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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눈의 성자들

김나미 지음 | 황금가지
더 낮은 자리에서 사랑하십시오 - 박호 신부

역곡 전철역에서 내려 가톨릭 대학 방향으로 걷다 보면 빌라가 조밀하게 모인 곳에 지상 4층의 벽돌집이 자리하고 있다. 십자가도 안 걸려 있는 이곳에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 나누고 사는 파란 눈의 성자들이 있다. 꼰솔라따 선교 수도회의 한국 지부장인 박호 신부님은 1954년 스페인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교육학을 공부하던 중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꼰솔라따 수도회에 들어갔다. 본명은 '프란시스코 예수'로 보통 애칭으로 '파코'라고 부르는데 우리말로 발음이 비슷한 '박호'라는 한국 이름을 쓰고 있다. 1988년 1월 서울에 지부를 세웠고 인천 만석동 달동네에서 봉사를 시작했다. 2002년부터는 양재동의 구룡 마을에서 봉사를 시작했다.



"선교사니까 우선 우리말을 잘 해야지요."

신부님은 작년 첫 대화 때부터 "십팔 년째 살면서도 잘 못하지만 그래도 우리말만 할래요."라고 못을 박았다. 처음 서울에 와 매운 음식에는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우리말 공부는 정말 재미있었다고 한다. 신부님에게 우리말은 곧 한국어다. 신부님의 우리말 실력은 만남이 거듭될수록 일취월장하고 있다. 신부님이 이렇게 노력을 하는 데는 사연이 있었다. "어느 날 한 신자가 고해성사를 하러 왔어요, 난 보속을 주며 화살기도를 하라고 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내가 'ㅎ' 발음이 안 돼요. 그래서 '화' 발음이 '자'로 나와서 화살이 자살이 되었어요. 나중에 그 신자가 나보고 자살기도는 어떻게 하느냐고 하기에 많이도 웃었어요." 그 뒤로 발음 실수에 대한 에피소드는 수없이 많아 한 시간이 넘게 배를 잡고 시원하게 웃고 또 웃어야 했다.



"넌 누구를 위하여 이곳에 들어왔느냐."

신부님은 스페인 남부의 유명한 휴양지인 말라가 근처의 '에스테포나'라는 작은 마을에서 여섯 형제 중 넷째로 태어났다. 전통적인 가톨릭 집안이었지만 종교에 있어서는 자유로운 분위기였단다. 신부님은 열두 살 때부터 미사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져 한때 성당을 멀리 한 냉담자였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 조카의 병을 계기로 하여 기도로 하느님을 찾게 되었다. "하느님, 조카를 살려주시면 평생 내 인생을 바쳐 사제의 길로 갈 것을 맹세합니다."



기도의 힘인지 조카는 드디어 병석에서 일어났다. 그때 신부님은 문득 겁이 나서 다시 한 번 기도를 바쳤다고 한다. "제가 했던 맹세를 취소합니다." 맹세를 저버리고 친구들과 어울리던 어느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성당에 들어가 기도를 하던 중 주님께서 원하는 대로 살기로 결심하고 삶을 맡기게 된다. 대학 졸업까지 기다리며 성소 피정을 통해 더욱 자신의 의지와 하느님의 부름 사이에서 고민하며 기도를 계속했다. 결국 '내 뜻대로'가 아닌 '그분의 뜻대로' 완전히 맡기며 확실한 하느님의 부름을 확인하게 됐고 신부님은 주저 없이 꼰솔라따 수도회를 선택했다.



그러나 자신의 선택에 대해 후회가 몰아쳤다. '그분 뜻대로'를 따랐지만 '내 뜻대로'가 신부님을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사제 서품을 받아야 하는 서원을 앞둔 시점에 하느님에게 매달리며 간절한 기도를 시작했다. "혹시 잘못된 선택은 아닌지, 부름이 확실한지 물으며 간절히 기도를 하던 바로 그때 '넌 누구를 위해 이곳에 들어왔느냐'라는 또렷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어요. 확신 없는 내 자신이 부끄러워 깊이 반성하게 되었지요."



신부님이 신부로서, 또 선교사로서 삶을 충실하게 살 수 있는 또 하나의 힘은 바로 아버지의 가르침이었다. "남을 위해 봉사할 때 누구에게도 알리지 마라." "말로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라."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 있어 큰 힘이 되고 있다.



"선교사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일'을 배우지요."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 가운데 신부님은 특히 세 가지를 강조했다. 공동체의 의미, 타 종교와의 대화를 통한 이해와 포용, 그리고 항상 낮은 곳에 임하리라는 마음이다. "각기 다른 사람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살 땐 반드시 형제 같은 사랑이 필수예요. 여기 모인 형제들은 내가 선택한 사람들은 아니에요. 하지만 오로지 하느님의 부르심이라는 '한뜻'으로 모여서 수도 공동체가 이루어졌지요."

"같이 생활하는 게 항상 즐겁기만 하진 않으시지요?" "서로 문화가 다르고 자라난 환경과 배경, 성격이 다르다보니 충돌이 있을 수 있지요. 하지만 결국 '형제 같은 사랑' 하나로 융화됩니다. 형제는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에요. 멀리 있는 사람보다 같이 사는 사람을 사랑하기가 어렵지요. 그러나 우리는 길을 찾아 함께 가는 사람들입니다. 모두 '함께할 것'을 결정했기 때문에 선교사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일'을 배우지요."



신부님은 사랑의 깊은 의미를 성경 구절에서 인용하며 목소리에 힘을 싣는다. "성경에도 있잖아요. 원수를 사랑하라 했지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면 남들도 우리처럼 서로를 사랑하지 않겠어요? 하느님의 사랑이 그대로 드러나는 곳이 바로 공동체예요. 형제 없이는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없지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면서 눈앞의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말이 되나요? 이것이 바로 수도예요."



"형제들이 있고 나눌 수 있는 곳이 바로 내 고향입니다."

구룡 마을은 한국전쟁 직후의 풍경과 다를 것이 없었다. 쓰레기 산 옆에 서너 평 남짓한 작은 사무실을 두고 꼰솔라따의 신부님 두 명이 마을 사람들과 같이 생활하고 있다. 사무실 옆에 공부방을 열어 자원 봉사 선생님들과 같이 운영하고 있다. 영하의 추운 날이었는데 어디에도 온기가 없다. 방 안을 들여다보니 배관이 터져 모두 젖었다며 한겨울에 선풍기로 요와 이불을 말리고 있었다. 난 그만 선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어쩌면 저렇게 일할 수 있을까. 선교가 목적으로 보이지 않았고 봉사라는 단어는 더욱 어울리지 않았다. 그것은 헌신이었다.



"신부님,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살 수 있는 거죠?" 낮은 곳에 임하는 마음을 알지만, 난 푸념 섞인 바보 같은 넋두리를 하고 말았다. "그곳도 사람들의 보금자리에요. 우리의 작은 손길이 가서 약간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또 우리의 발길이 가서 할 일이 있다면 어디든 가야지요." "고향 떠나 이 땅에 오셔서 정말 수고가 많으세요." 신부님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미소를 담고 살며시 입을 연다. "난 외국에서 산다는 생각이 전혀 없어요. 형제들이 있는 곳, 나눌 수 있는 곳이 바로 내 고향입니다." 신부님을 보면서 온 정열을 쏟는 그 힘 뒤엔 분명 주님이 함께하고 계심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주님은 신부님의 등을 두드려 주고 계시리라.



"내 자신이 나약하기에 더 사랑할 수밖에 없어요."

수도회 안이든 밖이든 신부님은 볼 때마다 항상 웃는 얼굴이어서 주위 사람의 기분까지 환하게 해 준다. 늘 사랑이 샘솟듯 넘쳐 누구나 반기고 누구에게나 웃어주시니 형제들을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 같다. 대화의 막바지에 신부님은 너무나 사랑하고픈 지구촌 형제들에게 사랑의 전갈을 준다. "남의 눈을 신경 쓰지 말고 잠시 멈춰 내면의 소리를 들어 보세요. 종교에 상관없이 양심에 따라서 사는 삶 속에 행복이 있어요. 마음의 평화는 양심에 귀 기울일 때 찾아옵니다." 신부님은 한 구절을 더 추가한다. "남 때문에 혹은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어 내면의 목소리, 즉 양심을 거스르며 사는 건 억지로 사는 게 아닐까요. 양심을 외면하면 공허함만 남습니다." 씁쓸하게 건네는 신부님의 이 말을 또박또박 가슴에 새기며 일어섰다.





당연하게 누리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 정일우 신부

정일우 신부님이 현재 총책임을 맡고 있는 한 몸 공동체는 예수회 한국 지구, 천주교 도시 빈민 사목 위원회 소속으로 예수회 신부님, 수사님이 사회 사도직을 펼치기 위한 공동체의 필요성을 느껴 자연스럽게 탄생한 공동체다. 1991년부터 1994년까지 정일우 신부님이 초대 원장을 맡았고 2002년부터 다시 신부님이 꾸려가고 있다. 현재는 열 명의 신부님이 각자 현장에서 뛰고 있다. 노동자 쉼터 마련, 이혼 가족 상담, 약물중독 상담, 비행 청소년 지도, 내외국인 노동자의 인권 보호 등 각기 주어진 임무와 일터가 다르다.



정일우 신부님의 본명은 존 빈센트 데일리다. 아일랜드계 미국인으로, 1935년 일리노이 주의 파이로 태생이다. 신부님이 신부가 된 것은 큰 뜻이 있어서가 아니고 단지 '끌림'에 의해서였다며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들려준다. "예수회 신학생과 수사님이 우리를 가르쳤는데 그들을 보면 얼굴에 행복이 넘쳤어요. 우리 학생들에게 그 행복을 나눠 줬는지 정말로 행복한 학창 시절을 보냈지요. 그래서 자연히 나도 그 길로 들어서게 된 거예요."



"어렵게 한국 사람이 되었어요."

신부님이 신학생 신분으로 부산항에 도착한 것은 1960년 9월 21일이었다. 1960년부터 1963년까지 서강대에서 철학과 영어를 가르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신학 공부를 마치고 1966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67년, 이번엔 신부님의 신분으로 다시 한국 땅을 밟았다. 얼마나 다시 밟고 싶었던 땅이었던가. 신부님을 다시 돌아오게 한 것은 바로 '정'이었다. "한국에 삼 년간 살아 보고 나니 미국이 답답했어요. 한국 땅이 그립고 한국 사람이 보고 싶어 속이 까맣게 타 들어가 그때부터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어요. 의문의 여지없이 나는 한국으로 돌아와야만 했어요.



신부님은 1997년 귀화하여 정일우란 이름을 갖게 된 대한민국 국민이다. 국적을 바꾸는 데에는 그 과정이 쉽지 않았다. "1969년부터 귀화 신청을 하고 싶었는데 처음엔 예수회에서 거절을 하더군요. 그 다음부터는 중앙정보부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어 또 불가능했어요. 불순한 사람으로 찍혀 계속 퇴짜를 맞다가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1997년에야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어요."



'난 왜 입으로만 가르치나.'

서강대로 돌아와 강단에 섰다. 신약 입문과 철학 과목을 강의하며 교수로서, 신부로서 신분을 보장받고 혜택을 받으며 부러울 것 없이 살았다. 그러나 문제는 신약 강의를 하면 할수록 '난 왜 입으로만 가르치나.'라는 회의가 드는 것이었다. 육 년간의 강의에서 나온 결론은 개념과 말로는 신약의 복음을 전달할 수 없으며 몸으로 직접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론이 나오기까지 뼈저리게 자신을 몰아쳤다 한다. 결국 신부님은 교수 자리를 박차고 나오게 됐고 서슴없이 청계천으로 뛰어들 수 있었다.



"너의 삶이 삶이냐."

신부님이 빈민 운동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1973년, 청계천에서 빈민과 같이 살다 청계천 일대가 강제 철거되려 하자 그때부터 철거민들과 인생을 같이 하게 됐다. 당시 청계천 주민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신부님은 청계천이야말로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라고 확신했고 그들과 어울려 같이 살았다. "왜 같이 살기로 하셨어요? 반드시 거기서 살아야만 했나요?" "처음엔 한 달간이라고 못을 박고 도시 빈민 생활을 체험하고 싶었는데 그게 십팔 년이 되더군요. 그 안엔 정말 배울 게 많지요. 가난한 사람들에게 배운 건 더 많아요. 청계천 주민들의 삶이 내 머리를 망치로 꽝 치며 '삶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깨우쳐 주었지요. 그들은 가난뱅이, 무식쟁이라 불릴지 몰라도 당당하게 '나는 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에요." 청계천 철거민은 시흥의 공동체 마을인 '복음자리'로 옮겨 갔다. 신부님도 복음자리에 입주했다. 이후 양평동, 상계동으로 옮겨 더욱더 철거민들과 가까이 있게 됐다. 신부님은 철거민과 같이 한 헌신적인 삶으로 1986년 제정구 의원과 함께 막사이사이상을 공동 수상하였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덕에 지구촌이 이렇게 굴러갑니다."

명동 성당의 보조 신부로 있으며 다음의 강제 철거 대상을 파악한 다음 또 철거촌으로 입주하길 되풀이했다. 그 사이 신부님은 철거에 관한 한 전문가가 되어 철거민들에게 '주택의 의미'에 대한 교육까지 할 수 있었다. 신부님은 도시 빈민의 입장에서 거침없이 고언을 한다. "소외된 계층인 도시 빈민들은 가장 기본적인 것을 원할 뿐이에요. 그들은 아주 작은 것을 원해요. 부잣집이 팔십 평에 산다고 칩시다. 하지만 빈민은 단지 추위를 피하고,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작은 공간, 십여 평 정도면 만족해요. 가장 기본적인 생존권을 원했는데 그것마저 무시되었지요."



대한민국 도시 빈민을 대변해 신부님의 목소리에 더 큰 힘이 실린다. "비주류가 주류가 되는 세상이 와야 해요. 농부, 노동자, 도시 빈민 모두가 비주류이지만 그들에 의해 이 세상이 유지되고 있는 걸 아세요? 세계의 빈민들이 날을 잡아 일주일만 파업을 했으면 좋겠어요. 환경 미화원, 트럭 운전사, 배달원 등 소위 하층의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도시가 마비될 겁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들의 힘으로 이 지구가 굴러가고 도시가 제대로 기능을 하잖아요."



"농부의 땀을 기억하십시오."

상계동 철거촌을 마지막으로 하여 신부님은 1991년부터 사 년간 예수회 한국 교구의 부지구장을 지냈다. 그 후 1994년 충북 괴산으로 내려갔는데 이곳에는 유기농 채소를 공급하는 솔뫼 농장이 있고 그 안에 예수회의 누룩 공동체가 있다. 팔 년간 직접 농사를 지으며 이번엔 농민과 함께 살았다. 누룩 공동체는 신부님에게 자연의 힘을 배우게 해 준 곳이다.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농약을 많이 쓰던 농부 세 명의 손가락에 마비가 왔다. 농약을 뿌리면 곧 죽음을 뿌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신부님은 유기농 농사를 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한다.



빈민을 잘 아는 신부님은 이번엔 농부로서 체험을 통해 농부의 마음을 전한다. "농부들은 빚만 떠안고 살아요. 가장 수고를 많이 하면서도 밑지는 장사를 해요. 농사를 잘 지어 추수를 해도 모든 이익은 중간 상인에게 갑니다. 농협의 이자가 얼마나 비싼지 아세요? 땀 흘려 수고해 이자라도 갚으면 운이 좋은 편이고 원금은 갚지도 못해요. 농부들이 일어서지 못하는 이유는 이자 갚기도 빠듯해서 그래요. 빚에 시달리고 있어요. 생각을 해보세요. 농부가 손을 놓으면 우리 밥상에 오를 것도 없어요. 누가 조금이라도 농부의 땀방울을 알아주기나 합니까?"



어디 그것뿐인가. 홍수, 가뭄, 태풍, 폭설 피해로 한 해 농사를 망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번엔 내가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 한마디 건넸다. "밥 먹을 때만이라도 농부들의 땀을 기억해야겠어요. 식전 기도에 같이 기억하면 좋겠네요." 이후부터 나는 평소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눈에 새로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따뜻한 잠자리를 고맙게 느끼기 시작했다.



"함께하는 삶 속에 복음이 있어요."

신부님은 가난을 선택했다. 그것이 자신이 가장 떳떳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가난 속에 있는데 돈 벌기 바쁜 사람보다 더 바쁘다. 시간 뺏기가 죄송할 지경이다. "이젠 쉬실 때도 되지 않았나요?" "난 일복이 많아요. 예수회원의 은퇴는 관 속이에요. 내가 무엇을 했느냐 하면 바로 빈민들과 농민들과 같이 소주마시고 신나게 놀았을 뿐이에요. 했다면 나 좋아서 한 일이에요." "하지만 신부님, 아무나 그렇게 살 수 있진 않아요." "나야 처자식이 없으니 그렇게 살 수 있었지요. 하하하!" 소박하고 시원한 웃음소리가 마음까지 시원하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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