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플라이프
리처드 포스터 지음 | 규장문화사
산업 디자이너 브룩스 스티븐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경제 전체가 계획적 노후화에 의존하고 있다." 밴스 팩카드의 『폐기물 제조자』를 보면 고의적 낭비와 계산적 낭비가 미국 경제의 핵심 요소임을 더할 나위 없이 명백히 알 수 있다. 한 예로 굴지의 한 철강회사에서 개발한 납도금 철강을 쓰면 제품당 단 8센트의 비용만 추가할 경우 자동차 수명이 다할 때까지 쓸 수 있는 소음기를 만들 수 있다. 그런데도 자동차 회사들은 2년마다 갈아야 하는 소음기를 계속 장착하고 있다. 제품의 계획적 노후화로 안 되면 심리적 노후화가 가세한다. 심리적 노후화의 유일한 취지는 기존 물건의 용도가 다하기 전에 새 물건을 사고 싶게 만드는 것이다. 해마다 신차 모델을 내놓는다는 개념은 자동차 산업의 본산인 디트로이트에서 1920년대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 사실상 동일 제품의 끝없는 변형이 가해지고 있다. 우리가 구입할 수 있는 커피의 상표는 551가지나 된다. 샐러드 드레싱의 상표가 무려 177가지, 비누의 상표도 249가지에 달한다. 미국인은 현재 매년 총 3억 4천만 톤의 고체 폐기물을 쏟아내고 있다.
우리의 '성장병'이 종식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끝내 우리를 파멸시킬 것이다. 우리는 지구의 놀라운 자원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현행 소비율대로 라면 앞으로 75년 이내에 "세계에서 현재 사용 가능한 금속류 저장량의 절반이 모두 바닥날 것"이라고 많은 전문가들이 예측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탐욕적 소비를 억제해야 한다는 점을 아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하는 이유는 과소비는 "우리의 영적 활력을 갉아먹는 암"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의 긍휼에서 심장을 도려낸다. 우리를 물질만능주의자로 전락시킨다. 상처받고 피 흘리는 수많은 인류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한다. 나는 경제학자가 아니다. 성장경제를 이끄는 것도 어렵지만 고의적으로 경제 억제책을 취하면 더 큰 문제가 따른다. 그래서 나는 이 시점에서 기독교계가 경제학과 사회정의에 관한 국제대회로 모이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 다국적기업
다국적기업은 좀더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이루는 데 최대 걸림돌이며 위험요소이자 동시에 좀더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실현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최강의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다. 다국적기업의 독특성은 웬델 윌키가 말한 '하나의 세상'이라는 꿈을 실현할 이데올로기와 기술력을 겸비한 기관이 사상 초유로 등장했다는 데 있다. 다국적기업의 시대가 신제국주의적 지배를 초래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문명 황금기를 불러올 것인가? 아무도 확실히 모른다. 다만 두 가지만은 분명하다. 첫째, 다국적기업은 인류에 무한한 유익을 가져다줄 자원과 조직을 갖추고 있다는 것, 둘째, 다국적기업에 어떤 형태로든 엄격한 책임이 부과되지 않는 한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세계 변혁을 위한 문제들이 우리의 미약한 능력 바깥의 일이라고 여겨지기 쉬우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많다. 첫째, 하나님이 우리를 쓰실 가능성에 마음을 열어놓아야 한다. 둘째, 우리는 우리의 이웃들에게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셋째, 우리는 무력하게 착취당하는 자들의 대변자가 될 수 있다. 넷째, 우리는 구제기관의 선행을 후원할 수 있다. 다섯째, 우리는 구제를 넘어서 정치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 여섯째, 우리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 필력(筆力)을 사용할 수 있다. 우리는 강력하고 정직하고 따뜻하게 써야 한다. 일곱째, 사회문제에 기도 사역이 들어가야 한다. 수많은 사회제도에 횡행하는 마귀의 정사와 권세를 물리치려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이 장의 짤막한 내용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 단순성을 실현할 수 있는 다양한 통로의 변죽만 울린 셈이다. 늘 우리 곁에 계시는 스승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분의 생명의 복음을 인간 사회의 모든 제도와 구조에 적용할 길을 우리에게 계속 가르쳐 주시기를 기도한다.21세기 현실에서 우리는 세상을 실체 그대로 바라보는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는 문제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질겁하며, 어떻게 대처할지 몰라 무력감을 느낄지라도 우리는 자기중심적 지역주의의 유혹에 절대 굴복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 재림 전에 어차피 있어야 할 일이라는 아전인수격 주장으로 감히 세상의 굶주린 자들이 토해내는 신음소리에 귀를 막아서는 안 된다. 세상은 어떤 곳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아직 듣지 못한 이들이 30억에 달하며 25억이라는 사람들이 문화적으로 현재 기독교 증거사역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으로는 세계복음화라는 만고불변의 지상명령을 절대 성취할 수 없다.
세상은 어떤 곳인가? 올해 미국에서 출생한 아이 1명이 소비하는 세계 자원은 인도에서 출생한 아이 20명분에 달한다고 한다. 고의적 낭비와 계획적 낭비는 미국 경제의 중요한 측면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먹고 지나치게 사고 지나치게 지으면서 지나치게 많은 유독 폐기물을 지상과 공중에 쏟아내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관련 핵심 이슈를 독특한 시각으로 보면서 지구촌의 난제 해결에 기여한다. 우리는 단지 사실과 숫자와 이슈만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 정사(政事)와 권세를 상대하고 있다. 잔인한 독재자들과 불의한 정책과 타락한 제도 이면에 영적 정사와 권세가 있다는 뜻이다. 거꾸로도 사실이다. 제도와 구조는 성령의 능력으로 인간의 삶에 커다란 선과 복을 가져다주는 통로가 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악한 정사와 권세에 대항하여 어린 양의 평화전쟁에 임할 것을 촉구한다. 이 모든 문제의 핵심 이슈가 영적·도덕적인 것임을 알기에 우리는 엄청난 이점을 안고 있다. 우리는 금식기도와 단순성과 복종에서 비롯된 내면의 힘으로 이들에 대항할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성경구절을 인용하거나 전통적 의미의 종교적 발언을 하고 다녀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구조악에 맞설 경우 우리는 신령한 자원에서 얻은 능력으로 맞서야 한다. 우리는 범사에 주님의 권세가 통치하기를 기도하며 세계 기아에 대한 국회 청문회에도 나가고 재개발 법안에 대한 지자체 청문회에도 나가야 한다. 우리의 말은 기도의 깊은 저수지에서 나와야 한다. 기도는 우리의 말에 겸손과 권위를 더해준다.
지금부터 우리는 어린양의 전선 중 단순성 훈련과 연관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슈에 주목하려 한다.
· 세계복음화
인류가 처한 그 어떤 비참한 곤경보다, 그들이 창조주로부터 분리된 것과 회개와 믿음을 거부하는 자들에게 임할 영원한 죽음이라는 처참한 실체보다 더 극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화 사역에 신속히 헌신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간을 긍휼히 여기지 않는 변명치 못할 죄를 짓는 것이다. 우리가 좀더 단순한 생활방식에 헌신하기만 한다면 이 새로운 선교각성의 물결에 부응할 경제적 자원은 얼마든지 확보될 수 있다. 선교학자 랄프 윈터는 미국 장로교인들이 장로교 사역자의 평균월급으로 살아간다면 현재 미국 선교비 지출의 3배에 달하는 20억 달러가 마련될 것이라고 말했다. 복음은 인종차별과 민족주의로부터 일체 자유롭다. 우리는 세계 복음을 지닌 세계 시민이다. 우리의 관심은 특정 민족국가의 이기적 이해관계가 아닌 이 땅 모든 백성들의 참된 행복에 있다. 기쁜 소식은 우리의 신실한 삶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가난한 자들에게 우리 마음을 닫는다면 그 분의 사랑을 선포할 수 없다.
· 세계기아
우리는 기아의 세계를 잘 모른다. 우리는 지금도 그 광경과 소리를 외면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기아의 끔찍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사실 중증 기아 피해자는 4억 6천만에 달한다. 내일이면 1만 명이 죽는다. 미국 인디애나 주의 1백만 돼지가 지구상의 10억의 인간보다 좋은 집에 살고 있다. 캘커타에만 60만의 영구 노숙자들이 있다. 이 일이 더욱 참혹하고 섬뜩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예방 가능하다는 점 때문이다. 세계기아 전문가들이 거의 만장일치로 동의하는 사실이거니와 필요한 희생을 감수할 용의만 있다면 우리는 기아를 줄일 수 있다. 우리는 자원이 있다. 기술도 있다. 의지만 있다면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쉽게 될 일은 아니다. 굵직한 장애물이 길을 막는다. 기상 이변은 농경에 치명타를 가하며, 정치 지도자들의 변덕스런 결정이 수백만 인구의 경제 몰락과 기아로 이어질 수 있다. 불의한 사회구조는 세계기아를 영구화한다. 세계 도처에서 힘있는 특권 엘리트층이 토지와 돈과 정치적 결정을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조정한다. 인구과잉은 세계 기아의 가장 무서운 적 중 하나이다. 월드비전(World Vision), 월드컨선(World Concern), 식량구호(Food for the Hungry)를 비롯한 기타 많은 기독교 구제기관이 구제하지만 이것으로는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세계기아에 대처하는 공공정책과 새로운 식량정책이 필요하다. 우리는 세계에 비축된 곡물을 수거하여 비상시 분배할 수 있는 세계식량은행을 지구상 도처에 설립할 것을 유엔에 건의할 필요가 있다. 기아에 대한 유명한 선언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35,40) 이 말씀에 담긴 의미는 엄청나다. 예수 그리스도가 굶주리고 계시다는 것이다!
· 한없는 욕심
제3세계가 무절제한 성장의 문제로 고생하고 있다면 선진국들은 무절제한 욕망의 문제로 고심하고 있다. 무제한 성장과 팽챙의 개념은 현대인의 의식 속에 깊이 배어 있다. 윌리엄 오펄스(William Ohphuls)는 "성장은 현대사회의 세속 종교다"라고 말했다. 팽창이 무조건 좋다는 개념은 경제학적으로 아담 스미스의 사색적인 연구, 특히 1776년 간행된 그의 『국부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런 팽창주의 경제는 세상에 대해 네 가지 중대 가정(假定)을 지니고 있다. 첫째, 사욕을 추구하면 반드시 궁극적 공동선(共同善)에 도달한다는 가정이다. 둘째, 천연자원에 거의 제한이 없다. 셋째, 경제적 사욕(私慾) 추구는 부득이 앞으로 태어날 세대들보다 현재 살아 있는 자들에게 더 높은 우선순위를 둔다. 넷째, 지속적 경제 팽창은 본래 선한 것이므로 모든 부정적 부작용은 단순한 외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거대한 산업공해는 불운한 부작용일 뿐 경제이론 자체에 의문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세계 인구 6%에 해당하는 미국인이 세계 자원의 33%를 소비하고 있다. 다른 나라들도 미국의 소비 수준대로 살려 한다면 세계적으로 알려진 모든 자원은 10년 이내에 바닥을 드러낼 것으로 추산된다. 작은 지구별은 부유한 현대인의 탐욕스런 소비를 도저히 감당해낼 수 없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다. 세계 자원의 공평한 분배에 근접하려면 우리의 생활 수준을 낮춰야 한다. 생태학자들과 경제학자들은 우리에게 단순성이 새로운 필연임을 외친다.
돈의 사역에 부름 받은 사람들이 있다. 주는 은사는 중요하고 정당한 영적 은사이며, 공동선을 위해 돈을 사용하는 일이 그 본질을 이룬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눅 16:9) 하나님 나라를 위해 물질을 쓰라는 뜻이다. 이것은 정말 중요한 사역이다. 우리는 지금 다이너마이트를 다루고 있다. 부는 영적 초보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돈의 사역의 가장 미묘하고 위험한 측면은 그것이 주는 거짓된 권력 의식에 있다. 우리는 자신의 통제권을 느끼기 시작한다. 남들이 우리를 찾기 시작한다. 영적 교만이 흉측한 고개를 쳐든다. 타락의 미끄럼은 계속되고 마침내 가짜 구세주가 탄생하기에 이른다. 영적 지도 없이 이 중요하고 위험한 사역에 임하라고 권할 뜻은 전혀 없다. 당신은 얼마든지 이 고귀하고 거룩한 일에 자격을 상실할 수 있다. 내가 지금, 어마어마한 자금으로 전 세계의 큰 사업들을 후원하는 거부들에 대해서만 얘기하는 것처럼 들리는가? 그러나 돈의 사역은 단순한 방식으로 표현될 때가 더 많다. 대개 이 일에 가담하는 이들은 예산이 한정되어 있는 보통사람들이다. 요건은 막대한 재산이 아니라 막힘 없는 통로가 되려는 겸손한 의지다.
여기 이 사역을 담을 수 있는 '새 부대'가 하나 있다. 가족들이 함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한 해 예산을 정한다. 그 후 예산액을 초과하여 들어오는 모든 돈은 전액 하나님나라를 위해 바친다. 존 웨슬리는 젊었을 때 한해 28파운드(약65달러)면 자기 필요가 충당되리라고 계산했다. 물가가 기본적으로 동일했기 때문에 나중에 책 판매로 한 해 수입이 1,400파운드에 달했을 때 그는 그 나머지를 다 나눠주었다. 또 다른 가죽부대는 아내와 남편이 맞벌이를 원할 경우 한 사람의 월급은 다른 이에게 주도록 스스로 훈련하는 것이다. 또 다른 접근은 하나님나라의 일을 위해 당좌예금 구좌나 저축성 예금을 만들어 보라는 것이다. 이 구좌에 들어가는 돈은 전액 하나님나라의 일에 써야 한다.
우리는 섬김의 재정적 측면에만 주력해서는 안 된다. 이기심을 벗어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종으로서 거리낌 없이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다. 자기의(自己義)의 섬김은 사라진다. 우리는 남을 주관하거나 남에게 부채의식을 심어줄 필요가 없다. 조작된 태도 없이 아무런 대가 없이 섬김을 베풀 수 있다. 이것이 섬김의 사역이 가져다주는 놀라운 자유다. 사랑으로 피차 귀히 여기는 능력이 거기서 나온다. 오늘 우리에게는 '예언자적(선지자적) 단순성'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다른 길을 가리키는 이의(異意)의 음성, 사회 기존 질서에 불복하는 창의적 모델이 필요하다. 예언자적 단순성의 핵심에는 그리스도를 위한 자기부인이 있다. 예언자적 단순성의 모델을 몇 가지 살펴보자.
첫째, 독신생활. 결혼은 부득이 사람의 충성을 분산시킨다. 결혼서약에 충실하기 위해 남편과 아내는 산더미 같은 관계적·재정적 문제에 신경 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독신자라면 하나님나라의 진보에 마음껏 주력할 수 있다. 통찰력 있는 기혼자라면 누구나 이 현실을 충분히 이해한다. 바울은 결혼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대가를 따져봐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고전 7장) 우리 시대의 커다란 비극 중 하나는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그리스도의 일에 사리사욕 없이 자신을 바쳤으나 그러한 과정에서 결혼생활을 망치고 자녀를 망쳤다는 점이다. 독신생활을 선택하기만 했어도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도 친히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고자된 자들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마 19:12)
이렇게 항변할 이들도 있을 것이다. "진작 나도 대가를 따져봤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렇게 하지 못했다. 지금 나는 가정이 있지만 시간상 결혼과 가정의 본분을 다하기 힘든 사역에 계속 소명을 느낀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의 소명은 당신의 가정에 있다는 것이 내 대답이다. 당신은 배우자와 맺은 언약에 충실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결혼생활에 파괴적 영향을 미칠 사역에 뛰어드는 것은 죄다. 배우자와 자녀들에게 당신의 삶을 투자하는 것으로 만족하라. 그 사역이 중요하다면 하나님이 다른 이를 들어쓰시거나 아니면 그 분의 때에 사역과 가정의 책임을 병행할 수 있도록 당신의 상황을 조정해주실 것이다.
둘째, 금식. 금식은 우리가 균형을 잡도록 해준다. 삶 전체를 더욱 민감하게 느끼도록 해준다. 그래서 우리는 소비자 의식구조에 사로잡히지 않게 된다. 금식은 우리의 우선순위를 바르게 하고 영적 민감성을 길러주는 일종의 내적 경보장치다. 우리는 내면에 있는 것들을 음식과 기타 좋은 것들로 감추고 있다. 금식하면 우리를 지배하는 것들이 드러난다. 초기 금식의 경험을 통해 드러난 첫 번째 사실은 좋은 기분에 대해 느끼는 나의 욕망이었다. 기분이 좋은 것은 분명 나쁜 일만은 아니다.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