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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와 빨간 사과

레베카 피펏 지음 | 사랑플러스
어거스틴은 위대한 고전 『신의 도성(The City of God)』에서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두 종류의 시민권을 가진 인생, 즉 사람의 도시와 하나님의 도시 시민으로 묘사했다. 인간 도시의 유혹은 하나님 도시의 부르심을 듣지 못하게 막는다. 지상의 도시는 가시적이고 유형적이며 우리의 오감을 자극한다. 또한 언제나 매력적이다. 반대로 하나님의 도시는 숨겨진 듯 불확실하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시는 실제이고 본질적이며 영원하다. 반면 인간의 도시는 손안의 모래처럼 스러져가고 헛되다.



무엇보다 부활은 우리가 영적 존재임을 말해 준다. 우리의 진정한 본질은 오직 하나님과 긴밀함을 유지하며 살 때 발견되고 성취된다. 우리는 부활을 사는 법을 생각해야 한다. 어떻게 우리 앞에 열린 길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모든 것, 즉 그분의 능력, 성품, 도우심과 은사들을 어떻게 받을까 고민해야 한다.



부활은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생생히 보여준다. 그분은 무에서 존재를 이끌어 내신다. 성경은 그분을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고 즐겨 말하는데, 이것은 그분이 지금 여기에 움직이듯이 현존하신다는 뜻이다. 또한 그분은 특성을 지닌 인격이시다. 그래서 사랑하고 진노하며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신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분을 무시하고 미워하며, 말로 다투고 거부하며, 알아갈 수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그분이 살아 말씀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서는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양날 칼보다도 날카로워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향을 가려냅니다."(히 4:12).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본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된다. 이처럼 새로운 삶을 살게 하고, 은혜로 말미암은 복을 누리게 하는 것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펴시는 능력이다. 그리스도는 죽고 만 것이 아니다. 그는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일으킬 때 사용하신 바로 그 능력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제공하시며 우리도 그 능력을 힘입어 살아가게 하신다. 영생이란, 시간 안에서 시작되는 영원한 삶을 말한다. 부활을 사는 것은 옛 세계에서 새로운 세계로 옮기는 에너지로 말미암아 사는 삶이다.



하나님을 한순간에 알 수는 없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황홀경과 신비한 경험이 아니라 공부, 탐구, 묵상 그리고 기도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미친 듯 바쁜 이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지켜야 한다. 21세기의 벽두를 사는 우리에게 이 일은 쉽지 않다. 깊이 생각하기보다는 바쁘게 뛰어다니고, 한 가지 일을 잘하기보다는 서너 가지 일을 다 하라고 재촉 받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하루 중 조용한 시간을 내서 성경 읽기와 기도에 할애해야 한다. 바쁘거나 쫓기지 않고 사고하고 고요히 경청하고 묵상할 수 있도록 속도를 늦춰야 한다.



우리는 삶을 더 소중하게, 용기와 기쁨을 가지고 살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부활의 소망으로 살기 때문이다. 삶이 아무리 엉망진창이 되더라도, 하나님만을 의뢰하고 요동하지 않으면 우리는 마침내 승리의 개가를 부를 날을 맞는다. 그때 모든 싸움은 끝나고, 믿음의 행적이 모두에게 드러나며, 소망이 성취될뿐더러, 우리의 전존재가 사랑하는 하나님과 연합하는 날을 맞는다. 지극한 기쁨, 갈급한 소원,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것들이 모두 우리 것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분의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는 여전히 길 위에 있다. 약속과 성취 사이의 간격이 우리의 믿음에 여전히 긴장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은 이 세상을 사는 우리를 위해 준비된 가장 강력한 추진력이다. 그렇다. 소망에는 이유가 있다.Part 1. 빨간 사과 껍질을 벗다

이 세상이 이 지경인 건 내 탓이다모든 사람에게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행복하고 싶고, 사랑 받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렇게 간단한 문제가 왜 그렇게 힘든 문제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행복을 추구하며 찾아 나선 그 길이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 큰 허전함과 외로움이 몰려온다. 우리의 갈증을 해결해 줄 더 깊은 무엇을 안타깝게 찾아다닌다. 무언가 잃어버린 느낌, 아니 우리에게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있다. 그런데 그게 무엇인지 확실하게 모른다.



사람에게는 자기가 바라는 이상과 실제의 삶, 지식과 행동, 지성과 인격 사이에 언제나 틈이 존재한다. 이 시대가 특별한 것은 그런 틈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틈을 인식조차 않는다는 것이다. 고대인들은 사람이 성장과 성숙에 이르면 말하는 바와 실행하는 바의 틈을 인정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날은 사정이 다르다. 틈을 인정하는 것은 긁어 부스럼 만드는 일이다. 우리가 영웅시하는 사람들이 실패하면, 우리는 충격을 받고 배신감을 느낀다. 그들 역시 고통으로 일그러진, 아니면 평범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인간이 가진 역설은, 선과 악, 관용과 자기 중심성, 정직과 사악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역설은 우리가 자신의 결함을 인정하는 것을 아주 어렵게, 그러면서도 중요하게 만든다. 우리 인간에게는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 할 만한 놀라운 면이 있다. 사랑할 수 있고, 아름다움과 진실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 불행의 씨앗이다. 한 정신과 의사는, "인간의 문제는 모두가 죄나 악과 개인적이며 지속적인 싸움을 하고 있는데, 정작 그 갈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우리가 인간 본성에 관해 어이없을 정도로 천진난만한 이해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당황스럽다. 역사상 가장 피 흘리기 좋아하는 한 세기를 살아왔으면서도, 인간은 자신들이 기본적으로 선하지만 가끔씩 악한 행동을 저지른다는 식의 자기 위안을 하고 있다. 역사는 우리의 문제가 쉽게 바뀌지 않음을 보여준다. 아니, 오히려 우리가 쉽게 망각하는 존재임을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가진단 능력 상실의 치매 증상으로 고생하고 있다.



G. K. 체스터톤은 '우주의 문제는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런던 타임즈」에 연속 기고 요청을 받았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 "우주의 문제는 바로 나다. 내 탓이다."내 인생은 나의 것! 이라는 거짓말토마스 하디는 말했다. "우리가 갈망하는 행복과 자유에 이르려면 먼저 죄악을 응시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그것이 해답이다. 먼저 죄악을 응시해야 한다. 무엇인가 잘못됐다고 인정할 때 진정한 해결책을 찾아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클레망스의 흥미로운 내면 여행은 자기 이해에 이르는 세 가지 단계를 보여준다. 처음 단계에서 그는 자신의 껍질 때문에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다. 오히려 실패한 사람들, 약점 있는 사람들을 내심 경멸하며 니체의 '초인'에 전적으로 공감했을 수도 있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자신에 대한 깊은 진실을 직시하게 됨으로써 자신의 한계를 보게 된다. 단순히 의지만으로 자신의 본성 자체를 변화시키기는 실로 역부족이었다. 세 번째 단계로 클레망스의 자각은 좀더 깊은 인간 본성의 심층에 가 닿는다. 무시해 보려고 애썼지만 그에게는 근원적인 불안이 붙어 다녔다. 우쭐거리며 잘나가던 시절에도 희미한 '연약의 그림자'가 자기를 따라다녔다. 그는 자신이 왜 그렇게 쫓기듯 살았는지 알게 되었다.



클레망스의 여로를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그가 쉴 새 없이 부, 직업적인 성취 그리고 성적 정복을 추구한 이면을 바라보게 된다. 클레망스는 안전하지 못하다는 희미한 자의식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것이다. 안정감을 느꼈다면, 왜 실제보다 자신을 크게 보이고 싶었겠는가. 왜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앞서야 한다고 느꼈겠는가. 왜 항상 자신이 더 크고 더 나은 것을 소유해야 한다고 생각했겠는가. 특히 가장 주된 욕망으로 나타나는 권력과 명예욕도 한꺼풀 벗기고 들어가면 우리의 불안과 밀접하게 붙어 있다. 하지만 불안을 엄폐하려는 이러한 전략은 도리어 몽상과 현실 왜곡의 거미줄로 얽혀, 마침내는 더 심한 불안으로 끝나고 만다. 환상일 뿐임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기막힌 것은, 마음속으로 거짓말이라고 알고 있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 소모하는 정력, 에너지이다.



이 문제의 핵심에서 작용하는 가장 심각한 거짓말은, 우리가 사람에 불과하면서도 하나님처럼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는 가엾게도 시간과 공간에 갇혀 있으면서 무한하고 영존하는 듯 자신을 꾸민다. 인간의 비극은 인간이 자기 자신이 아닌 그 무엇이 되려고 발버둥치는 데서 비롯된다. 수천 년 전 에스겔 선지자는 이것을 꼬집듯 말했다. "네가 마음속으로 신이라도 된 듯이 우쭐댄다마는,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우주의 운전석에 앉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리는지 모른다.



오늘날처럼 '신(神) 콤플렉스'가 활개를 친 적은 없다. 한 친구가 뉴에이지 세미나에 다녀왔다면서 흥분해서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내 안에는 결점이 없다는 걸 깨달았어. 나는 선한 일을 할 수밖에 없어. 왜냐하면 내가 선하니까. 신은 모든 것 안에 내재하거든. 내가 신이고 신이 나인 셈이지. 나는 긍정적으로만 생각하면 되는 거야. 어떤 부정적인 생각도 내게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내기만 하면 되지. 이제는 더 이상 '그건 틀렸어요!'라고 말하지 않을 거야. 그건 틀린 게 아니라 나랑 안 맞는 것이거든." 친구의 말을 듣고 내가 말했다. "너희 애들 지금 십대지? 아이들을 키우는 데도 그 생각이 적용될 수 있을까? 아이들이 새벽녘에야 몽롱한 얼굴로 들어와서 한마디하려 하면, '엄마, 그만 하세요. 그건 나랑 안 맞아요.'하고 말하면 어떻게 되는 건데?"



이 사람의 '새로운' 철학은 신과 피조물을 동일한 것으로 보는 오래된 범신론에 지나지 않았다. 뉴에이지라는 옷을 입힌 것은 산뜻해 보이지만, 그 아래에는 별 수 없이 과거의 환영이 어른거릴 뿐이다. 그 안에서 움직이는 환상은 동일하다. 신처럼 되고 싶은 욕망, 이것이 미국에 뉴에이지 선풍이 일어난 이유 가운데 하나다. 뉴에이지, 이것이 미국인들의 꿈의 신조이다. "틀렸다고 교육받아 온 모든 것들이 사실은 맞다.", "너는 실패할 수 없다. 네가 신이다.",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행하라, 움켜쥐라, 거기에 불을 붙여라, 그걸 위해 살아라.", "네가 하기 나름이다.", "다른 사람 걱정은 네 몫이 아니다. 그건 그들의 운명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개선을 위장한 자기 함몰이다.



카뮈의 클레망스는 현실을 냉혹하게 직시했다. 자신이 신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부푼 가슴으로 살기에는 너무 흠이 많았고 제한된 존재였으며 불안했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원하는 것이 있다. 자신이 이 망망한 우주에서 아무 의미 없는 존재라는 느낌, 그 왜소함을 떨쳐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자기 실수를 잊고 싶었다. 죄의식을 해결하고 멀리 묻어버리고자 했다. 그는 난생 처음 자기 자신이 못마땅했다.



누군가는 "그러면 자신을 바꾸면 될 것 아닌가."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불평일랑 그만두고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을까? 이게 말하자면 미국식이다. 미국인들은 일련의 방법론 적용하기, 문제를 명확히 파악해 더 나은 결과 도출하기에 익숙하다. 이들은 클레망스에게 다가가서 말할 것이다. "여보세요. 기분이 울적한 듯하군요. 내가 자기 개선을 위한 10가지 지침을 가르쳐 드리죠. 아주 쉬운 공식이니까 따라하기만 하면 곧 기분이 좋아질 거예요." 클레망스는 약간 찡그린 표정으로 말할 것이다. "자기 개선에 관한 책이요? 침몰하는 타이타닉 호 갑판에 있는 의자들을 똑바로 놓는다고 뭐 나아질 게 있나요?" 도무지 기가 꺾일 줄 모르는 미국인은 지지 않고 이렇게 대꾸할 것이다. "당신의 문제가 뭔지나 압니까? 당신은 우선 콜레스테롤을 낮춰야 해요. 조깅부터 시작하세요. 식습관을 바꾸고요. 그러면 이런 비참하고 우울한 생각이 떠나갈 겁니다." 클레망스가 대답한다. "친구여, 당신의 처방은 습관을 바꿀 뿐임을 모르시는군요. 제가 알고 싶은 것은 마음을 바꾸는 방법이랍니다."헛된 것에 예배하다우리는 우리의 유한성 때문에 언제까지나 신인 척 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대체물, 곧 다른 신을 직접 만들어낸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이렇게 우리는 한평생 불가능한 일(신인 척 하는 일)과 부적절한 일(신이 아닌데 신이라 믿고 의지하는 일)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신처럼 의지하는 고수입, 아름다운 외모 그리고 좋은 배우자는 애초부터 우리가 위기에 닥쳤을 때 올라설 수 있는 든든한 기초가 아니다. 액세서리일 뿐이다. 그런데 정말 놀랄만한 일은, 이런 안전책들이 무너지고 우리 인생이 산산조각날 때조차, '그럼 내 인생을 올려놓아도 될 만큼 확고한 기초는 무엇인가?'라고 멈춰 서서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그것 봐, 역시 신은 없어.'라든지 아니면 '더 이상 나빠지진 않겠지.'하고 비껴간다.



클레망스는 인간의 본성과 열망이 그 이상의 무엇을 가리키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들은 우리보다 큰 무엇인가를 향해 고상한 자기 포기를 하라고 아우성친다.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만이 사랑, 의미 그리고 안정을 얻는 길임을 아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우리에게는 우리의 모든 것을 바쳐 예배하려는 본성이 있다. 그리고 이 헌신을 받아주기에 합당한 인격 혹은 대상을 찾을 때까지는 뭔가가 결여된 존재로 남게 된다.



카뮈 외에도 이 점을 인정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피터 쉐퍼가 남긴 명 연극 〈에쿠스〉 역시 예배라는 주제를 파헤치고 있다. 말을 신이라고 믿는 소년이 자기의 치료를 맡은 정신과 의사 마르텡 다이사트와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줄거리인데, 여기서 다이사트를 당혹케 한 것은 소년의 착란 증세가 아니라, 의사인 자신의 삶에도 말 숭배는 아닐지라도 소년의 말 숭배와 같은 형태의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클레망스에 의하면 사람이 공허함을 피하기 위해 먼저 찾는 두 장소가 있다. 하나는 로맨스고 또 하나는 그것이 실패했을 경우 찾는 성적 만족이다. 신을 믿지 않는 현대인은 주로 여기서 출발한다. 클레망스는 사랑을 갈구하는 데서 나타난 그의 예배 본능을 발견했다. 그는 사랑에 눈멀고 싶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바쳐 사랑에 빠지면 그런 희열이 오기는 했다. 하나 됨과 탈아(脫我)라는 신비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만남이 아무리 짜릿했다 할지라도, 그가 여전히 같은 사람으로 남아 있다는 것 때문에 사랑은 곧 무색해진다. 로맨스가 몰락하자 클레망스는 성애에 눈을 돌림으로써 내면의 공허를 메우기 위한 몸부림을 계속한다. 그러나 로맨스나 섹스를 통한 클레망스의 행복 추구는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만다. 그것들은 문제를 더 자각하게 할 뿐이요, 혼자라는 의식을 깊게 할 뿐이었다.



클레망스는 자기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다음 발걸음을 취한다. 심리학적인 자기 검증에 도움을 구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의 본질에 관해 약간의 빛을 던져줄 뿐 그의 양심의 굴레를 벗겨주지는 못한다. 우리는 심리학 덕택에 '거짓된 죄책감'을 구별해낼 수 있게 되었지만, 합당한 죄책감일 경우 심리학은 우리를 어떻게 도울 것인가? 이것은 자기 스승 프로이드처럼 종교적인 신앙을 꺼렸던 그의 제자 어니스트 베커가 심리학의 광야에서 외친 소리와 같다. "죄책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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