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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포스터 지음 | 규장문화사
1부 단순한 삶의 기반



우리가 단순성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중심 개념은 철저한 의존이다. 우리는 독립적 존재 가 아니며 자립 능력이 없다. 우리의 존재와 소유는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단순성이란 의존의 자세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어린 아이처럼 신뢰의 영으로 살아가 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것은 선물로 받은 것이다.

1장 은혜와 훈련으로 되는 단순한 삶



"단순성을 구하라. 그런 다음 그것을 믿지 말라." - Alfred North Whitehead

현대 문화는 소유욕으로 병들어 있다. 부에 대한 욕심은 삶의 진실과는 동떨어진 정신질환이 되고 말았다. 현대세계의 속도와 복잡한 삶은 우리를 삼킬 듯 위협한다. 살벌한 경쟁에서 탈출구란 없어 보인다. 이 때 기독교적 단순성은 현대의 이 열병에서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 기독교적 단순성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소명이다. 단순성의 증거는 성경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가장 완벽하게 예시되어 있다. 기독교적 단순성이 단지 현대의 위기에 대한 반응 이상임을 강조함과 동시에 세상의 거대한 문제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도 강조해야 한다. 기아를 비롯한 수많은 사회 부조리에 대처할 수 있는 행동전략 개발의 기초가 되는 것이 바로 단순성의 훈련이다.

단순성이 현대의 딜레마에 답을 제시하긴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답이 아니다. 단순성과 단순논리를 절대 혼동해서는 안 된다. 독단적인 사람은 단순성 안의 다양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두 마음을 품은 자는 복잡성 안의 단순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즉 '단순성의 복잡성'(complexity of simplicity) 이라는 역설이다. 단순성에 대한 기독교 가르침의 핵심에 역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은 곧잘 역설로 표현되곤 했다. 목숨을 얻는 길은 곧 목숨을 잃는 것이다(마 10:39), 우리는 줌으로써 받는다(눅 6:38), 평화의 왕 예수께서 분열의 검을 주러 오셨다(마 10:34) 등. 물론 역설이란 외관상의 모순일 뿐이다. 역설의 진리는 두 가지 상반된 가르침 사이에 긴장을 유지함으로써 발견될 때가 많다. 두 가르침에 모두 진리의 요소가 들어 있긴 하지만, 다른 쪽을 배제하고 한쪽을 강조하는 순간 진리는 왜곡되고 변형된다. 예컨대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하면 우리는 모종의 범신론에 빠진다. 반면 초월성을 강조하면 우리에게 남는 하나님은 '태엽만 감아 놓은 채' 초연하고 무관심한 신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중추적인 역설은 단순성이 은혜이자 영적 훈련이라는 점이다. 단순성이 은혜인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이다. 단순성은 부지중에 찾아온다. 새로운 경이감과 집중력과 깊이가 어느 새 우리 성품 속에 흘러들어 자연스럽게 생활방식이 바뀐다. 단순성은 또한 영적 훈련이다. 단순성에는 개인생활과 단체생활 모두 의식적으로 선택된 행동노선이 동반된다. 우리는 '훈련된 은혜'에 관해 말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믿음과 행위의 공생관계에 바탕이 되는 심오한 실체도 바로 그것이 아니던가? 우리의 구원은 '솔라 피데'(sola fide), 즉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지지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복음의 실체는 순전히 은혜로 오지만 거기에는 영적 훈련의 궤적이 담겨 있어야 한다.

두 번째 역설은 기독교적 단순성이 쉽고도 어렵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모든 은혜가 일단 우리 삶 가운데 들어와 습관으로 굳어지면 쉽다. 그러나 그전까지는 어렵다. 괴로울 정도로 어렵다.

균형을 지켜야 할 세 번째 긴장은 단순성의 내면적 차원과 외면적 차원에 있다. 단순성은 외면의 생활방식으로 나타나는 내면의 실체다. 둘 다 있어야 한다. 단순성이 외형만의 문제라면 우리는 신바리새주의로 기울기 쉽다. 매사에 딱 부러지는 그 접근법은 모두가 알다시피 속박과 죽음이다. 의문(儀文)은 죽인다. 성령만이 생명을 주신다. 복음의 단순성은 자유와 해방을 준다. 단순성의 외적 표현은 내적 자원에서 흘러나와야 한다. 그러나 생활방식에 깊은 영향을 주지 않고도 내면에 단순성의 실체를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이다.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성령의 삶'(신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단순성의 네 번째 역설은 물질의 선함과 한계를 동시에 인정하는 것이다. 물질세계는 선하지만 그것은 제한적인 선(善)이다. 창조 질서의 선함을 부인한다면 금욕주의자가 된다. 창조 질서의 한계를 부인한다면 물질주의자가 된다. 기독교 신앙은 물질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누리도록 내려주신 창조된 재화로 본다. 오늘날 인간사회의 불행도 단순히 물질의 공급 부족에서 비롯될 때가 많다. 그런데 사람들이 물질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할 때에도 불행은 생겨난다. 물질은 삶의 필수 요소지만 절대로 유일한 요소는 아니며 가장 중요한 요소는 더더욱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적 단순성이 단순논리식 해답을 안겨주지 않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지금까지 몇 가지 함정을 훑어봤지만 가장 위험한 영역은 바로 단순성이 기독교 신앙 전반과 독립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단순성은 모든 영적 훈련 중 가장 외형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변질의 소지도 가장 높다. 단순성은 기독교 신앙 전체에 통합되어 있다. 뭔가 크고 포괄적인 것 가운데 한 부분일 뿐이다. 따라서 단순성은 전체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예컨대 단순성과 기도 사이에는 본질적인 관계가 있다. 기도의 핵심부인 신뢰와는 특히 더 그렇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우리는 기도함으로써 염려에서 벗어나게 된다. 기도는 신뢰를 가르쳐 준다. 그 결과는 평안이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 이처럼 기도와 단순성은 맞물려 있다.

마찬가지로 단순성과 고독도 서로 연관되어 있다. 고독이란 칭찬과 인정이라는 집요한 욕구에서 벗어난, 주로 내면의 단일성을 일컫는 말로 고독을 통해 우리는 진정 홀로 설 수 있다. 단순성이 얼마나 고독과 밀접한 지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좀더 단순한 생활방식을 구하려는 순간 흉측한 몰골이 드러난다. 전에는 부유해 보이려는 욕구에 지배되던 우리가 이제 청빈해 보이는 욕구에 지배된다. 페네롱의 말이 우리의 이런 씨름을 확증해 준다. "이 사람들은 성실하지만 단순하지 않다."

기독교의 모든 영적 훈련이 다 마찬가지다. 거기서 단순성을 떼어내면 단순성은 본연의 모습이 아닌 다른 것으로 변질된다. 연구를 위한 목적으로 영적 생활의 한 측면을 따로 떼어내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단 언제나 다시 전체로 돌아와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감춰진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은 하나의 통일체요, 이음새 없는 옷이다. 이것이야말로 단순성의 본질이자 삶의 복잡성의 원인이다.

2장 하나님이 보여주신 단순한 삶



"내 하나님이 아닌 모든 부는 내게 빈곤이다." - St. Augustine



단순성은 구약계시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그 계시를 통해 하나님은 당신이 어떤 분이며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여주셨다. 출발점은 창조기사다. 그 분은 창조 사역의 정점에서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 이 감격스런 기사의 핵심 교훈은 온 피조물이 하나님께 철저히 의존했다는 점이다. 단순성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중심 개념도 바로 이 철저한 의존이다. 우리의 존재와 소유는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 영혼의 대장도, 운명의 주인도 아니다. 개인적인 자존감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데 있다. 타락의 끔찍한 실체는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의존성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단순성이란 의존의 자세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어린아이처럼 신뢰의 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구약에서 얻는 단순성의 첫 번째 통찰이 철저한 의존이라면, 두 번째 통찰은 철저한 순종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은 순종했다. 이 '거룩한 순종'이야말로 단순한 삶이 흐르는 도관이다. 안식일에 쉬라고 명한 제4계명이 끝없이 앞서 가려는 우리의 욕심에 얼마나 정면으로 위배되는지 보라.

구약의 증거의 두드러진 특징은 후하신 하나님이 그 자녀들에게 아낌없이 주신다는 데 있다.(창12:1∼7, 26:12∼14, 신 7:13, 암 9:13∼15, 말 3:10 등)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물질적인 복의 약속이 조건적인 약속임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백지수표가 아니다. 조건이 있다.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사1:19) 순종과 축복의 연관성은 정말 중요하다. 그러나 그 주된 의미는 옳은 일을 했으니 보상받는다는 개념이 아니다. 그런 면도 있지만 그것은 부차적인 면이요, 어리석은 수준이다. "순종의 좀더 깊은 실체는 그것이 우리 안에 역사하는 영에 있다." 그것은 욕심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는 영이다. 긍휼과 나눔의 영이다. 민감함과 신뢰의 영이다. 일단 이 내면의 성향이 우리 성품에 배어들면 물질적인 복은 우리를 해치지 못한다. 물질의 축복을 강조하는 구약을 이해하는 데 또 한가지 중요한 요인은 약속된 공급은 거의 예외 없이 개인이 아닌 공동체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나라, 지파, 일가족의 유익에 강조점이 있었다.

십일조 관련 규정에서 우리는 무력하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언제나 단순성의 중요한 요소다. 특별히 3년마다 십일조를 한 데 모아 자력으로 살아갈 수 없는 이들을 위해 쓰도록 했다. "매 삼년 끝에 … 십분 일을 다 내어 … 레위인과 …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신 14:28∼29) 현대의 사회상을 감안하여 오늘 우리 곁에도 당시의 레위인, 나그네, 고아, 과부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없는지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만약 있다면 우리들에게 그들의 필요를 채워줄 책임이 있지 않을까? 관대함의 원리를 이해할 때에 우리는 족장 아브라함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 그는 큰 부(富)를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부를 쌓아두지 않았다. 오히려 씨족들과 아낌없이 나누었다. 사실 아브라함은 소유에 대해 남달리 단순하고 초연한 태도를 보였다. 롯의 탐심으로 분쟁이 생겼을 때 아브라함은 글자 그대로 롯에게 땅 선택권을 주었다(창 13:5∼12). 거저 받은 자답게 그는 거저 주었다.

공의의 사명은 구약을 관통하며 울려 퍼지는 위대한 주제 중 하나다. '미쉬파트'(mishpat)라는 히브리어를 통해 이 공의의 사명의 속뜻을 살필 수 있다. 법률 용어이자 윤리적·종교적 의미까지 함축하고 있는 미쉬파트에는 엄격한 법적 공의를 능가하는 도덕이 내포된다. 선한 관습이나 기존 관행을 준수한다는 의미와 특별히 땅의 평등한 분배를 실천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선지자들은 뻔뻔스레 공의를 외면하는 자들에게 가차없는 비난을 퍼부었다. 아모스의 통렬한 비난은 끝없이 이어진다. 아모스서 전체에 이런 책망이 메아리친다.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암 2:6)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생활수준을 높이려는 욕심으로 "가난한 자를 학대하며 궁핍한 자를 압제하는"(암 4:1) 여자들을 질책한다. 그 당시 뇌물은 관례였고, 진실을 밝히는 정의로운 재판관들은 멸시를 받았다(암 5:10,12). 그러니 아모스가 "오직 공법(공의)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지로다"(암5:24)라고 부르짖은 것도 당연한 일 아닌가?

긍휼의 주제는 구약 전반에 배어 있으며 신학적 의미가 풍부한 '헤세드'(hesed)라는 단어에 생생히 나타난다. 헤세드는 대개 '인자'나 '자비'로 옮겨지는데 헤세드에는 인내나 충성의 개념도 들어 있다. 이 말은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확고부동한 긍휼'을 지칭할 때 가장 빈번히 사용된다. 호세아를 통해 하나님은 이렇게 선포하신다. "나는 인애(헤세드)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놀라운 것은 성경기자들이 미쉬파트의 공의와 헤세드의 긍휼을 하나로 결합시킨다는 점이다. 구약을 통틀어 우리 사명을 가장 통찰력 있게 압축한 말씀 중 하나는 다음에 나오는 성경 말씀이다. 여기에도 외적 공의의 요구와 내적 긍휼의 영이 결합되어 있다. 이러한 긍휼과 공의의 융합은 단순한 삶을 촉구한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미쉬파트)를 행하며 인자(헤세드)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구약 전체에서 횃불처럼 빛나는 온전함과 평화에 관한 비전은 우리에게 기독교적 단순성에 대해 중요한 통찰을 준다. 이 주제는 '샬롬'(shalom)이라는 히브리어에 놀랍게 응축되어 있다. 샬롬이란 온전함, 연합, 균형이 녹아든 총체적인 개념이다. 평화로 집약되지만 그보다 훨씬 폭이 넓다. 샬롬은 하나님과의 조화롭고 애정 어린 공동체를 뜻한다. 공동체의 중심에는 기본 부양자요, 가장 영광스런 거주자인 하나님이 계신다. 우리는 하나님과 조화를 이룬다. 신실함과 충성이 가득하다. 우리는 이웃과 조화를 이룬다. 공의와 자비가 넘친다. 우리는 자연과 조화를 이룬다. 평화와 연합이 지배한다. 과다한 낭비, 으스대는 야망, 파괴적인 탐욕은 온전히 자족하는 샬롬의 형제애와는 하나같이 거리가 멀다. 하나님의 샬롬의 통치 하에 가난한 자는 더 이상 압제당하지 않는다. 더 이상 탐심이 지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유난히 가슴 아픈 장면에서 선지자와 제사장의 사기(詐欺)와 탐욕을 개탄했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6:14) 예레미야는 사실상 이렇게 호통친 것이다. "샬롬이 아니다. 하나도 잘되지 않았다. 정의가 짓밟히고 가난한 자가 압제당하고 고아가 무시당하고 있다. 이곳에 온전함이나 치유란 전혀 없다!"

3장 예수님을 통해 실현된 단순한 삶



"나는 하나님나라와 관련되지 않는 내 소유 일체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 - David Livingstone

예수님은 사람들이 지고 있는 가장 무거운 짐 가운데 하나에 관해 말씀하셨는데 바로 내일의 생계를 내 손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짐이었다. 그 분은 사람들이 부를 얻기 위해 애쓰다 망가지는 모습을 보셨다. 사도 바울은 부를 탐하는 이들이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말했다(딤전 6:9∼10) 예수님은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찌른 근심을 보셨다. 부자가 되려는 근심이었다.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탐탐히 여기시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의 깨지고 짓밟힌 심령을 보셨다. 그 분은 이 잘못되고 파괴적인 교리를 거듭 반박하시며 오히려 하나님의 경륜에서는 가난한 자, 상한 자, 저는 자가 그 분의 축복과 관심의 특별한 대상임을 보여주셨다(마 5:1∼12). 나아가 예수님은 부를 이미 얻고서 그것을 움켜쥐려 하는 자들의 무거운 짐도 보셨다. 부자 청년이 엄청난 부를 소유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좀더 중요한 것은 엄청난 부가 그를 소유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너그러이 부르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성경 전체를 통틀어 기독교적 단순성에 대한 가장 빛나는 말씀은 마태복음 6장이다. 이방인들이 지고 사는 내일의 세계에 대한 짐, 영혼을 짓누르는 그 짐을 우리는 더는 질 필요가 없다. 모든 필요가 채워지리라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단일한 초점과 중심 잡힌 심령으로 마음껏 "먼저 그(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義)를 구할" 수 있다(마 6:33). 예수님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는 부정적인 명령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긍정적인 명령으로 우리를 가르치신다(마 6:19∼20) 여기서 말하는 '보물'이란 거창한 재물만이 아니라 우리가 믿고 매달리는 모든 것을 뜻한다. 재물은 우리를 실망시키고, 하나님나라 안에서 우리의 소원대로 자유와 능력의 삶을 살지 못하도록 우리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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