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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말 몰랐던 예수 십자가

알리스터 맥그래스 지음 | 규장
1장 2천 년 전 갈보리 십자가 처형장으로 가다

우리는 상상력을 이용해 2천 년 전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떠난다. 마치 우리가 제삼자의 눈을 통해 보듯이 십자가를 바라볼 것이다. 이것은 발견을 위한 여행 이상의 일이다. 이는 재발견이요. 재각성을 위한 여행이다.



오늘날 기독교는 많은 부분에서 진부해져가고 있다. 이것은 재앙이다. 개념과 용어, 이미지에서 본래의 신선함을 잃어버렸다. 기독교의 위대한 사상과 용어와 이미지가 진부해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변화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생각하고 말할 때 기독교적인 방법의 순수함과 생동감을 회복하고 십자가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사상을 난생 처음 발견했던 그 시점으로 돌아갔다고 상상하려 애써야 한다. 지성의 눈으로 하나님의 사랑, 죄 용서, 영생의 약속 등과 같은 내용을 붙잡을 필요가 있으며, 거기에 함축된 놀라운 뜻을 음미해보아야 할 것이다.



좋은 신학이란 우리의 기독교적 사고 위에 수북히 쌓여 있는 먼지들을 털어 내는 것과도 같다. 단조롭고 진부하다고 여기는 생각이 우리를 방해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기쁨을 주기도 할 것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우리가 만일 그 깊이를 충분히 맛보기 원한다면 지금까지 배운 것들을 잊어버려야만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부활의 지식에 대해 마음을 닫는다. 우리는 죄 용서에 대한 바울의 영광스러운 선포를 잊는다. 우리는 마치 처음인양, 십자가를 경험할 준비를 하고 우리가 목격하게 될 것을 기대해야 한다. 새로운 창조를 위한 망각의 과정을 잘 준비한 다음, 우리는 이제 상상력을 이용해 2천 년 전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떠난다.



로마인들은 '십자가형'(crucifixion)이라는 처형법을 선호했다. 아마도 십자가형은 지금까지 고안된 처형법 가운데 가장 잔인한 방법일 것이다. 그것은 죄수가 혹독한 고통 가운데서 서서히 죽게 하는 처형법이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대로변에 십자가에 달려 죽은 시체를 줄지어 매달아 놓는 것만큼 사람들에게 반란의 결과가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것은 없었다. 로마인들은 먼저 처형할 사람의 허리까지 옷을 벗기고 채찍질을 시작한다. 채찍 끝에는 갈라진 뼈 조각이나 거친 쇠붙이를 매달아 놓았다. 그 채찍에 맞는 희생자의 등은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그 다음 로마인들은 희생자들에게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처형 장소까지 운반하도록 했다. 이것은 그들을 기진맥진하게 만들었는데 그것이 목적이었다.



처형 장소에 당도하면 죄수의 옷을 벗긴다. 육체적인 고통에 공개적인 망신이 더해지는 것이야말로 십자가형을 더욱 비하시키고, 그 형벌의 효과를 증폭시키는 일이다. 그런 다음 죄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 그들은 보통 죄수의 손목에 목을 박는다. 십자가에는 사람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장치가 있다. '쎄딜레'(sedile)라 부르는 엉덩이 받침대가 십자가 중심 기둥의 중간쯤에 있는데 죄수의 몸이 아래로 쏠리지 않도록 막는 그것은 죄수가 너무 일찍 죽어버리지 않도록 지연시키는 역할을 한다. 유월절 어린양들마저도 이보다는 훨씬 자비롭게 도살된다.



십자가의 형을 집행하는 데 걸리는 시간에는 제한이 있었다. 형 집행자들은 해가 진 다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그 죽음의 과정을 단축시키는 방법으로, '꾸 드 그라스'(coup de grace, 즉 자비로운 일격)라 하는 '죽음의 일격'을 고안해냈다. 그들은 희생자의 두 다리를 부러뜨렸다. 그러면 순간 그들은 더 이상 몸을 지탱할 수 없게 되고, 가슴에 가해지는 압박을 견디지 못한다. 결국 폐가 제 기능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어 이내 죽고 만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면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사람이 십자가 위에서 죽는다는 바로 그 사실은 그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일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다니, 그래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인간일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이 되고자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온갖 종류의 논리적인 매듭에 꽁꽁 묶여버리는 일이 될 것이다. 이런 신학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는 어떤 깊은 논리도 충분하지 않다.



석양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울 때, 로마 병사들은 양옆에 달린 다른 두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린다. 그러나 그들은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는 조금 다르게 행한다. 그는 이미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짐작하건대, 벌써 죽었겠지? 병사들은 구태여 그의 다리를 부러뜨리려고 하지 않다. 대신 창으로 그의 허리를 찔러 깊은 상처를 내고 말았다. 여기서도 우리는 그 피를 볼 수 있다. 그 피는 응고된 것처럼 보인다. 아까 죽지 않았다고 해도, 이제는 확실히 죽었을 것이다. 모두가 그렇듯 티끌에서 티끌로 돌아간 것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도 일어나야 할 일이다. 이제는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다. 이 사람이 그렇게 끔찍하게 죽을 수밖에 없었었던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누구든지 십자가 위에서 죽는다면, '확실히', 그리고 '분명히' 죽는다. 로마 병사들은 사람이 죽었는지 죽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방법을 똑똑히 알고 있다.



2장 2천년 전 예수 부활의 소문으로 술렁이던 예루살렘 거리로 가다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면, 절망의 상징인 십자가가 희망의 상징으로 변해버린다. 그것은 모든 것이 사라져서 다시는 회복이 불가능할 것 같았던, 세상의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태동된 희망을 상징한다.



예수가 죽은 것이 아니라는 소문이 무섭게 퍼지고 있다. 사람들 말에 의하면 그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 이야기에 전율을 느끼고 있다. 물론 미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서 뭔가를 믿기란 어렵다. 그런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황당한 이야기들을 믿게끔 되어 있다. 특히나 유대인들은 이 땅에서 부활이 일어날 거라고 믿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이 남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믿는 일은 오히려 당연할 법도 하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면, 이것은 전혀 말이 안 되는 일 같다. 유대인들이 부활을 믿고 있다고는 하나 그것은 세상의 마지막 때에나 일어날 일이다.



만약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정치적으로 상당한 충격을 줄 것이다. 행여나 '유대인의 왕'이라고 불리던 사람이 살아나기라도 한다면, 로마인들에게는 매우 좋지 않은 소식일 것이다. 그것은 반란의 불씨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로마의 관리들은 이 소문이 '허구'라는 것을 입증하지 않는 걸까? 분명히 저들은 이 부활 사건의 첫 목격자가 여자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유대 사회에서는 여자가 목격한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사실을 어린애도 알고 있다. 저들이 이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꾸며냈다면 그런 점들을 고려했으리라. 그 부분을 수정했더라면 약간 더 믿기 쉬웠을지도 모른다.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생각해 보라. 그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언제 어디서든지 누구나 그를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결국 역사상 모든 인류가 그를 만날 수 있다는 소리인데, 그것은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모두 단순한 착오였을 것이다. 그저 속기 쉽고 우매한 하층민들이 어떤 병적인 망상에 미혹된 것이다. 그것은 단지 그들이 바라던 소망의 성취일 뿐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사람들이 집단망상에 빠졌다는 추측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사용된 언어가 그렇다. 그들은 "예수가 자신들에게 나타났다"라고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그들의 표현에는 예수를 본 것이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으로 보일 여지가 전혀 없다. 예수를 본 사람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제자들에게 모습을 드러낸 사실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활'이라는 현상의 객관적인 측면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애초에 예수는 죽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의 십자가 처형에 뭔가 실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통 로마 병사들이 사람들을 처형하는 방법은 매우 신중하다. 더욱이 그 대상이 예수였다면 그들은 아마 좀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을 것이다. 예수를 제대로 죽이지 못했다면 그것은 화를 자초하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정신을 잃었다고 설명하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처형자들은 그가 당연히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제대로 확인해보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그가 다시 살아났다고 믿는 것은 아주 바보가 아니고서는 힘들다. 그 누가 십자가형을 당해 반쯤 죽은 사람을 보고 부활했다고 생각하겠는가? 어떻게 며칠 동안 굶주리고, 또 몸을 꿰뚫은 상처에서 그렇게나 많은 양의 피를 흘린 사람을 '죽음의 정복자'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어쩌면 무덤과 관련한 어떤 혼란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예수의 제자들이 아마도 예수가 묻힌 곳 주변을 배회했을 것이다. 그러다 누군가가 예수를 원래의 무덤보다 좀더 나은 장소로 옮기기로 마음먹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제자들이 저토록 변화되었을 리 없다. 예수가 재판 받고, 처형될 때만 해도 저들은 숨죽이고 눈치나 보는 일단의 패배자들이었다. 그것은 누구나 다 안다. 저들의 리더격인 한 사내는 자신이 예수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자신감으로 가득 차 보인다. 저들은 변화되었다. 거기에는 뭔가 설명이 필요하다.

하지만 만일 진짜 사실이라면? 정말로 예수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면 그것은 이 세상의 원리와 사고방식을 뒤엎는 일이 아니겠는가? 분명 부활은 예수를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유일한 인물로 만들어 주었다. 이전에 그 어느 누구도 그렇게 높임을 받지는 못했다. 예수는 세상이 지켜보는 가운데 살아나 새롭고 영광된 지위를 얻은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의 의미는 다시금 새롭게 해석되어야만 할 것이다. 십자가는 예수가 하나님께 징벌 받은 것을 의미한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하지만 부활의 광채 속에서 그런 생각은 소멸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일까? 십자가를 둘러싼 길고 긴 논쟁의 종지부를 찍을 시점이 온 것 같다. 아마도 매우 흥미로운 결론이 나올 것 같다.



먼저 부활은 예수의 신분에 대해 뭔가를 말해줄 것이다. 마지막 날에 있어야 할 부활이 돌연 예수를 통해 이 시대에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그 나머지(즉, 세상의 심판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도 지금 여기서 일어나야 한다. 그럼 예수의 부활이 아니 어쩌면 부활한 예수 그 자신이 우리를 심판한다는 것일까? 그렇게 본다면 예수와 하나님은, 두 분이 동등한 위치에 있다는 말이 된다. 그것은 예수가 우리를 권하고 심판하고 거룩한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행했다는 의미가 된다. 아마도 우리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은 관점에서 예수의 생애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예수가 단지 한 인간에 불과했다면 우스웠을 이야기가, 그가 정말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니 완벽하게 앞뒤가 맞아 들어간다. 예수가 하나님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셨다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그 건널 수 없는 심연에 다리가 놓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매우 고민해왔다. 그래서 대개 '형용할 수 없다'는 말로 끝내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제는 놀라운 방식으로 그분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친구들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사람의 사랑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 관해서는 어떤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우리의 현실에 어떤 의미를 갖는다는 말인가? 우리는 태어나서 죽게 된다. 인생을 위해 바치는 모든 시간이 낭비인 것처럼 보인다. 사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이 세상의 잘못된 부분들을 모두 정리해버린 것 같다. 세상에는 정의가 없는 것 같다. 예수와 같이 훌륭한 사람이 왜 처형당해야만 하는가? 그를 죽이는 데 사용했던 그 잔인한 방법은 인간 본성에 내재해 있는 잔학성의 정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살 만한 자격이 있는 유일한 인간인 예수가 처형됐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 이 세계의 모순을 종합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십자가는 그 자체로 절망과 좌절의 상징일 뿐이다.



하지만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면, 절망의 상징인 십자가가 희망의 상징으로 변해버린다. 십자가는 우리 자신의 인간적 자원에 희망의 근거를 두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가를 보여준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곳에 희망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제멋대로이고 절망적인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희망을 가지고 믿음을 지켜야 할 새로운 이유를 제시해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그의 업적과 관련을 맺을 수 있다는 말인가? 죽음을 이긴 부활에 대한 소망이 도대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 세상이 끝난 후에도 영원히 지속된다면 어떨지 상상해 보라 그것은 마치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깨어지지 않으며 멸절하지 않는, 우리가 끝까지 붙들 수 있는 어떤 것을 시작한 것과 같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죽음의 권세가 무너졌다면, 다른 나머지 세력들은 어떻겠는가? 우리를, 우리 스스로는 벗어날 수 없도록 자신의 정교한 사슬에 묶어두고 있는 죄는 어떤가? 나사렛 예수가 죽는 것을 지켜본 사람들은 알아차리지도 짐작하지도 못했지만, 뭔가 매우 중요한 어떤 일이 저 십자가에서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아마도 대사건의 시작일지 모른다.



3장 예수 십자가 사건의 의미는 무엇인가?

신약성경은 십자가를 통해 객관적인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선언한다. 십자가가 우리를 완전히 변화시킬 수 있다고 분명히 말한다. 신약성경은 십자가로 인해 새롭게 변화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효과적인 방법들을 제시한다.



복음이란 오히려 십자가와 부활사건 그 자체라기보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놓여 있는 그 사건들의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역사의 어느 한 시점에 예수가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우리를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이 바로 복음이다. 우리는 사건이 역사 속에서 가지는 의미를 정립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신약성경, 그 중에서도 특히 바울서신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자주 나타난다. 맨 처음, 사도들의 설교는 공통적으로 "그리스도가 살아나셨다!"라는 간결한 주제를 담고 있었다. 사도행전의 초기 설교들은 이 경험에 대한 짜릿한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점차 깊은 고찰이 일관되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부활에는 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선, 부활은 십자가에 못 박혔던 예수가 이제는 우리의 '주'(Lord)이심을 보여준다. 부활의 예수의 사역이 권세 있었음을 분명히 말해준다. 따라서 과거 예수가 자신에게 그런 권세가 있다고 주장했던 것들이 이제 사실임이 입증된 셈이다. 그리고 예수가 하나님이라면, 첫째로 우리는 그 순간 하나님에 대한 가장 훌륭한 시각적 예시를 본 것이 된다. 이 시각적 예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다. 예수를 본 것은 아버지(성부 하나님)를 본 것이다. 둘째로, 성육신 교리는 하나님의 사랑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를 낮추심에 대해서도 감동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이 이 세상 속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하셨다. 그것도 로마 황제로서가 아니라, 제국 변두리의 누추한 어딘가에서 태어난 어린아이로서 말이다. 따라서 우리도 그분을 만나기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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