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주신 쾌락의 열쇠
샘 스톰즈 지음 | 가이드포스트
1. 거룩함의 열쇠는 사랑에 빠지는 것하나님 안에 있는 더 좋은 만족으로 인해 죄가 싫어지지 않는 한 장기적으로 죄를 이길 길은 없다. 죄가 싫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전 존재의 아름다움을 먹고 맛보는 것이다. 예수님의 기쁨 즉, 그분만이 굶주린 영혼들에게 주실 수 있는 은혜의 긍휼과 자비와 사랑과 용서와 능력과 평안을 맛보는 것이다.
내 친한 친구 하나가 주님께 등 돌린 딸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딸은 대놓고 반항하여 죄의 길을 가면서 매순간 보란 듯이 그런 삶을 즐기고 있다. 최근 우리는 함께 만나 문제에 접근하는 최상의 대책을 의논했다. "딸한테 뭐라고 말하지? 어떻게 해야 내 말을 알아듣지?" 친구는 말했다. 나는 곧바로 정곡을 찔렀다. "더 높은 도덕으로 아이를 나무란다고 될 일이 아닐세. 더 높은 기쁨으로 아이를 초대하면 돼! 도덕 원리라면 자네가 옳고 아이가 틀렸지. 두말할 것도 없네. 하지만 아이한테 그렇게 말해 봐야 결과는 뻔하지. 아무리 잘 타일러도 아이는 자네를 자신의 쾌락과 행복의 적으로 해석할 걸세. 자네는 딱딱하고 금욕적이고 고리타분한 삶을 내세우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지."
나는 말을 이었다. "대신 아이의 낭비와 마약과 성 문란과 자아 도취적 생활방식과 희한한 옷차림과 기타 아이가 행복의 필수요소라 생각하는 것들을 보며 이렇게 말해 보게. '에게게. 겨우 이거야? 네가 고작 이 정도에 만족하다니 믿어지지 않는 걸. 쾌락치고는 형편없이 빈약한데? 세상에! 넌 네가 뭘 놓치고 있는지 통 모르고 있구나!'"
내 요지는 간단하다. "그런 틀렸어. 하지 마"라고 말하는 것은 상대로 하여금 옳은 길을 가게 하는 방법이 못된다. 그 '틀린' 길이 적어도 상대의 '옳은' 길보다 훨씬 신나고 매력 있고 즐겁고 재미있기 때문이다. 해답은 상대에게 더 아름다운 하나님, 모든 지각에 뛰어난 그리스도의 평안, 성령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주는 흡족한 쾌락을 맛보게 하는 것이다. C. S. 루이스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부끄럽지 않은 보상의 약속 즉, 복음서에 약속된 놀라운 보상을 생각하건대 우리의 세 상 욕심은 주님 보시기에 너무 강한 것이 아니라 차라리 너무 약해 보일 것이다. 우리는 무한한 기쁨이 약속돼 있는데도 술과 섹스와 야망 따위로 놀아나는 철없는 피조물이다. 약속된 해변의 휴일의 의미를 감히 상상도 못하기에 빈민굴에서 진흙이나 이기며 놀려 하는 무지한 아이처럼 말이다. 우리는 별 것 아닌 것에 너무 쉽게 만족한다."
내 신학적 신조와 개인적 체험을 통해 나는 내 심령이 죄의 쾌락보다 더 좋은 쾌락에 붙들리지 않는 한 죄에 대한 지속적 승리를 결코 누릴 수 없음을 얼마든지 피력할 수 있다. 일시적인 쾌락에 노예가 된 심령을 해방시키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는 기쁨과 즐거움에 열정을 품는 것이다. 죄의 쾌락에는 일시적 중독성이 있지만 하나님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 그 약속을 믿을 때 죄는 힘을 잃는다.
2. 쾌락은 힘이 세다욕망이란 무시한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욕망을 깊이 묻거나 마음속 안전한 구석에 가둬둘 수는 있다. 과거의 죄를 들먹거리며 욕망의 목소리를 잠재울 수 있다. 그러나 꾹꾹 누른 비치볼처럼 욕망도 결국 표면에 다시 떠오른다. 그것도 가장 엉뚱한 순간에 떠오를 때가 많다.
어느 날 나는 차 안에서 기독교 라디오 방송을 듣고 있다가 미국의 가장 유명한 성경교사 중 한 사람이 한 말에 갓길로 차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을 대충 풀어 쓰면 이렇다. "여태껏 내가 성경을 공부하며 깨달은 단연 최고의 통찰이자 지금까지 발견한 단연 가장 중요한 원리는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목표 내지 목적은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나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실 나는 그보다 당당하게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다. "여태껏 내가 성경을 공부하며 깨달은 단연 최고의 통찰이자 지금까지 발견한 단연 가장 중요한 원리는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목표 내지 목적은 하나님 안에서 정확히 행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내 영혼이 이토록 애타게 갈망하는 행복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는 것보다 그분을 더 영화롭게 하는 길은 없기 때문입니다."
블레이즈 파스칼은 기독교 쾌락주의의 중심 교의를 이렇게 표현했다. "모든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 예외가 없다. 동원하는 방법은 다를지라도 인간은 누구나 그 목적을 지향한다." 또한 조나단 에드워즈보다 그것을 명확히 이해하고 생생히 표현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든 인간의 영혼은 필연적으로 행복을 갈망한다. 그것은 선인과 악인을 막론하고 인간 본성의 보편적 욕구다." 악인들은 상상 가능한 온갖 죄악되고 타락한 체험에서 행복을 찾으려 한다. 신자들은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자신의 쾌락 충동에 마음을 굳게 닫고 문제가 자신의 욕구에 있다고 잘못 단정한다. 그리고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욕구의 표출을 깨끗이 억압하고 억누르려 해왔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의인과 잃은 영혼의 차이란 욕구 자체를 없애려는 데 있지 않고 '행복의 참 길'을 선택하는 데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문제는 욕망이 아니라 그 욕망을 이루는 길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주된 길은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즐거움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우리의 보배의 척도는 쾌락이다." 기쁨이 없는 의무는 하나님을 욕되게 한다. 하나님은 최고의 낭만주의자다. 그분은 인간 영혼에게 구애하고 노래하며 불러내고 유혹한다. 그분은 우리를 곁으로 가까이 이끌기 원하신다.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친밀함의 기쁨으로 이끌기 원하신다.
욕망을 비난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불교다. 불교 철학의 4대 도(道) 중 하나는 고통의 원인은 욕망이고 욕망이 채워지지 않을 때 우리는 고통하므로 고통을 없애는 길은 욕망을 소멸시키는 것이라는 깨달음이다. 만족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줄여라. 소원을 최소로 줄여라. 그러면 실망의 고통이 사라질 것이다. 이것은 단연 비기독교적인 시각이다. 문제는 우리에게 욕망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보다 죄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우리가 마귀한테 속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가장 악질적인 거짓말을 믿어왔다. 세상과 육신과 마귀가 주는 쾌락과 기쁨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존재보다 더 즐겁고 만족스럽다는 거짓말이다.
시편 기자의 말에서 그가 쾌락 욕구를 악하게 여겼는지 판별해 보라.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 34:8). 그분의 긍휼과 자비는 영혼에 달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맛있는 분이다! 그러나 이 권고는 바로 다음 구절인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시 34:9)는 또 다른 권고로 인해 더 놀라운 의미를 지닌다. 맞다. 우리가 '맛보아야' 할 그 하나님은 곧 우리가 경외해야 할 하나님이다. 지구별의 문제는 사람들이 쾌락주의자처럼 즐거움을 추구하는 데 있지 않다. 진정 영원히 그 쾌락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근원인 하나님의 임재를 반항적으로 어리석게 거부하는 데 있다.
우리는 그분을 즐거워하도록 지음받았다. 우리 마음은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고 그분의 위엄과 아름다움을 묵상하고 되새기며 신학적 깨달음의 지적 감격을 경험하도록 빚어지고 꾸며져 있다. 우리의 감정은 그분의 능력과 우리를 향한 사랑과 그리움을 느끼도록 되어 있다. 우리의 의지는 그분의 뜻과 길을 선택하도록 되어 있다. 우리의 영혼은 그분과의 연합의 환희를 경험하도록 빚어져 있다. 우리의 육체는 그분께서 친히 기쁘게 거하시는 성전으로 만들어졌다!
인간 심령에 대한 가장 심각한 위협 중 하나는 권태이다. 권태는 악의 온상이다. 따분한 사람은 육신과 마귀의 손쉬운 표적이 된다. 사람들이 중독증 생활방식에 그토록 빠지기 쉬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죄의 중독에 빠지는 사람들을 보면 치명적 권태에 젖었던 이들이다. 중독이 그토록 위력적인 이유는 우리 심령 속에 초월적 연합과 영적 낭만을 위해 지음받은 그 부분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우리의 심령은 어차피 중독의 일시적 쾌락 아니면 하나님께 이끌리게 되어 있다.
세상은 죽자살자 쾌락을 찾고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쾌락은 잠깐뿐이다. 금세 우리를 사로잡았다가 금세 김이 빠져 실망시키는 것이 세상 쾌락이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는 무한한 만족과 영적 기쁨이 있다. 하나님은 고갈되지 않는 저수지다. 하나님께는 우리를 매혹하고 사로잡아 감격시킬 일이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온 우주에서 그런 무한한 능력을 지니신 유일한 분이다. 뜨거운 열정으로 자기 백성들을 만져 주시며 즐거이 우리를 채우시고 환희와 기쁨과 흥분과 평화와 목적을 가져다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화 상태로 데려가신다. 끊임없이 우리가 보지 못했던 뜻밖의 것들을 우리 앞에 펼치신다. 새로운 맛, 새로운 소리, 상상도 못했을 정도로 더 영광스럽고 가슴 벅찬 그분의 새로운 모습을 말이다. 괴로운 시련과 혼란스런 비극 중에도 그것은 변함없다.
3.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 비참하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부족함을 채우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하나님도 모자란 부분이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그 부분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장 영광을 얻으시는 것은 겸손히 그분께 나와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자비와 선하심을 받을 때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해 내 생명마저 주려고 왔다"(막 10:45). 예수님의 선포는 그 어떤 종교 지도자나 스승의 입에서도 절대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일련의 규율 체계로 사람들을 불러모아 온몸으로 자신을 떠받들게 하는 분이 아니다. "그 신은 바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므로 사람의 손으로 만든 신전에서 사시지 않으며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이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않으신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직접 주신 분이기 때문이다."(행 17:24-25). 다윗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편 대목을 보면, "부와 존귀가 주께로부터 나온다." "사람이 위대하고 강하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고린도후서 8-9장에서 바울은 형편이 어려운 예루살렘 형제들을 힘껏 돕도록 고린도 교인들을 독려했다. 마케도니아 사람들이 보여 준 희생적 나눔의 본을 지적하면서 호소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자신들을 주께 바친 것은 먼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큰 은혜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들이 어떤 훌륭한 일을 행했든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행된 은혜의 역사로 인한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후히 드리는 자들에게 풍성한 공급을 약속하신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후한 그리스도인 청지기들에게 풍성히 채우시는 이유를 설명한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 작용하고 있는 영적 역동을 놓치지 말라. 은혜가 내려오자 기쁨이 피어올라 나눔이 뻗어나간다. 이처럼 모든 나눔의 근원은 하나님의 은혜에 있으며, 그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된다.
복음은 도움을 구하는 광고가 아니다. 존 파이퍼의 예화가 말해주듯, 한마디로 주님은 수조가 아니라 옹달샘이다. 옹달샘은 저절로 차오른다. 옹달샘은 늘 넘쳐흘러 사람들의 목을 축여 준다. 그러나 수조는 펌프나 양동이로 계속 채워 줘야 한다. 따라서 수조의 가치를 높이려면 계속 땀흘려 물을 부어 쓸모 있게 만들어야 하지만, 옹달샘의 가치를 높이려면 그저 무릎꿇고 앉아 실컷 물을 받아 마시면 된다. 다시 계곡 아래로 내려가 사람들에게 새로 찾은 샘물 얘기를 해줄 수 있을 만큼 새 힘과 원기를 얻을 때까지 말이다. 우리는 물을 갖다 붓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시기 위해 그분께 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섬기시는 분이다. 기쁜 소식은, 우리를 위해 행하시고 역사하시는 이 하나님은 주무시지도 않고 졸지도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분은 나라들을 통치하시고, 매순간 우주의 존재를 붙들고 계시며, 지상의 동물들을 계속 먹이신다. 또한 역대하 16:9의 말씀처럼 "여호와께서는 온 세상을 두루 살피시고 자기를 진심으로 찾는 사람들에게 능력을 주신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섬김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섬김의 결과이다.
하나님은 앞서 행하시는 분이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바울은 하나님의 선행적 임재와 능력이야말로 우리가 그분 보시기에 기쁘신 일들을 적극 순종하여 행하는 기초라고 담대히 선포한다.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행할진대 우리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다. 우리는 모든 다양한 차원에서 구원을 이루어갈 참된 소망이 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 안에서 일하시며 우리를 자극하시고 일깨우시고 의지적 반응을 유지시켜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환자요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의사다. 존 파이퍼는 말했다. "환자가 의사를 섬기는 것이 아니다. 환자는 의사의 좋은 처방을 믿는 것이다. 산상수훈과 십계명은 고용주의 직무 설명서가 아니라 의사가 처방한 건강 계획서다." 그러므로 의사가 환자를 섬기듯 그분이 우리를 섬겨 주실 것을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가장 높이는 것이다. 다윗도 그것을 알았기에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갈망을 광야에서 생명의 물을 찾아 헐떡거리는 사슴의 생생한 이미지에 비유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 이 회화적 묘사의 초점은 사슴이 아니라 물이다. 목을 축여 주고 목숨을 부지시켜 주는 사막의 시원한 물줄기에 모든 시선이 고정된다. 사슴이 시내에 가지고 오는 것은 타는 듯한 갈증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예배하는 우리도 하나님께 그렇게 나와야 한다.
4. 하나님의 최고 열정은 무엇인가?예수님과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지고한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에 우리 마음과 생각이 매료되고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체험은 회심으로 시작된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말처럼 거듭남의 진수는 "심령에 거룩한 맛 내지 감각을 주는 것,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고귀한 하나님의 성품을 맛보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적인 침전물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평생토록 꽃이 만발하는 살아 있는 씨앗이며, 마치 성령께서 직접 입으로 불어 용광로 같은 불길을 만들어 내시는 살아 있는 석탄과 같다. 구주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 새 맛을 잘 개발하고 가꾸면 그것이야말로 우리 영혼에 죄가 싫어지게 하는 유일한 요소다. 그래서 예수님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 거룩함의 열쇠다.
그렇다면 하나님 마음속의 최고의 열정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가장 큰 쾌락은 무엇인가? "하나님 마음속의 최고의 열정은 곧 그분 자신의 영광이다." 하나님이 불철주야 끊임없이 창조하시고, 다스리시고, 명령하시고, 지시하시고, 말씀하시고, 판단하시고, 구원하시고, 멸하시고, 건지심은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함이요, 궁극적으로 영원히 오직 그분께만 합당한 찬양과 명예와 영광을 온 우주로부터 얻으시기 위함이다. 단연 신 중심적인 이런 우주관이 없이는 거룩함을 향한 우리의 모든 노력은 심각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