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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세례와 충만

존 스토트 지음 | IVP
서문

어떤 사람들은 '신오순절주의(neopentecostal)'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은사주의(charismatic)'로 알려진 한 운동이 계속 퍼져 왔다. 이제 이 운동은 가히 세계적인 현상이 되었고, 대단히 존경받는 교인들도 이 운동의 지도자로 활약하고 있다. 우리는 이 운동을 고려하지 않은 채 현대 교회의 모습을 평가할 수는 없다.



하나님이 이 운동을 사용하셔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을 베푸신 사실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은사주의 운동은 아직까지 매우 유동적이며, 그 지도자들이나 구성원들이 모두 신학적으로 서로 일치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떤 이들은 '오순절주의'의 입장을 전부 수용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오순절파 교회들과 구별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또 어떤 이들은 자칭 '오순절적' 경험이라고 즐겨 부르는 것을 경험했다고 주장하면서도 그것을 전통적인 의미의 '오순절파 신학'의 용어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이들은 그들의 이해에 있어 유동적인 상태에 있으면서 자신들의 경험을 신학적으로 올바르게 표현할 방법을 계속해서 찾고 있다. 나는 스스로 '은사주의'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내가 쓴 글에서 자신의 입장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다고 느낄 수도 있음을 미리 사과하고 싶다!



나는 대화의 진전을 위해 우리가 동의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세 가지 영역을 제안했다. 첫째, 진리의 객관성이다. 우리의 모든 전통과 모든 의견과 모든 경험은 성경의 진리라는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시금석에 종속되어야 한다. 둘째, 그리스도의 중심성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주와 교회의 머리시고, 하나님의 목적은 "그리스도가 만물의 으뜸이 되시는 것"이며(1:11∼18),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2:9), 우리도 "그 안에서 충만해졌다"는 것을(2:10) 받아들인다. 셋째, 우리는 삶의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나 자신은, 영적 경험은 매우 다양하며 또 영적 은사에도 상당히 여러 종류가 있다고 믿는다. 만일 우리가 서로 속박하고자 하는 욕망을 버리기만 한다면 풍성한 다양성을 지니신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자유와 새로운 교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론

이 연구를 시작하면서 먼저 네 가지 서론적인 요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공통된 소원과 의무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온전한 목적을 찾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우리는 성경에서 이 하나님의 목적을 찾아야 한다. 셋째,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목적은 설명하는 부분에서보다 교훈하는 부분에서 우선적으로 찾아야 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설명하는 부분은 교훈하는 부분에 근거해서 해석될 때에만 유익하다는 것이다. 사건을 묘사하는 성경의 어떤 이야기들은 그 안에 설명적인 부분을 담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해석을 제공하는 반면, 어떤 이야기들은 독립적으로는 해석될 수 없고 다른 곳에 나오는 교리적 혹은 윤리적 가르침의 견지에서만 해석될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것은 '저희에게 … 거울이 되고 … 우리의 경계로 기록되었다"고 말한다. (전 10:11: 참고. 롬 15:4) 넷째,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하나님의 목적을 배우려고 하는 우리의 동기는 학문적이거나 논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며 개인적이어야 한다.





1. 성령의 약속

성령이라는 이 약속된 '선물'은 성령의 '세례'와 동일한 것인가? 바로 이 부분에서 사람들의 확신이 나뉜다. '선물'과 '세례'는 다르다고 말하는 자들은, 아무리 최소한 이상적으로는 세례가 선물에 바로 뒤이어 나타난다 하더라도, '세례'를 두 번째요 나중 경험이라고 가르친다. 반면에 두 가지가 같다고 보며 따라서 성령으로 '세례' 받은 것은 성령을 '받은 것'을 나타내는 생생한 수사학적 표현이라고 보는 자들은, 이 '세례'를 모든 그리스도인이 받은 것으로 여긴다. 내 입장은 후자인데, 이제 곧 그 입장의 성경적 근거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상세히 설명 할 것이다.



공관복음의 세 저자가 단순 미래형으로("그가 세례를 주시리라") 기록한 요한의 이 말이 제4복음서에서는 현재분사형으로 되어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요1:33). 현재분사형을 사용한 것은 그 일이 특정한 시간대에 한정되어 있지 않음을 나타낸다 그것은 오순절의 단회적인 사건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독특한 사역을 나타낸다.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이다." 요한이 '세례자' 또는 '세례 주는 자'로 불린 것은 물로 세례 주는 것이 그의 사역의 특징이었기 때문이듯이, 예수님이 '세례자' 또는 '세례 주는 자'로 불린 것도 성령으로 세례 주는 것이 그분의 사역의 특징이었기 때문이다.



사도 베드로도 오순절에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고 외쳤다(행2:38). 이렇게 말함으로써 베드로는, 회개하고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예수님에 대한 회개의 신앙을 공적으로 증거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두 가지 선물, 즉 죄의 용서와 성령의 선물을 받게 되었음을 확증했다.

이뿐 아니라 사도행전의 처음 두 장을 주의 깊게 읽어 보면 이 '성령의 선물'은 바로 그 앞에서 언급된 '성령의 약속'(행 1 :4: 2: 33, 39), 성령의 세례'(1:5), '성령의 부어 주심'(2:17,33)과 동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표현 중에서 두 가지는 성령을 주는 쪽을 더 강조하는 반면 나머지 두 가지는 받는 쪽을 더 강조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여기에 나오는 회개하는 신자들은 하나님이 오순절 전에 약속하셨던 성령의 선물을 받은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이 오순절에 부어 주신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었다. 더 나아가서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동일시에 대한 확신을 계속 유지했다. 후에 고넬료가 회심하고 성령을 받았을 때 베드로는 그것을 똑같이 성령의 '세례'와 '선물'이라고 지칭했다(행 11:16∼17).



논증의 다음 단계는 성령의 부어 주심 또는 세례가 단지 새로운 시대의 독특한 축복일 뿐만 아니라 (이 축복이 그 이전에는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또한 보편적 축복이라는 점을 밝히는 것이다(이 축복이 이제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의 생득권(birthright)이 되었다는 점에서). 첫째는, 요엘의 예언과 그 예언에 대한 베드로의 이해이다. 하나님이 요엘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약속에서 강조점은 성령이라는 선물의 보편성이다. 베드로는 그 예언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행2:17). 여기서 '모든 육체'는 이 선물을 받는 데 성별이나 나이, 지위나 인종 등이 전혀 상관없다는 뜻이다. 구약시대에는 모든 신자가 중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은 특별한 때에 특별한 사역을 위해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임하셨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2:38∼39절, 그의 설교 결론에서 성령의 '선물' 또는 '세례'의 약속의 범위는 그분의 부름심의 범위와 같음을 밝힌다. 이 신성한 부르심을 받아들이는 자는 누구나 이 신성한 약속을 상속받는다.

사도행전 2장에 의하면 오순절에 120명과 3,000명의 서로 다른 두 그룹의 사람들이 성령의 '세례' 또는 '선물'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3,000명은 처음 그룹의 사람들과 같은 기적적인 현상을 경험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베드로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확증에 의하면, 그들은 같은 약속을 받았고 같은 선물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이렇게 12명과 3,000명의 두 그룹을 구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표준은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첫째 그룹이 아니라 둘째 그룹인 3,000명의 경험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120명의 경험이 명확하게 구별되는 두 단계에 걸쳐 이루어진 것은 단지 역사적인 상황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들은 오순절 전에는 선물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특수한 역사적 상황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이 오순절 사건은 기독교 교회역사에서 때때로 이어져 왔던 최초의 '부흥'으로서 우리는 그러한 현상을 표준적인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그리스도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우리는 "그 안에서 이미 생명으로 충만해진 것이다"(골 2:9∼10). 만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분의 충만함 가운데 주셨다면, 그리고 만일 그리스도가 그분의 성령으로 이미 우리 안에 거하신다면, 하나님이 무엇을 더 보태실 수 있겠는가? 뭔가 다른 선물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야말로 예수님의 충만하심과 만족케 하심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2. 성령의 충만

성령의 세례를 말할 때 우리는 이 선물이 지속적이며 갈수록 더 많이 충당되어져야 하는 것임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례'와 '충만'의 차이점을 보자. 행2:4절에 보면 성령의 충만은 성령세례의 결과였다. 세례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고(하늘로부터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써), 충만은 그들이 받은 것이었다. 세례는 독특한 입문적인 경험이었고, 충만은 계속되는 영구적인 결과로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표준이 되도록 의도된 것이었다. 입문의 경험으로서 세례는 반복될 수도, 잃어버릴 수도 없는 것이지만, 충만은 반복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떤 경우에든 유지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에베소서 5:18절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충만하라는, 즉 계속해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잘 알려진 명령을 담고 있다. 사실 이런 구절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잃어버리는 것이 가능하며 또 애석하게도 그것이 흔한 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사도는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을 신령하지 않은 자들이라고, 즉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다고 책망한다. 그는 성령충만의 증거는 성령의 은사들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가 익어 가는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 그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고, 성령의 은사를 넘치게 받았지만,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한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성령충만의 증거는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성령충만을 누릴 수 있는가? 신약성경의 두 가지 중요한 본문을 살펴보자.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주님께로 와야 한다고 첫 번째 본문은 강조한다. 요한복음 7:37∼39에 기록된 주님의 고무적인 말씀을 말하는 것이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계속해서 요한은,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고 말한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그분이 아직은 오순절의 충만한 모습으로, '생수의 강으로'부은 바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친 나그네의 갈증을 해소해 주고 메말라 갈라진 세상을 적셔 줄 생수는 성령의 충만을 뜻한다. 여기에 나오는 동사들(목마르다, 오다, 마시다, 믿다)은 모두현재형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 회개하는 마음과 믿음으로 한 번만 오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도 계속해서 와야 하고 계속해서 마셔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계속해서 목마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시는 물은 이제 흐르는 물이 된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우리 안에만 담아둘 수는 없다. 만일 흘러나가지 않는다면, 그분이 거기에 계시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전도의 열망과 활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성령충만에 대해서는 그 어떤 주장도 경계해야 한다.



오늘날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의 표지는 무엇인가? 의심할 여지없이 그 가장 주된 증거는 기적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것이며, 성령의 은사에 있지 않고 성령의 열매에 있다. 사도바울이 그의 서신들에서 성령충만의 결과들을 묘사한 유일한 본문은 에베소서5:18∼21인데, 여기에 나타나는 것은 모두 도덕적인 자질들이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헬라어 원문에는 이 본문이 명령형으로 된 두 개의 동사("술 취하지 말라. …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와 그것들을 수식하는 현재분사로 된 네 개의 동사 (문자적으로는 '말하는 것', '노래하고 찬송하는 것', '감사를 드리는 것', '복종하는 것')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단 하나의 명령 다음에는 성령충만의 결과들을 보여 주는 네 가지 묘사가 이어지고 있다.



최초로 성령 충만했던 신자들이 일종의 만취 상태의 황홀경에 빠졌었다거나 또는 그러한 상태가 미래에 있을 모든 성령충만의 경험의 패턴으로 제시되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오히려 그 반대가 옳은 해석이다. 에베소서 5:18에는 술 취함과 성령충만이 그러한 점에서 비교될 수 없는 것임을 보여 주는 분명한 암시가 있다. 왜냐하면 술 취함은 '지나침'(AY) 또는 '방탕한 것'(RSY)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헬라어 '아소티야 (as tia)는 신약성경의 다른 두 곳에도 나타나는데, 거기서는 '방탕'(딛 1:6: 벧전 4:4)을 의미하며, 문자적으로는 사람이 자신을 '구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술 취하면 절제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바울은 그러한 상태를 피하라고 쓰고 있다. 따라서 술 취함과 대조되는 상태인 성령충만은 절제력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는 갈라디아서 5:23에서 성령의 열매는 절제(enkrateia)라는 것을 분명히 배운다! 우리는 또 사도가 계속해서 설명하고 있는 성령충만의 결과들을 우리가 하나님과 또 다른 사람과 맺는 이성적이고 절제되어 있는 건강한 관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제 성령충만의 네 가지 건전한 결과이자 확실한 객관적 증거들을 살펴볼 차례가 되었다. 첫째는 "화답하며"이다. 성령충만의 첫 번째 증거가 서로에게 말하는 것이라는 점은 매우 인상적이다. 충만의 첫 번째 표지는 교제이다. 그 뿐 아니라 그것은 영적 교제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속적인 잡담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은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는" 성령 충만의 두 번째 결과로 이어진다. 이 문구를 "너희의 전심으로(with all your heart)라고 번역한 RSV가 아마도 적절할 것이다. 마음은 노래가 비롯되는 장소라기보다는 우리의 자세를 가리킨다. 사도는 우리에게 소리 없는 예배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예배를 드리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우리는 범사에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대부분 어떤 일들에 대해서는 때때로 감사드린다. 그러나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모든 일에 언제나 감사드린다. 불평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 중 하나였는데, 그것은 불신의 표시이기 때문에 심각한 죄다. 우리가 투덜대고 불평할 때마다 그러한 모습은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다는 좋은 증거다. 네 번째로 우리는 피차 복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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