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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영적 기초

김순호 지음 | 예수전도단
1. 영적 갓난아이, 흔들리는 사람



영적 성숙이란 어떤 초자연적 능력으로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 안에서 자라나가는 과정을 말한다. 갓난아이 단계에서 성숙한 아비의 단계에 이르려면 오랜 시간 성장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각 단계마다 다음 단계로 자라가기 위한 기반을 세워야 한다. 그 기반을 통해 우리는 주님이 이미 예비하신 은혜 안에서 한 단계씩 견고하게 자라갈 수 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온 사람들은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지만 영적으로 성숙한 삶의 모습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우선 갓난아이 단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먼저 기억해 둘 것은 갓난아이의 문제는 정체성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이다. 정체성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리스도인이 된 지 수십 년이 지나도 갓난아이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영적 성장과 성숙을 위해서는 반드시 신분에 대한 확실한 이해와 기반을 가져야 한다.

영적 갓난아이의 특징 1 : 요동한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infant)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4)

갓난아이의 맨 처음 특징은 '요동한다'는 것이다. 기반이 세워져 있지 않고 뿌리가 깊이 내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영적으로 견고하지 않고 흔들린다는 말이다. 세상 풍조에 밀려 요동한다. 이 말씀에는 두 가지 교훈이 들어 있다.

첫째, 세상 형식이나 유행을 따라가지 말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로마서 12장 1-2절과 연결해서 볼 수 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들을 향해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라고 말한다. 이 세대를 본받는다는 것은 세상 속에서 나의 정체성을 찾는다는 말이다. 우리의 정체성과 안정감을 주님과의 관계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서 찾는다는 뜻이다. 이처럼 세상에 속한 것에서 자신의 안정감과 정체성을 찾는 사람을 영적 갓난아이라고 말한다.

둘째, 주님과 친밀하지 않으면 안정감이 없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할 때 안정감과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갓난아이는 자신에 대한 안정감이 없기 때문에 지나치게 영적인 사람처럼 반응한다. 이런 사람은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한다. 자기 안에 있는 자원이 아직 충분히 개발되지 않았지만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기 때문에 자신이 설정한 모델의 사역을 흉내내서 영적인 사람처럼 보이도록 노력한다.

영적 갓난아이의 특징 2 : 경쟁의식이 강하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고전 3:1-3)

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 종류의 사람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영에 속한 사람, 다른 하나는 육신에 속한 사람이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지만 여전히 마음속에 시기와 분쟁이 있다. 이 사람은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이 있지만, 비그리스도인과 별로 다를 것 없이 살아간다. 이것이 영적 갓난아이에게 나타나는 두 번째 특징이다.

이런 사람의 마음에는 시기와 분쟁이 있다. 시기가 소유하려는 욕망이라면, 분쟁과 다툼은 싸우려는 마음이다. 시기와 분쟁은 교만이라는 자기 중심적인 경쟁의식에서 나온 마음이다. 하나님은 자녀들의 성숙을 원하시므로 그들 안에 있는 경쟁의식을 철저히 다루기 원하신다.

경쟁의식이란 다른 사람들보다 내가 더 높아지고 중심이 되려는 이기적인 욕심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주목받고 으뜸이 되려는 마음이 나를 지배하도록 허락한다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통한 성장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경쟁의식을 갖는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그들이 칭찬받는 것처럼 칭찬받기 원하고 그들이 유명해진 것처럼 유명해 지기 원한다. 세상에서 큰 자가 되기 원하고 칭찬과 높임을 받기 원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주목받기 원하는 욕망을 버리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섬기는 것에 인색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영적 갓난아이의 특징 3 : 그리스도의 의를 선물로 받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인지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히 5:12-14)

12절에서 바울은 영적 갓난아이들을 책망하고 있다.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한지 수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그리스도의 초보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워한다. 만약 우리 자녀들의 육체적인 성장이 두세 살에 멈추었다면 부모 된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동일하게 주님도 당신의 자녀들이 성장하지 못한 채 영적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고통스러워하신다. 얼마간 갓난아이로 있는 것은 정상이나, 수년 동안 미성숙한 사람으로 머물러 있다면 우리는 주님께 용서를 구해야 한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babe)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13절). 여기서 젖이란 어린이가 아닌 갓난아이가 먹는 음식이다. 그럼 갓난아이들이 경험하지 못한 의(righteousness)란 무엇일까?

의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먼저, 그리스도의 의란 하나님의 성품을 말한다.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가진 경험이 없어서 그분의 성품으로 영, 혼, 육이 적셔지지 못한 사람은 영적 갓난아이다. 영적 유산의 크기는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선물을 받았는지가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얼마만큼 하나님을 경험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또한 의는 신분을 말하는데 그것은 앞서 언급한 하나님의 성품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된 근거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발견되고, 그 신분 안에 있는 우리의 존재 가치는 하나님의 사랑이란 성품 안에서 발견된다. 그분의 성품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사랑인데 여기서 사랑은 가치를 의미한다. 로마서 5장 8절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내어 주셨고, 내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분만큼이나 가치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선포한다. 이 놀라운 축복은 나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바울은 영적 갓난아이들에게 "너희가 그리스도의 의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원한다" 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이 의는 내가 누구이고 얼마나 가치 있는 존엄한 존재인지 결정해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자신의 신분을 발견할 때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영적 갓난아이의 특징 4 : 다섯 가지 어둠의 견고한 진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벧전 2:1-2)

1절은 영적인 갓난아이들에게서 나타나는 다섯 가지 어둠의 영역을 말하고 있다. 이는 영적 성장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영적 갓난아이들은 이것을 반드시 버려야 한다. 이것을 우리의 삶 속에서 깨뜨리지 않으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서 그분을 알아가는 성숙한 삶을 살 수 없다.

2절은 영적인 갓난아이들이 성장하고 성숙하려면 어떤 마음을 취해야 하는지 강조하고 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는 것은 영적 갓난아이들이 주님에 대한 영혼의 갈망과 열정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다윗이 시편 42편 1절에서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라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에게도 주님에 대한 갈급한 심령이 동일하게 있어야 한다.

2절 후반에서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는 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구원, 즉 일회적인 거듭남의 개념이 아니라 성화를 의미한다. 성숙이란 한순간의 도약이 아니라, 훈련 과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1) 악독



다섯 가지 어둠의 영역 중 첫 번째는 악독이다. 악독의 성경적 의미는 '완고한 마음'이다. 이 말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어떤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려는 고집스러운 의지와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나에게 아픔과 고통스러운 상처를 준 사람을 결코 용서하거나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런 마음과 생각이 있다면 우리 안에 견고한 진이 있다는 증거이다.

쓴 뿌리를 제거하지 않으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너희는 서로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히 12:14-16)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 필요한 두 가지 요소는 화평함과 거룩함이다(14절).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 두 요소가 무너진 사람은 어느 누구도 주를 볼 수 없다.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한다. 우리 안에 원망하고 분노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 속에 들어갈 없는 것이다.

15절에 나오는 '쓴 뿌리'는 악독함과 같은 의미이다. 쓴 뿌리는 영혼을 상하게 하고 파괴하는 독이다. 쓴 뿌리에서 흘러나오는 쓴물은 자신만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전염성이 있어서 많은 사람을 더럽게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쓴 뿌리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기쁨과 자유를 누리며 살기 원하신다.

쓴 뿌리를 제거하지 않으면 우리 삶에 두 가지 위기가 나타난다(16절). 하나는 음행이고, 다른 하나는 망령됨이다. 이 두 가지 위기를 한 단어로 말하면 정욕이다. 우리 안에 있는 쓴 뿌리를 제거하지 않으면 정욕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탄은 정욕을 통해 우리 내면과 삶을 파괴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음행은 하나님의 질서를 벗어나서 정욕적인 방법을 통해 내 안에 있는 욕구를 만족시키려는 행위며, 망령됨은 믿음에서 떠난 행위를 말한다.

왜 상처를 받는가



상처란 한마디로 거절감에서 온다. 그러나 거절감이 상처의 근본 원인은 아니다. 본질적인 것은 거절의 문제 이전에 '내가 주님 안에서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가'라는 정체성을 상실한 데서 시작된다. 우리는 가족이나 교회, 그리고 자신이 활동하는 다양한 조직 사회 속에서 사랑받고, 인정받고, 환영받고, 이해받고 돌봄을 받고 싶어하는 자연스러운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요구하고 기대하는 사랑을 받지 못하거나 사람들이 원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기도 한다. 사람들의 욕구를 채워 주지 못해 거절당하고 무시당하고 배척당하고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정서를 파괴시키고, 또 어떤 사람들은 우리 육체를 더럽혀서 수치심과 증오심, 공포와 두려움을 주기도 한다. 믿었던 사람들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깨어질 때, 그 배신감으로 인해 상처가 생기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상처와 쓴 뿌리를 가지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기도 한다.

이렇게 상처의 벽이 생기면 사람들이나 하나님과 친밀감을 느낄 수 없다. 사랑이 아닌 책임과 의무로 사람들을 대하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상처의 벽은 마음속에 '쓴 뿌리'가 생겨나게 한다. 주님은 용서하라고 말씀하시지만 나에게 남아 있는 상처가 너무 아프기 때문에 용서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결국 쓴 뿌리는 앞에서 말했듯이 음행하거나 망령되게 행하는 사람이 되게 한다. 우리 안에 쓴 뿌리를 제거하지 않으면 정욕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욕적인 사람은 소유욕이 강하고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이다. 지나치게 독립적인 정신을 가진 교만한 사람들로써 권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어려워한다. 다른 사람의 간섭이나 통제를 받는 것을 고통스러워한다.

우리가 정욕이라는 어둠에 갇혀 이런 독립정신을 가지고 산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게 되며 주님과 친밀하게 동행할 수도 없게 된다. 그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의 친밀함을 회복하기 위해서 반드시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어둠의 견고한 진들을 깨뜨려야 한다. 상처를 받으면 정서에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나는데 수동적인 반응으로는 자신에 대한 수치심과 부끄러움, 공격적인 반응으로는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한 원망과 분노(적대감 혹은 증오심)다. 주님은 이런 상처에 반응할 때 용서를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이 진리의 길을 선택하지 않고 어둠이 유혹하는 다른 길을 선택한다.

첫째, 우리가 선택하는 어둠의 길은 '부인'이다. 우리는 큰 상처를 받으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그 고통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아픈 감정을 의도적으로 억압하고 학대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무시하고 그 감정을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에게 "괜찮냐"고 물어 보면 항상 "괜찮다"고 반응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 사람의 인격이나 성격에서 나오는 태도나 반응, 그리고 삶에 나타나는 모습을 보면 아픔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받은 상처가 없기 때문에 치유 받을 것이 없다고 말하든지, 자신은 이제 모든 상처가 치유되어서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으며 자유롭다고 말한다.

둘째, 우리가 선택하는 어둠의 길은 '잊음'이다. 하지만 과거의 상처를 잊기로 결단하고 잊으려 노력한다고 해서 그 상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상처를 기억나게 하는 모든 것과 접촉을 끊고 멀리 도망가려 해도 피할 수 없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받았던 상처가 우리 안에 모두 저장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이 평생 동안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및 우리 자신의 삶과 인격에 영향을 준다.

셋째, 우리가 선택하는 어둠의 길은 '쏟음'이다. 주로 어디에 우리의 상한 감정을 쏟아 붓는가? 제일 만만한 공동체가 가정이다. 수치심과 증오심 때문에 일어나는 원망과 분노라는 감정을 가족들에게 쏟아 붓는다. 그러면 가정의 정서가 파괴된다. 통제되지 않는 분노로 가정의 정서가 파괴되면 긴장감과 불안감이 가정을 지배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어른들의 분노에 희생자가 되어 늘 긴장과 불안 가운데 살아가게 된다.

넷째, 우리가 선택하는 어둠의 길은 '덮음'이다. 거절과 거역에서 오는 아픔을 사람들은 쾌락이라는 정욕으로 덮어 버린다. 쾌락이라는 정욕은 상처와 깊은 관계가 있다. 상처가 깊을수록 욕망은 더 강하게 움직인다. 그래서 그 욕망을 세속적인 것으로 채우려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이 많은 민족이다. 오랫동안 외부의 지배와 억압을 받으며 억눌림과 아픔을 가지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아직도 우리 문화 속에서 아물지 않은 상처의 잔해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수치심과 증오심을 다루는데 있어서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둠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이런 어둠 속에 자신을 던져서 수치심에서 오는 고통을 잊으려 한다. 그러나 이런 선택은 우리 내면에 오히려 "나는 온전하지 못하다"라는 열등감을 더욱 가중시킨다. 그리고 이 열등감은 우리 속에 "나는 별로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결점이 많은 사람이고 이 세상에서 필요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심어준다. 결국 이런 어둠의 말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실제로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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