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캐처스
토미 테니 지음 | 규장
1부 하나님 발견의 열정
1장 하나님은 숨바꼭질하시는가?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배를 마치고 예배당을 떠날 때, 예배 시작 무렵보다 더 갈급하고 목말라야만 기뻐하고 만족하신다. 하나님을 쫓는 것을 넘어 하나님을 붙잡고 싶은 갈급함이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붙잡아야 하는 당신에게 하나님은 종종 숨으신다고 느낀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딸과의 술래잡기를 통해 그 비밀을 깨달았다. 벽장 속에 숨어 있는 나를 찾는 딸은 엉뚱한 곳에서 헤매기 일쑤다. 오랜 시간 딸이 나를 발견하기까지 웅크리고 기다리는 것은 좀이 쑤시는 일이지만, 나를 발견했을 때 딸의 얼굴에 피어나는 함박웃음을 생각하며 참는다. 때로는 숨어있는 곳의 단서를 알려주려고 슬쩍 발끝을 보이거나, 소리로 유인한다. 이렇게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술래잡기의 목적은 '숨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찾는'데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딸이 잘 찾을 수 있게 숨으려 노력한다.
하나님도 술래잡기하는 아빠와 마찬가지시다. 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쫓는 과정에서 좌절하고 지칠 때 절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비록 내가 자포자기할 때에도, 하나님은 나의 찬양과 예배를 받으시며 오히려 나를 찾아오신다. 하나님을 쫓다가 가끔 잘못된 방향으로 치우칠 경우가 있다. 그럴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신다.
다윗은 시편에서 11번 이상 "하나님은 숨으신다."는 표현을 썼다. 일반적으로 알기로, 하나님은 죄와 교만으로 가득한 인간에게서 숨으신다. 그 이유는 죄와 교만으로 꽉 찬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면 필시 죽을 수밖에 없고, 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꼭 이런 이유 때문에 숨으시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심판보다 오히려 기쁨과 더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을 쫓아가서 마침내 하나님을 잡는 것은 하나의 과정이다. 출장에서 오랜만에 돌아온 아빠가 통학버스에서 내리는 딸을 보고는 문 뒤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놀래켜 준다거나, 뽀뽀하기 위해 달려오는 딸을 피해 도망가다가 잡혀서 더 큰 기쁨 속에서 포옹하는 기쁨을 느끼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잠시 돌아서신다. 하나님은 주일 아침 잠깐의 뽀뽀만으로 만족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인간이 어찌 하나님을 잡을 수 있을까?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하나님의 길은 인간의 길과 너무도 다르다. 인간이 아무리 수련하고, 분발해도 하나님을 잡을 수는 없다. 인간의 행위로는 하나님을 잡을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매달릴 경우 사정이 달라진다. 우리가 완전히 절망하여 포기할 때, 숨바꼭질하던 딸이 "아빠 제발!"이라고 말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잡혀주신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잡을 수 없던 하나님의 마음이 이 한마디에 녹아버리는 것이다. 일단 이 단계에 도달하기만 하면 당신이 쫓던 그분이 거꾸로 당신을 쫓으실 것이다.
이렇듯 '쫓기 과정'을 역전시키는 것이 바로 예배다. 당신이 예배드린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추적하고 잡으실 것이다. 영적 허기를 채우기 위해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하나님은 민감하게 반응하신다. 예배는 본질상 '사랑의 덫'에 하나님을 걸려들게 하며, 하나님은 이를 즐겨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발견할 때, 하나님은 즐거워하신다. 성경에선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고 말씀한다. 이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하나님은 때로 당신에게서 숨으신다. 당신이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그리고 그때의 풍성한 기쁨을 맛보게 하기위해 숨으신다.
그러나 이런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우리는 종종 잊는다. 오히려 우리는 자신이 신앙적으로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랐다는 영적 교만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열정을 버리고 만다. 하나님을 붙잡는 자로서 우리는 영적 교만을 경계해야 한다.
2장 불타는 입술과 뜨거운 가슴당신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갈망하며 열에 들뜬 자인가? 그 증상은 뚜렷하다. 만일 당신이 전심으로 하나님께 몰두한다면, 형식적인 교회 행사나 인간적인 방식을 혐오할 뿐 아니라, 자기만족이나 흥분을 겨냥한 감정의 과대포장, 마치 종교라는 무대 위에 올려진 공연 같은 뜨뜻미지근한 예배에 염증을 느낄 것이 분명하다.
거룩한 갈망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이럴 때 하나님 스스로 우리의 영역으로 이끌려 나오신다. 그러나 우리의 예배가 일정한 조건을 충족시킬 때 이것이 가능하다. 언제나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성에의 구성요소들이 적절한 기상조건과 알맞은 습도, 실내외의 적당한 기온차가 있으면 독특한 형태의 성에로 만들어져 우리 눈에 보이듯이, 영적 영역에 알맞은 영적 온도변화가 있을 때 '하나님의 임재'라는 결정이 나타난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주변에 계시지만 영적 온도변화가 없기에 그분을 만날 수 없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나던 날 일정한 조건이 충족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임재'라는 영원한 형태로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신 것이다. 그러나 나라가 부강해지자 교만해진 웃시야 왕은 제사장의 직분을 침해하려했고 그로 인해 문둥병에 걸려 죽었다. 교만한 웃시야가 자기 고집대로 하나님과 접촉하려 했으나, 이것은 하나님의 징벌로 이어졌다.
오늘날 교회 역시 우리 방식대로 하나님께 가고자 하는 웃시야 신드롬을 겪고 있다. 바울이 말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교만한 자를 하나님은 내치실 것이다. 우리의 교만한 마음이 예배를 더럽히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지 못하게 한다. 웃시야 신드롬을 치유하는 유일한 해결책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타는 입술과 뜨거운 가슴이다. 평생을 의지하던 웃시야 왕 사후 의지할 곳이 없어 비통해하는 이사야에게 비로소 하나님은 그 모습을 보이셨다. 우리의 육신의 왕이 죽었을 때 비로소 살아있는 영의 왕과 영의 왕국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도 이사야는 유다민족을 향해 많은 예언을 해왔지만, 하나님을 만난 이후, 그의 사고와 삶은 완전히 변했다. 이사야 1장에서 5장까지는 이사야 자신과 민족의 죄에 대한 심판과 경고의 내용으로 일관하다가 6장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60장에 걸쳐 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예언적 선포를 한다. 그는 전능하시고 영존하신 하나님에 대해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되면 인간 중심의 설교와 찬양에 환멸을 느끼게 되며 이전과 전혀 다르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순수한 흥분과 기쁨을 누리게 된다. 당신의 운명과 미래를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민족과 국가를 변화시킨다. 하나님이 여기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시야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다.
우리의 예배와 찬양은 결코 완전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부족한 것을 완전한 것으로 받아주신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런 문제없는 것처럼 행동할 때 우리에게 관심 갖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간절히 갈망하는 것이다. 내 생각과 이상, 내 방법을 버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그 모습을 나타내신다. 자아를 버리고, 야망을 포기하고,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어느 순간 하나님과 만나게 될 것이다.
3장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우리가 느끼는 포만감이 교회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가장 큰 적이 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에 초점을 두지 않고 어제의 경험을 추억하는데 초점을 맞춘다면, 그동안 하나님은 우리의 제한된 시야와 인식의 범위를 뛰어넘어 저 멀리 이동하실 것이다. 영적인 균형을 이루는 유일한 길은 모든 것이 잘 되어 아무 문제가 없다는 듯한 태도를 버리는 것이다. 사탄의 계략 가운데 하나는 우리에게 만족감을 주는 것이다. 포만감은 하나님께 민감하게 감사하지 못하게 하며, 영적인 배고픔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배고픔이야말로 창조주께 드려야 할 가장 매력적인 것이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을 매혹시키는 것은 상대에 대한 열정이듯이 우리가 하나님께 열정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지금까지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한편, 더 큰 은혜를 갈망해야 한다.
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우리의 배고픔에 대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을 그 보좌에서 움직여 우리의 찬양 한 가운데로 모셔오도록 하는 기본적인 요인은 바로 우리의 배고픔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배고픔이다. 사도바울의 말처럼 우리 안에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완전한 성취감과 공허감은 서로 공존할 수 있을까? 그렇다. '만족과 배고픔' 둘 중 하나만 결여되어도 진정한 부흥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만족하며 감사함과 동시에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해야 한다. 하나님과 항상 함께하려면,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과 하나님의 백성과 교회와 지속적인 관계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란, 말 그대로 영의 사람들이 호흡해야 할 공기와 같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토록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상태를 유지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주된 관심사는 하나님의 임재를 향한 인간의 갈망, 배고픔, 열정에 있다, 하나님은 종교적인 의식보다는 우리의 열정을 원하신다.
2부 하나님 임재 체험의 깊이
4장 강가에 모일 것인가 속으로 뛰어들 것인가?하나님의 임재를 막연하게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그저 은혜의 강가에 모일 것만이 아니라 은혜의 강 속으로 뛰어들어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교회의 음향시설, 아름다운 찬양, 목회자의 뛰어난 설교 때문에 하나님이 교회에 임재하는 것처럼 오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하나님은 이런 것들로 좌우되는 분이 아니시다. 교회시설이나 설교, 성가대 등은 우리를 위한 것이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오직 우리가 거룩한 허기를 느낄 때,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예배할 때 반응을 보이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시고 우리에게 임하시기 전에, 먼저 인간적인 프로그램을 파하신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모호한 상상이나 전지하신 하나님에 도전하는 인간적인 지식을 파하신다. 또 우리가 개발한 각종 영성 개발 프로그램이 보유한 인간적인 영성을 타파하신다. 하나님의 불길이 우리의 삶을 통과하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간적인 기반 위에 뿌리내렸던 모든 것이 소멸한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만 남는다. 하나님의 얼굴을 뵙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자신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함에 있어 공식을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관계가 공허하고 의례적인 행사로 전락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며, 만날 때마다 신선한 기쁨을 맛보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오로지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의 파도를 일으켜 주신다. 하나님의 임재가 어느 때, 어느 민족, 어느 교회에 몰아칠지 아무도 모른다. 부흥이란 하나님과 인간이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만났을 때 발생하는 법이다. 성도들에게 필요한건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기보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에게 예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바울이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한 말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후부터 교회에 갈 때 사람들을 섬기러 가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교회의 모든 예배와 찬양, 기도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 만일 당신이 한번이라도 하나님을 만났다면, 당신은 인간적인 만남에 회의를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되기 때문이다.
단순히 설교만 듣고 끝나는 집회라면 하나님의 폭포수 같은 임재나 불같은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기 힘들다.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나 성령의 불길은 기도모임에서 체험하는 일이 많다. 그러므로 기도의 우선성 확보가 중요하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강력한 힘을 발산한다. 그 힘으로 신약의 교회가 시작되었고, 오늘날에도 2천년전 예루살렘의 다락방 사건을 재현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검증된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려는 실수를 한다. 독생자 예수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손수 찢으신 휘장을 오늘날 우리가 오히려 다시 꿰매고 있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인간의 율법적인 기준을 만들어 놓고 그 기준에 도달했다고 여겨지면 다음 단계로 인도하는 방법으로 하나님과 만나는 과정을 훼방하고 있다. 그러나 미안한 말이지만 하나님과 인간의 중재자 역할은 이미 예수께서 담당하고 계시다.
'뉴에이지'를 비롯하여 세계는 영적인 배고픔을 호소하는 운동의 물결로 넘실대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이런 영적인 움직임에 돌을 던지는 데만 급급해 있다. 물론 사람들이 그들의 가르침에 현혹되어 거짓 가르침을 따르게 될까봐 두려워서겠지만, 참된 교회라면 그들에게 돌 대신 '하나님의 임재'라는 떡을 주어야 한다. 그들의 영적 욕구에 귀를 기울이고, 참된 것으로 그 욕구를 채워줘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교회 프로그램 상의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종교행위에 의존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종교적인 고정관념 때문에 하나님이 이 시대에 행하고자 하시는 역사를 놓칠 수 있다. 하나님을 향한 배고픔으로 필사적으로 갈망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신다. 강으로 뛰어들자! 우리 앞에는 약속의 땅이 기다리고 있다.
5장 운명과 갈망의 조우참된 배고픔은 배고픈 자를 정직하고 솔직하게 만드는 신비한 능력이 있다. 배고픈 아기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배고픔에 모든 관심과 에너지를 집중하고, 그것을 해결할 방도를 찾는다. 본능적으로 필사적으로 울음으로써 원하는 젖을 먹게 된다. 우리 대부분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기 삶에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 태연한 자세로 살아간다. 사실 문제도 모른다. 그러나 영적 배고픔이 솟구치면 하나님께 관심을 보일 수밖에 없다. 위선적인 태도를 벗어버리고 정직하게 우리의 마음을 털어놓아야 한다. "나는 문제가 많습니다. 형식적인 교회생활에 지쳤습니다. 나는 하나님만 만나길 갈망합니다."라고... 우리 속의 처절한 배고픔을 애써 외면하지 말고 하나님과의 신선한 만남을 통해 치유 받아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빠의 선물이 아니라 아빠 자신이다. 하나님과 만남을 갖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시고 우리 역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갈망하는 것. 둘째, 우리가 배고픈 마음으로 열정적으로 졸라대며 울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급히 찾아오신다. 부자였지만 사람들에게 배척받던 삭개오는 배고픈 마음으로 뽕나무에 매달려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다. 흙먼지 속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던 바디매오 역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다. 우리의 사회적 지위가 어떻든, 우리가 어디 출신이든, 어떤 학벌을 가졌든 누구나 간절히 울부짖으면 하나님은 발길을 멈추신다.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인간은 다 똑같다. 주님은 가던 길을 멈추시고 두 사람 모두의 운명을 바꿔놓는 만남을 가지셨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인간의 갈급함이 서로 만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