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홀의 조선회상
셔우드 홀 지음 | 좋은씨앗
나는 이 어린이들의 기도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께 직접 청원을 드렸고
곧 응답이 왔다. 기도회가 끝나자 버티가 반짝이는 은화 1달러를 가지고 내 방에 왔다. 그 다음에는 그의 누이동생인 윌라가 10센트를, 뒤이어 오거스터 스크랜턴이 50센트를 가 지고 왔다. 이때 하나님의 자녀들인 이 꼬마들이 가져온 돈은 총액이 불과 1달러 60센트 에 지나지 않았지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신 하나님은 이 아 이들의 선물을 늘려 8개월 후에는 1,479달러 99센트가 모금되게 해주셨다. 오늘날 우리가 평양의 좋은 장소에 병원과 시료소를 갖게 된 것은 이렇게 생긴 것이다.이 많은 구경 인파에게는 담이나 대문도 소용없었다. 몇 사람씩 방으로 들어와 우리를 구 경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평양 감사 밑에 있는 젊은 관리는 남편이 있는 자리에서 "그의 아내를 이곳에 머물게 한다면 외국인들이 하나씩 계속 평양에 들어오게 되어 결국에는 평 양은 외국인들이 다 차지하게 될 것이오"라고 말했다.
하루는 저녁 기도를 한 다음 평화스런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는데, 새벽 2시경 기독교 신자들인 오씨와 이씨가 찾아와서 우리를 깨웠다. 그들은 믿음이 강한 김창식이가 감옥으 로 잡혀갔다는 소식을 가지고 왔다. 창식이는 닥터 홀이 서울로 돌아가고 없을 때도 이곳 에 남아 복음을 전하고 있었던 사람이다. 창식이는 매를 맞고 칼을 쓴 채 심한 고통을 받 고 있다고 했다. 관리들은 "닥터 홀에게는 감히 매질을 할 수 없으므로 대신 창식이를 가 두고 때리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닥터 홀은 평양감사와의 면회를 신청했으나 만나주지 않았다. 그는 그 사이에 감옥에 있 는 창식이를 보고 왔다. 창식이는 수갑(칼)을 너무나 조여놔서 매우 고통을 당하고 있었 다고 한다. 닥터 스크랜턴에게 급히 전보를 띄워 조치를 취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총영사 와 외무대신을 통해 서신을 보내도 조선 왕비의 친척인 평양감사는 전보의 명령을 이행하 지 않았다. 마침내 여러 차례의 압력으로 석방된 창식이가 비틀거리며 집으로 들어와 마 루에 쓰러졌다. 오는 도중에 사람들로부터 줄곧 돌맹이를 맞으면서 왔다는 것이다. 사법 관이 계속 예수를 부정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라고 명령했으나 창식이는 못 하겠다고 거절 했고, 그 때문에 더욱 심한 고통을 당한 것이었다.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사람이다. 닥터 홀은 창식이의 발 아래 꿇어 엎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조선에서 예수를 위해 고 난 받은 신앙인을 볼 수 있었다"는 이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귀한 은혜라고 말했다.
시작내가 태어난 곳은 4천 년 역사상 가장 복잡 다난한 격변의 시대를 맞고 있었던 조선 땅이었다. 불행한 지리적 위치 때문에 외세가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사건으로 점철된 역사다. 조선 사람들이 외국의 지배와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한 정치적인 결과는 드디어 조선을 폐쇄된 '은둔 왕국'으로 알려지게 만들었다.
내가 서울에서 태어난 때는 1893년 11월 10일, 마침 조선이 고립 정책에서 벗어나 국제 대열에 들어서려던 시기였다. 나는 그 당시까지 외국인에게는 한 번도 허가된 일이 없었던 이북 지방에서 살게 되었다. 백인 어린아이로는 내가 처음이었다. 약 1백 년 동안 금지되어온 기독교 선교가 나의 부모에 의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이 사실은 종교적으로 억압에서 자유라는 전환점을 맞는 중요한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다. 나의 부모인 닥터 윌리엄 제임즈 홀과 닥터 로제타 셔우드 홀은 미국 감리교 해외선교회 소속인 의료 선교단의 일원으로 조선에서 봉사하게 되었다.
나의 아버지 윌리엄 제임즈 홀은 캐나다 온타리오 주의 한 통나무집에서 다섯 형제 중 맏이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특출나게 총명하지는 않았지만 신중하고 사려 깊은 소년이었다. 열일곱 살 때 목수 견습공으로 취직을 했으나 2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건강이 나빠져 집으로 돌아와 죽을 때를 기다렸다. 기독교 신자였던 아버지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덧없이 죽게 된 점을 가장 괴로워했는데 뜻밖에도 건강이 회복되었다. 다시 살아난 아버지의 가슴속에는 "이제 나에게 주어진 이 짧은 인생을 어떻게 해야 가장 뜻있게 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아버지는 1883년, 교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 2년간 교사로 일했다. 그는 학교에서 받은 봉급과 틈틈이 생명보험사의 세일즈맨으로 일해서 번 돈을 모아 1885년에는 온타리오 주 킹스턴에 있는 퀸즈 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는 의과대학에 YMCA 지부를 성공적으로 조직함으로써 그의 봉사 의욕과 조직력을 입증했다. 그리고 1887년, 그에게 인생의 한 전기가 찾아왔다. '해외 선교 학생 자원 운동'의 인도 지역 책임자인 존 포먼 목사가 퀸즈 대학교를 방문한 것이다. 이 때 22명의 학생들이 해외 선교에 참가하겠다는 서명을 했고, 그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졸업하자마자 바로 감리교 교회에서 시행하고 있는 메디슨 가 의료 선교지부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당시 의료 선교회 간부였던 닥터 스톤의 저택에 기거하면서 날마다 뉴욕의 빈민가로 출근했다. 닥터 스톤 내외는 닥터 홀을 매우 사랑하여 마치 아들처럼 대했다. 그는 닥터 홀의 활동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닥터 홀은 자애로운 의사로서, 불쌍한 사람들의 형제로서, 병들어 죽어가는 뉴욕 거리의 사람들을 아무 대가 없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돌보았다. 상대가 살인자건, 도둑이건, 어 떠한 범죄자건 가리지 않고 선교의 사명을 다했다. 닥터 홀은 자기의 주인, 예수가 행한 것처럼 날마다 고통받는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밝고 더 나은 생활로 인도하는 데 몰 두했다. 그는 철학적, 신학적인 이론을 캐는 데 시간을 낭비하기보다는 상냥함과 사랑을 나눠주는 행동의 사람이었다.어느 날, 닥터 홀은 조수로 온 로제타 셔우드를 보는 순간 첫눈에 사랑을 느꼈다. 두 사람은 헌신적으로 합심하여 험한 그 지역의 시료원 일을 잘 해냈다. 이듬해 부활절, 닥터 홀은 그녀에게 청혼을 했다. 이때 그녀는 이미 조선에 선교사로 임명을 받은 뒤였으므로 취임 후 5년 동안은 결혼할 수 없다는 규정 때문에 사양했다. 그러나 닥터 홀은 약혼기간이 아무리 길어져도 기다리겠다고 하여 두 사람은 약혼을 했고, 1890년, 닥터 셔우드는 조선으로 가기 위해 그곳을 떠났다. 닥터 홀은 이별이 매우 고통스러웠지만 그녀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모습에 더욱 감탄했다. 이로 인해 또 다른 차원의 깊은 사랑이 솟아났다.
닥터 홀도 해외 선교사로 나갈 길을 모색하며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 당시 닥터 셔우드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적혀 있다. "로제타, 난 방금 그토록 바라던 조선으로 임명을 받았소. 하나님께서 살아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지금보다 더 깊게 느껴본 적이 없었습니다. 나는 지금 조선에 있다가 안식년 휴가로 이곳에 돌아온 닥터 스크랜턴과 함께 방을 얻어 기거하고 있습니다. 스크랜턴 모자는 당신을 높이 칭찬하더군요."
닥터 홀을 떠나 보내는 환송은 인정이 넘치는 따뜻한 풍경이었다. 가장 가슴을 울린 송별사는 닥터 홀에게 치료를 받았던 가난하고 병들었던 사람들로부터 나왔다. 한 유태인 환자는 벅찬 감정에 말을 더듬었다. "닥터 홀은 오랫동안 우리를 계속 찾아주었습니다. 그는 훌륭한 분입니다. 돈을 받지 않고 우리를 치료해주었으며 먹을 것을 가져와서는 무릎을 꿇고 우리 모두를 위해 기도해주곤 했습니다." 한 의과대학 학생은 "닥터 홀은 관대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했고, 상대방의 장점을 계속 강조하여 실제보다 더 크게 인정해주고 고무해주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그 사람이 인정받은 그대로 되었다"면서 진심으로 그를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개척을 향한 모험여자를 치료하거나 기독교를 전하려면 여의사가 있어야 했기 때문에 닥터 스크랜턴은 여성해외선교회에다 여자와 어린아이들만을 따로 치료할 수 있는 병원을 만들어달라고 청원했고, 이 요청이 수락되어 1887년 닥터 메타 하워드를 조선에 파견했다. 이 병원은 스크랜턴 여사가 세운, 조선에서는 첫 번째 여학교인 '이화학당'과 한 장소에 있었다. 닥터 하워드는 수천 명의 여성과 어린이들을 치료했고, 그 결과 건강이 악화되어 1889년에는 미국으로 귀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닥터 셔우드는 바로 그의 뒤를 잇기 위해 조선에 왔던 것이다.
닥터 홀이 도착하기 몇 주 전은 닥터 셔우드에게는 매우 바쁜 나날이었다. 그녀는 새로운 열정을 가지고 일에 몰두했다. 이 무렵 치료된 환자 수는 1년 전에 비해 3배나 더 많았다. 한편 학교에서는 계속 심리학과 약물학을 가르쳤다. 닥터 셔우드는 어린 조수들에게 인체학을 가르치기 위해 사람의 골격을 교습 자료로 쓸 구상을 했다. 무심결에 동료 선교사에게 지난 봄에 남산의 성 밖에서 주운 사람의 해골을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치겠다고 했는데, 이 말을 들은 선교사들은 놀라서 주의를 주었다. 왜냐하면 전에 "외국인들이 조선 아이들을 잡아먹고 약으로 쓴다"는 유언비어가 퍼졌던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선교사들은 이 해괴한 소문이 가라앉을 때까지 긴박한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고 한다.
조선에 온 선교사들이 부딪힌 가장 미묘하고 심각한 문제는 전통적인 조상 숭배의 관습이었다. 초기 카톨릭 교도들이 처형을 당한 것도 바로 이 문제 때문이었다. 조상 숭배의 관습을 포기해야 하는 점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가장 심각하고 힘든 투쟁이었다. 닥터 셔우드는 양반집에 왕진갈 때면 안마당에 세워진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보곤 했다.
1891년 12월 15일, 닥터 홀이 탄 배가 부산에 도착했다. 닥터 셔우드는 약혼자에게 병원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표정에 닥터 홀과 함께 있는 즐거움이 너무나 또렷이 비쳤다. 닥터 홀은 결혼 날짜를 정하기를 원했다. 그는 아펜젤러 부부가 여름에 안식년 휴가를 얻어 미국에 가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그 집이 빌 것이다. 그는 셔우드에게 이 기회를 이용해 결혼하자는 뜻을 비쳤다.
한편 닥터 홀의 선교회에서는 새로운 선교 기지를 찾기 위해서 닥터 홀과 존즈 선교사를 이북에 전진기지를 탐사하도록 보내기로 결정했다. 조선 정부에서 허가만 한다면 선교 기지를 세울 예정이었다. 그들은 서울에서 북쪽으로 600킬로미터 떨어진, 만주와 접경지인 의주까지는 함께 여행하고 거기에서 서로 갈라져, 닥터 홀은 평양을 거쳐 서울로 돌아올 계획을 세웠다.
홀은 매우 힘들긴 했으나 조선 사람들로부터 매우 친절한 대접을 받았다고 보고했다. 그는 평양이 조선 내륙의 선교기지로서는 최적지라고 보았으며, 그의 선택이 옳았다는 점은 후에 증명되었다. 그는 평양이 왜 최적지인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했다. "첫째, 이 도시는 조선에서 가장 문란하고 더러운 도시라는 평을 받고 있으므로 선교의 도전 대상지가 된다. 또한 자기들의 기분에 맞지 않으면 일반인이건 관원들이건 막론하고 돌로 때리는 폭력배들이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거기에다 인구가 10만이 넘으며, 주민들은 적극적이라 번성할 여지가 있는 도시다. 이외에도 이곳은 서울과 북경 간을 연결하는 도로선상에 위치하므로 육로 사정도 괜찮고 해상 교통도 용이하다. 그리고 평양은 찬란한 역사의 도시다."
결혼식은 6월에 거행되었다. 신혼 여행에서 돌아온 홀 내외는 아펜젤러 씨의 빈집에다 신혼 살림을 꾸몄다. 그런데 얼마 후 셔우드 홀은 계속 서울여성병원에서 근무하도록, 닥터 홀은 평양 선교 기지 개척 담당자로 임명이 되었다. 그들에게는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는 아직도 내지에서 외국인이 거주할 수 없다는 금령이 발효 중이었고 기독교 포교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법이 존재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이 일을 수행하는 데는 의사가 가장 적격자였다. 홀 내외는 이 임무가 지금은 힘들어보이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앞에서 인도하실 것이기에 극복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1893년, 잠시 서울에 들렀던 그는 평양에 가옥을 구입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고 노블 목사와 동행했다. 닥터 홀이 임명받은 구역은 서울에서 평양까지의 300킬로미터에 걸친 지역이었다. 이때의 경험을 노블 목사는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조선에서의 여행은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선교사의 진정한 모습을 시험하는 이상한 고통과 시련이 많다. 이런 시련을 대하는 닥터 홀의 모습은 감명 깊었다. 그는 마 치 편한 기차 여행이라도 하는 것같이 어려움을 즐겁게 대처해 나갔다. 특히 평양 시료소 에서 닥터 홀의 생활은 그 자체가 설교였다. 그의 곁에 있으면 구세주를 더 잘 알게 된 다. 그는 조선인처럼 방바닥에 주저앉아서 그를 보러온 사람들을 만났다. 어떤 사람들은 호기심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치료를 받으러왔다. 그러나 어떤 목적으로 왔건 떠날 때는 참으로 훌륭하고 선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간직하고 갔다. 한번은 평양에서 외국인에게 증 오심을 가진 어느 관리의 영향으로 군중들이 들고일어난 적이 있었다. 조선인들의 적개심 이 어떻게 터져 나올지 예측할 수 없는 상태에 직면했을 때, 나는 닥터 홀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물어보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희생시켜 이 도시의 문을 여실 생각이라 면 나는 그 희생자가 되는 것을 피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미세스 홀도 남편이 없는 서울에서 열심히 일했다. 그녀는 한때 이화여대 부속병원의 전신인 릴리언 해리스 기념 병원의 원장을 지냈으며 몇 개의 병원에서 의료 봉사를 하고 학교에서도 강의를 계속했다. 김점동은 특별히 뽑힌 학생으로 시료소에서 약을 짓고 환자들을 간호하고 있다가 홀 부인의 언청이 수술을 본 다음부터 반드시 의사가 되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김점동의 세례명은 에스더였다. 후에 내지로 들어가 닥터 홀과 합류하여 일하게 될 경우 그녀는 에스더를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
연례 회의에서 닥터 홀과 그의 아내 셔우드 홀에게 평양 개척의 임무가 떨어졌다. 홀 내외는 감사해 했다. 선교 기지가 필요했기 때문에 닥터 홀이 서울로 와서 모금을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이고 용기를 준 사람들은 선교사의 자녀들이었다. 닥터 홀은 그때 일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그해 가을, 닥터 홀은 또 하나의 기쁨을 갖게 되었다. 항상 어린이들을 사랑했던 그는, 이제 자신이 아버지가 되려던 참이었다.
평양에서의 수난홀 부부의 아기, 셔우드 홀은 1893년 11월 10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셔우드가 태어난 지 3주가 되었을 때 닥터 홀은 다시 평양으로 떠나야 했고, 1894년 5월에는 온 가족이 배편으로 평양에 도착했다. 현지 기독교인들 몇 명이 그들을 마중나와 있었다. 그 모습에 가슴이 뭉클했다. 마을로 들어서자 백인 여자와 백인 아이를 처음 본 주민들은 호기심에 가득 차 있었다. 홀 부인은 평양에서의 생활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노블 목사도 그 당시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조선의 선교 역사상 처음으로 업무를 다 제쳐두고 모든 선교사들이 서울에 모여 기도를 했다. 각자 이 위기가 자신들과 깊이 관련된 일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모든 사람에게 사 랑을 받는 이 두 사람을 위해 많은 기도를 했다.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있을 때 닥터 홀로부터 "모두 석방됐음. 창식. 심한 상처를 입었음"이라는 전보가 도착했다. 이 사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