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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앞서가는 설교

데이비드 버트릭 지음 | 요단
시대를 앞서가는 설교

데이비드 버트릭 지음/김운용 옮김

요단/2002년 12월/282쪽/8,500원



제1장 설교와 성경

미국 교회 설교자들이 설교할 때, 한 손에 성경을 펴들고 설교하는 것을 주목해 본 적이 있는가? 강단에는 언제나 커다란 강단용 성경이, 성경의 중간 정도가 되는 시편 부분에서 펼쳐져 있다. 가끔 부흥사들은 한 손에 성경을 들고 음률에 따라 설교를 하기도 한다. 분명히 미국 개신교 설교자들은 성경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의문이 제기된다. 설교는 반드시 성경으로부터 나와야 하는가? 정확하게 성경과 설교는 어떤 관계인가?

우리 모두는 20세기 '성서신학운동'이 낳은 후예들이다. 성서신학운동은 20세기 초에 나타난 것으로, 이 운동의 결실로 많은 주석들이 발간되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각 출판사들은 성서연구자료 출판으로 무척 분주했다. 신학교 학생들은 활짝 웃으면서 경쾌하게 노래를 불렀다. “오 성경, 그것은 나를 위한 책이로다!”

설교학에도 이 운동은 유사한 영향을 미쳤다. 1907년 포사이스는 예일 대학교의 설교학 강의에서 성서적 신앙과 성서적 설교로 되돌아갈 것을 촉구하였다. 1928년 칼 바르트는 성경을 의인화하면서 성경은 인류에 대한 구원의 관심을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열정적인 목소리라고 주장했다. 바르트의 이러한 주장은 큰 영향력을 미쳤다.

바르트는 설교자는 다른 것이 아닌 오직 성경만을 설교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바르트에게 있어서 설교는 성경본문의 반복적인 낭독이 된다. 즉 설교가 세상에 대한 적절한 언급 없이 마치 성경을 낭독하는 자의 무의식적인 입술운동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성경적 설교와 관련하여 분명히 해야 할 사항이 있다. 교회 밖에서 행해지는 복음전파를 위한 설교들이 언제나 성경본문을 중심으로 한 성경적인 설교가 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복음전도는 모든 곳에서 행할 수 있는 경기와 비슷하다.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칵테일 라운지에서도 행해질 수 있는 것이 전도이다.

교회 밖에서의 설교는 일반적으로 성경을 근거로 해서 시작되지 않는다. 대신 복음전도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소식을 전하는 일에 관심을 갖는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빛줄기 안에서 사람들은 삶의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성경구절을 설교하는 데 있어서의 이론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인간들은 태어나서 죽는 존재이며, 기억과 희망 사이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사건들을 펼쳐 보이고자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삶의 의미들이 이야기와 같이 조직되어야 한다. 요약하면, 인간의 의미는 일반적으로 이야기의 구조를 통해서 발견된다.

그렇다면 성경은 무엇을 제공하는가? 성경은 신비로운 이야기 등을 펼쳐 보여주며 교회의 비전을 새롭게 해준다. 성경이 제공하는 것은 창조와 타락, 카인과 아벨, 노아의 방주, 바벨탑의 이야기들과 같은 정교하게 제시되는 신비적인 시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에서나 에스겔서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인류 역사의 완성으로써의 종말과 함께 주어질 거룩한 새 예루살렘 성에 대한 이야기를 대하게 된다. 그리고 이야기 사이사이에서 하나님께서 완고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루시는 방법에 대한 일련의 거대한 이야기들을 대하게 된다.

모든 구절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성경은 창조부터 시작하여 종말까지의 이야기들에 의미를 부여해주며, 사이사이에 하나님께서 죄인된 인간들을 어떻게 조정하시는가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해주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몇몇 구절들에는 기독교와 관련성이 없거나 부차적인 내용들도 있다.

성경에서 발견되는 시초부터 종말까지의 신비한 비전은 성경의 서사성 만큼이나 중요하다. 우리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려고 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이야기가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는 어떤 틀로써 창조와 종말의 상징들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이야기에 의해서 형성되는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가 출생하기 전으로 돌아가야 하며, 실로 인간의 의식이 형성되기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창조와 타락, 카인과 아벨, 노아의 방주와 무지개, 그리고 종교성을 띠었던 바벨탑 이야기의 상징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한 이야기들은 충분한 사회적 의미를 제공하며, 그 의미들은 우리 삶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을 채우고 있는 복합적인 이미지들은 결론과 같이 제시되는데, 의미를 제공해 주는 중요한 본문이다. 하나님과 함께 교회 없는 야영지로, 이제 더 이상 애국주의나 전쟁, 편견, 상함이 없는 곳을 묘사하면서 성경의 마지막 부분은 하나님의 새로운 질서의 세계로 우리를 부르고 있다.

다시 한 번 질문을 반복해 보자, 성경구절들을 설교하기 위한 이론적 근거는 무엇인가?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 성경의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선포한다는 데 있었다. 개혁자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설교로 이해하였다. 그들은 성경을 기록된 문서로써 이해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금세기에 있어서 종교개혁의 근본사상들은 뒤집어진 것처럼 보인다. 오직 성경만이 온전한 권위를 가지며, 설교는 부가적인 행동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 즉 설교는 성경에 대한 부속물처럼 여겨진다. 오늘날 사람들은 소위 유대교 전통에 의해서 적법하게 요리된 음식물처럼, 모든 설교는 반드시 성경을 언급하면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단적인 성향이 강한 것으로, 혹은 아주 심한 자유주의 경향이 강한 것으로 단정해 버린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좋은 선물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말씀으로 매일 기쁨을 누릴 수 있고, 또 그러해야 한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깊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좋은 선물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얻게 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분명하게 구원에 이르게 하는 달콤한 지식이다. 하지만, 초대교회 성도들은 정해진 일정한 성경이 없이도, 복음을 설교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설교이다. 예언적이고, 열정적이고, 신학적으로 깊이 고려된 복음의 소식들에 대한 설교, 우리를 하나님의 새로운 속성 가운데로 불러 세우시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그 설교를 원하신다.

왜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인가? 설교가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을 위해 사용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설교는 복음의 복된 소식을 전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을 하나님의 새로운 성품 가운데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해방시킨다. 설교가 교회의 보호 가운데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뜨거운 마음’으로 전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도 아니다. 또 성경구절들을 나열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도 아니다. 성령의 이끌림을 받고,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을 위해 사용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가? 그렇다. 성경은 수 천 년 동안 계속된 믿음의 행진 속에서 그것을 드러내는 거룩한 목소리들을 함께 모은 고상하고 거룩한 책이다. 그러나 성경이 여성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데 사용되거나 인종과 특정그룹에 대한 편견을 조장한다든지, 동성애자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의 인격을 계속적으로 비하하는 데 사용될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일 수 있는가?

성경과 설교가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와 진위가 결정된다. 설교나 성경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기보다는 그것이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온전히 증거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경은 단지 성별된 문학적인 대용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은 자유 그 자체이다.

우리에게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설교는 하나님의 해방하시는 목적을 위해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자체가 성경을 근거로 하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계속 하나님은 사람과 같이 동등됨을 취하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설교의 목소리는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한다.

우리는 단지 교회만을 위하여 설교하지 않는다. 성경이 널리 알려지고 널리 인정을 받게 하기 위해 설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인간을 죄에서 해방시키려는 구속 목적에 우리 목소리를 사용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설교하는 것이다. 이 목적 외에 다른 어떤 이유도 없다.



제2장 설교와 교회

성전의 벽을 가득 채운 거대한 그림이 높이 걸린 성당이 있다. 그 그림은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담고 있다.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주님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거대한 검이 나오는 것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그 검은 아래로 향하고 있는데, 우리를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주일마다 예배당에 모이는 우리들은 누구인가? 우리는 날카롭고 좌우에 날선 검과 같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는 자들이다.

훌륭한 유대인이었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믿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도 헛되이 돌아오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성취되었다. 그래서 말씀은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설교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이다. 설교는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들에게 숨겨진 하나님의 신비로운 본성을 드러낸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선지자들에게 말씀을 주셨는지를 기억하였다. 에스겔의 눈을 감동으로 열어 환상을 보여주시고, 이사야의 입술에 숯을 대며 말씀하셨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구약성경에는 “주의 말씀이 임하시니….”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곳만 500곳에 이른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모세, 엘리야와 엘리사에게 말씀하셨으며, 예레미야와 에스겔, 호세아와 미가, 그리고 스바냐와 말라기 등 많은 다른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택하신 설교자들을 통해 말씀하시고 그들을 통해 예언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의도는 위대하고 찬란한 시온에 대한 비전이었다. 이스라엘은 사회적 윤리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가지고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성경의 기록은 두 종류의 설교를 포함한다. 세상을 향해 복음의 기쁜 소식을 증거하는 교회 밖에서의 설교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하도록 돕는 교회 안에서의 설교가 그것이다. 결국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세상을 향해 새로운 질서의 표지가 되어야 하며, 동시에 빛과 소금이어야 한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행하는 양육을 위한 설교든, 교회 밖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는 설교든, 모든 설교는 하나님으로부터 그 권능을 부여받는다. 궁극적으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지 인간의 말이 아니다. 설교는 하나님 자신의 힘과 지혜로 가득 차 있으며, 세상적으로는 약해 보이고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감추어진 구속의 힘으로 가득 차 있다.

요즘 들어 교회의 위상이 높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설교의 위치가 갈수록 내려앉는 분위기이다. 교회들은 마케팅 기술에 따라 그 위치가 상승되기도 하고 하강하기도 한다. ‘교회성장을 위한 경영원리’라는 표어에서 볼 수 있듯이, 목회자들은 교회사업가로 전락하고 있다.

종교 ‘시장’에서 영혼을 위해 경쟁한다면 설교는 청중이 선호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의해서 지배받을 것이다. 청중들이 치유를 원한다면, 설교자들은 치유에 관해 설교해야 할 것이며, 청중이 자부심을 갖도록 해주는 위로의 설교를 갈망한다면 설교는 늘 낙관적인 관점으로 행해져야 할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설교자는 하나님을 대변하는 목소리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필요에 따라 총명한 신학자가 되고, 주석가가 되고, 교사가 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설교자들이 청중들을 단순히 ‘돕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목회자는 회중들을 위하여 돕는 자가 되는 것이 그 본연의 목적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물론 설교의 역할에 있어서 변화는 불가피한 것일 수도 있다. 대부분의 주요 교단들은 오늘날 잔뜩 위축되어 있다. 그러한 교단의 교인수가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다. 몇 년 전 ‘둔즈베리’ 만화는 교회당이 거의 텅 빈 교회에서 적은 무리의 노인들에게 설교하는 턱수염 난 둔즈베리의 목회자가 "우리의 전성기는 다시 올 것입니다."라고 설교하는 것을 만평으로 실은 적이 있다. 교회가 자신을 보존하려고 할 때 그들은 전도에 깊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들은 크게 나타나고 있지 않다. 성경은 우리의 전도의 사명을 강조한다. “가서 전하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명령으로 다가오고 있다. 우리는 전도분과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보다 넓은 의미에서 그것은 교파적인 자기이익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 종교시장에서 우리가 생존할 수 있을 것인지가 가장 중요한 내용이 되고 있다.

요즘 미국에서는 주요 교단의 교회에서 교인들이 줄고 있기 때문에 잔뜩 긴장을 하고 있다. 그들은 심한 공포심에 붙들려 있다. ‘개혁교회 전통’이라고 부르짖는 것도 마치 나이 든 배우가 “그 공연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소리치는 것과 같은 절박한 심정으로 외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전통은 하나님의 새로운 질서인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새로운 소식에 의해 다시 점검되어야 한다.

“가서 전하라.”는 명령은 여전히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러나 전도는 최근 교회성장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설교하는 심리학적 개인주의 사이의 덫에 걸려 있다. 둘 중 그 어느 것도 크게 마음을 끄는 것은 없다.

복음의 소식은 하나님의 새로운 질서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며, 때로는 기존의 사회적 안정을 깨뜨리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구속을 약속해 준다.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여, 오라. 와서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생명의 세계를 형성해 다오.’ 그것이 기독교 전도의 핵심이다.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에 대한 비전은 처음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성경의 페이지마다 가득 채워져 있다. 하나님의 세계는 인종차별이나, 성차별, 계급주의와 같은 흠이 없는 화해를 위해 정교하게 디자인되어 있다. 전쟁의 공포는 사라졌으며 완전한 샬롬의 세계가 임한다. 그러한 비전은 성경의 페이지마다에 가득 채워져 있지만, 이 땅에서 이루어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이다. 그래서 성경의 마지막 페이지에 묘사된 거룩한 도시는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하다. 하나님의 꿈은 근거 없는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이제 설교강단은 ‘우리는 죄인입니다!’라는 엄격한 사실성과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라는 비전 사이에서 말씀을 전하도록 다시 한번 부름을 받고 있다. 설교자들은 우리의 죄악으로 흉한 상처자국뿐인 이 땅 위에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가 임하고 있음을 선포하도록 세움 받았다는 것을 명심하자!



제3장 설교와 문화

몇 달 전 한 젊은 학생이 나의 연구실로 찾아와 자신은 자그마치 네 부류의 회중 가운데서 목회를 하고 있다고 불평을 털어놓았다. 첫 번째 부류는 1950년대부터 신앙생활을 해온 사람들인데, 그들은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 것을 이해하지 못해 불평하는 사람들이며, 더 많은 교인 수와 보다 큰 교회 건물을 원하는 사람들이었다. 또 1960년대부터 신앙생활을 해온 두 번째 부류는 자신들에게 ‘해당되는 문제’에만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었다. 그 뒤를 이어 1970년대부터 신앙생활을 한 세 번째 부류는 믿음생활에 있어서 관망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 젊은 목회자는 주로 1980년대부터 신앙생활을 해온 네 번째 부류와 가까이 지내왔는데, 그들은 과거에 대한 향수로 가득 찬 사람들로, 그 옛날의 신앙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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