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땅에 쓰신 글씨

마이클 카드 지음 | IVP
분명 우리의 어릴 적 첫 기억은 창조적이며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첫 기억은 아기 침대에 누워서 모빌 연의 꼬리를 잡아당겨 얼굴에 부벼 대던 것이었다. 그는 하늘을 나는 방법을 연구하며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다양한 비행용 기구와 낙하 기구들은 물론 그의 놀라운 예술 작품들을 통해 그 연구는 매우 실질적으로 이루어졌다. 내가 이 책을 쓰기 전에, 또는 여러분이 이 책을 읽기 전에 이미 우리는 먼저 쓰거나 읽는 상상을 할 수 있어야만 한다. 실제로 아무도 자신이 상상해 보지 않은 일을 하는 경우는 없다.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는 냉수 한 잔 들이키는 것을 상상하고 바로 그렇게 한다. 우리는 무언가 할 일을 상상하고 나면 0.1초 후가 되든 10년 후가 되든 간에 그 일을 한다. 상상력은 우리가 행동하고 말하는 생활의 전 영역에 담겨 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상상력의 덩어리이다.



상상력은 마음과 생각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 둘을 통합하며 우리로 하여금 감성적인 마음을 사용해 생각하고 이해하도록 하고, 지적인 생각을 사용해서 느끼며 감정을 나타내게 한다. 이것은 진리로 이끌어주는 매체이다. 이목을 집중시키는 상징과 비유와 이야기와 역설을 사용해서 우리를 상호 작용 가운데로 이끌어 준다. 상상력은 하나님에 관한 진리들을 전달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상상력을 회복시키는 데 그토록 열심을 보이시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경적인 관점, 즉 그리스도 중심의 시각으로 상상력을 이해해야 한다.



상상력의 위력을 파악하는 또 다른 방법은 우리를 몹시도 괴롭히는 죄들이 바로 이 상상력을 통해 일어난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다. 탐욕은 내가 이웃의 물건을 훔칠 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물건을 내 것이라고 상상할 때부터 생긴다. 세상 죄악의 창조자인 사단은 이 상상력의 위력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 역시 음악과 은유와 영상을 자신의 음흉한 목적을 위해 사용한다.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를 회복시키시려 두루 찾으시는 것만큼 사단은 우리를 죄악 가운데 사로잡으려고 애쓰고 있다. 우리는 창조적이 되도록 부름받았기 때문에 상상력에 대해 실무적이고 실질적인 이해를 갖추는 것은 필수적이다. 이 상상력은 가장 강력한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가장 취약한 약점이 될 수도 있다. 때론 동시에 두 가지 모두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 상상력을 이용하는 것, 더 나아가 이 상상력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일은 아직까지 충분히 논의되거나 기도 제목이 된다거나 실행에 옮겨진 적이 없다. 그러나 상상력이 구속적으로 사용될 수 있으려면 먼저 상상력을 회개시켜야만 한다. 또한 예언서들을 통해 우리는 장차 그분의 아들을 통해 완성될 사역을 행하시며,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무언가를 행하기를 지금도 간절히 바라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그분이 우리의 상상력을 회복시키시고 우리를 제단 불꽃 위에 올려놓으신다.



가장 먼저 넘어야 할 걸림돌은 그들의 '예언자적 열정'이다. 우리는 소심한 아브라함과 남을 속이기 바빴던 야곱, 심지어 상사병에 시달렸던 솔로몬을 잘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사야의 열정이나 예레미야의 상한 심령은 도대체 어떤 것이란 말인가? 아마 가장 난해한 것은 예언자들이 이야기하는 방식일 것이다. 복잡한 상징들로 이루어진 그들의 환상과 이상야릇한 이미지들, 그리고 그들의 노래가 비유하는 바가 다 그렇다. 하나님이 예언서들을 통해 이 시대의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진정 무엇인가? 예언서들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예언자들이 회개치 않는 자들 위에 내릴 하늘의 불을 이야기할 때는 그저 가만히 앉아서 그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나 지켜본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우리는 우선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러서 회개시키고 그들의 삶을 즉시 변화시키려는 것이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품기 쉬운, 균형 잃고 건강치 못한 미래 예측에 대한 집착(그래서 예언 중심에 있는 회개와 각성의 부르심을 배제하는 것)은 예언의 핵심을 놓치게 만든다. 우리는 예언의 목적이 '앞을 내다보는' 데 있지 않고 '앞서 이야기하는' 데 있음을 완전히 다시 배워야 한다. 예언에서 미래를 내다보는 요소는 한 가지 수단일 뿐 그 목적은 아니다. 그러나 그 목적이 이렇듯 간단명료한데도 왜 그들은 굳이 돌려서 이야기하며, 그 많은 상징과 신비한 환상은 왜 있는 것인가? 간단히 하나님 당신의 능력을 보이셔서 무릎 꿇게 하거나 불을 내리시는 것이, 그 모든 예언자들의 기괴한 행동과 분노에 찬 소리보다 훨씬 효과적인 듯한데 말이다. 그러나 모세오경에서 보듯이 이 직접적인 계시들조차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궁극적으로 실패하지 않는가? 우리는 예언서들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의 현재 모습과 우리에게 기대할 수 있는 바 전부를 회복시키시기 위해 나서고 계심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단지 마음이나 생각뿐만 아니라 '마음의 생각'과 '생각의 마음', 즉 상상력을 회복시키기 원하신다는 뜻이다. 우리 마음의 눈을 열고, 귀를 기울여 진정 당신을 이해하기를 간곡히 부탁하신다. 이것이 바로 예언의 핵심이다. 우리의 상상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그런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공동체(community : cum - 함께, moenia - 성 쌓기)를 정의하면 방어벽이 있는 장소라는 뜻이다. 우리는 인종 간의 벽이나 남녀 사이의 벽 등 '벽을 허무는 것'에 대해 늘상 이야기하며, 분명 이런 장벽들은 무너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형제 자매들을 보호할 벽, 세속의 어떤 측면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벽을 쌓는 일이 필요하다. 이는 우리에게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말이자, 스가랴서에 의하면 우리에게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창조적 삶의 모범이시라면, 우리는 그분이 가장 심사숙고하셨던 일 중 하나가 공동체를 창조하시는 일이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사실 그분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세 개의 공동체를 창조하셨다:



첫째, 신중하게 선택하신 열두 제자가 있었다. 이 그룹은 전위 부대였다. 그들은 '복음'을 전파하는 권위를 부여받은 이들이었다. 열두 제자들은 바로 이 작은 공동체에서 서로 주고받는 가운데 자신들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물론 대부분 예수님과의 상호 작용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지만, 동시에 그들 사이의 부딪힘과 깨짐, 즉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과정"을 통해서 변화되기도 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신비를 그들 안에서 드러내고, 서로 다가가서 상대방의 신비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했을 때, 그들은 이 공동체라는 환경 속에서 그들의 창조적 능력에 대한 도전을 발견했다.



둘째, 예수님과 '대들보' 같은 세 제자들, 즉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 간에는 더욱 친밀한 수준의 공동체가 존재했다. 예수님이 그분의 진정한 성품의 심오한 면들을 드러내 보이신 것도 이 제자들에게였다. 이 세 제자가 예수님의 관심을 더 받은 이유는 더 신실하다거나 명석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관심이 더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입을 열기만 하면 시종일관 틀린 것을 말하고 잘못을 저질렀다. 그럼에도 그들의 연약함 속에 깊은 교훈이 있다. 바로 우리의 타고난 재능이나 혹은 그 재능의 부족함이 주님과 우리와의 친밀함이나 우리가 그분께 과연 쓸모있는 사람인지 여부를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분의 은혜로운 선택에 달려 있다. 우리 공동체의 강함은 우리 공동의 연약함으로부터 나오고, 이 연약함은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강건하고 창조적으로 만들어진다.



셋째, 이 공동체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 '칠십 인'인데, 누가만이 이 그룹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눅 10:1∼4). 다소 큰 이 '제자들'의 무리는 예수님이 정해진 지역에 다다르시기 전에 길을 닦는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그 분이 도착하실 때마다 어떻게 그리 자주 수많은 군중이 그분의 말씀을 들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를 설명해준다. 그분의 사역의 상황을 감안하면, 이처럼 많은 수의 남자들과 역시 그 정도로 많았을 여인들이 예수님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공동체를 창조하시고 유지하시고 활용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았다. 공동체는 그분의 인격과 사역을 지탱하는 힘이었다. 그리고 공동체는 그분이 건설하시겠노라 말씀하셨던 우주적 교회의 기초를 제공했다.창조적 공동체를 위한 모델을 한 가지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이를 일단 '언약 예술인 연합'(Covenant Artist Allicance)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언약 예술인 연합'의 목적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① 진정한 공동체를 위한 체계를 제공한다.

② 예술인들과 그들을 지원하는 전문가들이 믿고 맡길 수 있는 언약,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들을 목적과 비전에서 하나로 묶는 언약을 제공한다.

③ 공동체를 위한 일련의 강의와 공개 토론회를 널리 지원한다.

④ 언약 회원들을 위한 수련 센터를 제공한다.

⑤ 공동체에 예술인들과 전문가들을 배치해서 매일 매일의 창조 '사업' 속에 언약의 정신이 드러날 수 있게 한다.



이 연합의 구조는 이중으로 되어 있다. 중심에는 언약 예술인 그룹들, 아마도 4∼5명의 회원들로 규모가 제한된 그룹들이 있게 될 것이다. 이 그룹들은 세 가지 기본적인 형태로 제자 훈련에 그들 자신을 헌신할 것이다. 젊은이들을 훈련하고, 동료들과 나란히 걷고, 연장자와 멘토링 관계를 맺는 것이다(디모데와 바울과 바나바가 그 모델이다). 이 그룹 곁에는 협력 회원들이 있을 것이다. 이들은 예술인들을 위해 일하는 주요 전문인들이다. 이 그룹을 연합에 포함시키는 것이 두 가지 이유에서 좋다. 첫째, 사실 이들이 지닌 실무적인 은사들이 예술인이 제대로 일할 수 있도록 해주지만, 종종 이들은 예술인들의 공동체에서 제외되어서 마치 '이등 시민'인 양 스스로 느끼게 되고 만다. 하지만 그들은 경험을 통해 나눠줄 수 있는 것이 참 많다. 그래서 그들을 포함시키기 때문에 그 조직이 연합이라고 불릴 수 있다. 둘째, 연합된 전문인들의 존재가 협력 분위기를 조성해 줄 것이다. 모든 이들이 창작, 연주, 제작, 홍보, 유통 등 자신의 서로 다른 은사들을 모두 함께 결합시키는 모습은 철저히 성경적인 것이다. 그 목적은 이윤 추구가 아니라 그 공동체를 강화하고 심화시키는 데 있다.잠시 후면 그분은 체포되실 것이다. 몇 시간 후면 그분은 돌아가실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위축되거나 숨지 않으시는 예수님을 보게 된다. 그분은 골고다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떨어진 베다니로 향하시어 나환자 시몬이라고만 알려진 사람의 집으로 가신다. 처음에는 아무도 그 여인을 주목하지 않았다. 그녀는 옆문으로 살며시 들어왔다. 식사가 한창일 때, 그녀는 예수님 뒤편으로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왔고 거기서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음 순간, 겉옷 자락에서 하얀 옥합을 꺼내었다. 그녀는 예수님 옆으로 다가가서, 말 한마디 없이 그분의 머리에 값비싼 향유를 천천히 붓기 시작했다. 그녀만의 방식이었다. 뜻밖의 행동이었다. 모두를 노하게 했다. 제자들은 흙바닥에 쏟아버린 1년치 품삯 어치의 향유가 엄청난 낭비로 보여 화가 났다. 그들이라면 '그 돈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양식을 주는 등 무언가 더 실제적인 일을 할 수 있었을 텐데'하고 말이다. 잊지 못할 그 날 저녁, 이름없는 한 여인이 행한 일은 시간 속에 여백을 만든 것이었다.



그 여백 안에서 그녀가 행한 바 그 사랑의 고요함에 귀기울인 이는 오직 한 분 예수님이셨다. 그분은 평소에 좀처럼 사용하시지 않던 단어로, 우리가 창조성과 예술과 상상력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그 절대 중심에 있는 단어로 "저가 내게 '아름다운' 일을 행하였도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그녀는 무엇을 행했는가? 그녀는 그분에게 무언가를, 향유보다 한없이 귀중한 무언가를 드렸다. 그녀는 그녀 자신을 드리기 위해 창조적이고 상상력 넘치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이는 예수님이 이해받지 못한 채 철저히 홀로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즉 적어도 한 사람만큼은 그분이 곧 돌아가실 것에 관해 말씀하신 바가 무엇인지를 들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방법이었다. 결국 그녀는 그녀의 사랑을 최대한 나타내 보였다. 그 여인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선물 그 이상의 줄 것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가진 창조성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아름다운 표현은 우리 자신을 드리는 방법을 발견하는 것이다.

선물은 놀라운 것이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는 과정은 그것이 친구를 위한 시 한편이든 세계를 일주하는 거대한 전람회이든 간에 관계된 모든 이들에게 짜릿한 경험이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 이상을 주기 위해 부름받았다. 우리가 고백하는 바대로 예수님이 진정 우리의 모범이자 본보기시라면 우리도 그분처럼, 그리고 그분을 위해 다른 이들에게 우리 자신을 내어줄 새롭고도 창조적인 방법을 지속적으로 찾아나서야 한다. 그것이 참된 창조성이다. 우리 주위에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언제나, 우리가 재능과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시비를 거는 우둔하고도 침울한 집단이 존재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동참'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소수의 사람들은 우리의 세계가 단지 보이는 세계만이 아님을 깨닫기 시작한다. 이 모든 일이 그리고 무한히 더 많은 일들이 머지않아 단번에 일어난다. 들음, 귀기울임, 느낌, 이해함에서 모두 동시에 말이다. 그리고 그 일들이 일어나는 동안 내내, 우리는 흙 위에 끄적거린다."어느 것 하나 똑같지 않은, 창 위에 낀 성에 각양 무늬들로 창틀을 채우네. 움직임으로 간직되고 타오름으로 얼어붙네. 그 무늬들 안에 그분의 이름이 있는가? 우리는 왜 아름다 움을 갈망하는가?"

- 짐 크로거트(Jim Croegaert)의 노랫말 중에서초대교회 성도들은 '카르멘 크리스티'(Carmen Christi, 라틴어로 '그리스도를 향한 찬송')를 통해 예수님이 "자기를 비우셨다."고 노래했다. 예수님의 겸손만큼 그분의 생애 가운데 확연히 구별되는 성품이 또 있을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실 수 있음에도 예수님은 겸손한 종이 되기를 택하셨다.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들이 얼마나 겸손하고 꾸밈없으며 기적답지 않게 이루어졌는지 주목해 본 적이 있는가? 예수님은 이적을 베푸실 때마다 그분에게로 집중되는 관심이 늘 하나님을 향하도록 돌려 놓으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이끌어내셨다. "아버지를 떠나서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고, 그럼으로 인해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이끌어내신 것이다. 진정한 성경적 겸손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진리를 깨닫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오직 그분과의 관계만이 진정한 겸손을 가져다줄 수 있다. 중세의 미술가들은 자기 작품에 서명을 하지 않았다. 그런 일은 결코 없었다. 그들에게 예술은 은사였고, 그들 자신보다는 그 재능을 부여하신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 자신은 주의 영광을 위해 신성한 과업을 맡게 된, 위대하신 왕의 자녀들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의 정체를 안다는 것은 이 겸손한 감추어짐이다. 이는 실로 우리의 소유로 보이는 타고난 소질들이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믿음이다. 또한 그 재능을 부여하신 목적이 우리 스스로 주목받거나 칭찬받기 위해서가 아니요, 애초에 그 은사를 주신 한 분에게 우리의 할 수 있는 바 최대의 창조적인 노력으로 감사를 표현하기 위함임을 믿는 것이다.순종 : 부르심창조적 상상력의 회복창조성의 특징



겸손 : 감추어짐의 은사섬김 : 대야와 수건지금껏 우리는 예수님이 흙 위에 무슨 말씀을 두 번씩이나 끄적이셨는지에 관해 아는 바가 전무하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