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뿔소 교회가 온다
어윈 라파엘 맥매너스 지음 | 두란노
코뿔소 교회가 온다어윈 라파엘 맥매너스 지음/홍종락 옮김두란노/2004년 9월/167쪽/8,000원
1. 야만적 침공더글러스는 스코틀랜드를 해방시킨 왕이자 자신의 친구였던 로버트 드 부르스의 심장을 작은 상자에 담아 목에 걸고, 모든 전투에서 “네 왕의 심장을 위해 싸우라!”며 용맹하게 외쳤다. 이 이야기는 우리 안의 근원적인 갈망을 일깨우는데, 그것은 바로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 앞에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위해 싸우라!”라는 외침으로 응답하고자 하는 갈망을 말한다. 그런데 불행히도 기독교인은 지난 2천년간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야성을 잃고, ‘종교적인 신자들’로 전락해 버렸다.
그렇다면 야만적 방식을 취하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누구인가? 그들은 종교나 지위, 조직이나 관료주의, 전통 등의 율법적 제한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왕이신 하나님의 심장을 따르는데 초점을 둔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 즉, 성령님의 변화시키는 능력만을 믿는다. 안전하고 예측 가능하고, 지루할지 몰라도 위험하지 않은 평범함보다는 불합리함과 숨막히는 모험을 즐긴다. 야성적인 코뿔소 크리스천은 예수님의 심장을 위한 싸움에 온전히 헌신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비극은 처음 믿을 때의 야성적 열정과 힘을 잃고 길들여지거나 문명화되는 것에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은 심플하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하나님은 그들의 생명이며, 인류를 하나님께 이어 붙이는 일은 곧 그들의 사명이다. 야만적 방식에는 사랑과 친밀함, 열정과 희생이 있다.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그들의 영혼은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되어 있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다.
당신이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라면 당신 안에는 분명 풀려나기만 기다리는 거친 야성의 믿음이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임재로 힘을 얻는 새생명을 주시며, 아직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도록 도우실 것이다.
코뿔소의 심장이 펄떡인다!믿음의 야성이 당신 안에서 살아 숨쉬게 하라. 주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혁명을 시작하셨다. 하나님을 향한 불붙는 마음으로 우리 안에서 불타는 열정을 자유롭게 추구하며 전진하라.
2. 야만적 부름하나님이 자기 아들의 가는 길을 준비케 하시려고 선택하신 자, 세례요한은 진정한 야만인이었다. 그는 광야에서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면서 예수의 오심을 선포했다. 비단 겉모습뿐만 아니라 그는 당시의 종교지도자 격이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부르면서 지옥불 메시지를 전하였다. 자기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점잖게 길들여진 종교인들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오실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 자신의 유일한 사명임을 분명히 하고, 정확히 그 일을 했다.
요한은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푼 순간 하늘이 열리며 예수님 위에 성령이 빛처럼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또 하늘에서 선포하는 음성을 들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6~17) 그 때 요한은 예수님이 바로 그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다. 그 후로 요한은 그리스도 예수의 목적과 인격에 충성하기로 선포했다.
그랬던 그가 제자들을 시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라는 질문을 한다. 그 당시 요한은 형수인 헤로디아와 불륜을 맺은 헤롯왕의 죄를 지적함으로 인해 감옥에 갇힌 상태였다. 죽음 앞에 선 요한은 예수님이 마땅히 자신을 도우러 오시리라 기대했지만 예수님이 오시지 않자 딜레마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먼 사람이 보고,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내게 의심을 품지 않은 사람은 복이 있다.”(마11:4~6)라고 하셨다. 사실 요한은 이미 옥중에서 이 모든 일들을 알고 있었다. 예수님의 사역은 요한의 의심을 없애는 차원이 아니라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이런 기적을 본 사람이 신앙을 버리는 일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 사건이 누군가를(요한을) 실족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답변은 이런 뜻이었다. “요한, 난 널 도우러 가지 않겠다. 너를 감옥에서 꺼내주지 않겠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이 모든 일을 했지만, 내가 너를 위해 택한 길은 다른 사람들의 길과는 다르다. 요한, 이 일로 인해 네가 의심하지 않는다면 복이 있을 것이다.”예수님의 목적은 우리를 고통과 고난이 아닌 ‘무의미함’에서 구해 내는 일이었다. 예수님이 보실 때 요한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바로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막1:15에서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어느 것보다도 야만적이다. 이 세상에서 전혀 다른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라는 부르심이다. 예수님은 그분을 따를 때 생겨나는 위험이나 치러야할 대가를 숨기지도, 거짓말하지도 않으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를 잃거나 빼앗기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눅9:23~25)
품위 있는 종교인이 되라는 부르심은 애초부터 없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야만적 부르심 앞에 순종하려 애썼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사랑을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지금이라도 당장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베드로는 자신의 방식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데 실패했지만 예수님의 요구를 이해하게 되었다.
야만적 방식이 말하는 것은 희생과 섬김을 통해 표현되는 사랑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와 다시 만났을 때 그 둘은 사랑과 희생에 대한 대화를 다시 나눈다. 예수님은 세 번 물으셨다.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똑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하셨기에 마음이 아팠다고 성경에 기록한다. 베드로의 대답은 간단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더 깊은 주제의 대화로 옮겨갈 준비가 되었던 베드로는 이제 야만적 방식으로 부르심을 받고 있었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지만,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너의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예수님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암시하셨다. 이 말씀 후에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말씀하셨다.(요21:18~19) 예수님은 베드로를 단 한길, 야만인의 방식으로 초청하셨다. 예수님은 선택을 유도하여 그에 따라 대가를 줄여주지 않으셨다. 이 말에 베드로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그는 딴 소리를 한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21:20~21) 베드로는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내가 죽는다면 다른 사람들도, 특히 요한도 죽어야 하는 건지 알고 싶다.’
야만적 부르심이 우리 모두를 향한 것이라면 우리 모두 같은 내용으로 부르심을 받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요21:22) 이것이 야만적 부르심에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공평하지도 공정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자신을 따라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의 진의를 이해한다면 비로소 그것이 집단 오디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삶으로 당신을 부르지 않으신다. 당신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유일하다.
개화된 기독교는 하나님이 우리와 단체 협상을 하신다고 생각한다. 모두 요한의 꾸러미를 받으며, 베드로의 꾸러미를 받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은 위험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결과와 증거를 안전한 삶으로 생각한다니, 참 얄궂은 상황이다.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믿음의 선진들 -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요셉, 모세 등 - 은 믿음으로 살면서 나라를 정복하고, 정의를 실천하고, 약속된 것을 받고, 사자의 입을 막고, 불의 위력을 꺾고, 칼날을 피하고, 약한데서 강해지고, 전쟁에서 용맹을 떨치고, 외국 군대를 물리쳤다.(히11:33~34) 그러나 믿음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 믿음의 선진들의 짧은 목록은 규칙이 아니라 규칙의 예외를 보여 준다. 그들의 삶은 너무도 특별하고 그 결과가 너무도 유별나기에 이렇게 나열된 것이다.
성경에 근거한 믿음을 이해하려면 히11:35 후반부터 등장하는 ‘어떤 이들’을 놓치지 말라. 이 ‘어떤 이들’은 우리가 잘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의 믿음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또 어떤 이들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더 좋은 부활의 삶을 얻고자 하여 구태여 놓여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을 받기도 하고, 채찍으로 맞기도 하고, 심지어는 결박을 당하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면서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들은 돌로 맞기도 하고, 톱으로 켜이기도 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궁핍을 당하며, 고난을 겪으며,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았습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일 만한 곳이 못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며 다녔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좋은 증언을 받았지만,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계획을 미리 세워두셨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 없이는 완성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히 11:35~40)‘어떤 이들’이 체험한 삶은 성경의 유명인들과 비교할 때 정말 비참하다. 그러나 그들의 삶 역시 영웅들 못지않게 하나님의 임재와 뜻 안에서 온전하게 이루어졌다. ‘어떤 이’의 이름은 유명인들 보다 그 수가 훨씬 많기에 남아있지 않지만, 예수님 때문에 실족하지 않았기에 모두 복을 받았다. 그들은 고난과 고통 가운데서 가장 충만한 생명을 누렸다. 어떤 야만인은 사자굴에서 밤을 보내고도 살아남지만, 어떤 야만인들은 가장 어두운 밤과 죽음의 고통을 겪고 영원 가운데 깨어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위로가 아니라 할 일을 맡기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 삶의 의미를 희생하면서 우리의 안전을 택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편안한 삶이 아니라 중요한 삶을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창조하셨다. 가장 안전한 장소가 하나님의 뜻 한 가운데라면, 왜 증인(witness)을 가리키는 성경의 단어가 바로 순교자(martyr)를 의미하는가? 모험과 위험투성이였던 사도 바울의 경험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과거 바울은 종교인이었다. 종교인으로서 바울은 거만한 독선 뒤에 숨은 채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기술을 익혔다. 죄책감과 수치를 통해 타인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종교를 사용했다. 그러나 참된 종교는 언제나 우리를 일으켜 다른 사람들을 섬기게 하고 억압받는 자들을 도와 자유를 얻게 한다. 예수의 죽음은 우리를 죽음에서 자유롭게 함과 동시에 죽음의 공포를 벗어 던지게 하였다. 우리가 당당하게 죽은 후 영원히 살 수 있도록 우리를 해방시키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죽은 자들만이 갈 수 있는 장소로 우리를 데려가기 원하신다.
오늘날 기독교 문화는 고작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복을 받을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수준이지만, 사실 예수께서 허락한 미지의 삶이 고통과 고난과 실망의 삶이라 해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예수님 없이 세상 모든 것을 누리는 것보다는 그분을 따르는 것이 훨씬 강력하고 보람된 삶이기 때문이다. 믿음의 혜택들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분보다 더 소중한 것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동행할수록 믿음의 요구는 더 커진다. 더 많은 것을 감수하게 될 것이며,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희생을 진심으로 받아들인다면, 희생의 삶 역시 기꺼이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을 변화시키시고, 역사를 쓰시고, 미래를 창조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펼치신다. 개척자 예수님과 보조를 맞출 계획이라면, 변화는 각오해야 한다. 우리는 “내 뜻대로 마시고 당신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위험한 순간들을 각오해야 한다.
코뿔소로 부르셨다!예수님의 부르심은 야만적이다. 위험이나 치러야 할 대가를 보여 주시면서도 “나를 따르라!”고 부르신다. 사자의 입이 막히고 죽음의 힘이 꺾이는 야만인의 길로 우리를 부르신다.
3. 야만적 무리요한의 제자들이 떠나갈 때 예수님은 군중을 향해 요한에 관한 말씀을 시작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 예언자를 보러 나갔더냐? 그렇다. 그는 예언자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다. 이 사람에 대하여 성경에 이르기를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먼저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길을 닦을 것이다.’하였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가 낳은 사람 중에서 세례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아무리 작은이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마11:7~11)
예수님은 요한에 대해 분명히 아셨으며, 다른 사람들이 요한에 대해 혼란스러워 하는 것도 아셨다. 당시 요한은 영적 지도자로 기대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거칠고 야성적이었으며, 전혀 세련된 지도자가 아니었다. 갈대, 즉 문명인들의 기대에 맞춰 쉽게 흔들리는 사람도, 정권에 좋은 인상을 주기위해 애쓰는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도 아니었지만 요한은 선지자였다. 하나님의 아들의 길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선택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마11:11)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아직 커다란 기회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요한의 뒤를 이어 야만의 무리가 따라 오리라는 것을 예상하셨다. 하나님의 의도와는 달리 당대의 조직화되고 개화된 유대교에 대해 예수님은 끝까지 이방인으로, 외부인으로, 야만인으로 살다가 죽으셨다. 당시 유대인들의 길들여진 행태를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지적하셨다. “요한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니까 ‘그는 귀신에 들렸다.’고 하고, 인자는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 ‘보아라 저 사람은 먹기를 탐하는 자요, 포도주를 즐기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한다.”(마11:16~19) 예수님을 따르는 이가 무슨 일을 해도 그 일을 멸시할 이유를 찾아낸다는 것이다.
삶의 방식은 달랐지만 예수님과 요한은 모두 야만인으로서 하나님의 음성에 인도함을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심플하게 행하는 것을 생활 패턴으로 삼았고, 같은 삶을 제자들에게도 명하셨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기독교는 비신비적인 합리적 믿음의 종교가 되었다. 정말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지의 여부는 사소하게 되고, 정통 교리를 믿어야 정통 신앙인의 대접을 받는다. 그러나 성경의 믿음은 신비한 믿음이다. 영이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영계에서 행하는 삶이다. 에녹은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들림을 받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방랑의 여정을 시작하였다. 사무엘은 밤에 하나님의 음성을 세 번이나 들었으며, 이세벨을 피해 동굴로 숨은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같은 야만인들의 이야기는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끝난다. 그들은 창조주의 뜻을 이루는 일에 부름 받은 신비한 전사들이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법을 배워야 하며, 신비의 전사라는 소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야만적 방식과 더불어 일정한 광기가 찾아온다. 제자도의 요점은 하나님을 향해 열정적, 영적으로 미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나라, 목적, 그분의 열정이 닿는 방향으로 우리를 이끄신다. 그분의 열심과 갈망은 우리를 순응시키지 않고 변화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