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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한 십자가

존 피셔 지음 | 죠이선교회
1. 올드그리니치 십자가

코네티컷 주에 있는 올드그리니치 마을에 한 교회가 있다. 보통 강단 뒤쪽 벽에 십자가를 걸어두는 일반 교회와는 달리 이 교회는 강대상 1미터 앞 콘크리트 바닥에 십자가가 박혀 있다. 전통과 상식과 예술감각을 뒤집는 엉뚱한 자리이다. 보기도 흉하다. 거친 원목으로 만들어진데다 자세히 보면 군데 군데 갈라지고 딱딱해서 무척 무거워 보인다.



누구도 이 십자가를 무시할 수가 없다. 나는 교회 앞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걸어다니면서 무의식적으로 십자가를 피하려고 했다. 나는 십자가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했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십자가를 기준으로 내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했다. 교회당 안으로 들어와서 십자가의 위치를 보는 순간 놀랐지만 정말 중요한 것을 발견했다. 교회의 정중앙에 십자가가 떡하니 버티고 있듯이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는 언제나 역사의 중앙에 있고 진실한 마음으로 십자가를 붙잡고 사는 사람의 삶 중심에 존재한다. 그리고 교회의 정중앙에 놓인 십자가가 눈에 거슬리듯이 주님의 십자가 역시 그렇다. 아니 그래야 한다. 십자가는 안락의자가 아니다. 예배당 중앙의 거친 나무 십자가는 십자가가 주는 충격을 완화하려는 인간의 노력을 거부한다. 우리가 대하는 십자가는 일반적으로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 대개 귀걸이, 팔찌, 목걸이로 쓰인다. 예배당 지붕 위나 본당 벽에 걸려 있다. 십자가는 감성이 녹아 있는 종교적 상징이나 장신구이다.



이 십자가의 범상치 않은 자리가 21세기를 시작한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현대 교회는 점점 십자가 없는 기독교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다. 기독교를 대중화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희생을 거의 요구하지 않는 편리한 복음을 창조했다. 복음의 좋은 부분만 전하려는 현대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의 고초를 간과해 버렸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십자가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인간의 무능력한 죄 문제는 어디로 갔는가. 현대인에게 원죄는 역기능과 알코올중독에 대한 관심의 그늘에 가려 뒷전에 물러난 지 오래다. 교인들도 사고기능을 회복하는데 십자가의 능력보다는 정신과 의사의 능력을 신뢰하는 편이다.



죄의 대가를 요구하는 의롭고 거룩하여 근접할 수 없는 하나님을 생각해보자.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 때문에 수백 년간 제단 위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간 소와 염소를 생각해보자. 오늘날 우리가 아는 제사의 본질이 무엇인가? 제사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 있기나 할까? 현대 복음이 전파하는 하나님은 하늘에 사는 친구일 뿐이다.



그러나 만물의 중심에 있는 십자가는 우리의 가면을 깨부순다. 우리의 교만과 죄 때문에 주님이 치른 대가인 십자가를 보고도 겸손하지 않기란 쉽지 않다. 십자가는 시대의 변화에 거의 반응하지 않는 듯하다. 모든 세대가 자신만의 차별화 된 문화를 꽃피울 때도 십자가는 변함이 없었다. 나는 본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십자가를 시류에 맡기지 않으셨다. 시류에 거슬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독생자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셨다. 죄를 위해 피를 흘리는 제사에 대한 노래를 어느 누가 좋아할까? 그러나 현대 교회는 친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고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고자 시류에 맞는 매력적인 모습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와 같은 교회는 만물의 중심에 타협하지 않고 서 있는 십자가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올드그리니치 십자가는 모든 삶의 중심에 십자가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한다. 십자가는 결혼, 장례, 공연, 세례, 봉헌, 기도, 예배의 중심에 있다. 장례식때 관을 두기도, 결혼식 때 신랑과 신부가 붙어 있기도, 음악회 때 악단을 배치하기도 불편하다. 올드그리니치 교회는 마치 십자가를 기준으로 지어진 듯하다. 벽보다 지붕보다 먼저 십자가를 세운 것 같아 보였다. 십자가가 그렇다고 말해주는 듯했다.

2. 하나님의 색

하나님은 첨단 문화의 기수처럼 전국에서 새롭게 지어진 교회와 너무나 잘 어울린다. 신세기에 걸맞은 새로운 복음과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모브(mauve)빛깔로 치장되었다. 과거에 비해 세련된 모브빛 하나님이 우리 문화에 더 잘 어울리는 이유는 자명하다. 새로운 하나님은 구원의 길이 열려 있는 교회 근처에도 오기 싫어했던 사람의 관심을 끌게 만들었다. 이제 사람들은 교회로 몰려들고 있다. 역사상 최초로 교회가 사람들의 실제적인 필요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재정관리, 인간관계 개선, 이성교제, 자녀양육, 중독치료, 치유, 알코올중독, 다이어트, 건강 등 사람들의 필요를 채웠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을 치유하고 삶에 소망을 주셨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언제나 하나님보다 나의 필요에 가 있다. 이제 교회가 거의 정신과 의사 행세를 하고 있다.



이제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은 사람은 그저 마음 문을 열기만 하면 되고 문이 열리면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신다. 이렇게 친절하고 멋진 하나님이 문 밖에 계신데 누가 문을 꼭꼭 닫고 있을까?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모브빛" 하나님을 성경에서 찾을 수가 없다. 나는 지금도 찾고 있지만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 대신 핏자국은 선명하게 보인다. 피와 같은 붉은 색, 진홍같은 죄의 색이 보인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 사실 구약성경 대부분이 그리고 신약성경도 동일하게 핏빛으로 물들어 있다. 유행을 따르는 "모브빛" 복음에 도움이 되지 않는 내용이다.

올드그리니치 교회에는 키가 높은 십자가가 하나 더 있다. 이 십자가는 교회당 밖 입구 쪽에 있어서 거리에서나 기차에서나 쉽게 볼 수 있다. 뉴욕 시를 왕래하는 기차가 하루에도 수차례 사람들을 태우고 십자가 곁을 지나간다. 녹슨 십자가는 비를 맞으면 녹빛 물이 떨어진다. 이것이 이 십자가가 전달하는 가장 강력한 외침이다. 십자가가 박혀있는 콘크리트에 물들인 녹빛은 지워지지도 않는다. 그리고 비가 올 때마다 시멘트는 반복해서 녹빛에 물든다. 눈보라가 지나간 겨울 어느 날 모습을 드러낸 태양이 십자가를 달구면 녹슨 십자가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하얀 바닥에 핏빛 구멍을 낸다.



예수 그리스도는 엄청난 고통 속에 죽어갔다. 성경은 피로 물든 책이다. 유쾌한 이야깃거리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십자가의 실체를 경험하지 않고는 이 강력한 십자가의 모습 뒤에 숨은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우리는 레위기에 대한 설교나 간증은 자주 듣지 못하는 편이다. 누군가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구절이라며 레위기 4장4절을 소개하는 장면을 상상해보자. "곧 그 수송아지를 회막문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 그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예배가 끝나면 이 별난 사람을 구경하려고 너도 나도 몰려갈 것이다.



나는 소, 염소, 양을 죽일 준비를 하고 하루를 맞는 제사장이 되는 상상을 했다. 가죽을 벗기고, 내장과 지방을 제거하고, 각을 뜨고, 비둘기라면 머리를 비틀고, 날개를 찢어내고, 그런 다음 여기저기 제단에 다른 제사장들의 발가락과 귓불에 계속 피를 뿌린다. 그 냄새와 낭자한 핏자국과 파리 떼와 쓰레기를 상상해 보라. 게다가 이런 일은 끝이 없다. 제사장이 방금 황소를 죽이고 막 제사를 마쳤는데 한 사람이 나타나 이렇게 말한다. "저를 위해 희생제물을 드려 주십시오. 제가 이웃집 부인과 동침하고 말았습니다." 내가 제사장이었다면 소를 잡는 대신에 그를 잡을 것 같다. "그런 수작을 부리러 다니면서 이런 때가 올 것을 예상하지 못했느냐?"고 호통을 치겠다. 이런 일이 수없이 반복되면 한번쯤은 제사장 중에 누군가는 끈적끈적한 손을 하늘 높이 쳐들고 소와 양과 비둘기들이 우는 가운데 크게 소리치지 않겠는가? "이놈들아, 제발 죄 좀 짓지 마라!"



많은 사람들이 피를 보기만 해도 기절한다. 우리 대부분은 피 냄새를 맡지도 않고 피를 볼 일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그런데 오늘 나는 레위기를 읽고 나서 그것이 과연 다행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런 고통스런 객관적 교훈을 떠나 살게 되었고 이제는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 십자가가 무엇인지 잊어 버렸다.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 정말 무엇을 지불했는지, 죄를 짓는 일의 대가로 무엇을 지불했는지를 우리는 몰랐다.



우리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생활을 하고 있다. 죄, 자백, 용서의 과정은 모두 피를 흘리듯 고통스런 일이고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고통 뒤에는 기쁨이 찾아온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이 대부분을 추상적으로만 받아들인다. "갈보리 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노래를 부르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우리 자신의 죄를 저 멀리 두고 노래로만, 예배 의식으로만, 신학적으로만 죄를 생각하지 개인적인 것으로는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면 그가 죽으신 다음에 지은 죄들도 이전에 지은 죄들과 마찬가지로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는 원인이 된다. 이런 진리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어기기가 어렵다. 이는 마치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등에 칼을 꽂는 것처럼 모순이다. 현대의 죄와 그리스도의 과거의 죽음 사이의 인과관계를 살펴볼 때, 단순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반복되는 죄에 대해 무엇인가 결단을 해야 한다.



3. 신비스러운 십자가

이 세상에서 십자가의 중요성과 목적은 우리의 생각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 십자가에서 일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사실인지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말고 할 일이 아니다. 또한 반드시 사실로 인정받을 필요도 없다. 복음을 듣고 감정적인 경험을 해야 구원 얻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 죄를 위해 험한 언덕 위의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당신도 나도 그 자리에서 이 사건을 목격하거나 무슨 소리를 들은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보셨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죽은 예수님을 불쌍히 여기는 경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사실을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전하려고 갖은 수단을 다 쓰시는 하나님도 안 됐다는 식으로 바라본다. 우리가 척박한 십자가를 부드럽게 만들든지 아니면 아예 치워버리지 않고는 현대인들의 입맛에 맞추기가 쉽지 않다. 물론 하나님은 이런 놀음이나 흥정에 조금도 관심이 없으시다. 단지 우리가 기독교를 오해한 것이지만 사람이 제아무리 머리를 써서 하나님을 안다고 해도 여전히 기독교를 제대로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어찌됐든지 하나님의 아들은 숲 속에서 나무 하나가 쓰러지듯이, 그리고 주위에서 그 쓰러지는 나무 소리를 아무도 듣지 못했다 해도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



오늘날 기독교가 다시 검토해 보아야 할 가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복음이 현대문화를 수용하면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쉽고 그리스도인이 될 확률도 높아진다는 것이다. 인기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어 간증을 하고 다니면 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만약 대중문화 가운데 복음적인 요소가 없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만약 복음이 이 문화와 함께 존속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지금 우리가 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복음을 사람들이 듣고 있다고 어떻게 확신하겠는가? 복음보다 문화의 목소리가 커서 사람들이 복음을 감지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복음을 상황에 연관시키려고 하다가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위배되는 행동을 하고 진리의 효용성을 잃을 수 있다. 하나님은 항상 당신의 메시지를 세상과 어울리지 않게 제시하기를 좋아한다. 하나님은 자주 메시지를 반문화적으로 선포하는 경향이 있다. 그분은 우리 문화에 역행하여 역사한다. 자기들끼리도 바로 그 사람을 죽여 버리는 무리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는 계획을 시작하신다. 그리고 사람들이 믿든지 말든지 그의 죽음을 통해 그들과 다른 모든 사람들을 구원한다고 선포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갑자기 유행처럼 인기 있는 일이 된다면 과연 이 기독교가 예수님이 말씀하시던 것인지 질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특정 시대가 낳은 인물이 아니다. 그는 언제나 존재하였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신다. 그를 1세기의 로마 문화로 정의할 수 없다. 그의 삶과 메시지는 그 시대의 문화를 초월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문화의 안과 밖에 동시에 존재한다. 변화와 초월이 가능한 복음의 능력, 문화의 안과 밖을 아우르는 복음의 특징을 구현하려는 노력을 현대 기독교는 게을리 하고 있다. 우리는 너무 '안'에 들어와서 사람들을 '밖'으로 끌어내지 못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날,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도 이와 똑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싫어했던 사람이라면 예수님을 '바보!'라고 말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날 오후 골고다 언덕에서 이 처참한 광경을 보면서 어떤 식으로든 사랑을 느낀 사람은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역겨운 기분이 든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기분이 어떤지 묻지 않으셨다. 그분은 그냥 그렇게 하셨다. 그는 독생자를 보내어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고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전체를 통하여 이 사건이 중요하다고 선포하셨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제기된다. 내가 구속할 만한 가치가 있어서 그리스도는 나를 위해 죽으셨나, 아니면 나를 통해 은혜를 보이시고 더 나아가 온 세상에 은혜를 보이시려고 죽으셨나? 만약 하나님의 구속이 나의 가치에 따른 것이라면 하나님은 유능한 사업가에 지나지 않으며 투자에 상응하는 수익을 거두었다. 그러나 만약 이 구속 사업이 하나님의 전체 계획을 하늘에 속한 정사와 권세에게 알리려는 목적이라면 우리는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큰 그림의 일부가 된다. 핵심은 하나님의 교회를 통해 나타난 은혜와 자비이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이 영광을 돌리는 것, 모두가 무릎 꿇고 만입이 찬양하며 그에게 예배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러한 내용이 빌립보서 2:5-11에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일을 기록하면서 무릎을 빼고는 우리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모든 것이 하나님과 그의 아들과 그리스도의 태도에 대한 것뿐이다. 우리는 그의 사역의 목적이 아니며 함께 예배에 참여하게 될 피조물이다. 중요도를 따져 볼 때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위해 죽으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위해 죽으셨다고 믿는다.



4. 대속제물

한 세대를 대표한 전도자요 하나님의 대변자로 헌신적인 사역을 했던 빌리 그래함 목사는 미국 42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기도를 하게 되었다. 반세기를 복음 전파에 쏟아 부었지만 이 세상은 그가 사역을 시작할 때보다 더 큰 혼란에 빠져든 것 같아 보였다. 그는 이 일에 일말의 개인적인 책임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는 단상에 올라서서 온 국민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나아갔다. "오,하나님 우리는 죄인입니다." 혼자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던 나는 빌리 그래함 목사의 기도를 듣는 순간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의 말은 천년을 관통하고 있는 듯했다. 그날 아침 혼자 문제의 핵심을 찌르는 빌리 그래함 목사의 기도에 미국의 내면에 흐르는 죄악을 보고 죄책감을 느꼈다. 취임식이란 원래 밝은 희망의 미래를 제시하는 날이다. 그러나 아무도 빌리 그래함 목사를 비난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진실한 말 한마디에 나라 전체가 머리를 숙였다.



우리가 에이즈 치료법을 발견하는 데는 성공할지 모르나 동성애자들이나 보통 사람이거나 상관없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악의, 편견, 교만 등에 대하여는 속수무책이다. 우리가 배고픈 자들에게 음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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