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그 끝없는 유혹
황호찬 지음 | IVP
제1장 다르게 사는 사람들성장 지상주의 정책과 이로 인한 고도 산업 사회로의 신속한 진입은 돈으로 환산될 수 없는 많은 귀중한 것들, 예를 들어 정직, 사랑, 책임의식 등을 희생시켰다. 경제발전으로 우리의 호주머니는 두둑해지고 씀씀이는 헤퍼졌지만, 인정은 메마르고 거리는 삭막해져 간다. 회칠한 무덤같이, 겉으로는 호화롭고 웅장한 빌딩들이 치솟았지만 그 속에는 탐욕과 방탕이라는 죽은 자의 뼈와 같은 더러운 것이 가득 차 있다(마 23: 25-27).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정신없이 치닫고 있는 이 길이 혹 영원한 멸망으로 이르는 길은 아닌가? 이러한 영혼의 절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 분주하고 시끄러운 세상 소리 때문에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더 이상 듣지 못하는 심각한 영적 불구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이 책에는 이러한 영적 질문들이 깔려 있다. 필자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다르게 살도록 지음 받았으나 그렇게 살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그리스도인의 정체성(identity)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자 한다. 특별히 매일의 경제 행위에 비추어서 이 주제를 조명해 볼 것이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경제 행위는 인간의 다른 행동과는 달리 인간 생존 자체를 결정짓는 데 절대적이라는 점에서 쉽게 비리, 속임, 부정, 탐욕이 용납되는 영역으로 자리 잡아 왔다.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인지 그 기준이 분명치 않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받은 은혜만을 누리려고 할 뿐, 은혜에 대한 마땅한 응답으로서 그리스도인답게 살기를 거부한다. 본 회퍼는 '싸구려 은혜'야말로 현대 교회의 가장 강력한 적이라고 말했다. 싸구려 은혜란 회개 없는 용서, 훈련없는 세례, 제자도(discipleship)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은혜, 살아계시며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 없는 은혜, 한마디로 말하면 희생 없이 쉽게 교회에 다니고자 하는 것을 말한다. 현대인의 삶에는 상황윤리가 너무나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이 상황윤리가 현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는 어차피 인간은 절대적 진리를 알 수도 없고, 설령 안다 해도 다 지키지 못할 터이니 상황에 따라서 적당히 살자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리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의 몇 가지 예는 상황윤리가 우리 시대에 얼마나 깊숙이 침투되어 있는가를 보여 준다:- 당신이 나에게 하고자 한다면 나도 당신에게 그렇게 할 권리가 있다.- 결과는 수단을 정당화한다. -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도 괜찮다. - 들키지 않을 수만 있다면 하고 싶은 대로 하라. - 서로 동의만 한다면 모든 일은 다 옳다.
종합하건대,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이 싸구려 은혜와 상황윤리 속에서 세상과 타협하며 살고 있는데 어떻게 감히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길을 자신 있게 권면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다. 과연 '다르게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또 왜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가? 그리고 왜 그일은 그토록 어렵기만 한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물질의 욕망이 충족되면 행복해질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태도는 결정적인 결점을 안고 있다. 첫째는 이들이 추구하는 대상이 유한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물질적인 욕망보다는 인간관계에 역점을 두기도 한다. 이들은 돈보다는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고 원만한 인간관계와 서로에 대한 신뢰를 중요하게 여긴다. 또한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를 측은히 여길 뿐 아니라, 이들을 돕기 위해 삶을 바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탕에 깔려 있지 않은 인간관계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는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여러 부정적인 요소(속임수, 배신 등) 때문에 실망하고 상처받기 쉽다. 인간 중심적인 휴머니즘은 인간의 근원적인 사악함으로 인해 언젠가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증명되었다.
이와는 아주 다르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삶의 최우선에 두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돈이나 인간관계보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물질도 인간관계도 하나님과의 관계도 다 중요한데,문제는 우선순위이다. 만약 우선순위가 뒤바뀐다면, 즉 그 무엇이 마땅히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를 차지한다면 그것은 바로 우상이다.
제2장 돈이란 무엇인가?한 통계에 의하면 성인의 경우, 하루의 약 60-70퍼센트를 돈과 관련된 생각으로 보낸다고 한다. 돈은 과연 현대인의 신(神)이라 할 만하다. 그러면 대체 돈이란 무엇인가? 돈이 영적인 문제를 야기시키는 이유는, 그 이면에 하나님과 사단이 서로 대립되고 있기 때문이다. 돈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될 수도 있고 사단으로 말미암은 저주의 수단이 될 수도 있다.(창 13:2: 14:23: 신 8: 18: 왕상 3: 13: 겔 12장; 살후 2:9)
루이스(C.S. Lewis)는 "우주에 중립 지대는 없다. 한 치의 땅, 한 순간마저도 하나님과 사단이 동시에 그 권리를 주장한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기려 한다. 즉, 하나님도 적당히 섬기고 사단도 적당히 섬겨 어느 주인으로부터도 저주받지 않고 모두로부터 복을 받고자 한다. 예수의 말에 따르면 역사상 최초로 야훼의 경쟁자로서 사회를 지배했던 거짓신은, 전적으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것, 즉 돈이었다. 그렇다 인간이 돈 문제에 대해 무기력한 이유는 돈에 이와 같은 신적(神的)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돈에는 인간을 조종하여 하나님까지도 대적하게 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영적 능력 이상으로 재물을 소유한 자에게는 돈이야말로 그를 파멸에 이르게 할 수 있는 폭탄과도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돈이 누구에게로부터 오는 것인지, 그 주인이 누구인지, 왜 이런 돈이 나에게 주어졌는지 등을 계속해서 스스로 질문할 수 있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적 전쟁에서 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만물이 선하다면, 돈도 좋은 것이어야 한다. 즉 물질은 인간의 행복과 풍요로운 삶을 위해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직접 인간에게 허락하신 선한 것이다. 그런데 타락으로 인해 인간은 돈에 대해 적어도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오해를 하게 되었다:
오해 1 : 내가 번 돈은 내 것이다.성경은 기본적으로 사유 재산권을 인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은 다음과 같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출 20:17). 사실 사유 재산권은 자본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매우 중요한 권리다. 따라서 내가 번 돈은 내 것이라는 주장은 타당성 있어 보인다. 문제는 이러한 사유 재산권이 절대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이기심은 재산권의 절대성을 강조하기 시작했고 공공의 이익을 뒷전으로 밀어냈다. 협약은 강자의 뜻대로 작성되거나 일방적으로 파기되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성경은 사유 재산권을 인정하되 절대적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구약 시대의 희년 제도에는 토지 매매에 대한 제한 규정이 있다. 빚으로 땅을 잡았다 하더라도 50년째 해에는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했다(레 25장). 이는 땅이 본래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만물의 궁극적인 소유주는 하나님이므로 우리의 소유권은 의존적이고 임시적이다. 돈뿐 아니라 영혼까지도 다 주님의 것이다(겔 18:4). 태어나면서부터 돈을 소유한 사람은 없으며 죽을 때 돈을 가지고 가는 사람도 없다. (욥 1:21)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내가 번 돈은 내 것인가? 그러나 그 돈을 벌게 한 원인자(原因者)를 생각해 보면 이러한 주장도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하나님이 바로 돈을 벌게 하는 모든 재화와 서비스를 가능케 하는 제공자이시기 때문이다. 단지 인간은 주어진 원재료에 가공이라는 노력을 덧붙여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여 돈을 벌게 되는 것이다. 만물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을 말뿐만 아니라 사고와 행동에서까지 인정하면, 놀랍게도 우리는 그 때부터 돈에 대해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나는 맡겨진 재산에 대해 관리자로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이보다 더 큰 자유는 없다. 관리자는 자기가 맡은 책임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자유로울 수 있다.
오해 2 : 돈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사실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 돈으로 자식을 키웠으나 자식은 돈 때문에 부모를 죽인다. 돈으로 사랑과 우정을 산 것 같았지만 그런 사랑과 우정은 쉽게 떠난다. 돈이 있다고 해서 죽음을 영원히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진리에 이를 수도 없다.
오해3 : 돈이 많으면 행복하다탐욕은 만족을 모른다는 특성을 지닌다. 돈을 향한 끝없는 탐욕은 인간에게 지워진 영원히 벗을 수 없는 족쇄와도 같다.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전 1:8)"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5:10).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소유=행복'이라는 등식이 처음부터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간디는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은 모든 사람의 필요를 채울 수 있을 만큼 충분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탐욕을 채우기에는 부족하다." 부자가 더 행복할 것이라는 가정이 잘못된 이유는 인간에게 내재 되어 있는 탐욕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부자는 가진 것 때문에 더 불안할 수 있다. 더욱이 부자들의 가장 큰 불행은 하나님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데 있다. 성경은 가난 자체를 아름답게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난한 자에게 특별히 사랑을 베푸신다. 그것은 가난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가난하다는 이유 때문에 가난한 자들이 부유한 자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며 불이익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은 주님을 더욱 절실히 찾는다. 당장 오늘 저녁 끼니가 없을 때, 그야말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을 때, 그들이 하나님을 찾는 심정은 절대적이다. 그렇다면 누가 더 행복한 자인가? 이는 행복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의 행복의 척도와 원천은 소유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부자일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면 불행한 자이며, 가난할지라도 하나님 안에서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 있다면 행복한 자이다.
오해 4 :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타락으로 인해 나타나는 잘못된 현상들 중에서 제일 위험한 것은 돈만 있다면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다. 호의호식할 수 있으니 어찌 하나님이 필요할 것인가?(신 8:12-14).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의 샘을 찾지 않는 한, 참 빛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 한(요 1:9), 돈에 대한 갈증을 채울 수 없다(마 1:28). 주님에게 돌아오는 길이야말로 돈 문제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해결 방법이 된다.
제3장 어떻게 돈을 벌 것인가?추수의 비유 (마 13:24-30)는 정직하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나씩 땀으로 맺어지는 점진적 과정이 하나님의 방법임을 가르쳐 준다. 짧은 시간에 많이 벌고자 하는 마음은 탐욕이며 어떤 측면에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장래를 불확실하게 생각하면 할수록 앞날에 대해 대비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돈을 버는 일에는 다음과 같은 7가지 유혹이 따라다닌다:
유혹 1 :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돈을 번다. (기업 경영의 목적)그리스도인이 돈을 버는 이유는 단지 잘 먹고 잘 살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은 매우 기본적인 목표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추구해야 할 최상의 목표는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마 6 : 25).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때때로 경제적인 목표를 낮게 세우려는 유혹에 직면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이상을 이와 같이 낮추는 것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중대한 책임 회피다. 그리스도인들이 돈을 버는 목적은 세상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것이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돈을 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돈을 벌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혁신적인 사고로 창의력을 계발하고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이다. 이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이자 의무이기도 하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웃에게 없어서는 안 될 물건들을 생산하고 인간 생활에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또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에게 일터를 제공하는 것이다. 인간은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났는데, 당신이 일할 기회를 이웃에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그리스도인의 임무는 잃어버린 '일'의 의미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이웃에게 일터를 제공하는 것은 일의 참된 의미를 회복하기 위한 한 방법이 된다.
유혹 2 : 돈을 벌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해도 된다. (재화와 서비스)돈을 버는 데에도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 아무 물건이나 만들어서 아무렇게나 팔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어떤 물건을 만들어서 어떻게 팔아야 한다는 구체적인 지침은 성경에 나와 있지 않다. 다음에 제시하는 세 가지 기준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안목을 제공하여 줄 것이다:
* 기준1 : 환경파괴 * 기준2 : 가치관, 습관, 태도, 건강 등에 미치는 영향 - 담배는 암을 비롯하여 많은 병을 유발한다. 영양 상태가 양호하지 못한 미개 발 국가의 어린이들이 콜라 같은 음료수를 섭취하는 것은 건강에 결정적으로 나쁜 영향을 끼친다. 음란 비디오는 성도덕을 문란하게 한다.* 기준3 : 불건전한 소비문화의 조장 여부 - 불필요한 소비를 부추기는 판매 전략을 세운다면 그러한 소비를 감당할 수 없는 소비지들에게는 소비가 하나의 유혹이 되고 종국적으로는 재정적 파탄을 불러일으키는 빌미가 될 것 이다.
유혹 3 : 나만 그러는 것이 아니다. (경영 정책)하나님이 그의 자녀에게 요구하시는 첫 번째 원리는 정의로운 경영이다. 정의로운 경영을 위한 첫 번째 관건은 공평한 경영이다. 소비자에게는 그들의 몫에 해당하는 정당한 분깃, 즉 폭리를 취하지 않고 적절한 가격으로 상품을 공급하며, 종업원에게는 차별없이 적정한 임금을 주고 대우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골 4:1).
두 번째 관건은 정직한 경영이다. 근본적으로 정직성이 무너지면 모든 상거래의 기초가 무너지게 된다. 기업이 잘못된 정보를 고의적으로 소비자에게 전달하거나, 불리한 정보를 공시하지 않는 것은 정직한 경영의 모습이 아니다. 정직한 경영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인이 겪는 가장 큰 갈등은 탈세에 관한 문제다. 탈세는 분명히 죄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고 말씀하셨다. 국가에 소속될 돈을 훔치는 죄는 제8계명을 범하는 행위이다. 국내의 어느 기업은 이 문제를 두고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세 가지 원칙을 정했다고 한다. 첫째, 사업의 결과보다는 과정의 승리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기대하는 것임을 잊지 않는다. 둘째, 어렵더라도 세금을 정직하게 내는 것이 세금을 통한 소득의 재분배에 기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 셋째, 비록 세금이 과중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해결책 역시 하나님 안에 있다는 믿음으로 세금 문제에 정직성을 유지한다.
'사랑의 경영'이라는 원칙은 임금 결정과 종업원의 고용 및 해고 때의 원칙이라는 두 영역에서 잘 드러난다. 마20:10-12의 비유는 임금을 받는 입장에서 보면 공평의 원칙에서 위배되는 것 같으나 임금을 주는 입장에서 본다면 사랑의 표현이다. 왜냐하면 한 데나리온이라는 임금은 노동자들이 하루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돈이었다. 사랑을 가지고 있는 경영주라면 어떤 형태로든지 어려운 상황에 처한 직원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방법을 고려해야 한다. 또한 종업원을 해고할 때는 자신이 주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최선을 다했는지 스스로 질문해 보아야 한다. 불만스러운 면에 대해 대화를 했는가, 교정할 수 있는 기회와 기간을 주었는가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