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에서 온 남자 모압에서 온 여자
노옴 웨이크필드, 조디 브롤즈마 지음 | 요단
이스라엘에서 온 남자 모압에서 온 여자
노옴 웨이크필드․조디 브로즈마 지음/윤귀남 옮김
IVP/2002년 6월/196쪽/5,500원
1. 문제점
목회자로서 일생의 대부분을 인간관계에 투자하면서 지내온 나는 많은 인간관계의 문제들 중에 특히 남자들과 여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의 장벽을 주목했다. 근래의 책이나 정기간행물, 신문을 통해 본 양성간의 전쟁은 어느 때보다 더 강렬하고 공격적이고 적대적으로 보여지는데 이는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죄’는 관계를 허물어뜨리고 왜곡시키고 부패시키기에 어차피 그리스도인이건 비그리스도인이건 원죄를 범하기 이전의 에덴동산에서의 관계의 자유를 누릴 수 없다.
여호와께서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를 대면하셨을 때 아담은 하와를 비난하였고, 이로부터 비난은 죄에 대처하는 새로운 전략이 되었다. 죄는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 3 : 16)."라는 관계의 새 위계 질서를 들여왔고, 타락이래 남자와 여자들은 주도권을 두고 싸워 왔다. 죄는 남녀사이의 창조적 균형을 비뚤어지게 만들었고, 인간관계에 긴장을 초래했으며, 그 결과 고통과 낙담과 소외를 낳아왔다. 이를 솔직히 인정할 때 우리는 건강한 관계로의 회복을 위한 잠재력을 갖게 된다.
오늘날 남녀관계를 특징짓는 일반적인 양식이 몇 가지 있다. 첫째, 다수의 남녀들은 투명하게 그리고 연약한 측면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다. 둘째, 남자들과 여자들은 ‘젠더(사회적으로 형성된 성)' 클럽을 만들어내는 자기들만의 젠더 어휘를 발달시키는 경향이 있다. 동성들만의 언어로 이성을 배제시키는 것이다. 또한 남녀는 너무 달라서 이를 인정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것만이 최선이라는 신념(예 : 남자는 이성적이고, 여자는 감성적이다)으로 이성에 대한 지속적인 소외를 합리화하고 있다. 셋째, 남녀의 긴장과 소외는 서로에 대한 근본적인 경시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상대에 대한 존경심이 없을 때 서로 품위를 떨어뜨리고 상처와 깊은 분리를 겪게 된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서 발견되는 남녀간의 긴장에 대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시나리오가 있다. 하나, 교육권과 투표권을 남성에게만 주고, 여성들에게는 ‘여러분은 소중하고 사랑스런 여자들이니 조용히 앉아 잠잠하게 지켜보기만 하시오’라며 은사와 재능 있는 여성들의 비전과 에너지를 죽어가게 하는 교회가 있다. 둘, 여자의 말은 중요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해 왔던 결혼한 지 20년 된 한 남자가 교회의 수련회 프로그램을 통해 난생 처음 여자의 말을 진정으로 귀담아 들었다고 했다. 셋, 샘은 예수그리스도를 신실하게 사랑하는 헌신적인 남편이자 아버지이다. 그러나 그는 아내가 아이들을 훈계할 때 호되거나 논리적이지 않다고 얕본다.
조디와 나는 이 책을 쓰면서 성격적 진리에 헌신한 사람으로서 그 진리를 구현하는 관계를 형성하였다. 우리는 독자들이 이처럼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남자와 여자로서의 우리에게 하시는 도전에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여 주기를 기도한다.
2. 성에 대한 성경적 모델
존 그레이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는 남자와 여자가 근본적으로 아주 다른 존재라는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이성끼리 관계를 맺으려는 시도가 실패할 때 느끼는 자포자기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한다. 그러나 성차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우리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강력하고도 풍성한 요소들을 보지 못하는 일은 위험하다. 패러다임은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기 위해 사용하는 틀로 패러다임을 통해 입력되는 정보와 경험을 여과한다. 그러나 패러다임을 갖고 있음을 우리는 종종 망각하며 이를 재검토하거나 전환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함에도 그렇게 하는 것이 내키지 않아 전환하지 않음으로써 좀더 풍성하고 만족스런 삶의 기회를 빼앗긴다면 그 손실은 매우 클 것이다.
남녀의 성차에만 초점을 두고 있는 우리사회의 문화적 패러다임은 남녀의 공통점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 못한 채 고착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 : 17)."라는 말씀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주님은 그분의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보기 원하시며, 그분의 세계로 우리를 이끄신다. 우리가 서로 얼마나 다른지에 초점을 두면 관계의 공통 기반이 없다는 생각에 소외와 갈등을 초래하지만, 서로의 공통점에 초점을 두면 굳건한 공통점을 기반으로 건강한 성장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게 된다.
성경 속에 등장하는 몇 안 되는 남녀관계의 본보기 중 건강하고도 긍정적인 관계를 심오하게 보여주는 구약의 책이 있는데, 그 책이 룻기이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룻과 보아스의 관계를 현대적 정황 - 혹은 소위 ‘패러다임’이라고 부르는 - 에 짜 맞추려는 충동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현대적 정황이라는 것은 이와 같은 관계가 낭만적인 매력에 기초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이 감정적으로 온통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에 이런 놀랄 만한 관계가 생겨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 본문은 이러한 가르침을 지지하지 않는다. 본문을 주의 깊게 연구해 보면 그들의 관계는 확고한 영적 확신이 뿌리박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가 결혼으로 마무리된다는 사실은 그들의 호르몬에 대한 증언이 아니라 그들의 인격이 어떤가를 보여준다.
3. 은혜로운 남자
은혜는 중요하고 의미 있는 모든 관계에 나타나는 특징적인 매력이다. 은혜는 활기 넘치는 생명력이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흐르도록 만드는 연결 매체이다. 나는 성경에서 은혜의 관계를 공부하고 삶에서 경험하면 할 수록 내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은혜를 실현하도록 부름 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은혜와 진리 둘 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될 필수요소다. 주님은 그 둘을 따로 떼어놓으려고 하신 적이 없다(요 1 : 14). 은혜가 마음의 토양을 갈아서 우리가 씨앗을 떨어뜨릴 때 마음이 그것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시키기 때문이다. 은혜의 정신이 다른 사람들을 향한 나의 생활방식이 될 때, 내가 말을 하면 그들이 나의 말을 더 잘 받아들이고 도움을 받으려고 한다.
결혼 초기에 나는 아내를 교정해 주려고 했다. “이 주제에 대해 읽어 본 사람은 누구든지 아는데….”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나는 진리로 ‘그녀를 바로잡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아내가 자기 앞에 던져진 진리를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중에서야 나는 은혜가 훨씬 더 강력하고 자비로운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보아스는 구약에서 몇 안 되는 은혜의 모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은혜를 삶으로 보여주었다. 은혜의 놀라운 점은 “내가 누군지 보시오!”라고 강조하는 태도나 행동에 기초를 주지 않고 “당신을 어떻게 섬기고 축복할까요? 당신에게 무엇을 드릴까요?”라는 식의 태도와 행동에 기초를 둔다는 사실이다. 얼마나 눈부신 매력인가! 보아스는 부유한 농장주였다. 그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일자리를 주는 보아스와 같은 사람들에게 의존하여 하루하루 먹고 살아야하는 형편이었다. 보아스는 그에게 의존하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다. 그는 그들을 축복하거나 무시하거나 처벌할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보아스는 그러한 갈망을 알아채고 그 마음과 영혼을 만족시킬 수 있는 개인의 자원을 관대하게 나누어준다. 그가 등장할 때면 언제든지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주님의 쓰임을 받기 원하는 소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룻은 매우 공격받기 쉬운 상태로 베들레헴에 도착하였다. 그녀는 유대문화 속에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었다. 비유대인을 모욕적이고 냉대하는 태도로 대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룻은 특히 모압의 후손이다. 롯과 그의 맏딸의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모압의 후손들은 영적으로 더럽다고 여겨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노예로 팔려가 다른 남자의 재산이 될 수도 있었던 ‘여자’였다. 현실적으로 룻의 미래는 매우 어두워 보였다. 어떤 남자가 그녀를 원하겠는가? 어떤 남자가 그녀를 주목하거나 친구로 삼을 가능성이 있겠는가?
보아스의 가장 매력적인 특징은 외면적인 규칙에 제한받지 않고 위엄과 존경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능력이었다. 처음 만남에서 그는 룻이 자기 밭에 온 것을 환영한다(더 나아가서 자기 삶에 들어온 것을 환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녀가 땅에 엎드려 절한 것을 보면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을 열등한 존재로 볼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녀의 말을 보면 이 점이 더욱 확실해진다. “나는 이방 여인이어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아보시나이까(룻 2 : 10)?" 그렇지만 보아스는 그것으로 끝내지 않는다. 그는 주님의 이름으로 룻을 축복한다.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룻 2 : 12)." 유대 남자가 이방인인 자기를 위해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기도를 들었을 때 그녀의 마음에 얼마나 큰 기쁨이 넘쳤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여자들은 보아스와 같은 은혜를 보이는 남자들에게 끌린다.
룻은 그 날 아침 자신이 만날 남자가 자기의 삶을 바꾸어 놓으리라는 것을 거의 알지 못한 채로 보아스의 밭에 갔다. 역사는 그 날 이루어졌다. 그녀가 밭으로 들어갈 때 인생은 험하고 미래는 어두워 보였다. 그렇지만 은혜의 남자를 만나자, 소망으로 가득 찼다. 그것이 은혜의 힘이다. 은혜가 충만한 남녀가 서로 관계를 맺을 때, 서로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구체적인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한다. 또한 우리의 삶이 다른 사람에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4. 순종하는 여자 - 섬기는 것인가, 고통받는 것인가?
룻기에는 아름다운 순종의 그림이 펼져지는데, 이는 룻과 보아스의 관계에서보다 룻과 나오미의 관계에서 더 뚜렷하게 보인다. 이 관계가 아름다운 이유는 성과 관계없이 내면의 자질로서 순종을 보여주는 데 있다. 게다가 그것은 경건의 열매인 것이다.
성경은, 강하고 결단력 있는 여자 룻이 어떻게 나오미의 권위와 지혜에 복종하는 지를 보여준다.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 1 : 16~17)." 룻은 하나님께 이와 같이 맹세함으로써 나오미에게 헌신했다는 사실을 확언할 뿐 아니라 나오미의 하나님께도 순종하겠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압 여인으로서는 대단한 헌신이다. 이 때 나오미는 룻의 뜻에 순종한다. 그녀는 룻이 옳다는 것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쨌든 나오미는 “좋아, 네가 원하는 대로 하자.”고 겸손하게 말할 때를 알았다.
마찬가지로, 룻은 더 나이가 많고 지혜로운 여인의 조언을 무시할 만큼 고집이 세지 않았다. 룻은 나오미의 조언을 따르면서 이삭을 주울 최상의 장소를 발견했으며 보아스에게 적절하게 반응할 길도 찾았다. 룻이 “시모의 명대로 다하였을(룻 3 : 6)" 때, 결과는 언제나 순조로웠다. 우리는 이 여인들이 서로 사랑하고 돌보았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기꺼이 순종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건강한 사랑을 표현하는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자유로이 순종하도록 한다.
순종은 다른 사람이 그의 능력으로 나를 이끌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룻은 베들레헴의 사회 관습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는 외국인이었다. 나오미는 그 상황에 적합한 연장들, 즉 혈연과 문화에 대한 풍부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룻은 나오미가 그의 능력으로 자기를 이끌도록 했기 때문에 그 문화에 동화될 수 있었고 보아스의 마로가 행동에 적절히 반응할 수 있었다. 약점을 지닌 채 혼자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 룻은 나오미에게 순종하여 매사에 성공할 수 있었다.
순종의 태도가 없으면 다른 사람을 신뢰할 수 없게 된다. 룻은 나오미와 함께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연장자가 적절한 행동이나 관습을 알고 있다고 믿을 수 있을 만큼 시어머니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룻은 기꺼이 나오미의 손에 자신의 미래를 맡겼으며 그녀의 지시를 따랐다. 순종이 신뢰를 바탕으로 하듯이, 지속적인 순종의 결핍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불신감을 낳는다. 순종의 태도가 없으면 '내가 통제해야 한다'는 망상이 생기게 된다. 우리 문화는 ‘나’라는 문화가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문화다. 하나님의 계획은 남녀가 한 팀이 되는 것인데, 운동선수라면 누구든지 팀워크라는 것은 코치의 지혜와 기술에 순종하는 것을 뜻한다고 말할 것이다. 자기 방식대로 경기를 하고자 애쓰는 운동 선수는 자기 팀을 패하게 만들기 십상이다. 더욱이 순종하기를 거절하고 지배하고자 하는 마음은 쉽게 우리를 지치게 할 것이다.
순종은 첫째, 다른 사람들의 장점이 드러나고 꽃피게 해준다. 나오미는 남편과 아들이 죽었을 때 공허함과 절망감이 그녀를 압도했을 것이다.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고 했던 나오미를 룻은 자기의 순종으로 마음을 바꾸었다. 나오미는 갑자기 룻의 인도자와 조언자로서 놀라운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둘째, 순종은 균형을 창출한다. 룻이 나오미에게 순종했을 때 그들의 관계는 변화되었고 따뜻함과 조화도 덧입게 되었다. 룻은 나오미를 돌보며 그녀의 신체적인 필요를 채워 주었다(룻 2 : 17). 나오미는 룻을 보호하고 그녀에게 조언해 주었다(룻 2 : 23, 3 : 1~4). 셋째, 순종은 존경과 감사를 전달한다. 순종은 말이나 칭찬을 넘어 사람의 마음에 도달한다. 관계 속에서 신뢰감을 발달시키는 얼마나 단순한 방법인가! 이러한 관계는 상호 존중과 감사를 가져온다.
경건한 순종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미 습득된 어떤 개념이나 정의를 던져 버려야 한다. 고역으로 완전히 지쳐 버린 노예의 그림을 지워 버리고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대체하라. 그분을 본받아 담대하게 종이 되라. 당신이 맺는 관계들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5. 경건한 남자 -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재현되다
성경의 이야기는 보아스의 경건함에 어떤 특징이 있는지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첫째, 평범한 사람들과 먹고 마실 때 드러나는 경건함. 보아스는 수수꾼들이 바쁘게 일하고 있는 밭에 나갈 때 그들에게 무관심하거나 생색을 내는 듯한 태도가 전혀 없다. 사람들은 그가 모든 사람을 따뜻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것을 느낀다. 그들은 그가 땅 주인인 줄 알고 있지만 또한 그를 친절하고 돌보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그가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보고 웃으면서, 자기들을 돌보는 사람과 친근한 대화가 이루어질 것을 기대한다. 보아스는 사람들을 주목했다. 그들에 관해 묻고 그들을 살펴보았다. 그는 그들 마음의 선함을 분별할 수 있었다. 그는 사회적으로나 직업적으로 거리를 유지하려 하기보다는 앉아서 그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우리는 그의 경건이 실제적인 방식으로 표현된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즉 그는 룻을 섬겼다. 그는 자기 손으로 직접 음식을 풍성하게 대접했다. 이것이 그녀의 마음에 얼마나 감동이 되었을까! 의지할 곳 없는 여인이 땅 주인의 따뜻한 대접을 받다니 말이다.
둘째, 말 속에 드러나는 경건함. 보아스는 말하는 것이 달랐다.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는 그의 섬세한 방식을 주목해 보라. 그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이 잘 되기를 바라고 그들에게 최선의 것을 구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복이 그들에게 임하기를 원했다. 실제로, 우리가 들은 그의 첫 마디는 고용인들에게 한 아침 축복 인사다. 사람들은 자기가 가치 있다는 것을 알고 싶어한다. 이것이 바로 보아스가 믿고 실천한 진리다. 그렇지만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가 그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과 가치를 표현했다는 점이다. 룻을 처음 만났을 때 한 말을 들어 보자.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룻 2 : 12)." 이보다 더 그녀를 기쁘게 하는 방법이 있었겠는가!(또한 보아스는 자신이 이 여인을 향한 주님의 복의 일부가 되기를 간절히 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