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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영성의 파워

스티브 맥베이 지음 | NCD
1. 은혜의 삶



나는 27년 동안 주님을 믿어 왔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를 깨닫기 시작한 것은 불과 5년밖에 되지 않는다. 5년 전에야 비로소 주님이 나를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신 진리는 우리의 삶에 영원한 변화를 일으킨다. 나에게도 하나님이 은혜 안에 사는 삶을 가르쳐 주셨고 그 진리가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믿는 자에게 예수님은 그저 구세주요 주님으로만 머물러 계시지는 않는다. 우리에게는 그보다 더 큰 부르심의 이유가 있다. 예수님이 주님(Lord)으로만 계신다면, 신약성경에 나오는 주님은 단순히 주인(Boss)이라는 의미만 지닐 뿐이다. 이처럼 그를 주인으로만 알 때 우리에게는 종의 마음이 생겨나게 된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한 어조로 우리가 더 이상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생명으로 여길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맛볼 수 있는 새로운 삶의 차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에게 바로 예수님의 본질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는 이미 우리 안에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주인을 기쁘게 하려는 종의 마음과는 달리, 자녀로서 아버지와 같은 마음과 생각을 품게 된다.

대부분 그리스도인의 삶을 지배하는 문제는 '선과 악'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옳은 일만 한다는 것은 너무 단순한 목표이다. 구원받지 못한 많은 사람들도 대부분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살아가려고 애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단순히 옳은 일 몇 가지 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의롭게 사는 데 있다. 그런 목표를 가질 때 우리는 기적의 삶을 경험하게 된다.

"주 하나님이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을 일구시고,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 주 하나님은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를 땅에서 자라게 하시 고, 동산 한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창 2:8-9)

두 나무는 하나님 안에서 선택할 수 있는 두 가지 삶의 형태를 보여 준다. 생명나무란 예수님을 상징한다. 신약 성경에는 예수님이 바로 생명이라고 거듭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곧 생명이다. 바로 생명이신 예수님과 연합하여 사는 삶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이다. 이것은 그분과 함께 거하고 그분과 함께 경험하고 그분을 즐기는 삶이다. 이것이 태초부터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었다.

한편 이 동산에는 다른 나무도 있었다. 그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서 율법을 나타낸다. 하와가 그것을 먹고 남편인 아담에게도 주어 두 사람 모두 선악과를 먹었을 때,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갑자기 그들의 눈이 밝아져 처음으로 자기들이 벗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전에는 이들이 벗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나는 이들이 그 전에는 벗었다는 것에 전혀 마음을 쓰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선악과를 먹기 전 그들의 삶은 온전히 하나님께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런데 타락이 시작되는 이 시점부터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인류는 계속해서 자신에게만 집중하며 하나님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즉 그들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선택했기 때문에 선악과의 기준이 그들의 삶에 들어 온 것이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선과 악의 잣대로 옳고 그름의 문제를 삶 속에서 찾기 시작했다. 그것이 그들 삶의 중요한 가치가 되면서 도덕적인 행위를 갈구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그러나 하나님은 도덕적인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인류를 창조하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선악을 초월하여 도덕적인 삶뿐만 아니라 기적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범한 최초의 죄는 바로 하나님 안에서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독립적인 삶을 선택한 것이다. 행위를 선하게 바꾼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대 교회에서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어 성도들에게 승리를 경험하도록 가르친다.

어느 날 빌립이 나를 찾아와서 자신이 포르노의 유혹에 빠져 있다고 고백하며 상담을 요청해 왔다. 나는 먼저 교회를 꾸준히 나오고 매일 아침 성경을 읽으라고 권면했다. 또한 하루에 30분 정도 기도하고, 이와 더불어 정욕과 유혹에 관련된 성경 구절들을 암송하면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나 사실 빌립에게 했던 상담은 "당신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악이라는 가지를 가지고 있군요. 그러니까 선이라는 가지로 바뀔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정말 빌립이 나아지겠는가? 우리는 모두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성경을 읽으며 기도생활을 한다. 하지만 우리 마음속에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안고 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은 좌절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나는 빌립에게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 안에 있는 정체성, 즉 예수님의 본질과 성품이 그 자신 안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어야 했다. 예수님이 그에게 역사하실 때만이 그는 유혹에서 승리할 수 있다. 승리의 삶을 사는 비결은 행위를 바꾸는 데 있지 않다. 승리의 열쇠는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만약 기적의 삶을 살기 원한다면,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성령 안에 거할 때,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삶 가운데 흐르게 된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에 싸여 나타날 것입니다."(골3:4)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행17:28)



믿는 자가 삶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그것은 낮은 영성을 가지고 선악을 기준으로 하여 사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사는 것은 은혜의 영성이다. 우리의 행위 중심의 삶에서 인격 중심의 삶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은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매일 아침 "하나님을 위해서 제가 무슨 일을 할까요?"하고 묻지 않았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거하기만 하면 예수님이 나를 통해 일하신다.(요 14:9-10)

누가복음 10:40-42절을 보면 유명한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가 나온다. 마리아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녀는 예수님의 발 아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다. 마리아는 좋은 것, 즉 그 분 안에 거하는 편을 택했다. 이것이 섬기는 일을 무시한 것인가? 예수님이 마리아와 함께 있다가 마리아에게 목마르다고 속삭였다면, 마리아가 어떻게 반응했을까? 아마 단숨에 일어나 물 한 컵을 가지고 왔을 것이다. 한편 마리아는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했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배가 고프지도 않은데 음식을 준비하느라고 바빴고, 졸립지도 않은데 잠자리를 준비하느라고 바빴기 때문이다. 진정한 섬김이란 예수님 안에 거할 때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하느라고 바쁘다. 온갖 봉사활동으로 교회에서 분주하다. 그러나 그 모든 충성스런 섬김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갈급함과 허전함이 남아 있다. 무언가 빠져 있다. 그것은 우리의 행동이 예수님의 인격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는 생명나무가 없다. 율법적인 삶은 우리에게 끝없이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율법에 따라 사는 한 우리는 결코 만족을 느낄 수가 없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항상 무엇인가를 해야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것은 율법주의다. 은혜는 나에게 스스로 하고 싶다는 소원을 불어넣는 반면, 율법은 결코 만족을 주지 않는다.

2. 육의 삶수년 동안 나는 하나님께 새로운 헌신을 약속하곤 했다. 어떤 동기로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정죄감을 느끼면 다시 새롭게 헌신하고 또 다시 침체에 빠지는, 그런 악순환을 반복했다. 그렇게 열심을 내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지치곤 했다. 자족(스스로 만족하는 삶, 즉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행하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을 말함-역자주)하는 마음은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우리를 지치게 만들고 섬기는 행위를 줄이게 한다.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뒤로 물러설 때 죄책감을 느낀다. '나 같은 사람은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없어. 나 같이 일관성 없고 부족한 사람을 하나님은 사용하지 않아' 그러한 속삭임이 끊임없이 들려온다, 우리는 점점 깊어져 비참한 구렁텅이로 빠져든다. 이것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영적인 침체이다. 급기야 '하나님, 나를 죽여주세요'라고 외치며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진다. 그러나 새로운 동기가 주어지면 또 다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다. '자, 이제 나는 그분 앞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거야' 반복하여 하나님께 새롭게 헌신하는 삶의 형태는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사실 성경 어디에도 우리에게 재헌신을 요구하는 곳은 없다. 예수님은 이것과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마16:24;막8:34;눅9:23)

예수님은 헌신하라고 하지 않고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것은 내 의지로 그분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께 항복하고 그분의 생명이 우리를 통해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삶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육의 삶'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육이란 말은 자족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성경적 용어이다. 그리고 우리가 살면서 각자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스스로 발전시켜 온 기술, 혹은 능력을 말한다. 즉 우리가 자신의 삶을 관리하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그분께 온전히 내어 드림으로 그분의 삶이 우리의 삶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육은 삶을 자신의 능력으로 관리하여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방법을 추구하라고 한다.

우리는 종종 죄를 우리 힘으로 극복하려 애를 써 본다. 그리고 옳은 일을 해서 승리하려고 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6-17절에서 두 가지 길, 곧 '육의 길'과 '영의 길'이 있다고 말했다. 육은 자족하는 삶이며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애쓰는 삶이다. 한편, 영은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이다. 예수님이 나를 통해 사시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빌립보서 2장 5-8절에서 바울은 타고난 자원과 능력을 자랑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누구든지 자신과 겨뤄 보자고 말한다. 소위 바울은 종교적으로 탁월한 육적인 자랑거리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것은 긍정적인 요소이기는 하나 여전히 육에 속한 것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육을 뛰어넘는 놀라운 진리를 가르쳐 주기 전까지, 그가 해 왔던 일들은 종교행위에 불과했다.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누가복음 15장에 두 아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큰아들은 자기 스스로 아버지를 위해 무언가를 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늘날 교회 안에서 주님을 충성스럽게 섬기고 있지만 내면은 비참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으로 상징되어진다. 큰아들은 집을 떠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 집에서 종으로라도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돌아오는 둘째 아들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를 오해하고 있었다. "내가 아버지 집에서 여러 해 동안 섬겼고 바른 일만 했기 때문에 아버지는 나를 더 사랑하실 거야'라는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반응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지극한 사랑의 마음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얘, 너는 나와 항상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너의 것이다. 내가 가진 것이 다 네 것인데 너는 살찐 송아지 몇 마리로 잔치를 베풀었다고 화가 났구나! 네가 송아지를 원하느냐? 저기 들판을 보아라. 수천 마리의 소가 있지 않느냐? 저것들이 다 네 것인 줄 알지 못하느냐?"

오늘날 교회 안에도, 자신이 하나님께 얼마나 사랑 받는 존재인지, 얼마나 용납 받는 존재인지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들은 주님을 열심히 섬기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큰아들처럼 불만이 자리잡고 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삶인가? 육의 삶은 옳은 일을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은혜의 삶은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예수님을 처음 영접했을 때를 기억해 보라. 그 때가 우리 삶의 이정표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님과의 친밀함을 잊어버렸다. 친밀한 관계를 가지는 대신 규율과 법칙에 얽매이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존재 가치보다 행위에 초점을 두게 되었다.

그렇다면 육체를 어떻게 끊을 수 있겠는가? 바로 십자가다. 주님은 우리가 승리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십자가를 주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우리도 함께 못 박혔다. 우리가 할 일은 또 다시 새롭게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다. "주님, 이제 저는 스스로 애쓰고 노력하는 것에 지쳤습니다. 더 잘해 보려고 애쓰는 것에 진력이 납니다. 저 자신의 힘으로 해 보려는 몸부림을 끊어버리고, 이제는 더 이상 발버둥치지 않겠습니다. 주님께 두 손 들고 나아갑니다. 저의 모든 삶을 주님께 드립니다. 주님이 내 안에서 하시고자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행하소서, 그래서 내 육의 삶을 끊어주옵소서."

3. 깨어진 삶



예수님은 '믿는 자들의 삶은 생수의 강이 흐른다'고 말씀하셨다. 그 강은 우리의 가장 깊은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서 약속한 생수의 강을 경험하지 못하고 산다. 게다가 그 중요성조차 모르고 사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한계를 넘는 곳까지 인도하셔야 한다. 자족의 한계에 부쳤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육체를 깨닫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육적인 생활, 즉 혼자 살아가려는 삶을 회개하도록 인도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육의 삶을 정리하도록 하시는지 그 과정을 설명하기 전에 깨어짐(brokenness)이라는 개념을 생각해 보자. 우리가 깨어지는 자리로 나아오기 전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히 사용하실 수가 없다. 깨어짐과 절대적인 순복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깨어짐은 우리의 능력에 의지하는 것을 포기할 때 생긴다. 절대적인 순복은 주님께 나를 완전히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면 어떤 일이든지 내게(to me), 나와 함께(with me), 내 속에(in me), 혹은 나를 통해(through me) 주님이 마음대로 하실 수 있도록 나를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것이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은 사람은 구할 것이다."(막8:35)

이 말씀에서 목숨을 잃는다는 것은 마지막으로 잡고 있는 나뭇가지에서조차도 손을 떼는 것이다. 하나님이 쓰신 믿음의 사람은 모두 깨어짐의 쓰라린 과정을 겪었다. 그것은 모세도 마찬가지였다. 깨어짐은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 겪어야만 하는 필수과정이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요12:24)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모세를 부르셨다. 그는 생애 초반 40년을 애굽의 궁정에서 보냈다. 거기서의 40년은 화려한 세월이었다. 이 기간에 그는 자신의 육을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삶을 관리하고 헤쳐나가는 기술들을 개발하여 유능한 정치인이 되었다. 그러나 모세는 광야에서 또 40년을 보냈다. 거기서 그는 과거의 화려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목자의 삶을 살았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섬김을 받는 자리에서 양들을 돌보는 초라한 목자로 전락한 것이다. 모세에게 광야는 하나님의 새로운 훈련의 장이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모세를 찾아와 지팡이를 던지라고 말씀하셨다. 그 지팡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전부였다. 그것은 목자로서의 능력과 기술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지팡이를 던졌을 때, 그것이 뱀이 되는 기적을 체험하였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가 자족하고 신뢰하던 그 지팡이를 버리도록 말씀하셨다. 그것이 오히려 그에게 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뱀을 다시 잡으라고 하셨고, 그가 잡았을 때 다시 지팡이가 되었다. 출애굽기 4장20절에 보면, "하나님이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하는 구절이 나온다. 이 날 이후로 그 지팡이는 더 이상 모세의 지팡이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지팡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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