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고데모의 안경
신국원 지음 | IVP
서언 : 우리의 기독교 세계관 이야기니고데모는 안경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진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기 원했다면 말이다. 그것을 모른채 그가 예수님과 나누는 대화는 답답하기 그지없다. 지식인 소리를 들었을 그가 다음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보다 더 말귀를 못 알아들었다. 대화는 동문서답으로 헛돌다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가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었던 것은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우리 주변에 있었던 니고데모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우리의 니고데모가 누구인지 궁금 해 할 필요는 없다. 그 이야기는 20여 년 전 최루탄과 화염병의 매캐한 냄새가 대학가를 뒤덮었던 시 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은 눌리는 마음으로 학교를 다녔다. 사회 전체가 끝없이 요동치는 것이 불안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엉거주춤한 태도 때문이었다. 친구가 반정부 데모를 하러 가자고 했을 때 망설이던 모습이 그랬다. 본래 비전은 어두운 시대를 배경으로 서서히 빛나게 마련이라고 했던가. 그들이 기독교 세계관이 제시하는 비전에 눈을 뜨게 된 것도 이런 암울한 시대를 배경으로 해서였다. 똑같이 무거운 마음을 풀기 위해 애쓰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은 큰 위안이 되었다.보다 구체적으로 이들의 눈을 열어 준 것은 개혁주의 신앙의 폭넓은 관점이었다. 복음주의 교회에서 는 찾기 힘들었던 삶과 세계에 대한 실제적 비전이 있었다. 그것은 이들에게 신앙과 삶을 바라볼 새 로운 안목을 열어 주었다. 정치 현실에 대한 고민을 통해서 신앙이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 러나야 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발견한 것이다. 그런 도전은 학문의 길을 택했던 이들에게 더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성경과 기독교 신앙이 세계와 삶에 대한 구체적인 조망을 제시한다는 점에 긍지를 갖게 된다. 자연주의, 인본주의, 마르크스주의, 무신론보다 더 신빙성 있고 설득력 있는 세계관을 발 견했던 것이다. 그것은 운동권과는 다른 방식으로 행한 현실 참여였다.한 세대 전,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동기를 제공했던 상황은 이제 많이 달라졌다. 우리 사회 전체를 좌우했던 민주화라는 거대한 담론은 다양한 실천적 관심사로 분산되었다. 그람시(Antonio Gramsci)가 말한 바와 같이 이제는 전면전이 아니라 참호전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런 상황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바, 거대 담론에 대한 의심이 특징인 포스트모더니즘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런 가운데 거대 담 론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 세계관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계 시된 진리는 시대가 달라도 변하지 않는다. 순종하는 방식이 변할 뿐이다.우리는 이런 상황일수록 비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위기가 닥치면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최선의 해 결이다. 다시 성경적 세계관의 뿌리도 돌아가야 한다. 시대의 변화에 적절한 대응을 못하면 운동성은 급속히 약화되기 마련이다. 생명력과 역동성을 잃은 운동은 늘 염증을 느끼게 마련이다. 기독교 세계 관 운동이 진부한 상태에 빠졌다면 거기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 밖에 없다. 근본으로 돌아가 다시 시 작하는 일이다. 그래서 이 책을 쓰면서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다. "여러분 이것이 기독교 세계관입니 다."제1장 세계, 세계관 그리고 문화
우리는 여러 가지 창문을 통해 세상을 본다. 이 세계는 물론 하나다. 그러나 인간은 그 하나의 세계를 각기 독특하게 인식한다. 세상을 보는 창문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세계관은 세상과 인생을 내다보는 창이다. 세계관은 세계를 바라보는 안목을 열어 준다. 그것은 세계를 경험하는 개인적이며 사회적인 특이한 방식이다. 개인의 차원에서 보면 세계관은 그 사람의 인격과 안목의 수준이다. 한 사회와 문화 역시 독특한 사조와 비전과 생활 방식을 공유한다. 파편화가 이 시대의 가장 강력한 공통정신이라는 것은 분명 역설이다. 인간은 세상과 삶에 대한 전체적 조망을 본능적으로 추구한다. 이러한 인간은 여러 가지 질문을 품게 되는데 이 질문은 의도적으로 묻는 것이라기보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떠오르는 것이다.
여러 사람이 지적하듯이 세계관 형성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과 답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세상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나?인생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왜 세상은 이다지 고통과 죄악으로 가득한가?구원이 실제로 있는지,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사람은 무엇을 위해 살며, 세상과 역사의 목적과 의미는 무엇인가?
인간은 이런 근본적인 질문들을 묻고 답함으로써 세상과 삶에 대한 종합적 이해를 갖게 된다. 세계관을 형성하는 질문의 답은 과학적인 연구와 조사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성적 사유와 과학적 연구 조사가 이런 전제들에 입각해서 이루어진다. 결국 세계관은 본질적으로 학문의 차원이 아니라 종교적 성격을 띤다. 누구도 그 질문의 답을 이론적으로 얻을 수 없다. 물론 이성적 요소가 결여된 것은 아니지만 주로 전통과 문화 그리고 믿음에서 얻는다. 능동적으로 파악하기보다 주어진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삶과 세상에 관한 이야기들은 모두 이런 질문과 답을 달고 있다. 그 질문들은 근본적인 것이다. 자연히 그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찾기는 쉽지 않다. 심오한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지만, 답을 모르는 경우도 많다. 사실 가장 흔한 답은 "모르겠다"는 것이다. 성경에도 이런 문제로 씨름하는 구절들이 있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욥 3:11) 하나님이 인생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알 수 없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욥처럼 마치 퍼즐 조각 같은 삶의 단편들을 맞추려고 애쓴다. 이 또한 전도서 저자의 말과 같이 인간에게 주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전 3:11)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계관은 인간의 독특한 존재의 본성과 맞물려 있다. 유한하나 영원을 꿈꾸고 의미를 찾을 수밖에 없는 본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세계관이란 세상에 대한 종합적 이해를 단지 시각, 즉 '관(觀)'이란 말로 표현한 일종의 제유(提喩)다. 그러나 그것이 함축하는 것은 시각만이 아니다. 모든 감각을 통해 얻는 세계에 관한 이해 전부를 말한다. 즉 사람을 두고 어떤 인상을 갖듯이 세상과 인생에 대해서 어떤 인상을 갖는 것이다. 세계관은 세상과 인생에 대한 이해와 앎의 통합적 기초다. 눈이 어디를 향하며 무엇을 듣느냐는 단지 감각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안목은 삶의 방향 설정에 영향을 미친다. 세계관에서 삶의 행보가 정해진다.
나아가 인간의 시각은 카메라와 달라 의도적이다. 보는 것을 믿기도 하지만, 믿는 것을 보는 이유가 그것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의식의 게슈탈트 구조(Gestalt factors)가 이를 증거한다. 그래서 클리포드 기어츠(Clifford Greetz)나 제임스 올시우스(James Olthius)의 말처럼 세계관은 두 가지 요소를 가진다. 첫째, 세계관은 세상과 삶에 대한 조망(view of the world and life)이다. 둘째, 세계관은 세상과 삶을 위한 조망(view for the world and life)이다. 전자를 '세상과 삶에 대한 이해'라 한다면 후자는 '비전'이다. 이해는 비전의 토대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관은 지도와도 같다. 그것은 삶의 안내가 된다. 이는 세계관이 단지 세상을 이해하는 것에서 머물지 않고 세상을 만드는 전략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우리는 바라보는 세계를 일정한 관점에서 이해하고 그에 따라 세계를 만들어 간다. 이렇게 해서 생긴 또 하나의 세계는 인간적인 세계다. 우리는 그것을 문화라고 부른다. 그래서 자연-세계관-문화라는 순서가 가능하다. 세계에 대한 다양한 이해는 세계를 형성하기 위한 전략으로 나타나고 그로 인해 다양한 문화가 만들어진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자칫 세계관이 매우 상대적인 개인의 관점처럼 이해될 수 있다. 같은 사회 속에서 여러 관점이 가능하고 개인차도 나기는 한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도 세계관에는 공동체적 성격이 강하다. 세계관은 공동체적이다. 대개 같은 문화, 같은 언어권인 경우 세계관이 같거나 흡사하다. 사실 다원주의와 상대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포스트모던 사회에도 일련의 공동체적 특성이 나타난다. 그래서 그것은 '포스트모던'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세계관이 공동체적이라는 또 다른 증거는 강력한 국가나 문화 뒤에는 강력한 세계관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문화의 차이 뒤에는 반드시 세계관의 차이가 존재한다.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돌출 건물은 보험 회사인 대한생명 63빌딩이다. 대부분의 도시가 다 그렇다. 지금은 테러로 붕괴되었으나 예전에 뉴욕에서 가장 큰 건물인 102층짜리 쌍둥이 건물은 무역회관이었다.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돈이며 경제라는 사실을 이보다 더 분명하게 가시적으로 보여 줄 수는 없다.
왈쉬와 미들톤이 지적한 대로 세계관은 삶의 체험을 통해 교육되고 전수된다. 그것은 목욕 방법이나 음식과 가족 관계에 배어 있다. 세계관은 의식적인 교육에 앞서 생활 속에서 전수된다. 또한 세계관은 대개 개념적으로 명시되거나 학술적으로 체계화되어 있지 않다. 신화, 전설, 설화 등 이러한 이야기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공유하는 집단의 미래를 지시하는 비전의 역할을 한다. 세계관은 삶의 밑그림과도 같다. 세계관은 이렇게 우리 삶의 방향과 세부 행위를 인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세계관 전수 방식은 이야기다. 이야기는 과거를 회상하지만 그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반드시 비전, 즉 전망을 담고 있다. 이야기와 비전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과거를 설명하는 이야기와 미래를 투사하는 비전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한 민족이 역사적 전기를 마련하고자 할 때 대부분 역사 바로 세우기가 선행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야기를 통해 비전을 제시하는 세계관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역시 히브리 전통이다. 히브리인들은 들음에서 진리를 발견했다. '환상'과 '꿈'은 특히 구약 성경에서 많이 사용되는 하나님의 방식이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믿음의 열조들은 모두 이 비전을 통해서 삶과 세상을 바라본 사람들이었다.
제2장 기독교 세계관그리스도인의 비전은 기독교 세계관을 통해 형성되어야 마땅하다. 기독교 세계관이 다양하다는 말은 통일성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은 되지만 그 공통성은 성경이 담보하고 있다. 그 공통성은 흔히 이 책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창조, 타락, 구속의 진리로 대표된다. 또는 교파를 초월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이 고백하는 사도신경이 담고 있는 기본 진리로 표현된다.
기독교 세계관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이 '세계관'이라는 말의 철학적인 근원에 대해 경고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알버트 워터스(Albert Wolters)는 이 말이 독일의 낭만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역사적 상대주의를 함축하게 되었음에 유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계관이라는 말은 세계에 대한 하나의 견해 또는 관점에 불과하다는 의미가 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함의가 묵직한 이 말을 채용하여 기독교적 삶의 체계를 나타내는 어휘로 처음 사용한 사람은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per)였다. 그는 이 말이 단지 철학적 체계라는 인식을 피하기 위해 삶과 세계에 대한 관점(life-and-worldview)이라는 다소 어색한 긴 표현을 의도적으로 사용하였다. 그의 생각은 1889년 프린스턴 대학에서 행한 스톤 강좌(The Stone Lectures)인 『칼빈주의』(lectures on Calvinism, 세종출판사 역간)에 잘 설명되어 있다. 이 강의와 책은 기독교 세계관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거기서 이렇게 말했다. "칼빈주의는 교회 제도에 그치지 않고 생활원리(life-system)로 발전했으며, 교리의 구성을 위하여 전력했을 뿐만 아니라 인생관과 세계관을 창조했다." 그는 또한 그 강좌의 주된 목표가 "칼빈주의가 전적으로 교리적인 교회 운동을 대표하고 있다는 그릇된 관념을 뿌리 뽑으려는 것이었다"고 했다.
카이퍼는 총체적 삶의 체계로서의 기독교 세계관의 필요성을 역설했는데, 그 철학적 바탕을 일구어 낸 것은 그가 세운 네덜란드 자유대학 출신 헤르만 도예베르트(Herman Dooyeweerd)의 몫이었다. 도예베르트는 서구 문화에 대한 역사적 분석을 통해 네 개의 다른 지류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형상/질료의 그리스적 동인, 자연/은총의 스콜라적 동인, 자연/자유의 인본주의 동인, 창조/타락/구속의 성경적 동인이다. 이 네 개의 다른 문화적 동인들은 각기 상이한 종교 기반을 가진 특징적 세계관으로서 각각 다른 문화를 형성하고 발전시켜 왔다는 것이다. 결국 이 동인은 사상과 문화의 영성인데, 이것에 대한 인식은 사상과 문화의 초월적 또는 종교적 비판과 연관된다. 도예베르트가 생각하는 서구 사상의 기본 동인은 모든 그 기반에서 종교적인 근원을 가진 것들로, 본질적으로 절대성을 가진 것이다. 비성경적 동인들과 성경적 동인은 궁극적으로 대립(antithesis) 관계에 있다.
기독교 세계관은 우리의 안목을 고쳐 주는 치료 효과를 가지고 있다. 존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성경을 "자연인의 안목을 고치는 안경"이라 했다. 성경은 우리의 안력을 바로잡아 주는 삼중 렌즈로 된 특수 처방 안경이다. 레슬리 뉴비긴(Lessile Newbigin)이 잘 말한 것과 같이 성경은 우리가 그것만을 바라보아야(Look at) 할 책이 아니다. 성경은 그것을 통해 보아야(Look through) 할 책, 즉 안경이다. 세계를 우리의 눈과 의식만으로 보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눈, 아니 마음이 죄로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만드신 대자연의 스펙터클 또는 하나님의 극장을 제대로 보기 위한 안경이다. 나는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성경을 들여다보지 말고 양끝에 줄을 달아 눈에 쓰라고 말한다. 성경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안경은 투명해야 제 역할을 하는데, 마치 눈의 일부처럼 자연스러워야 한다. 안경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 잘 보기 어렵다. 안경사가 아니라면 늘 안경만 만지고 있을 이유는 없다.
기독교 세계관은 성경의 진리에 따라 세상을 보는 안목이다. 그래서 기독교 세계관과 성경적 세계관이라는 말은 서로 바꾸어 사용할 수 있다. 창조와 타락과 구속은 세상을 바로 이해하게 하는 성경의 삼중 렌즈다. 이 진리들은 다초점 렌즈와 달리 따로 움직이지 않는다. 창조, 타락, 구속의 진리는 서로 맞물려 우리의 눈을 밝혀 준다. 만일 창조의 진리만 강조되고 타락과 구속이 빠진다면 자연신론이나 이신론에 근접할 것이다. 타락만 강조하는 세계관은 불교와 같이 세상을 부정하는 관점을 줄 것이다. 구속만을 강조하는 관점은 세상의 존재 이유나 역사의 의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할 것이다. 이 세 진리가 함께 작동하는 성경의 세계관은 철저히 일원적이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11:36). 바울의 찬양 그대로다. 음과 양이 대립되거나 선과 악의 근원이 별도로 나란히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욥은 자녀와 전 재산 그리고 건강마저 잃은 상황에서도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2:10).
다른 세계관들은 통합적이지 않다. 그것은 한 세계관 내에 궁극적으로 상반되는 여러 초점이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세상은 선/악, 성/속, 자연/문화, 자연/은총, 자연/자유와 같은 이원론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이런 세계관들은 세상을 하나의 통합된 관점으로 설명하거나 의미를 주지 못한다. 다신교적 신앙 역시 눈을 흐리게 한다. 상황에 따라 여러 신을 섬기기 때문이다. 다신론과 다원론의 관점은 마치 잠자리 눈처럼 초점이 여럿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사조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일단 형성된 세계관은 바꾸기가 매우 힘든데, 그것은 세계관 교육이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관은 개개인이 만들기보다 문화를 통해 전수받는다. 세계관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그것을 그리기 전에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의 밑그림과도 같다. 우리는 그 밑그림을 토대로 해서 나머지 부분을 맞추어 그려 나가는 아이와도 같다. 물론 이것은 일반적인 가능성이다. 때로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서 주어진 밑그림을 없애고 새로운 그림을 들여올 수도 있다. 대개 사람이 거듭나는 것과 같은 과정에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다. 1980년대 대학가에서 행해진 운동권의 '의식화 작업'이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 물론 온전한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르나, 그들의 작업은 대학 입학 전까지 가졌던 세계관을 벗기고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하는 데 효과적이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오른 눈이 범죄케 하면 빼어 버리라"(마5:29)는 말씀의 세계관적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