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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

바르바 던 지음 | IVP
성경에서 안식일의 의미로 육체적인 쉼이 특히 강조되는 것은 신명기 5:12∼15에 기록된 계명에서이다. 이 성경 말씀에서 종으로 하여금 안식일에 일을 그치게 해야 하는 이유는 이스라엘도 한때 종으로 일해야 했으며, 그러기에 종으로서 일하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지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애굽의 압제에서 건져내신 것에 감사하며 안식일을 지키고 모든 사람으로 일을 그칠 뿐 아니라 진정으로 쉬게 해주어야 했다.



'육체적 쉼'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곧바로 생각나는 중요한 경고가 하나 있다. 내가 보기에 우리 문화는 시청각 매체에 사로잡혀 진정한 육체적 쉼을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든 것 갈다. 우리의 감각이 광고의 공격을 받고 우리의 지각이 부도덕의 포격을 받을 때 우리의 몸은 쉴 수 없다. 우리 사회에는 고요한 쉼이 절실히 필요하다. 정신없이 달려가는 우리 문화에서 쉰다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따라서 안식일의 쉼을 자신들의 생활양식으로 정착시키려는 사람들을 지원하는 것은 기독교 공동체의 매우 본질적인 기여일 수 있다.10. 정서적인 쉼우리는 정서적으로 지나치게 메말라서 우리에게 또는 우리 때문에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처하지 못할 때가 너무 많다. 우리는 시간과 변화의 속도, 우리에게 주어지는 요구들의 무게 때문에 육체적으로 지쳐 있다. 성경에서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은 아침부터 정오까지 기도하고 부르짖으며, 춤을 추고, 자해까지 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제단에 강력한 불을 내리심으로써 자신을 나타내심에 힘입어 거짓 선지자들을 살육했고, 오래도록 기다리던 비도 내리게 했다. 분명히, 그 날 엘리야는 감정이 격해 있었을 것이며 바알 선지자들과의 대결은 그를 몹시 지치게 했을 것이다.(왕상 18:16∼46). 그러나 화가 난 이세벨 왕후는 즉시 엘리야에게 사자를 보내 그의 운명도 다른 선지자들의 운명과 같이 될 거라고 경고했다.



당신이 엘리야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겠는가? 나 같으면 틀림없이 도망칠 것이다. 엘리야도 그렇게 했다. 그는 서둘러 광야로 하룻길을 들어가 여호와께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간구했다. 예언자의 삶은 너무나 힘들었다. 놀라운 것은 여호와의 응답이다. 그 분은 엘리야를 잠들게 하셨다! 그리고 나서 천사를 보내어 그를 먹여 주셨고, 그 후 엘리야는 다시 낮잠을 잤다. 그 후에 천사가 두 번째로 나타나 엘리야가 호렙까지 가는 긴 여행을 견딜 수 있도록 다시 음식을 준다. 여호와께서는 호렙에서 엘리야에게 나타나셨으나,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과 같은 통상적인 형태가 아니라 조용하고 부드러운 속삭임 가운데 나타나셨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바로 앞에서 말했던, 엘리야가 이틀 동안 겪었던 감정들과 똑같은 감정들을 경험한다. 의심할 여지없이, 엘리야가 느낀 감정에는 두려움, 통쾌함, 공포, 확신, 당혹감, 기쁨, 의심 등이 뒤얽혀 있었다. 그가 죽기를 원한 것은 이상할 게 없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를 위해 가장 먼저 하신 일은 그를 잠들게 하시는 것이었다. 이것은 정말 이치에 합당하다. 우리는 먼저 육체적으로 원기를 회복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정서적인 필요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다. 안식일은 우리에게 육체적인 쉼을 주며, 그런 다음에 특히 새로운 전망을 줌으로써 우리에게 정서적인 쉼을 준다. 육체적으로 힘을 얻은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방법으로 만나주심으로써 그의 정서를 다루신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의심과 두려움을 비판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를 인자하게 맞으시고, 그에게 왜 그렇게 당혹하느냐고 물으시며, 그의 거듭된 불평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에게 다음은 무엇을 해야 할지 새롭게 지시하신다. 이 모든 선물은 엘리야에게 정서적 치유를 위한 공간과 도구를 제공한다.

삶에서 하나님의 주되심에 집중할 때, 우리는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 있으며, 우리를 위협하는 모든 것을 주권적인 그분의 손에 맡길 수 있다. 이 때 우리의 정서는 참된 위로와 치유를 주는 쉼을 얻을 수 있다.안식일 지키기에서 필요한 또 한 부분은 염려 그치기에 구체적으로 집중하는 것이다. 내 경우에는 안식일을 좀 더 철저하게 지키며 그럼으로써 나머지 엿새 동안 근심에서 좀 더 자유로울 수 있도록 근심을 한쪽으로 제쳐 두는 데 도움이 되는 몇 가지 훈련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안식일의 여왕' 을 맞기 위해 집안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 준비 자체가 성가신 부담이 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토요일 저녁에 모든 서류와 글쓰기 자료며 책을 한 곳으로 치워 버릴 때면 이미 안식일이 주는, 긴장으로부터의 해방이 시작된다. 잠자리에 들면서 키두쉬 기도를 드림으로써 나 자신을 위한 모든 일을 주님의 손에 맡기는데, 이때는 긴장이 더욱 완연히 사라진다. 염려를 그치는 데 도움이 되는 특히 중요한 또 한 가지 훈련은 안식일을 지키는 동안에 관계 - 특히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 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안식일에는 지위를 구하는 대신에 우정 관계를 돈독히 한다. 우리는 기독교 공동체의 사랑 안에서 근심을 그친다.



안식일을 즐길수록 안식일의 관습 자체가 내게 새로운 활력을 주어 주중에 긴장을 늦춰줄 뿐 아니라 새로운 우선 순위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주어 남은 엿새 동안 긴장 자체가 덜 적대적인 형태를 띠게 한다. 안식일은 문제들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과 맞서기 위해 은혜를 받는 기회다.4. 하나님이 되려는 노력을 그침안식일이 우리를 그토록 자유케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일을 그칠 때, 우리는 자신의 미래를 창조해야 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16:21∼30에 나오는 이 기사는 아주 흥미롭다. 이 이야기 전체의 핵심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필요를 공급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들 스스로 해결하려고 발버둥 칠 필요가 없다. 실제로 하나님이 그들의 필요를 공급해 주시리라는 것은 히브리 민족사 전체에 나타나는 메시지다. 이것이 성전(聖戰)의 의미이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해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4)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오는 복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안식일을 지킬 때 자신의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서 진정 하나님 되시도록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수동적인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이 우리의 일을 하셔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우선 순위를 바로 정하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다만 그분의 종일뿐이라는 것을 기억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은사와 자원의 선한 청지기가 되기 위해 자신이 할 있는 모든 일을 할 힘을 얻는다.5. 우리의 소유를 그침안식일에 사고팔기를 삼가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사거나 파는 행위가 모든 잘못된 것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대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생각한다.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는 대신, 소유가 우리의 욕구를 지배하게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지배가 거의 돌이킬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너무 늦게 발견할 것이다 - 우리는 이기적인 물질주의자, 탐식가, 심지어 알코올 중독자나 마약 중독자가 된다.) 또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관대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을 하나님이 이미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 대신, 거래에서 얻어낼 것에만 초점을 맞춘다.



주중의 엿새 동안은 사고팔기라는 요소가 주를 이루지만 안식일은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며 물질에 대한 스스로의 노력을 그치는 날이다. 우리가 물질과 공간에 대한 소유를 그치고 안식일을 지킬 때, 시간이 우리를 소유하게 된다.6. 우리의 문화 순응을 그침우리의 안식일 지키기는, 이상적으로 볼 때 기독교 공동체의 구성원인 우리는 세상의 가치와 대조되며 공동체 밖의 사람들에게 다른 길을 선택할 기회를 줄 수 있는 대안 사회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특별한 시간이다. 유대 공동체에서 안식일 지키기는, 이들을 주변 세상과 구분하는 중요한 표시였다. 사실 학자들이 말하는 바로는, 유대인이 바벨론 포로 기간에도 그들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안식일을 지켰기 때문이며, 심지어 현대 서구 역사에서 유대 문물이 보존되어온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고 한다. 유대인 수필가 아카드 하암은 유대교 역사에서 안식일 전통의 중요한 기능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유대인이 안식일을 보존했다기보다는 안식일이 유대인을 보호했다고 단언할 수 있으며 이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안식일이 유대인의 영혼을 회복시켜주고 매주 그들의 영적인 삶을 새롭게 해주지 않았다면, 유대인은 평일의 침울한 경험들 때문에 너무나 절망하여 물질주의와 도덕적, 지적 타락의 바닥에까지 떨어졌을 것이다. 한때 개혁주의 유대인은 주변 문화와 더 잘 융합하기 위해 토요일 대신 일요일을 안식일로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논쟁을 벌이기까지 했으나, 이 제안은 결국 무시되고 말았다. 이들은 항상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지켜 왔으며,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이다."7. 단조로움과 무의미를 그침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최악의 문제 가운데 하나는 이들의 삶이 너무 단조로워지며, 하루하루가 항상 똑같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일에 대한 중압감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언제나 좀 더 해야 할 일이 있다. 우리 문화에서 일을 그쳐야 할 필요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있다. 바로 주말마다 도시를 빠져나가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다. 즉, 수많은 사람들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단순히 일, 생산, 긴장, 자신을 주관하려는 노력, 사고팔기의 혼란, 지배적인 문화적 가치관 등에서 달아나려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결국 다시 그 곳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요일 저녁이면 그렇게도 풀이 죽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아브라함 헤셀이 지적하듯이 성경의 정신은 "휴식은 목적이 아니다. 휴식은 활동을 위한 것이며 새롭게 노력할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한 것이다."라고 단언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신과는 다르다. 헤셀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안식일은 인간의 일의 효율성을 강화하는 데 그 목적이 있지 않다. 안식일은 "창조 상으로는 마지막이나 의도 상으로는 첫째이며, 천지 창조의 목적이다." 안식일이 명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명일이 안식일을 위해 있다. 안식일은 삶의 막간이 아니라 절정이다. 안식일과 그 안에 있는 쉼과 받아들임과 향연의 기쁨은 삶의 절정이자 초점으로서, 삶에 새로운 에너지와 의미를 준다.제2부 쉼



8. 영적인 쉼영적인 쉼에 꼭 필요한 도구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쉬기 위해 마음과 영을 하늘의 것들에 고정시키고 일상의 일들은 한쪽으로 제쳐놓게 된다. 창세기의 창조기사는 하루가 아침에서 저녁까지가 아니라 저녁에서 아침까지라고 말함으로써 시간의 양식을 정해 준다. 목사요, 작가인 유진 피터슨에 따르면, 이러한 히브리인들의 저녁/아침이라는 시간 개념은 우리를 은혜의 리듬에 맞춰 준다. 우리는 잠자리에 들고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시작하신다. 우리가 잠잘 때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전개하신다. 그러다가 우리가 잠에서 깨어나면,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동참하라는 요청 요청을 받는다. 우리는 믿음으로, 일로 반응한다. 그러나 은혜야말로 항상 선행하며 일차적이다. 우리는 깨어나서, 우리가 만들지도 않은 세상에, 우리가 수고해서 얻은 것도 아닌 구원으로 들어간다. 나 자신의 노력을 의지하거나 다른 신들을 선택할 때마다, 사실 나는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고요와 평화를 스스로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안식일의 쉼은 영생의 맛보기다. 어느 날 우리는 이 쉼, 이 메누하를 완전히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의 안식일 지키기에는 우리가 언젠가 안식일의 완전한 성취를 맞게 해달라는 기도가 포함된다.9. 육체적인 쉼12. 쉼을 돕는 도구들이제 안식일이 거룩한 시간이 될 수 있도록 개발하고 싶은 관습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할 시간이다. 첫째, 나를 하나님의 임재로 인도해주는 효과적인 도구는 아름다움이다. 음악, 산, 꽃, 단풍, 겨울의 눈으로 어우러지는 장엄한 자연, 초와 향품의 향기, 모포의 부드러움과 따사로움, 성찬의 빵과 포도주의 맛, 아이들과 가까운 친구들의 포옹, 예술작품의 신비 이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창조자요, 디자이너이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한다. 나는 또한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운데 창의성을 자극하는 모든 것을 통해 영적인 쉼을 경험한다. 우리는 연주회를 열 정도의 실력을 갖춰야 한다는 부담감 없이 자유롭게 주님을 향해 기쁨의 소음을 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우리를 영적인 쉼으로 이끈다. 나는 특히 성경에 관한 전문적인 책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초점을 맞춘 책들을 읽기를 좋아한다.13. 사회적인 쉼사회적인 쉼'(social rest)이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대신에, 우리가 대개 듣는 것은 사회적 불안(social unrest)이라는 말이다. 안식일 지키기의 신명나는 부분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우리의 가까운 공동체에는 물론, 혼란스럽고 전쟁에 찢긴 세계 양쪽에 매우 실제적인 결과를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확신컨대,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안식일을 철저히 지킬 수 있다면, 우리는 서로를 죽일 필요가 없다는 것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안식일 지키기는 우리로 하여금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좀 더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생산성과 성취에 대한 우리의 필요를 그칠 때, 이것은 또한 우리가 옆 사람보다 더 나아야 한다는 필요를 줄여 준다. 쉼 - 특히 정서적인 쉼 - 은 적대감을 줄여 준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나쁘다면,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 구별된 하루를 누릴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이 안식일을 지킨다면, 우리는 더욱 더 희년의 백성이 될 것이다. 경제적 불의에 의해 억압당하는 자들을 해방하며, 빚을 탕감하고, 땅을 회복하며, 그리하여 평화를 세움으로써 나는 이 책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안식일을 지키려는 바람을 다시금 일깨우도록 기도한다. 이 기도는 교회에서 우리의 안식일 지키기가 세상에서 정의를 지키고 평화를 지키는 가운데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간구로 확대된다.14. 인격의 윤리이 장에서는 2부에서 논의한 쉼의 모든 면이 기독교 윤리의 성격을 좀 더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살펴보겠다. 첫째, 영적인 쉼에 관한 장에서 강조했듯이, 우리의 윤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다. 우리의 윤리는 자유의 윤리,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사랑으로 반응하는 윤리다. 둘째, 우리의 일의 가치는 안식일의 쉼에 의해 결정된다. 이 모든 것은 안식일의 리듬이 행위(doing)의 윤리가 (우리가 구체적인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느냐) 아니라 되어 감(becoming)의 윤리로(우리의 인격이 어떻게 발전하느냐) 이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안식일 지키기는 우리의 인격을 바꿔 놓는다. 우리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구별된 특별한 날에 헌신함으로써 틀림없이 변화될 것이며, 이러한 변화는 우리의 안식일 지키기의 초점이신 하나님의 성품에 걸맞은 생각과 태도와 정서와 행동을 낳을 것이다.제3부 받아들임



15. 의도성을 받아들임내가 안식일 지키기를 배움으로써 얻은 보물 가운데 하나는 왜 의도적으로 행동하기(intentionally acting)를 강조하는지 더 잘 이해하게 된 것이다. 유대교는 의식화된 율법의 종교라는 비판을 자주 받아왔지만 우리는 이러한 잘못된 개념을 재고해 보아야 한다. 물론 유대교 의식의 면밀함이 공허한 형식주의나 율법주의적인 의무가 되기 쉬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의식에 대한 이들의 일관성을 존중해 주어야 하는데, 이들의 의식은 "남보다 거룩해"라는 엘리트주의적인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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