 줄 알면서도 왜 그만두지 못하는가?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의 음란 사이트에 계속 접속하는가? 이 중독자들은 자신의 중독 상태를 즐기는 것일까?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중독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잠시 동안은 흥분을 즐기지만, 다음날 아침이면 참담함을 느낀다.
술이나 마약에 중독 되기 쉬운 성향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중독성 행동은 선천적 요인 때문이 아니라 성장과정에서 일련의 결정들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그들과 같은 부모, 가정, 이웃, 환경에서 자랐다면, 지금 그들이 겪는 어려움을 바로 우리가 겪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알코올 중독자는 어떤 사람들인가? 가장 대표적인 오해는, 중독자들이 주로 3류 시민이며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노동자일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러나 약물 중독자들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다:
성별 분포 : 75% 남자, 25% 여자
직업별 분포 : 45% 전문직 또는 관리직, 25% 사무직, 30% 노동직
학력별 분포 : 50% 대학교 재학 또는 졸업자, 37% 고등학교 재학 또는 졸업자, 14% 기타
세속 프로그램은 위험한 행동에 초점을 맞추려는 경향이 있다. 프로그램에 참가한 사람들은 스스로 실패자라고 느끼며 자신의 중독행동을 없애는 데만 집중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냥 성 중독이 되고 마약을 하고 과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삶의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01. 왜 이렇게 행동하는가?중독행동으로 힘들어하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정체가 공동체 가운데서 발각되는 것을 두려워하며, 일단 발각되면 날벼락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이유로 이들은 신앙생활과 재활에 더 어려움을 겪는다. 흔한 경우는 성중독이다. 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정평이 나 있는 복음주의 신학교의 학생 가운데 60%가 성생활에 죄의식을 느낀다고 한다. 또한 카지노, 도박 그리고 정부에서 운영하는 복권 등이 확산되면서, 이제는 술보다 도박에 중독된 사람이 더 많아졌다. 그런가 하면 많은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도박이나 음주를 금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음식을 (너무 많이) 먹으면서 그것을 교제라고 부른다. 우리 염려를 냉장고에 맡겨버리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건강한 방법이 아니다. 사람들은 왜 이런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가?
내가 엔지니어 공부를 할 때, 한번은 우리 부부가 공군 대위부부와 저녁을 같이하게 되었다. 대위의 부인은 술이 독하지 않다고 불평을 했다. "술맛이 밍밍해요." 그 부인은 무언가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독한 술이 필요했다. 자신의 양심을 무디게 하고 자신의 문제와 책임을 내려놓지 않고는 재미있게 지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언젠가 나는 독신부모들의 모임에 초청을 받아 간 일이 있다. 거기서 한 독신 어머니를 만났는데, 이 여인은 다른 모임에서는 술도 담배도 하지 않는데 그 날은 술 담배를 하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주위의 압력 때문이다. 우리가 어떻게 분위기의 압력을 이겨내고 방종에의 유혹을 떨쳐내느냐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얼마나 안전감을 느끼고 우리의 기본적 욕구가 얼마나 충족되느냐에 달린 것이다. 젊은이들 가운데 혼자 설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견고한 정체성을 확립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또 어떤 사람은 권위에 대한 반항을 나타내려고 중독 행동을 한다. 이런 젊은이들은 대개 역기능 가정이나 율법주의적 종교 환경에서 자란 이들이다. 인간 관계가 배제된 규율은 반항을 낳는다. 무조건적인 사랑이나 용납으로 아이의 반항적인 태도를 고쳐보려는 시도는 처음에는 종종 거부당한다. 아이는 부모나 권위를 가진 어른들의 사랑이 진짜인지를 시험하는 것이다. 아이의 태도를 바꾸려는 내 동기가 순수하다면, 나의 신념을 타협하지 말고 아이를 더 온전히 사랑하라.
이밖에도 "일이 과중하여 견딜 수 없다." "아무도 나를 이해해 주지 않아." 등등, 사람들은 이런저런 삶의 압박에서 벗어나려고 술을 마시거나 마약에 의지한다.
한편 불행하게도, 인생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환경을 바꾸도록 노력해야만 희망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결과 그들은 소유하고 조종하는 사람이 되며, 그 주위 사람들은 공동의존(codepen-dent) 관계를 보인다. 그러나 아주 능란한 사람이라도 삶의 모든 상황을 세세히 통제할 수는 없으므로 그들은 자신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 술이나 다른 감감제(desensitizer)를 사용하게 된다. 이들은 분노와 적의에 찬 사람들이다. 삶의 시련과 환난을 통과하면서 성장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이것이 중독의 가장 큰 비극이다. 인격의 성장이나 정서적 발달이 멈추어 버린 것이다.
심한 치통이 닥치면, 오직 이 통증을 없애는 것만 생각하게 된다. 정치도, 가정도, 세계 복음화도 생각할 수가 없다. 선량한 많은 사람들이 처방된 약에 중독될 정도로 의존하는 이유는 고통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진통제를 내다버리라는 말은 아니다. 때때로 진통제는 필요하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약에 과도하게 의존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의 통증을 견디고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은 성장에 필수적이다.
사람들이 술과 마약을 선택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든지 그들은 모두 다음 세 가지 중에서 적어도 두 가지 원인을 공유하고 있다. 첫째, 그들의 기본욕구가 정당한 방법으로 충족되지 못했다. 둘째, 그들은 삶의 다양한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셋째, 그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갈등과 영적인 갈등의 문제를 책임 있는 방식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 같다.
02. 중독에 이르는 길이스라엘의 왕 다윗과 헷족속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 사이의 사련(邪戀)은 타락의 단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다윗이 어떻게 타락해 갔으며(삼하11장), 그리고 그의 아들 암논이 어떻게 타락했는지(삼하13장) 살펴보자.
다윗이 보니 밧세바는 "심히 아름다워" 보였다. 첫 단계는 그냥 자연스런 욕구로 시작된다. 이성에게 끌리는 것은 아주 자연스런 일이다. 이런 자연스러운 충동은 우리의 즐거움을 위한 것으로, 우리가 도덕적 경계선을 넘지 않는 한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자연스런 끌림이 정신적인 강박증으로 바뀌면 우리는 경계선을 넘어 두 번째 단계에 이른 것이다. 암논은 누이 다말을 향하여 강박적인 사랑(이 사랑의 실체는 다름 아닌 정욕이다)에 빠졌다(삼하 13:1,2). 우리가 유혹을 당할 때 하나님은 피할 길을 주신다.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강박증에 사로잡히고 정욕에 떨어진다.
이렇게 되면 세 번째 단계인 정욕의 표출은 피할 수 없다. 누구든지 이 단계에 도달한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계획을 이미 마음에 갖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성은 사라진다. 다윗은 밧세바와 동침을 했고 죄를 교묘히 은폐하기 위해 다윗은 그 남편 우리야를 전쟁에서 불러들여 집에 보냈다. 그리고 첫 계획이 실패하자 우리야를 위험한 전선에 투입하여 전사하게 했다. 암논 역시 부당한 방법으로 누이를 끌어들여 겁탈해 버렸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자신을 제어하던 그것을 증오하게 되는 것이 타락의 마지막이다. "그리하여 암논이 그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전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한지라 암논이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 하니"(삼하 13:15). 독주를 다 들이켜 빈 병이 되면, 알코올 중독자는 스스로 혐오감에 치를 떨며 병을 벽에다 집어던진다.
사람들이 처음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하고, 마약을 하거나 잘못된 관계에 빠져들 때, 그들은 정신적, 정서적 한계선과 대인관계에 대한 일정한 기준선(baseline)을 의식하고 있다. 우울에 빠진 사람들은 그들을 짓누르고 있는 이 슬픔을 잊어버리기를 간절히 바라는데, 술이나 마약이 이럴 때 도움이 된다. 그리고 당장 효험이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약효는 곧 사라진다. 그 다음날 아침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학교에서나 일터에서 감당해야 할 삶의 모든 책임과 스트레스가 몰려오기 시작한다. 그 사람의 양심에 따라 죄책감, 두려움, 수치심 등이 일어난다. 이제 그들은 간밤의 황홀한 경험이 아주 나쁜 것임을 깨닫고 다시는 이런 상황에 빠지는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아침에 눈을 떠서도 여전히 어제의 황홀한 경험을 회상하며 또 그런 기회가 오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다.
중독의 첫 단계는 습관화이다. 가끔 마시는 술, 도박, 성적인 유희 또는 마약이 습관이 되고, 정서적으로 의지하게 되고, 결국엔 나를 붙들어주는 버팀목이 된다. 이것은 육신적 방어기제이다. 문제는 그 처음의 흥분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술과 마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중독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은 처음에 경험한 흥분 상태에 이르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아무리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해도 처음의 흥분 상태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그럴수록 우울증은 더 깊어가고, 그만큼 흥분의 기대도 높아간다. 오래지 않아 그들은 기준선 정도의 경험에만이라도 이르기를 소원하지만, 이것도 점점 환상처럼 멀어져 간다. 의지력을 상실한 중독자들은 가정과 직장에서까지 책임 있는 삶을 살아갈 능력을 빼앗기고 만다.
약물 중독으로 인해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자연히 사회적인 관계를 단절하게 된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이거나 알리고 싶지도 않으며, 중독자로 드러나 멸시와 비난을 받는 것도 두렵기 때문이다. 중독자들은 직장을 잃고, 건강을 해치고, 결혼이 파경에 이르기까지 기다린다. 그제서야 그들은 결국 문제를 인정하고 그렇게 고대하던 도움을 받기로 하든지, 아니면 파멸의 대열에 끼어 죽음의 길을 간다. 성 중독은 좀 다른데, 이들은 몇 년 동안 자기의 중독증을 숨길 수 있다. 성 중독자들은 마음속으로 중독행동을 계속할 수 있다. 한 번의 성적인 이미지나 경험은 이 습관을 수년간이나 지속시킬 수 있다. 음란물을 세 번 보는 것은 실제 성행위를 한번 하는 것과 동일한 정도의 지속적인 기억을 남긴다고 한다.
내가 목회를 할 때, 교인 중에 아주 신실한 여성도가 상담을 요청했다. 한 번도 가정의 비밀을 나눈 적이 없던 그녀의 20년 침묵이 깨어졌다. 그 여인은 더 이상은 그런 상태로 살 수 없었던 것이다. 남편의 알코올 중독은 가정과 결혼생활을 파탄지경으로 내몰았다. 그 여인이 이렇게 오랫동안 문제를 안고 기다렸다는 사실이 나는 더 놀라웠다. 20년간, 그 아내는 어떤 면에서 남편의 음주벽을 도운 것이다. 남편의 뒤처리를 하고, 깨끗이 씻겨 침대에 뉘이고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시켰다. 가족의 명예를 지켜야했고, 가장이 직장을 잃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었기에 거짓말과 위장이 사용되었다. 온 가족이 이 연극을 하면서도 그들은 정신적, 정서적, 육체적 고통에 시달렸다. 그들은 수치심을 누르고 침묵 가운데 살았다. 이들 협력자(enabler)는 거짓말과 위장으로 위기를 넘기며 살아남는 법을 배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중독행동에 빠져 있고, 거기서 벗어나려는 의지가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그를 직장 상사에게, 교회에, 그리고 범법행위가 있다면 경찰에게까지 데리고 가야 한다. 내가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주의를 끌기 위하여 못된 짓을 저지르는 어린아이와 같다. 징계는 우리 사랑의 증표이지, 배반이 아니다. 목사님과 면담을 청하라. 당신은 도덕적 지원과 영적 조언이 필요하다. 알코올 중독자의 아내나 자녀들을 돕는 기독교 단체를 찾아보라. 중독자와 당신을 중재하고 간섭해줄 전문가의 도움을 구하라. 그들은 자신의 병증을 가지고 우리를 조종하려고 한다. 그들의 요구나 중독증에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요구에 따르는 순간, 그의 멍에는 곧 나의 멍에가 되는 것이다.
03. 모든 중독의 궁극적인 원인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안에서 용납되고 인정받았으며 안전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생각하고 선택하는 능력은 창조에 당연히 포함된 요소였다. 그러나 우주에는 악이 존재하고 있었다. 사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왜곡하여 하와를 유혹했다(창3:1-6). 처음 죄를 짓던 날, 아담과 하와는 육체적으로 죽지 않았지만 영적으로는 죽음을 맞았다. 물론 육체적인 죽음도 죄의 결과로 결국에는 맞게 될 것이었다. 아담은 하와에게 책임을 전가하면서, 자신의 타락에 하나님도 일조하신 게 아니냐는 듯한 말을 흘렸다. "사실 하나님이 이 여인을 창조하여 제게 주시지 않았습니까?" 자신이 잘못하고서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습성은 그 후로 타락한 인간 본성의 변치 않는 태도가 되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려면 우리 자신의 회피하고 방어하는 습관을 깨뜨려 버려야 한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은 인간이 어쩌다 이 지경으로 추락했는지를 설명하는 유일하게 설득력 있는 가정이며, 이 추락에서는 복음만이 유일한 소망이 될 수 있다. 사단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반박하는 사상을 퍼뜨리고(고후10:5), 그 속임수에 넘어간 인간들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비웃는다. 하나님의 영원한 도덕기준을 따를 수 없는 타락한 인생들은 두려움, 죄책감, 수치심을 스스로 처리해야 하는데, 그 수단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숨거나 아니면 하나님을 공격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 독립하여 사는 사람은 아무도 거룩한 삶을 살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들 대부분은 사실, 자신의 부적절함이 드러날까 봐 두려워한다(요3:20-21).
많은 경우 중독자들은 도움이 필요하고, 이런 도움은 '간섭'이라는 형태로 오게 된다. 아담은 숨었지만 하나님은 그가 도망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이것이 인류 최초의 간섭이다. 이 방법이 제대로 성공할 경우 놀라운 결과를 얻는데, 중독행동으로 갈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이중성, 즉 속마음의 상태와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의 불일치를 고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간섭이나 그에 따르는 자백은 겨우 시작단계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오랫동안 위선 가운데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