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이름으로
헨리 J. M. 나우웬 지음 | 두란노
프롤로그다가오는 21세기 크리스천 리더십에 대한 강연 요청은 나를 약간 불안하게 했습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다음 달에 대해 물어도 어쩔 줄 모르겠는데 어떻게 다음 세기에 대해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학계에서 목회 상담, 목회 신학과 기독교 영성 신학 교수로서 20년을 지낸 후에 나는 깊은 내적 위협 을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25년 간 성직 생활을 했건만 기도도 제대로 못하고, 다른 사람들로 부터 동떨어져 있는 편이며, 긴급한 문제들에게만 사로잡혀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모든 사람 들이 내가 아주 잘하고 있다고 했지만 나의 성공이 나의 영혼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고 말하는 내면 의 소리를 나는 들었습니다.깊은 묵상 기도의 부족과 나의 외로움과 가장 긴급해 보이는 일들에 항상 걷잡을 수 없이 말려드는 것은 바로 성령이 점차적으로 억압당하고 있다는 신호가 아닌가 하고 자신에게 묻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영적 죽음을 일컫는 아주 적합한 심리학적 용어가 바로 '탈진'(burnout)입니다.이런 와중에서 나는 계속, "주님, 주님께서 제가 가기를 원하시는 길을 보여 주시면 따르겠습니다."라 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정신 장애인 공동체 라르쉬의 설립자인 장 바니어(Jean Vanier)를 통해 말 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 가운데 가서 그들과 함께 살아라. 그러면 그들이 네 심령을 치유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하버드에서 라르쉬로 옮겼습니다.당장은 그런 삶이 나의 영적 탈진에 대한 해결책으로 보여 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르 쉬에서의 새로운 삶은 나에게 미래의 크리스천 리더십에 대해서 말할 수 있도록 새로운 언어를 제공 해 주었습니다. 나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면서, 복음서의 두 가지 사건 곧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사건(마4:1-11)과 베드로를 목자로 부르신 사건(요21:15-19)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1장 현실지향에서 기도로유혹 : 현실적이 되라
정신 장애인들과 한 집에 살게 되면서 맨 처음 나를 놀라게 한 일은, 그들이 나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이 그때까지 내가 해왔던 많은 업적들하고는 전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과거에 상당히 실제적이라 입증되었던 기술적 방법들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현실적인 불안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험이 내가 새로 시작한 삶의 가장 중요한 경험이 되었으며 많은 면에서 아직도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이로 인해 진정으로 내가 누구인가를 다시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깨어지고 상처 입고 철저하게 꾸밈없는 이 사람들은 나로 하여금 현실 지향적 자아, 즉 무엇인가 할 수 있고 보여 줄 수 있고 증명할 수 있고 일을 풀어 나갈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자아를 버리게 만들었습니다. 대신, 꾸밈없는 자아, 그 속에서 전적으로 긴장감을 풀고 일의 성취에 관계없이 사랑을 주고받을 줄 아는 그런 자아를 다시 갖게 했습니다.
나는 미래의 크리스천 지도자들은 완전히 현실에 부적절하며 자신의 연약한 자아밖에는 줄 것이 없는 그런 모습으로 이 세상에서 있도록 부름 받았다고 깊이 확신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하거나 이루어 놓은 일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 가운데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셨기 때문에 또한 모든 인류의 삶의 진정한 근본인 그 사랑을 전하도록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닥쳤던 첫 번째 시험은 현실에 충실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돌들을 빵으로 바꾸라는 것이었습니다. '아, 내가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하고 얼마나 소원했던가요! 아마 나는 거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고,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을 살려내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돌을 빵으로 변화시키는 지극히 현실지향적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그는 '말씀 선포'라는 자신의 사역을 고수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사역을 하면서 경험하는 가장 큰 고통은 자존감이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은 자신들이 거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음을 점점 더 인식하게 됩니다. 출석교인들은 점점 줄어드는 현실이며, 심리학자들이나 정신과 의사, 가정생활 상담자나 의사들이 목회자 자신들보다 더 신뢰를 받고 있는 것을 자주 보기도 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세속적인 사람들은 큰소리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살 수 있어. 하나님도 필요 없고 교회도 목사도 필요 없어.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단 말이야.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렇게 하도록 더 열심히 해야 해. 문제는 믿음이 아니라 자신감이 없는 거야. 만일 아프다면 유능한 의사가 필요할테고, 가난하다면 능력 있는 정치가가 필요하지. 또 기술적 문제가 있다면 유능한 엔지니어가 있어야 하고, 전쟁이 일어났다면 능력 있는 협상가가 필요하겠지. 하나님, 교회, 목회자가 지난 수세기 동안 무능력의 골을 메워 왔지만 오늘날 그 골은 다른 방법으로 메워지고 있어. 그러기에 우리는 실제적인 문제에 영적인 대답은 더 이상 필요 없어."
그러나 우리 시대에 이룩된 모든 위대한 성취 이면에는 절망의 심연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효율성과 제어력이 아주 중요한 열망의 대상이 되어 있지만, 반면에 고독감, 소외감, 우정과 친밀감의 결핍, 깨어진 관계, 권태감, 공허감, 우울감, 자신을 무용지물로 깊이 자학하는 감정 등이 성공 지향적인 세계에 살고 있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너무도 분명하게 이런 부르짖음이 들려옵니다.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이 있습니까? 나를 진정으로 생각해 줄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울고 싶을 때 나와 함께 있어 줄 사람이 있습니까?" 어디에서 치유책을 찾아야 할지 모르는 채, 심각한 영적, 도덕적 장애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새로운 크리스천 리더십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미래의 지도자는 이 시대에 자신은 부적절하다고 분명히 선언하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질문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목자가 될 것을 명령하시기 전,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또 물으셨습니다. 세 번째 도 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우리는 기독교 사역의 가장 핵심된 질문으로 이 질 문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적절하지 못하면서 도 진정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예수님을 한번 봅시다. 세상은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의 메시지는 힘과 능률과 통제력을 추구하는 세상에 의해 거부당했습니다. 그렇지만 볼 눈이 있고 들을 귀가 있고 또한 이해할 마음을 가진 몇몇 제자들에게 영광스런 그 몸의 상처를 가지 고 나타나셨습니다. 이처럼 거절당하고, 알려지지도 않았으며, 몸에 상처를 지녔던 예수님은 단순히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오직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 랑을 전하는 데만 관심을 가지셨던 그분이 유일하게 하셨던 질문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였습니다.외로움과 절망으로 가득한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들, 즉 용서하고 진정으로 생각하고 손을 내밀어 치유해주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너무나도 필요로 합니다.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는 예수로 성육신하신, 즉 '육신의 마음'을 가지신 하나님의 그 마음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입니다.너무 단순하고, 어쩌면 진부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자신이 아무 조건이나 제한 없이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런 무조건적이고 무제한적인 사랑을 사도 요한은 제1의 사랑이라 불렀습니다. 그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라고 하면서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 하셨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요일 4:19)우리에게 의심과 좌절, 분노와 원망을 남기는 사랑은 제2의 사랑으로서, 우리가 부모, 스승, 배우자 그리고 친구들로부터 받는 인정이나 애정, 연민, 격려와 지원 등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런 사랑은 얼 마나 제한적이고 깨어져 있거나 깨어지기 쉬운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제2의 사랑의 긴장과 스트레 스가 크게 느껴지지 않을 우정이나 결혼이나 공동체는 없습니다. 종종 우리 일상생활의 유쾌한 일들 뒤에는 포기, 배신, 거절, 단절, 손실 등을 동반하는 숱한 상처들로 골이 져 있습니다. 이 모든 상처 들은 제2의 사랑의 어두운 측면이며 우리 인간의 가슴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어두움을 드러내 고 있습니다.제2의 사랑은 제1의 사랑의 깨어진 모습일 뿐이며, 하나님은 그 안에 아무런 어두움이 없는 제1의 사 랑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은 정말 좋은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어두움이 없는 하나님의 제1 의 사랑이 구체화된 것입니다. 그분의 마음에는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 마음으로부터 "네 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안다는 것과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곧 참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지식을 가지 고 살아갈 때 어느 곳을 가든지 치유, 화해, 새로운 삶과 새로운 희망을 심어 주는 일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훈련 : 묵상기도 현실에 적절하려는 욕망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제1의 사랑을 아는 지식 안에 거하려면 신비주 의자가 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신비주의자란 하나님의 제1의 사랑 안에 자신의 존재 의미를 깊 이 뿌리 내리고 있는 사람입니다.미래의 크리스천 지도자에게 가장 필요한 훈련은 바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 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계속 물으시는 그분의 임재 안에 거하는 훈련일 것입니다. 그것은 묵상기도의 훈련일 것입니다. 묵상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긴급한 문제들만 쫓아다니는 것으로부터, 또 하나님의 마음이나 자신의 마음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지도자 들은 지속적인 묵상기도를 통하여 사랑의 목소리를 거듭해서 듣는 훈련을 해야 하며, 그들에게 어떤 이슈가 주어지든지 대처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도 그 사랑 안에서 찾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2장 유명세에서 목회로유혹 : 멋있게 보이라 라르쉬에 가게 되었을 때 나의 개인주의는 철저히 변화되었습니다. 신부라는 사실이 개인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자격증이 되어 주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시간마다 나의 행방을 알기 원했 으며 나의 행동에는 일일이 책임이 따랐습니다. 같이 사는 장애인들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오늘 밤 집에 계세요?"라는 말이었습니다. 한번은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장애인 중 한 사람인 트래버 에게 인사도 없이 여향을 떠났는데 목적지에 도착해서 첫 번째로 걸려온 전화를 받아 보니 바로 울먹 이는 트래버였습니다. 그는 "헨리, 왜 우리를 떠났어요? 다들 당신을 보고 싶어해요. 제발 돌아와 주 세요"라고 울면서 말했습니다.예수님이 받았던 두 번째 유혹은 정확하게 뭔가 굉장한, 그에게 열렬한 환호를 안겨다 줄 그런 일을 해보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그러면 천사들이 손으로 너를 붙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해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스턴트맨이 되기를 거부하셨습니다. 그분 은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해 보이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이 굉장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활활 타는 석탄 위를 걷지도, 불을 삼키지도, 또한 사자의 입 속에 손을 집어넣는 등의 일을 하지도 않으 셨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오늘날의 교회를 살펴보면, 목회자들 사이에 개인주의가 만연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경 쟁 사회의 분명한 한 측면인 스타 의식과 개인주의적 영웅주의는 교회에서도 전혀 낯선 것이 아닙니 다. 거기에도 역시 모든 일을 혼자서 할 수 있는 자립적인 사람들이 단연 돋보입니다.과제 :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신 후에,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 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의 사랑을 확신하신 후에 예수님은 그에게 목회의 사명을 주십니다. 이 시대 문화 통념상 우리는 이 말을 마치 베드로가 영웅적인 사명을 행하도록 보 냄을 받은 것처럼 매우 개인적인 차원에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목양에 대해 말씀하실 때는 순한 양 떼를 돌보는 용감하고 외로운 한 목자를 우리에게 상기시키시는 것이 아닙니 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예수님은 목회란 공동체적이며 상호 보완적 경험인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둘씩 짝지어 보내십니다(막6:7). 우리는 우리가 둘씩 짝지어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계속 잊어버립니다. 우리는 혼자서 복음을 전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공동 체 단위로 함께 복음을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바로 하나님의 지혜가 있습니다.당신은 아마도 혼자 여행하는 것과 함께 여행하는 것이 얼마나 현격한 차이가 있는지 이미 오래 전에 경험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혼자 있을 때 예수님께 진심으로 신실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거듭 거듭 경험했습니다. 나는 함께 기도하고, 당면한 영적 문제를 함께 이야기하며, 나의 몸과 마음과 영 혼이 늘 순수하도록 나를 도전할 형제와 자매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치유하 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시고, 진리를 말씀하시는 분도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시며, 주님도 내 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란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선포할 때 이 사실은 너무나 도 뚜렷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함께' 사역을 할 때는 언제든지 우리가 우리들의 이름이 아니라 우 리를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더욱 쉽게 인식시킬 수 있습니다.목회란 공동체적 경험일 뿐만 아니라 상호관계의 경험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 을 버리노라"(요 10:14-15). 예수님께서 목자이시듯 그분은 우리도 목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남의 문제를 알지만 또 자신의 문제도 알릴 필요가 있고, 남을 돌볼 뿐 아니라 자신도 돌봄을 받아야 하며, 용서하고 또 용서받는, 사랑하면서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는 그런 연약한 한 인간으로 목회하기를 원 하십니다.우리는 훌륭한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해서 우리가 인도해야할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봉사를 하고 또 다른 사람은 봉사를 받으면서 역할이 뒤바뀌지 않도록 주의를 합니다. 그렇지만 아직 깊은 인격적 관계의 문을 열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자 신의 삶을 바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삶을 헌신한다는 것은 당신 자신의 믿음과 회의, 희망과 절 망, 기쁨과 슬픔, 용기와 두려움 등을 다른 사람들이 생명의 주인과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내놓는 것을 의미합니다.우리는 치료하는 자도 아니요, 화해자도 아니요, 생명을 주는 자도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돌보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죄인이요, 깨어지고 연약한 자들입니다. 우리의 제한 적이고 매우 조건적인 사랑이 하나님의 무제한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여는 한 통로가 되도록 우리 가 택함을 받았다는 데 바로 목회의 신비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