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직접 만나라
스킵 하이지그 지음 | 가이드포스트
우리의 문화 속에서는 행복을 찾는 것이 일종의 강박증이 되어 가고 있다. 생명과 자유와 행복추구권은 너무도 성스러운 것이어서 헌법에까지 명시되어 있지만, 행복은 결코 끝이 없는 추구이다. 행복을 잘못된 곳에서 찾으려고 할 때는 특히 그렇다. 사마리아의 옛 도시인 수가성의 우물가에도 온갖 잘못된 곳에서 행복을 찾아 헤매던 한 여인이 있었다. 이 여인은 인생이 평탄치 못했다. 그녀의 과거는 실패한 관계의 파편들로 얼룩져 있었다. 한 번씩 이혼할 때마다 그녀의 꿈은 조금씩 더 깨졌을 것이고 쓰라림도 점점 더 깊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매번 쓰라림을 경험할 때마다 불신감도 커졌으리라.
이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러 우물에 왔을 때 한 유대 남자가 우물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마음 상태가 어떠했을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유대인은 여행을 할 때 사마리아 땅은 밟지도 않을 정도로 사마리아인들을 저주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몰랐던 것이 있었다. 바로 오늘 우물에 물 길러 온 발걸음은 거룩한 선약이었다는 사실. 거기 있는 남자는 바로 그 시간에, 바로 그 장소에 오기 위해서 일부러 먼 길을 돌아온 것이었다. 예수님은 정중한 요청으로 이 상호작용의 주도권을 잡으셨다. "물을 좀 달라(요 4 : 7)." 이 말은 그저 서로의 무장을 풀고 대화를 끌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다가간 예수님을 맞이한 것은 회의주의였다. "어찌하여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예수님은 좀더 깊이 파고들어 소망이라는 신경을 건드리신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다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요 4 : 10)."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 : 13∼14)." 그러나 이 말씀에 반응하는 이 여인의 목소리에는 영적인 갈증과 현실적인 비관주의가 뒤섞여 있는 듯하다.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그녀의 말이 고통으로 가득한 인생을 표현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과거 경험들이 영적인 감수성을 둔하게 만들었다. 이제 좀 더 개인적으로 접근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 명사수처럼 예수님은 그녀 개인의 삶을 겨냥한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단 한 마디 말로 그녀의 전 인생이 이 이방인 앞에 발가벗겨졌다. 그분은 죄악과 상처의 해골들이 쌓여 있는, 그녀가 꼭꼭 잠궈 버린 벽장문을 열어 버렸다. 왜 예수님은 이런 행동을 하셨을까? 깊은 상처를 덮고 있는 딱지를 왜 떼어내는가?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그녀가 받아 마시고 누리기 위해서는, 먼
저 자신의 갈증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갑자기 그녀의 태도가 변했다. 그녀는 존경을 표하면서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잠시 후 그녀는 예수님을 좀 더 시험한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것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이 질문은 어느 성전이 진짜냐 하는 것이었다. 이런 질문은 잠정적으로 분열을 유발할 수 있었고, 따라서 대화를 끝장내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과 진리를 균형 있게 종합하면서, 지역성은 부적절하며 성전 자체도 불필요해질 것이라고 설명하신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 : 21∼24)."
이제 이 여인은 예수님과 영적인 진리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자세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가장 깊은 소망을 피력했다.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그녀의 이 말은 하나님의 개입을 꿈꾸는 믿음의 선언이었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예수님은 자신을 그녀에게 한 켜씩 벗겨 보여 주셨고, 결국 그분이 누구신지 깨닫게 해 주셨다.
예수님과의 만남에 대한 이 여인의 반응은 아주 극적이다. 그녀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마침내 깨닫게 되자, 자기가 경험한 것을 말해 주려고 동네 사람들에게로 달려갔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것은 그곳 전 지역에서 일어날 뭔가 놀라운 일의 시작이었다. 그녀의 변화는 더 큰 변화들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이천 년 전 중동 땅의 한 우물가에서 어떤 천한 여인에게 일어났던 이 이야기가 당신과 나에게 어떤 관련이 있는가? 우리는 모두 '사연 보따리'가 있다. 그 보따리 속에는 현재의 우리를 만들어 낸 경험들과 꿈, 계획과 성공, 그리고 실패들이 가득 들어 있다. 그것들이 당신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하려면, 과거를 솔직하게 직면하고 그 과거를 당신에게 유익하게 활용하라.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의 일상 생활의 맥락 속에서 다가오신 것처럼 현재 당신이 처한 자리에서 당신을 만나실 것이며, 또한 당신이 처해 있는 지금의 그 장소에서 당신을 사용하실 것이다.
영국의 전도자인 집시 스미스는 어떻게 부흥을 일으키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집으로 가서 당신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당신 주변에 둥그런 원을 그리세요. 그리고 그 원 안에서부터 부흥이 시작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세요. 하나님이 당신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순간부터 부흥은 시작될 것입니다."신약 성경의 몇몇 구절들은 예수님의 인격과 그분의 능력을 직접 만난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예수님이 손마른 자의 근육을 회복시켜 주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경이로움에 사로잡혔고, 소경의 시력을 회복시키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단지 고침 받은 육신과 메시아적인 증거 그 이상을 보았다. 그들은 인간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보았던 것이다. 그들의 활동 무대로 발을 들여놓으시고 그들의 일상적인 삶에 관심을 갖고 계신 창조주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능력 있는 어루만짐이 가장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예수님을 찾아온 무력한 문둥병자였다. 역사학자였던 요세푸스는 기록하기를, 그 당시 문둥병자들은 죽은 사람처럼 혹은 추방당한 범죄자들처럼 사회에서 완전히 분리되었다 그는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마치고 언덕을 내려가고 있는 절대절명의 순간, 떼 지어 몰려든 사람들 무리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 앞에 놓여졌다. 만지면 안 되는 이 문둥병자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접근하실 것인가? 예수님은 그 사람 때문에 멈춰 섰다. 그리고 자기 앞에 엎드려 있는 이 찌그러진 남자에게 온전히 관심을 쏟으셨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마 8 : 2)." 이 말은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에 대한 순전한 확신을 표현한 말이었다. 그에게 문제는 예수님의 능력 여부가 아니라, 예수님의 뜻이었다.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은 치유해 주셨지만, 자기도 하나님의 거룩한 뜻 속에 포함되어 있는지에 대해서 이 문둥병자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것을 당연시할 수 없었다. 오로지 예수님의 권위 있는 의지에 자신을 내맡겼다. 예수님은 "민망히 여기셨다." 그리고 나서 모든 사람이 놀라서 숨이 막힐 만한 행동을 하셨다. 손을 내밀어서 그 사람을 만지신 것이었다. "내가 원하노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 사람의 필요를 채워 주고 싶은 열망을 보여 준다. 치유의 능력은 예수님의 의지와 그분의 말씀 속에 있었다.
모세의 율법은 문둥병자를 만지는 것을 금하고 있었다. 그러나 치유는 즉각적이었고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만지신 시점에 그는 이미 문둥병자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율법을 범한 것은 없었다. 예수님의 만지심은 치유의 어루만짐인 동시에 또한 회복의 어루만짐이었다. 이 뒤틀린 사람이 변화되는 순간 얼마나 놀라운 광경이 무리들의 눈앞에 펼쳐졌겠는가! 예수님의 만지심은 깊은 애정을 나타내는 보살핌의 어루만짐이었다. 예수님은 잠시도 주저하지 않으셨다. 이 즉각적인 반응. 그것은 바로 인간을 보살피시는 그분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얼마나 눈에 선한 정경인가!
이 순간의 경이로움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무게 있는 명령 때문에 약간 무색해진다.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마 8 : 4)." 이 사람은 성경의 규정을 따라야 했다. 그는 먼저 성전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고 이 사건이 진실로 기적적인 치유임을 인정받을 필요가 있었다. 이 절차를 지킴으로써 예수님은 자신이 모세의 율법에 충실하다는 것을 증명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삶 속에도 기꺼이 들어가시길 원하신다. 당신의 고통을 어루만지길 원하신다. 예수님은 이 병든 사람이 스스로에 대해 자신은 저주받은 자가 아니라 사랑받는 자임을 깨닫기를 바라셨다. 그것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임을. 타락 이후로 고통은 인간의 삶에 일부가 되어 버렸다. 누구나 고난을 겪는다. 심지어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들도 예외는 아니다. 고통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그런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와 그 고통을 직접 다루시는 예수님을 보게 된다. 예수님은 도망가지 않으셨다. 그분은 이 사람의 눈동자를 직시하면서 그의 필요에 맞게 사역하셨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의 삶 속에서도 고통을 피하려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인간의 육신을 입으셨으며, 잔인한 고문 도구인 로마의 십자가형이라는 엄청난 고통을 당하셨다.
『두려울 만큼 경이롭게 만들어진 존재』라는 책에서 의사이자 작가인 폴 브랜드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신체적 접촉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재고하고 있다. "나는 가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인간의 육체를 입고 계셨던 동안에 어떻게 행동하셨는지를 되새겨 본다. 그분은 손을 내밀어 눈 먼 자의 눈을 만져 주시고, 문둥병자의 피부를 만져 주셨으며, 절름발이의 다리를 만져 주셨다. 그분이 만지시면 능력이 전달되었다. 예수님의 능력 정도면 마술 지팡이로 한 번만 휘둘러도 됐을 텐데. 사실 지팡이를 휘두르면 손으로 만지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을 텐데. 또한 예수님은 무리들을 비슷한 집단별로 나누어서 조직적으로 기적을 행하실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그분은 그런 방법을 택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분의 사랑과 따스함과, 그리고 그들과 완전히 한 마음이 되어 주심을 느끼길 바라셨다. 예수님은 일단의 무리를 상대로 쉽게 자신의 사랑을 보여 줄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대체로 사랑은 어루만짐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고난당하는 인간에게 한 걸음 가까이 오셔서 얼굴을 맞대고 만나 보기를 원하신다. 하지만 예수님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도 예수님을 만나기 원해야 하며, 그분의 능력과 사랑을 얼굴을 맞대고 접해 보기를 원해야 한다. 육체적인 고통은 사람을 자기에게만 몰두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접근한 방식을 보면, 그것은 자기의 고통을 경감시켜 달라는 요청이 아니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며 예배의 행동을 취했다. 그는 축복이 오기도 전에 예배를 드렸다. 예배란 하나님이 해 주신 것에 대해서보다는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해서 우리가 보이는 반응이다. 하나님은 그 본성 자체로 예배받으실 분이시다.
예수님은 지상에 계시는 동안에 많은 능력을 행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치유를 받았다. 그러나 예수님 사후에 사도들이 어린 시절부터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던 한 앉은뱅이와 맞닥뜨렸던 것으로 보아 모든 사람이 다 치유받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이 사람을 고쳐 주시지 않고 남겨두셨는가? 여기서 요점은 바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 나오는 문둥병자는 이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겸손하게 예수님의 의지에 맡겨 드렸다.
회복의 하나님께서는 이 소외된 한 사람을 어루만지사 그를 열정적인 전도자로 만드셨다. 당신도 스스로를 소외된 자로 여기고 있을 수 있다. 이제 예수님을 당신의 그 고통스러운 장소로 들어오시게 하라. 그분이 당신을 개인적으로 보살피신다는 사실에 안심하라. 그분이 당신을 인격적으로 보살피시도록 내어드려라. 가장 좋은 출발점은 지금 당장 잠시 멈추어서 그분을 예배하는 것이다. 고통 중에도 당신에게 가장 힘을 주는 장소는, 바로 당신이 하나님 앞에 절하며 그분을 예배하는 곳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이 사람에 대해 우리는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이 사람이 상당히 고위층이었다고 믿고 있다. 아마도 당시 헤롯 안티파스의 궁정 조신이나 왕의 사무관이었을 것으로 믿고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핵심에 들어가 보면, 그보다는 아주 처절한 아버지로 등장하고 있다. 헤롯이 디베랴를 왕족이 사는 마을로 전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람은 원래 디베랴에서 사는 사람이었음이 틀림없다. 죽음이 임박한 그의 아들을 싣고 디베랴에서 갈릴리 가버나움으로 왔던 것이다. 예수님은 초기에 가버나움을 기지로 삼고 활동하셨으므로 그곳에 가면 예수님을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신하가 도착했을 때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안 계셨다. 남서쪽에 있는 가나로 가셨던 것이다. 이때쯤 이 사람의 아들은 더 이상 여행을 하기가 힘들 정도로 아팠을 것이다. 그래서 아들을 가버나움에 놔둔 채, 이 정부 고관은 처절한 마음으로 가나를 향해 출발했을 것이다. 도보로 40km 거리를 말이다. 그는 예수님만 찾아다녔다. 예수님이 계신 곳 외에는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처한 상황은 절망적으로 보였다. 그의 아들은 소망이 거의 없었고, 그는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든지 아들의 병을 고치는 것에만 온통 마음이 쏠려 있었다. 이 시점까지 예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은 그저 얄팍하고 세속적인 수준이었다.
그는 예수님을 발견하자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라고 말한다. 이 말 속에는 상당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이 간곡한 부탁에는 절망이 스며 있다. 아들이 생사의 기로에서 헤매고 있는 상황은 쓰라린 경험이었으리라. 믿음의 근육을 견고히 세우는 3단계 훈련이 시작되는 시점도 바로 이 시점이다.
이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그는 가장 초보적인 1단계 믿음, 즉 능력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예수님은 이것을 감지하셨다. 그래서 첫 마디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였다. 사람들은 믿기 전에 먼저 거창한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싶어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2단계로 약속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셨다. 이 신하의 유약하고 초보적인 믿음을 취해서 좀 더 강인한 믿음으로 이끄신 것이다. 이 사람은 의기소침해지지 않고 더 강하게 요구했다.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더 높은 분의 능력에 대한 처절한 믿음을 가진 이 사람은 이제 생명을 구할 능력이 있는 예수님과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신하가 좀 더 깊은 영적 현실을 깨닫게 되길 바라셨다. 이 얼마나 절묘한 그림인가. 죽어 가는 아들의 아버지가, 죽기 위해 아버지로부터 보냄 받은 아들 앞에 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