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창
켄 가이어 지음 | 두란노
영혼의 창
켄 가이어 지음/윤종석 옮김
두란노/2000년06월/330쪽/11,000원
머리말
하나님을 말하지 않고 영혼을 말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하려면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걸음을 멈춰 예배하지 않고도 성 베드로 성당의 안내가 가능한 것처럼. 그러나 우리는 그런 여행이라면 다 해보았다.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자아의 추구야말로 우리들 대부분이 한평생 해온 일이다. 심지어 신앙 생활을 통해서도. 그러나 자아란 막다른 골목이어서, 결국 우리는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다. 인생을 헛산 기분.
우리의 추구가 영혼 자체로 끝난다면, 그것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이 길 역시 막다른 골목이어서, 아무리 열심히 걸어도 결국 자기 존재의 언저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언저리와 매번 거기서 맴도는 걸음에 조금씩 지쳐 있다. 우리가 갈구하는 것은 종교적 반경을 맴도는 진부한 걸음 이상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동행을 원한다. 이 여정이 홀로 가는 길이 아니며, 그분이 우리와 동행하시고 대화하시며 우리 삶에 깊이 관여하신다는 확신을 원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그런 친밀감을 경험한 순간들이 있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순간들. 아침 햇살의 부드러운 손길이 침실 창으로 새어 들어와 우리 눈을 간질여 영원한 것에 눈뜨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만지시던 순간들. 그 창은 단순한 깨달음의 순간일 때도 있다. 판단을 더디 하고 이해를 속히 해야 한다는.
그러나 간혹 그 창은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부분에 들려 오는 말일 때가 있다. 우리를 잠 깨워 인생의 여정을 준비시키는 말, 위기를 일깨우거나 안식처로 인도하는 말, 내가 누구이며 지금 왜 여기 있으며 인생의 이 특정 시점에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말일 수 있다. 햇빛보다 더 밝은 놀라운 은혜의 순간, 그것은 우리가 평생 그토록 듣고 싶었던 바로 그 말씀 - 하나님의 말씀 -일 수 있다. 가장 희미한 메아리까지 놓치지 않으려 가장 가파른 절벽까지 오를 가치가 있는 너무나 소중한 말씀. 영혼의 창은 바로 그 말씀을 듣는 곳이다. 그리고 그 여정이 시작되는 곳이다.
영혼의 창
하나님은 하늘을 펼치시고 아름다운 별들로 밤을 수놓으셨다. 해에게 하루의 리듬을, 달에게 한 달의 리듬을, 절기에 한 해의 리듬을 정해 주셨다. 갈대밭에 바람이 불게 하시고 멀리서 천둥이 울게 하셨다. 흙덩이로 당신의 형상을 빚어 생명을 불어넣으셨다. 그 형상을 온전케 하고자 짝을 만드시고 두 절반을 하나로 묶어 당신의 피조 세계의 중앙 무대에 두셨다. 그리고 유혹과 타락, 엄청난 상실, 숨어 버린 인간. 하나님은 숨은 그들을 찾으셨다. 그 이후로 그분은 그들의 자녀들과 그 자녀들의 자녀들을 찾으셨다. 그리고 나중에 그 찾는 사연을 글로 남기셨다.
하늘과 땅이 섞여 빚어진 우리는 두 세계 사이에 있다. 한편으로는 숨고 싶다. 한편으로는 찾고 싶다. 아직 읽을 수 있는 희미한 마음의 말과 아직 볼 수 있는 흐릿한 영혼의 그림을 통해 더러는 숨은 곳에서 나와 찾는 일을 시작했다. 우리는 우리가 잃은 것이 그림 속에 있나 보려 그림을 그렸다. 우리가 잃은 것이 음악 속에 있나 보려 곡을 만들었다. 우리가 잃은 것이 돌 속에 있나 보려 조각을 새겼다. 막막할 때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모를래야 모를 수 없던 때도 있었다.
우리는 많은 길을 통해 하나님께 다가간다. 하나님도 그런 것들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그분의 다가옴은 말씀으로 시작된다. 우리의 다가감은 들음으로 시작된다. 그분의 찾음은 보이심으로 시작된다. 우리의 찾음은 봄으로 시작된다. 하나님을 찾는 우리와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은 일상 생활의 창에서 서로 만난다. 이것이 영혼의 창이다.
영적으로 훈련되지 않은 이들에게 이것은 영적 훈련 같은 것이다. 실은 훈련 중에서도 가장 혹독한 훈련이다. 창을 보고 그것을 통해 들려 오는 음성을 들으려면, 항상 눈여겨보고 귀 기울어야 하기 때문이다. 소리는 때로 희미하고 그림은 때로 아득한 까닭이다.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보고 귀에 들리는 것 이상을 듣기 위해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민감해야 한다. 창은 어디에나 있어, 언제 눈에 띌지 모르기 때문이다. 때로 우리가 그 창의 한 광경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다. 오랜 세월 우리를 찾으신 그분을 찾지 않는 한.
영화의 한 장면이든, 책 한 페이지이든,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든, 충분히 시간을 두고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 마음의 렌즈에 잡힌 그 순간이 점점 창처럼 투명해진다. 그림이 어디에나 있으나 실은 그림이 아니고 창이다. 그림 너머 저편을 볼 수 있는 눈만 있다면, 자세히 보면, 2차원의 액자 너머로, 일상 생활의 캔버스에 칠해진 평범한 색조 너머로 뭔가를 볼 수 있다.
그런 창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나의 현재의 모습, 과거의 모습, 미래의 모습에 대해 무엇을 보는가? 길 건너 이웃이나 아예 길거리에 사는 이웃에 대해 무엇을 보는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보는가? 영혼의 창은 세상을 보는 하나의 방식이며, 그것은 대상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존중한다는 것은 거기 뭔가 볼 것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표면이 전부가 아니라 이면에 뭔가가 있음을.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을 바꿔 줄 위력이 있음을. 삶을 보는 방식뿐 아니라 실제 살아가는 방식까지 달라지게 할 깊은 계시가 있음을.
예수님은 인생을 그렇게 사셨다. 나인 성의 과부, 우물가의 여인, 나무 위의 세리, 십자가의 강도, 부자와 나사로에게서 그림 이면의 것을 보셨으며 그것은 그분에게 영혼의 창이 된다.
창가에서 쉬어 가기
별난 직업으로, 때로는 무직으로 한때 여섯 명의 가족을 먹여 살린 작가의 영혼을 고요하게 한다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당시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더 좋은 날을 기다리며 보냈다. 언젠가는 쓰리라. 언젠가는 출판되리라. 언젠가는 전업 작가가 되어 내가 좋아하는 일로 생계를 꾸려 가리라. 그러나 그 언젠가를 위해 사는 동안 나는 오늘을 놓치고 있었다.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는 데만 너무 바빠 현재 있는 곳과 지금 하나님이 후하신 손으로 베풀어 주시는 것을 잊고 산 것이다. 내 하루하루의 삶의 창을 들여다보게 되고 나서부터야 모든 것이 바뀌었다. 내 영혼의 소음을 고요하게 하면서부터 비로소 내게 주어지는 선물은 물론, 그 선물을 주시는 분도 함께 깨닫게 되었다. 그제서야 나는 그렇게 주어지는 것을 받기 시작했다. 언젠가가 아니라 오늘. 우리 삶의 바퀴가 빠지지 않게 하는 고정축은 바로 영혼의 고요함이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창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준비하는 식사가 그 음식을 먹는 사람들보다 더 중요해질 때, 내 일이 그 일의 수혜자인 내 가족들이나 나의 소중한 사람들보다 더 중요해질 때, 내가 주장하는 말이 그 말을 듣는 사람보다 더 중요해질 때, 이것은 내가 고정 축을 잃었다는 증거가 된다.
중요한 것을 보는 눈과 타인의 성스러움을 느끼는 감각을 잃지 않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영혼의 창을 볼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온갖 준비로 마음이 산만한 종교 활동의 부엌에서 살고 싶지 않다. 너무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며 뜨겁게 열오른 오븐 앞에 달라붙어 살고 싶지 않다. 나는 주님의 발 아래 앉아 그분의 눈빛을 보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 보여 주시는 많은 창을 들여다보며 살고 싶다. 바로 그 발 아래에서 우리는 ‘창가에 쉬어 가기’를 배우는 것이다. 그분 발 아래 앉아 마음을 고요하게 하면 그분의 속삭임까지도 들을 수 있다.
저 창에 그 무엇이
창에 있는 것을 보려면 먼저 걸음을 멈춰야 한다. 그리고 C. S. 루이스의 말처럼 “거기 정확히 무엇이 있는지 선명히 보일 때까지 보고 또 보아야 한다.” 우리 삶의 일상적 사건 이면에 뭔가가 있다. 우리가 지나치는 모든 이들의 삶의 이면에 뭔가가 있다. 우리가 찾아내지 못하면 그것이 우리를 찾아낸다. 우리 어깨를 두드리며 재촉한다. 걸음을 멈추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듣고 보라 한다.
떨기나무 주위에서 야생 딸기나 따고 있었던 적이 얼마나 많은가? 마치 야생 딸기가 전부이기라도 한 양. 날마다 여기저기 오가면서 스쳐 지나는 이 땅의 많은 떨기나무들 속에서 하나님의 불꽃을 보지 못한 일이 얼마나 많은가? 거기서 나를 부르는 음성을 그냥 놓쳐 버린 일이 얼마나 많은가?
어느 이교도가 랍비를 찾아와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왜 떨기나무 속에서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이시라면 적어도 영산(靈山)의 정상에서 천둥소리로 말씀하셔야 한다는 것이 그 이교도의 생각이었다. 랍비는 이렇게 답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 보잘것없는 가시덤불조차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 오는 방식에서 그분의 겸손이 보이지 않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마구간의 갓난아기 울음소리로 낮아진 그곳에서 우리는 겸손의 극치를 보지 않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거하시며 말씀의 통로로 삼으실 수 없을 만큼 세속적인 시간과 장소와 사건은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기 위함이리라. 낮고 겸손하게 찾아오시는 하나님 특유의 방법을 깨닫지 못하는 한. 우리는 이 땅에 천국이 가득한 순간들, 하나님이 인간의 태를 빌려 태어나는 베들레헴의 그 순간들을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말 것이다. 말구유 건초더미 위에서 성스러운 것을 볼 때까지 우리는 그 창을 보고 또 보아야 한다.
영혼의 갈망
우리 안에는 인간의 혈통과 하나님의 혈통의 피가 섞여 흐르고 있다. 우리 안에는 이 땅의 흙과 천국의 호흡이 죽음만이 갈라놓을 수 있는 신비한 방식으로 연합되어 있다. 인간 본성의 고지대와 저지대, 우리는 그 둘 사이에서 끝없는 긴장 속에 살아간다. 나무처럼 우리도 두 세계에 끼여 있다. 한쪽은 이 땅에 뿌리를 두고, 한쪽은 하늘로 잎을 향한 채. 그러나 잎이 하늘을 붙들기보다는 뿌리가 땅을 붙드는 것이 안전하기에 언제나 현실성이 커 보이는 쪽은 땅이다. 그러나 잎의 기공으로 하늘이 흡입되고 그 세포 속으로 태양이 빨려 든다. 잎은 이산화탄소를 공급받아 생명에 필요한 엽록소를 만든다. 하늘이 주는 모든 것을 박탈하면 잎은 양분을 얻고자 뿌리에 더욱 매달리다 결국 시들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영혼도 하나님과 단절되어 영원한 의미의 근원인 태양이 가려지면 엉뚱한 곳에서 의미를 찾으려 한다. 좋은 직장, 좋은 학교, 좋은 소속 단체를 찾아 뿌리를 뻗으며 더 깊이 땅속으로 파고든다.
갈망은 영혼의 본질적 기능이다. 다윗은 이렇게 부르짖었다.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시편들 속의 극도의 굶주림은 이 땅의 어떤 음식도 채워 줄 수 없는 굶주림의 산물이다. 우리 영혼의 창에 놓인 음식은 맛보면 맛볼수록 다시 맛보고 싶어진다. 마침내 견딜 수 없는 배고픔이 우리의 덜 중요한 갈망들뿐 아니라 삶 자체마저 바꿔 놓을 때까지.
그러나 우리 안에 솟아나는 이 갈망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신학자 본 휘겔은 이렇게 표현했다. “하나님은 언제나 먼저 계신다.” 사도 요한도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우리의 갈망도 어쩌면 같은 이치이리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갈망이 우리에게도 그분을 찾는 갈망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님은 아주 세미한 것 - 내면으로 끌리는 마음, 우연만은 아닌 말과 사건들의 조화 - 에 계실지라도, 우리 심장의 고동을 멈추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은 갈망을 심어 주기에 충분한 것이다.
창을 열며
시스틴 성당 천장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그림은 인간 역사를 통틀어 온 인류와 하나님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손을 내미신다. 아직 손가락이 맞닿아 있지는 않다. 손가락이 맞닿을 때마다 그 계시의 한 순간, 하늘과 땅 사이에 창이 열린다. 그리고 그 계시의 순간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말씀이다. 은혜와 사랑의 말씀, 인도와 교정의 말씀, 지혜와 깨달음의 말씀, 용서와 확신의 말씀. 우리 영혼에 갈급한 말씀...
하나님이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세상을 지으셨을진대, 이제 해와 달과 별은 그 말씀의 편린이요, 우리는 그것을 살핌으로써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조금은 헤아릴 수 있다. 제대로 보고 제대로 듣기만 한다면 모든 삼라만상이 하나님의 자기 표현의 수화임을 알게 된다. 먼 옛날 하나님이 홍수의 설교로 세상에 심판을 명하시자 지층은 그 말씀이 기록된 퇴적의 책장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기에 그리스도의 삶의 모든 언행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언어가 되었고, 지금도 그렇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하나님은 우리의 언어를 통해 다른 이들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면, 그 응답을 이루는 삶의 상황은 그대로 그분의 말씀의 메아리가 된다. 하나님에게서 나온 말씀은 그 소임을 완수하기 전에는 결코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에도 새겨져 있다. 마음속 깊은 곳의 도덕법만이 아니라 우리 혈통에도 메시아의 혈통의 유전적 기호가 있다. 우리의 기원에 대한 아련한 잉크 자국은 지금도 우리가 우연한 화학 반응물이나 동물적 본능의 집합체 이상의 존재임을 일깨우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과학이 아니라 예술이다. 뚜렷한 물체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실체의 그림자 같기에 또한 믿음의 여지도 있다. 우리의 본능적 성향은, 은혜의 순간을 분석하여 그 순간을 재현시킬 수 있는 원리를 만들고, 그 원리를 신앙의 척도와 행동 규범으로 율법화하려 한다. 그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연스러움을 놓칠 뿐 아니라 생명마저 잃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영혼은 보이지 않는 영역에 속한 것이기에, 자신의 이해의 희미한 불빛으로 말씀의 신비를 파헤치며 더듬어 찾아가는 것이다. 창을 여는 쪽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기서 그분이 주시는 것을 받거나 받지 않는 것뿐이다.
직업의 창
신학교 다니던 시절, 나는 학생들과 교수들이 자신의 특별한 ‘부르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간혹 들었다. 선교지로 가라는 부르심. 목회에 대한 부르심. 그러나 나의 경우 그것은 좀더 일반적인 방식으로 왔다. 고3을 마치던 여름, 콜로라도에서 열린 ‘영 라이프’ 캠프에서였다. 저녁 메시지 후 침묵의 시간에 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응답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 사랑은 십자가에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그날 밤, 나무 아래 앉아 내 인생으로 그 부르심에 응답했다. 내 인생이 그분에게 별로 소용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혹 그분이 뜻이 있으셔서 원하신다면 그분 것이 되고 싶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였다. 받은 것은 너무 컸고 돌려 드릴 것은 너무 작았다. 그토록 큰사랑에 어떻게 내 인생을 내어 드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너무 많이 드려야 하면 어쩌나 하는, 조용하지만 아주 현실적인 두려움이 일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너무 깊이 빠질까 두려웠다. 그분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갔다가 그분이 내 눈을 유심히 보시며 무리 중에서 나를 지명하여 불러내 원치 않는 곳으로 보내실까 봐 두려웠다.
신학교 졸업 후 한 농촌교회에서 2년 간 목회를 했으나 결국 하나님은 나를 목사로 부르시지 않았다. 죄책감이 들기는 했으나 그 어색한 2년이 흐르는 동안, 나는 글을 써야 한다는 ‘야생의 부르심’ 같은 것을 느꼈다. 날마다 잠에서 깨어날 때면 목사로서는 느끼지 못했던 흥분으로 가슴이 설렜다. 나는 매일, 매 문장, 매 페이지에 몸을 던졌다. 하루가 다 끝나고 자정을 넘겨도 에너지가 남았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뜰 때면 다음 장을 쓰고 싶은 열망에 그렇게 기분이 상쾌할 수 없었다. 너무 보람 있고, 너무 충만하고, 너무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