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 쓰신 글씨
마이클 카드 지음 | IVP
흙 위에 끄적이신 말씀지금껏 우리는 예수님이 흙 위에 무슨 말씀을 두 번씩이나 끄적이셨는지에 관해 아는 바가 전무하다. 대체로 주석서들도 오랜 세월동안 빗나간 질문만 해 왔다. 무슨 말씀을 쓰셨을지 그 내용만을 계속 알아내려고 했던 것이다. 주석가들은 예수님이 왜 그러셨는지를 질문해야 했음에도, 그걸 깨닫지 못하고 무얼 쓰셨을까만을 질문했던 것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끄적이신 내용이 아니라 끄적이신 이유였다. 뜻밖의 행동이었다. 모두를 초조하게 했다. 그분만의 창조적 방식이었다.
사실 바리새인들은 간음한 여인에게 화가 난 만큼 예수님께도 화가 나 있었다. 그들은 여인을 성전 뜰로 끌고 와서는 영광스런 가르침을 전하기에 한창이셨던 예수님을 가로막았다. 그 장면은 당신도 알 것이다.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짐짓 예수님을 존경하는 양 바리새인들이 묻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입을 다무셨다.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시고 대신 몸을 굽혀 성전 바닥에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써내려'(kata - 아래로, graphein - 쓰다) 가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 의미심장한 침묵을 견디다 못해 질문을 던지며 재촉하고 나섰다. 마침내 예수님이 숙연한 침묵을 깨셨다. 그분은 끄적이신 말씀을 놓아두신 채 똑바로 일어서서 그분의 생애를 온전히 구체화하는 지혜와 긍휼이 농축된 단순한 여덟 단어의 말씀을 던지셨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러고 나서 다시 흙 위에 무언가를 끄적이셨다.
그날 아침 예수님은 시간 가운데 여백을 창조해내신 것이다. 끄적이신 글의 형태나 심지어 내용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더 중요한 사실은, 한 순간에 소란이 멈추고 새로운 곳에 이목이 집중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세상이 단지 현존하는 세상만이 아님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유케 되었다. 이 또한 분명 예술이다. 우리가 창조하고 글을 쓰고 춤을 추고 노래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될 수 있는 이런 종류의 시간 속 여백이 활짝 열릴 수 있다고 상상해 보라! 그림은 이 혼탁한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온전한 창조 질서를 바라보게 하는 창이 될 수 있다. 음악은 이 지친 인류의 귀가 오래도록 듣기를 갈망했던 그분의 음성을 표현하는 장엄한 메아리가 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보고 들음을 통해 산출되는 예술인 것이다.
이 책은 다른 이들의 생각을 종합해 놓은 것이 아니다. 사실 이 책을 처음 쓸 때 내 바람이 그것이었다. 나는 창조성과 상상력에 대한 문헌을 읽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그런 글들을 읽으면서, 난 그들이 기울인 창조적인 노력 하나 하나에 내내 감사의 마음이 넘쳤다. 난 그들의 주요한 논지들을 종합해 내 자신만의 웅장한 시간을 만들고 싶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일종의 '방법론'이나 '창조성을 고무해주는' 류의 책은 아니다. 그런 식으로 이 주제를 다루고 있는 책들이 일반 서적 중에 많으나, 테크닉적인 면만 가득할 뿐 일부 유용한 논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독자들의 시간만 빼앗고 있다. 하지만 특별히 나라고 해서 이 신비한 과정을 단번에 몇 가지 단계로 응축해 낼 수는 없다. 물론 우리가 알아낼 수 있는 창조성의 진리들이 어느 정도까지는 존재하지만, 그 깊이는 우리의 인식 범위를 넘어선다.
내가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비전은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통로로서 창조적인 과정, 바로 그 창조 과정에 대한 그리스도 중심의 비전을 함께 나누자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먼저, 성경에 나타난 창조성과 더불어 창조적 부르심에 순종한 믿음의 선진들의 삶을 간략히 살펴보려고 한다. 그런 다음 초대교회의 찬송시(빌 2:6∼11)를 통해 그리스도 중심의 창조성이 육신을 입고 구현된 형상이 어떤 것인지 발견하고자 한다.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발견된 개념들을 여러분의 삶과 나의 삶에, 그리고 우리의 경건 생활과 신앙 공동체에 적용하기를 바란다.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어느 것 하나 똑같지 않은, 창 위에 낀 성에 각양 무늬들로 창틀을 채우네. 움직임으로 간직되고 타오름으로 얼어붙네. 그 무늬들 안에 그분의 이름이 있는가? 우리는 왜 아름다 움을 갈망하는가?" - 짐 크로거트(Jim Croegaert)의 노랫말 중에서
아름다움이 빚어내는 반응어젯밤 하늘에서 우주쇼가 펼쳐졌다. 큰아들 윌과 나는 몇 시간 안에 개기월식이 진행된다는 것을 천문력을 통해 알고 있었다. 진짜로 몇 시간 뒤 지구의 그림자가 마마 자국을 한 달을 뒤덮기 시작했고, 그 질투 가득한 얼굴은 이내 검붉게 변했다. 게다가 달 바로 아래에서는 화성이 특유의 붉은 빛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고는 대미를 장식하듯 유성이 한 개도 아니고 두 개씩이나 반짝이는 꼬리를 남기며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윌은 이런 우주쇼를 볼 때마다 "와, 하나님 감사해요!"라고 끊임없이 혼잣말을 하곤 한다. 우리는 마음속에서 뭔가를 애써 갈망하는데, 이 위엄있는 아름다움 앞에서도 그 갈망은 채워지지 않는다. 이것은 아름다움을 향한 갈망 그 이상의 것이다. 이는 동시에 사랑과 용납을 향한 갈망이자, 좀더 시간을 두고 생각한다면 바로 하나님을 향한 갈망임을 깨닫게 된다. '그분은 아름다우신 분이기에',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아름다움을 갈망하는 이유이다.
당신은 자신에게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런 각별한 방식으로 깨달은 적이 있는가? 우리는 그분의 아름다움을 깊이 생각하는 일이 드물고, 더군다나 '그 아름다움을 앙망하는' 데는 더 인색하다. 신학이 이를 개략적으로나마 다루는 일도 거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엄연히 성경적인 사실이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시종일관 자신이 아름다우신 존재이며 그로 인해 찬양받으셔야 함을 알리셨다. 하나님은 아름다우시다. 그분의 아름다움은 그 아름다움을 표현해 낼 마땅한 반응을 요구한다. 그 반응이 진정한 예배이며, 예술인 것이다. 이는 빌 레인이 내게 여러 해 전에 말해 주었던 것이다.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반응하는 것이다." 그건 마치 연애하는 것과 같다. 내가 아내 수잔을 처음 보았을 때, 내 안의 모든 것이 그녀에게 반응하길 원했다. 감성적인 면, 영적인 면, 관계적인 면, 특별히 육체적인 면까지 포함해서 그 모든 영역에서 말이다. 나는 반응했다. 바로 이것이 예배다. 예배가 본질상 하나의 반응이라는 점에서 창조성은 예배이다. 그러기에 노래하고 글을 쓴다. 그러고는 음악을 사용해서, 침묵으로, 사랑하면서, 감사 가운데 섬김의 도구인 대야와 수건을 들고 반응한다. 이것이 내가 진정 사모하는 분을 향한 낭만적인 반응이다.
창조로의 부르심하나님이 자기 앞에 늘어 세운 수천 종류의 동물들에게는 각기 다른 이름을 붙여줄 줄 알았건만, 정작 아담은 뼈에 사무치는 자기 아픔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몰랐다. 후에 그는 이 아픔을 외로움이라 불렀으리라. 그러나 외로움의 이유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때는, 외롭다는 느낌을 이해하기란 무척 힘든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와를 창조하시기 전에 그녀만이 온전히 채워줄 수 있는 외로움이라는 공간을 미리 아담 안에 창조하셔야 했을 것이다. 비로소 하와가 모습을 나타냈을 때,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한 반응으로 아담은 인류 최초의 노래를 불렀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에 살이라" 아담의 이 첫 노래는 하와를 향한 찬사이자 위로였다. 그녀로 하여금 자신이 누구이며 또 인생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를 깨닫도록 도와주었다. 이후의 모든 예술이 추구한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최초의 부부이자 최초의 창조 공동체로서 그들은 자신의 창조주 앞에 서서, 창조하라는 명령을 부여받는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하나님은 낭만적인 응답자로 창조된 아담과 하와가 맥없는 모방의 목소리로 답하지 않고(진정한 창조는 결코 모방일 수 없다), 찬양으로 고동치는 심장으로 화답하기를 원하신 것이다. 이 명령의 본질은 바로 예배로의 부르심이다.
구약 성경에 나타난 창조적 행위의 기록은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선한 방향이든 아니든 이후로도 계속 창조의 충동에 사로잡힌 인류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노아만큼 팔과 허리에 큰 통증을 느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한 그와 그 아들들이 비웃음거리였던 방주를 지으면서 수십 년 동안 받았던 만큼이나 많은 조롱을 받아 본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노아는 그때까지 한 번도 벌어지지 않은 상황을 대비해 엄청나고도 기이한 형태의 구조물을 지어 나갔다. 창세기 2:5∼6의 기록에 의하면 그 당시에는 홍수는커녕 가랑비 한 번 내린 적이 없었다. 창조적 과정에 직접 참여하기 위해 우리가 노아로부터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순종이라는 개념이 창조적 명령과 밀접한 관련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창세기 6:22을 통해 노아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모든 것을 그대로 준행했음을 알 수 있다. 노아의 능력이나 상상력, 그가 가진 상식과 자원을 뛰어넘어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의 명령이 구원의 방주를 현실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명령이 노아의 순종과 만났을 때, 그 결과는 구원으로 드러났다. 사실 하나님의 명령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그 명령은 값비싼 순종을 필요로 한다.
홍수가 지나간 후, 하나님은 노아와 그 가족들을 향해 새로운 창조 명령을 내리신다. 그들은 창조적인 반응으로 포도밭을 경작했으나 끝내는 파국을 가져오게 된다. 창조성을 남용한 것이다! 새 포도밭의 풍성한 수확 덕택에 노아는 만취 상태가 되었다. 어쩌면 방주를 짓는 것으로 그의 순종은 '완료되었다'고 잘못 추측했을 수도 있다. 아마 지나친 자축이 하나님을 잊게 했을지도 모른다. 창세기 11장에서 우리는 창조의 충동에 대한 또 다른 예, 바벨탑 사건에서도 인간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창조에 대한 충동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창조적인 공동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면이다. 다만 이 공동체에 속한 일단의 사람들은 순종이 동기가 되어 움직인 게 아니라 스스로의 이기적인 야망에 의해 행동하였다. 바벨탑은 그들 스스로 생각해 낸 것 같다. 그 동기는 자신들의 이름을 내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반응하거나 그분의 아름다움을 반영하는 일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역시 파국이었다. 인류는 나누이고 흩어졌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처음 만나는 하나님은 가까이 가기 두려운 우주의 입법자나 심판자가 아니라 예술가이시다. 창세기에서 말하는 바는 하나님이 마치 화가나 조각가처럼 매일 저녁 '창조'라는 캔버스에서 몇 발자국 물러나 그분의 작업을 감상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단 한마디로 "좋군!" 하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자신의 형상을 우리 삶의 구조 속에 엮어 놓으셨다. 우리 한계를 넘어서며 때론 이해하지도 못하는 것들을 창조하고자 하는 우리의 열정이 이로써 설명된다. 하나님은 시간 가운데 여백을 창조하도록 우리를 부르신다(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그분의 아름다움을 우러르며 그분을 경배하도록 하는 여백 말이다).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은 그분의 아름다움에 창조적인 예배로 응답할 수 있는 부르심을 허락하시되, 이 부르심은 순종과 불순종의 가능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응답은 바벨탑을 쌓은 이들처럼 우리 중심적이어서는 안 된다. 성경은 그 대가가 얼마나 비싼지를 보여주고 있다.
창조적 상상력의 회복분명 우리의 어릴 적 첫 기억은 창조적이며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첫 기억은 아기 침대에 누워서 모빌 연의 꼬리를 잡아당겨 얼굴에 부벼 대던 것이었다. 그는 하늘을 나는 방법을 연구하며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다양한 비행용 기구와 낙하 기구들은 물론 그의 놀라운 예술 작품들을 통해 그 연구는 매우 실질적으로 이루어졌다. 내가 이 책을 쓰기 전에, 또는 여러분이 이 책을 읽기 전에 이미 우리는 먼저 쓰거나 읽는 상상을 할 수 있어야만 한다. 실제로 아무도 자신이 상상해 보지 않은 일을 하는 경우는 없다.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는 냉수 한 잔 들이키는 것을 상상하고 바로 그렇게 한다. 우리는 무언가 할 일을 상상하고 나면 0.1초 후가 되든 10년 후가 되든 간에 그 일을 한다. 상상력은 우리가 행동하고 말하는 생활의 전 영역에 담겨 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상상력의 덩어리이다.
상상력은 마음과 생각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 둘을 통합하며 우리로 하여금 감성적인 마음을 사용해 생각하고 이해하도록 하고, 지적인 생각을 사용해서 느끼며 감정을 나타내게 한다. 이것은 진리로 이끌어주는 매체이다. 이목을 집중시키는 상징과 비유와 이야기와 역설을 사용해서 우리를 상호 작용 가운데로 이끌어 준다. 상상력은 하나님에 관한 진리들을 전달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상상력을 회복시키는 데 그토록 열심을 보이시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경적인 관점, 즉 그리스도 중심의 시각으로 상상력을 이해해야 한다.
상상력의 위력을 파악하는 또 다른 방법은 우리를 몹시도 괴롭히는 죄들이 바로 이 상상력을 통해 일어난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다. 탐욕은 내가 이웃의 물건을 훔칠 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물건을 내 것이라고 상상할 때부터 생긴다. 세상 죄악의 창조자인 사단은 이 상상력의 위력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 역시 음악과 은유와 영상을 자신의 음흉한 목적을 위해 사용한다.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를 회복시키시려 두루 찾으시는 것만큼 사단은 우리를 죄악 가운데 사로잡으려고 애쓰고 있다. 우리는 창조적이 되도록 부름받았기 때문에 상상력에 대해 실무적이고 실질적인 이해를 갖추는 것은 필수적이다. 이 상상력은 가장 강력한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가장 취약한 약점이 될 수도 있다. 때론 동시에 두 가지 모두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 상상력을 이용하는 것, 더 나아가 이 상상력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일은 아직까지 충분히 논의되거나 기도 제목이 된다거나 실행에 옮겨진 적이 없다. 그러나 상상력이 구속적으로 사용될 수 있으려면 먼저 상상력을 회개시켜야만 한다. 또한 예언서들을 통해 우리는 장차 그분의 아들을 통해 완성될 사역을 행하시며,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무언가를 행하기를 지금도 간절히 바라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그분이 우리의 상상력을 회복시키시고 우리를 제단 불꽃 위에 올려놓으신다.
가장 먼저 넘어야 할 걸림돌은 그들의 '예언자적 열정'이다. 우리는 소심한 아브라함과 남을 속이기 바빴던 야곱, 심지어 상사병에 시달렸던 솔로몬을 잘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사야의 열정이나 예레미야의 상한 심령은 도대체 어떤 것이란 말인가? 아마 가장 난해한 것은 예언자들이 이야기하는 방식일 것이다. 복잡한 상징들로 이루어진 그들의 환상과 이상야릇한 이미지들, 그리고 그들의 노래가 비유하는 바가 다 그렇다. 하나님이 예언서들을 통해 이 시대의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진정 무엇인가? 예언서들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예언자들이 회개치 않는 자들 위에 내릴 하늘의 불을 이야기할 때는 그저 가만히 앉아서 그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나 지켜본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우리는 우선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러서 회개시키고 그들의 삶을 즉시 변화시키려는 것이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품기 쉬운, 균형 잃고 건강치 못한 미래 예측에 대한 집착(그래서 예언 중심에 있는 회개와 각성의 부르심을 배제하는 것)은 예언의 핵심을 놓치게 만든다. 우리는 예언의 목적이 '앞을 내다보는' 데 있지 않고 '앞서 이야기하는' 데 있음을 완전히 다시 배워야 한다. 예언에서 미래를 내다보는 요소는 한 가지 수단일 뿐 그 목적은 아니다. 그러나 그 목적이 이렇듯 간단명료한데도 왜 그들은 굳이 돌려서 이야기하며, 그 많은 상징과 신비한 환상은 왜 있는 것인가? 간단히 하나님 당신의 능력을 보이셔서 무릎 꿇게 하거나 불을 내리시는 것이, 그 모든 예언자들의 기괴한 행동과 분노에 찬 소리보다 훨씬 효과적인 듯한데 말이다. 그러나 모세오경에서 보듯이 이 직접적인 계시들조차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궁극적으로 실패하지 않는가? 우리는 예언서들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의 현재 모습과 우리에게 기대할 수 있는 바 전부를 회복시키시기 위해 나서고 계심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단지 마음이나 생각뿐만 아니라 '마음의 생각'과 '생각의 마음', 즉 상상력을 회복시키기 원하신다는 뜻이다. 우리 마음의 눈을 열고, 귀를 기울여 진정 당신을 이해하기를 간곡히 부탁하신다. 이것이 바로 예언의 핵심이다. 우리의 상상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그런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