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천사 최춘선 :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김우현 지음 | 규장
맨발을 만나다바람이 불었다. 잿빛 하늘 때문일까... 5월인데도 약간 스산하다. 어디로 가야 하나.... 석류처럼 진한 한숨이 토해졌다. 나에겐 분명히 갈 길이 있다. 난 지금 일을 하러 가는 것이다. 새벽 라디오 프로그램에 에세이를 쓰고 심야의 음악방송에 나가는 글도 쓴다. 나는 그 일을 하러 가는 중이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하나 멈칫 망설이고 있는 나를 보았다.
마을버스는 그 가벼움 때문인지 휘청휘청 흔들리면서 중심을 잡으려 애쓴다. 맨 뒤편에 몸을 내던지고 습관처럼 가방에서 비디오 카메라를 꺼냈다. 흔들리는, 손때묻은 손잡이들을 찍었다.
이미 여러 번 찍었던 그 손잡이들을 습관처럼 또 찍는 나를 물끄러미 본다. 먼지 낀 차창에 비친 얼굴이 흐릿하다. 그 흐릿한 나를 찍는다.
그 때 난 김수영의 시 <거미>를 내 비망록에 새기고 다녔다.
김수영은 이 시를 1954년 10월 5일에 썼다.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그가 서러움에 입을 맞추던 1954년의 가을날을 자꾸만 생각해 보았다. 나는 그 날을 살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 날은, 그리스도께서 가을날 변방에 우두커니 서 계신 루오의 그림을 떠오르게 했다. 황혼이다. 어느 고독한 선지자의 서러운 결심이 스민, 그러나 막막한 평온이 감싸는 적요다. 밤마다, 그 풍경을 들여다볼 때마다 그리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것은 그리움이기도 하고 아련함이기도 했다.그리하여 내 비망록과 영화는 10월 5일에 첫 문장을 쓰고 크랭크 인을 했던 것이다. 1994년 10월 5일, 그 날은 황혼이 붉었다. 그 날에 <거미일지>를 처음 적고 찍었다.
그 날 황혼녘에 남한산성에 올라 기도했다.
'거미처럼 남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음습한 모퉁이에서 살되 누군가에게 의미가 되는, 그런 존재들을 만나게 하소서.'
그 당시 나는 인적이 드문 변방을 쏘다니면서, '제멋대로 난 연보라 달개비꽃, 질경이, 꽃다지, 애기똥풀, 머귀가 그 생리와 이치를 아는 누군가의 손을 거치면 인간을 유익하게 한다니, 아픈 인간을 치유하는 힘을 지녔다니' 하면서 뜬금없는 놀람들로 살아가고 있었다. 지천에 널린 들풀들이, 개똥조차 약으로 쓰이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인간에 대한 절망에서 나온 경외일 수도 있다. 사는 것에 대한 지독한 무의미가 나를 백 년 동안의 전쟁처럼 쓸고 간 뒤였다.
'사람'에게 절망하고, 그것의 축약인 '삶'에 절망한 것이다. 떠도는 존재들에 대한 관심은 그렇게 나온 것이다. 그래도 기도를 했다. 할 수밖에 없었다. 난 지쳤고, 외로웠고, 어떤 따스한 우물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고 치부하자. 그 객기 같은 기도의 응답이었을까.... 나는 그 날 그 노인의 발을 본 것이다.
순간 환영인가 하였다. 아무런 말없이 그저 분주히 각기 제 길을 가는 출근시간이다. 거의 달리다시피 타다닥 소리만 나는 그 걸음들 사이에 그 발이 있었다. 나는 눈을 의심하며 다시 오르던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동물 같은 본능으로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분주한 발들을 찍으며 따라갔다. 숙명 같은 한 방향을 잡은 듯 모두가 연어처럼 내닫는 그 계단 끝에 그 모든 방향과 흐름을 한순간 무시하는, 거꾸로 향해 있는 그 발이 뷰파인더에 잡혔다. 게다가 그것은 거칠고 더러운 맨발이었다. 인간상식을 넘어서는 이 독특함에 나는 순간적인 전율을 느꼈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온 풍경인 양, 꾹꾹 누르듯 조심스레 그 발을 찍어갔다. 마치 오랜 시간을 기다려 시베리아의 호랑이를 만난 사냥꾼처럼 설레기조차 했다. 아무도 주목하지도, 거들떠보지조차 않는 한심한 풍경일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떤 힘인지, 나는 그 발에 감전되어 가던 길을 멈추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얼굴이 잡혔다. 몹시 가벼운 느낌이었다. 광인이라 할만큼 특이한 형상이었으나,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는 묘한 질량감을 몸 전체로 풍기고 있었다. 노인은 쇳소리를 내며 무어라 외쳐대고 있었다."우리 하나님은 자비로우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오래 기다리십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말은 분명하게 들려왔다. 순간, '이 노인은 그 흔한 광신적 전도자구나' 하는 실망감이 들었다. 왜 그랬는지 언뜻 설명하기 어려운 다른 무언가를 기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아니, 떠나지 못했다. 노인의 형상에는 내 실망을 넘어서는, 기이하다고 할 정도로 독특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맨발만이 아니라 모자에도 무언가를 적어서 꽂고 있었다. 그리고 가슴에는 이해하기 힘든 문장들로 가득 채워진 종이를 안고 있었다. 노인은 내가 촬영하는 걸 슬쩍 살피더니 무시하듯 쇳소리를 내며 외쳤다.
"농가 부채가 한 해에 150억, 미군 군비가 한 해에 400억."
아까와는 다른 이상한 말이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노인에게 스르르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고흐의 버려진 구두처럼, 남루한 갈색의 피곤함이 거기 있었다. 노인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기라도 하듯 카메라를 끄고서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할아버지."
나의 소리는 의외로 부드럽고 작았다.
순간 노인은 내가 말을 걸 줄 알았다는 듯 아주 편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제가 지금 일하러 가는 길인데, 혹시 오후 3시쯤에 여기서 다시 뵐 수 있을까요?"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내가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볼 수 있느냐는 것이었는데, 노인은 "그래요. 그렇게 해요" 했다. 참으로 기이한 느낌이었다. 광인처럼, 아니 광인이라 여겼던 노인의 말은 매우 인자하고 부드러웠고, 마치 오랫동안 사귀었던 사이처럼 편안하기조차 했다.
"오후에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일보고 와요."
멍한 상태를 깨운 건 오히려 노인이었다.
노인은 정말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을까.
'나는 왜 그 이상한 노인에게 이토록 끌리는 것일까, 만나면 무엇을 물을까, 아니 그 자리에 없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는데 벌써 교대역이었다. 3시 5분, 조금 늦었다. 3호선을 갈아타는 에스컬레이터 옆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노인은 없었다. 아직 오지 않은 건가. 약간의 조바심을 동반한 불안함으로 이리저리 둘러보았으나,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약속을 안 지켰구나…'
역시 미치광이에 불과한 노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종일 노인 생각에 맘을 졸였던 것이 허무하기조차 했다. 돌아서 오려는데, 어디선가 아주 탁하고 작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자비의 초대."
나는 그 소리의 진원지를 따라 본능적으로 빠르고 조심스레 다가갔다.
모퉁이에 노인이 쭈구리고 앉아 있었다.
"할아버지 여기 계셨네요. 난 안 오신 줄 알고...."
"미안해요. 다리가 아파서 여기 앉아 있었어요."
노인은 목발을 옆에 세워두고 있었다. 아침엔 분주하고 정신이 없어서 목발을 발견하지 못했다."하루 종일 이렇게 맨발로 다니신 거예요?"
"하루가 아니고 30년이 넘었어요."
노인은 그것이 무척 부끄럽다는 듯 눈웃음을 보였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노인의 행색이나 전하는 말을 들으면 광인이란 생각이 드는데, 대화를 나누면 너무나 편안하고 다정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노인에 대한 묘한 끌림도 이것 때문이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무얼 전하시는 건가요?"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찍으며 물었다.
노인은 카메라를 의식하지도 않고 빙그레 웃으며 거침없이 말했다.
"하늘의 소명이 있어서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지요."
또렷하고 중심이 살아 있는, 분명한 대답이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외쳤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자비의 초대, 예수 그리스도 자비의 초대."
"인류의 종말은 예고된 것. 절대 자유, 절대 영생, 만인 구원."
순간 혼동이 엄습해와 더 이상 촬영을 못하고 멈추었다. 망설이는 동안 노인은 힘겹게 몸을 일으키더니, 목발을 짚고 섰다. 나도 노인을 그저 따라 나섰다. 그 행색만으로도 특이하지 않은가. 노인은 목발을 짚고도 힘겨운 듯 천천히 맨발을 움직여 나갔다. 얼마나 조심스럽고 유유한지, 마치 우주를 유영하는 비행사 같았다.
이 노인을 언제 다시 만날는지 모른다. 오늘이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노인을 따라 작은 몸짓까지 카메라에 담았다.
노인은 은은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더니, "얼마나 힘들어요?" 하고 생각 밖의 말을 했다.
"힘들다니요, 할아버지가 불편한 몸으로 힘드시지요."
"아닙니다, 난 힘들지 않습니다. 부끄러운 영혼인데 한량없는 주님의 자비로 늘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역시 기이한 기분이었다. 혼자 외칠 때와는 너무나 다른 느낌의, 차라리 감동적이기조차 한 답이었다."언제부터 이렇게 다니신 건가요?"
노인은 마치 진지한 다큐멘터리를 위해 인터뷰를 하듯 말했다.
"20대부터 헌신한 가운데 지금까지 왔어요. 김포에서 개척교회할 때 죽을병에 걸려 목숨이 위태로웠는데 '한량없는 영광 중에 주의 얼굴 대하리' 이 찬송 주시면서 죽을병도 고쳐주시고 평생의 사명도 주셔서 그 은혜를 생각하며 이렇게 전도하고 있습니다.“
죽을병에 걸렸다가 기도로 고침 받은 후 어떤 변화를 겪었고, 그 후로 이렇게 나와서 나름대로 전도라는 형태로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이렇게 길거리나 지하철에서 전도하는 분들 중에는 무모하리만큼 광신적이거나 어떤 특이한 체험과 계시를 받은 후 거리로 나오는 이들이 많다. 그래서 그들은 남을 의식하지 않고 기분을 상하게까지 하면서 자기만의 전도 방식을 고수하는 것이다. 이상한 문구나 메시지들로 보아 노인도 그런 부류 가운데 하나다. 나는 그렇게 판단했다.
"이제 어디로 가세요?"
잠시 단절된 분위기를 메우려고 물었다.
"예수 천당, 날마다 천당."
순간 깜짝 놀랐다. 참으로 엉뚱하지만 놀라운 대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인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지팡이를 짚더니, 중대한 사명을 앞둔 선지자처럼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순간 범접하지 못할 기운을 느꼈다. 다시 노인을 찍으며 뒤따라갔다. 이젠 광인을 찍는 것이 아니다. 노인이 지닌 그 당당한 풍모의 가운데 밀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다시 지하철을 타고 신사역에서 내린 노인은 구내매점에 들어가더니 무어라 인사말을 건네고 나왔다.그리고 밖으로 나가는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십자가를 지고 황톳빛 언덕을 오르는 느낌이었다. 30년을 그렇게 다녔다는 거칠고 상처 난 맨발을 찍으며 나도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이젠 쳐다보는 관중들도 의식되지 않았다. 우주 가운데 노인과 나 단둘이서 어둠속 하나뿐인 계단을 오르는 기분이었다."이제 난 집으로 갑니다. 더 이상 따라오지 마세요."
발을 멈춘 노인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친근한 모습은 어디 가고 준엄한 경고를 하는 듯 매서움이 느껴졌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크랭크 업을 해야 할 시간이다. 햇살은 빌딩 숲 너머에서 부끄러운 듯 숨어 있었다.
신사역을 다 빠져 나온 노인의 해 그림자가 길게 보도블록에 깔렸다. 이 그림자를 엔딩 장면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순간, 노인이 갑자기 신사역 사거리로 들어섰다. 그러더니 자동차들이 저돌적으로 달리는 도로 한가운데를 목발을 짚은 채 건너가는 것이었다. 놀란 차들이 급정거를 하고 클랙슨을 울리고 난리가 났다. 노인은 그 소리와 동요에도 아랑곳 않은 채 절룩이는 발로 도로를 건너갔다. 그 황망함은 설명할 길이 없었다. 이런 무모한 횡단은 처음 본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희열이 있었다. 어떤 의미 모를 통쾌한 자유가 전해왔다. 도대체 이 노인은 어떤 존재인가, 여전히 수수께끼 같은 궁금증이 나를 친친 옭아맸다. 느리고 도발적이기조차 한 횡단이 다 끝날 때까지 숨소리도 내지 않고 촬영을 했다.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나는 저녁노을이 부서지는 한남대교 방향을 향해, 노인의 버스가 사라질 때까지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준비된 재회1998년 12월. 노스트라다무스에 의해 번져온‘세기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시절을 앞두고 세상과 일상은 큰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1999년이란 파국보다도 그 너머 새로운 천년에 대한 기대감이 좀더 큰 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 동안 IMF를 겪으면서 아플 대로 아팠고, 힘겨울 만큼 힘겨웠던 것이다.
난 여전히 뒷골목을 쏘다니며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풍경과 존재들을 찍었으며, 그것을 작품으로 만드는 일에만 빠져 있었다. 이상하게 그런 풍경 속으로 들어가면 자유의 바람을 느끼곤 했다. 서럽디서러운 풍경들, 그 안에서 무엇을 보고 싶어했는지, 나는 그것에 천착했다.
예수께서‘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셨다’는 말씀에 붙들려 한동안 힘들어하기도 했다.문둥이에게 다가가는 것은 참으로 용기다. 그런데 그와 더불어 밥을 먹는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거대한 사랑이 가슴에 담겨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일이다.가능하다면 나도 그런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그 꿈은 몇 년이 지난 후 이루어졌다. 당시 나는 일상의 풍경만 찍던 것을 넘어 좀더 큰 작품을 만들려는 꿈들을 키웠는데 그 첫 번째가 <그리스도의 잔꽃송이 - 손양원>이었다. 기독교방송국 도서관에서 방송 원고를 위해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낡고 두꺼운 책을 하나 꺼내게 되었다. 소설이라기보다는 전기에 가까운 글이었다. '만일 이런 삶이 진실이라면...' 붉게 넘어가는 해를 등지고 도서관 구석에서 전율에 휩싸인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리스도처럼 문둥이들과 더불어 밥을 먹고, 그들의 피고름을 입으로 빨아주고, 그들과 더불어 살아간 한 영혼의 삶이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사람을 양자로 받아들이는, 소설이 아닌 현실의 삶이 거기 있었던 것이다. 나는 손양원 목사님의 생애를 영화로 만들려는 꿈을 키웠다. 그 꿈은 내 스스로 새긴 것만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심어놓은 소망이기도 했다. 그것을 알기까지는 녹록치 않은 세월이 필요했다.
그 당시 나의 별명은 '변방의 우짖는 새'였다. 나는 변방을 떠돌며 윤동주의 시처럼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카메라로 담아내고 사랑하려는 한 마리 외로운 새였다. 그런데 어느 날 한 후배가 나에게 KBS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보자는 제안을 했다. 감독과 작가의 의도는 지하철에서 만나는 여러 군상들과 풍경들을 통해 힘겨운 시절에 용기와 희망을 나누는 내용을 담자는 것이었다. 주님께서 변방의 우짖는 새에게 넓은 지평으로 나아가라고 기회를 주시는 것 같았다.
어느덧 1998년 12월이 되었다. 내가 만든 다큐멘터리가 시청률은 물론 피시 통신에서도 난리가 났다. 그러나 왠지 모를 허탈감이 엄습했다. 그 전에 홀로 다니며 바람의 노래를 듣던 시절이 그립기도 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용광로 같은 격동 속으로 내던져진 느낌이었다. 이제는 돌아갈 수가 없는가... 문득 울고 싶어졌다. 어디 산속에라도 달려가 주님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고 싶었다. 그렇게 휘청이면서도 계속되는 촬영 일로 따라간 맹인 악사의 저 건너편에서 눈을 의심케 하는 무언가를 발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