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캇 펙의 거짓의 사람들
M. 스캇 펙 지음 | 비전과리더십
스캇 펙의 거짓의 사람들
M. 스캇 펙 지음/윤종석 옮김
비전과리더십/2003년 7월/360쪽/12,000원
1. 악마와 계약을 맺은 남자 - 강박증에 시달리는 사람들
조지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는 세일즈맨이자 아내와 세 아이를 둔 가장이었고, 이따금씩 물이 새는 지붕과 자주 풀을 깎아 주어야 하는 마당이 있는 집도 한 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도 저녁만 되면 으레 슬픔과 두려움이 뒤엉켜 있는 것 같은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강박증의 근본 원인 : 조지는 그를 괴롭히는 이런저런 강박 관념에 대해 털어놓았다. 대부분이 자신의 죽음에 관한 것이었고, 그밖에 다른 사람을 죽이거나 범죄를 저질러 고발당하는 내용들도 더러 있었다. 치료 기간 동안 나는 그에게 강박증상 말고도 여러 고민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지에게서 서서히 아내를 향한 엄청난 적개심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애들이 자기에게 등을 돌리는 것은 모두 아내 책임이라고 했다. 그가 썩 행복하진 않았다고 인정한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도 나는 다시 한 번 자세히 돌이켜보게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스스로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을 만큼 훨씬 더 나빴고 무서웠던 부분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여덟 번째 생일날, 아버지가 여동생의 새끼 고양이를 죽였던 일을 기억해 냈다. 고양이가 거실 탁자 위에 똥을 싸 놓았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사정없이 고양이를 두들겨 패 결국 죽게 하고 말았다. 아버지가 주립 병원에 입원하기 일년 전의 일이었다. 조지는 그의 어머니 역시 아버지 못지 않게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되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의 생활도 자기가 기억하고 싶었던 것만큼 그렇게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입원하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집에 와서 살던 2년 동안, 외할아버지는 매주 거르지 않고 외할머니에게 손찌검을 했다.
조지는 자신의 강박관념에 대해 끊임없이 보고해 왔다. 곧 나는 한 가지 명확한 사실을 깨달았다. 조지가 자신의 인생의 실체들과 맞부딪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그러한 증상들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분명한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조지는 죽음의 문제에 있어서도 똑같이 미온적이었다. 자신의 가정생활이나 어린 시절의 고통스러운 실체들과 맞부딪치는 일에는 조금도 열의가 없었다.
악마와 계약하다 : 다음 번 면담은 저녁 시간에 있었다. 아무런 불안의 조짐도 없이 일상적인 말투로 그가 입을 열었다. “저는 제가 강박 증상에 지는 것을 막기 위해 혼자서라도 뭔가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악마와 계약을 했습니다. 이런 계약을 맺었지요. ‘만약 내가 강박 증상에 이끌려 다시 그 곳으로 간다면 악마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생각이 실제로 이뤄지게 만들 것이다.’ 예를 들어 보지요. 지난 번 채플 힐 언저리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번에 올 때는 네 차가 저 둑을 들이받아 너는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계약 내용대로라면, 만약 제가 둑에 가 본다면 악마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가 진짜 그 둑을 들이받아 죽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제 제게는 가지 않아야만 할 강력한 동기가 생긴 것입니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나는 탈출구를 찾는 일에 무력함을 느꼈다. 조지는 침묵 속의 기다림을 더 이상 견디지 못했다.
“조지, 당신은 성격에 결함이 있습니다. 바로 당신의 모든 문제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당신은 겁쟁이입니다. 일이 좀 어려워진다 싶으면 내빼지요. 그에 맞서 뭔가 조치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이 이렇게 피할 수 없는 것들을 피하려 드니까 그것들은 강박 관념이라는 증상의 옷을 입고 당신의 뒤를 쫓아다니는 것입니다. 당신은 무엇이든 거기서 자신을 건져줄 수 있겠다 싶으면 붙잡고 싶어졌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쉬운 탈출구만을 찾아다닙니다. 옳은 길이 아니라 쉬운 길 말입니다. 만약 당신이 자기 인생의 고통스러운 실체들 즉 공포스러웠던 어린 시절, 비참한 결혼생활, 죽을 운명, 자기 내부의 겁쟁이 등과 기꺼이 맞닥뜨리려 든다면 그때는 나도 어떻게든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날 밤이 조지의 치료에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들과 더불어 고통에 대해 못 견뎌 하는 민감한 성격 속에 자신의 인간성이 들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악마와의 계약에 대해 입씨름했던 이후 그의 강박증세는 서서히 강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2년 만에 조지의 치료는 끝났다.
2. 악의 심리학을 찾아서 - 자신을 속이고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들
강박 신경증 환자들의 전형적인 특징으로는 정신과 의사들이 ‘마술적 사고’라고 부르는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마술적 사고는 여러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으나 기본적으로 자기 생각이 어떤 사건을 일어나게 할 수 있다는 신념 면에서는 모두 똑같다. 어린 아이들은 대개 이처럼 마술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춘기쯤 되면 생각만으로 외부 사건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자신에게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터득한다. 조지가 악마와 맺었다는 계약은 또 하나의 마술적 사고에 불과하다. 단순히 의학적 모델에만 국한시킨다면 문제는 조지와 악마의 관계가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취급된다는 데 있다. 만약 이 문제를 전통 기독교의 종교적 모델에서 본다면 어떻게 될까? 인간과 우주는 선의 세력과 악의 세력, 하나님과 악마 사이의 팽팽한 대결 속에 끼어 있다. 이 대결의 전투장은 인간 개개인의 영혼이다. 인생의 의미는 전적으로 이 전투에 달려 있다. 마침내 조지는 계약 관계를 파기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지옥으로부터 하나님의 영광 및 인류의 희망 쪽으로 구출하게 되었다.
악과 죄 : 악한 사람들의 특징은 그들의 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죄의 난해성, 완고성, 경직성에 있다. 악한 사람들의 핵심적인 결함은 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는 마음에 있다(융은 '악'이란 섀도우(Shadow)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에서 기인한다고 정확히 짚어 냈다). 정치적 권력이 주어졌다든지 해서 자신의 제약된 힘을 뛰어넘을 수 있게 된 히틀러처럼 몇몇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범죄’는 너무 미묘하고 가려져 있어서 내놓고 범죄로서 지명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은폐와 위장이라는 주제는 이 책에서 앞으로도 계속 쉬지 않고 되풀이해 나올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을 '거짓의 사람들'이라고 한 것도 그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교도소에서 범죄자들을 상대로 일한 경험이 있었으나 그들을 겪으면서 그들이 악하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의 파괴성에는 일종의 임의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신들이 “정직한 범인인 까닭에 잡혀 온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론 주저하지 않고 자신들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한다. 악한 사람들과 일반적인 범죄자들 사이의 구분과 함께 나는 또한 인격 특성으로서의 악과 악한 행동 사이에도 뚜렷한 구분을 짓는다. 다시 말하면 행동들이 악하다고 해서 사람도 악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죄에 대해서 가장 많이 알려진 정의는 ‘표적을 빗나간다’는 것이다. 죄란 연속적인 완전 상태에 미치지 못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계속적으로 완전한 상태에 있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불가능한 까닭에 우리는 모두 죄인들이다. 물론 범죄에는 좀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죄나 악까지도 정도의 문제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의 도덕적 붕괴를 막아주는 것은 곧 자신의 죄성에 대한 인식이라 할 수 있다. 악한 사람들은 자신을 거스르는 수고를 묵묵히 감내할 마음이 조금도 없다. 그들이 악하게 된 것은 바로 그 수고를 감내하지 않으려 하는 데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내가 악한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행동에 있는 가장 지배적인 특징은 곧 남에게 죄를 덮어씌우는 책임 전가다. 그들은 마음속으로부터 스스로를 비난의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까닭에 자연히 자신을 비난하는 상대에게 손가락을 겨누게 된다. 이 책임 전가는 정신과 의사들이 투사(projection)라고 부르는 방어기제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악한 사람들은 밑바닥에서부터 자신들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까닭에 혹시 무슨 갈등이라도 생기면 그 갈등을 일관되게 세상 탓으로 돌리는 것이 그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고 불가피한 것이다.
나는 악을 이렇게 정의했다. “악은 정신적 성장을 피하기 위해서 행해지는 정신적 힘의 구사, 즉 공개적이거나 은폐적인 강압을 통하여 자신의 의지를 다른 사람에게 부과하는 것이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악한 사람들이 파괴적인 이유는 종종 그들이 악을 퇴치하려는 데 있다. 인생이라는 것이 종종 완전한 자아상을 위협해 오는 까닭에 그들은 그 인생을 미워하고 파괴하려는 일에 이따금씩 반사적으로 뛰어들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인생을 미워하는 데 있다기보다는 자신의 죄 된 부분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런 극단의 자기 방어는 언제나 자신보다는 남을 희생시키게 마련이다. 자신을 미워할 줄 모르는 것, 자신을 거스르지 못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가 악하다고 부르는 책임 전가 행위의 뿌리요 핵심적인 죄라고 생각된다. 악한 사람들의 도덕성을 이해하는 데는 ‘이미지’, ‘외형상’, ‘겉으로 보기에는’ 같은 말들이 퍽 중요하다. 그들의 ‘선함’이란 모두 가식과 위선의 수준에서 선함일 뿐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거짓이다. 그들이 ‘거짓의 사람들’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만약 악한 사람들에게 옳은 것과 그른 것에 대한 의식이 없다면 이런 자기기만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거짓 행위에는 아무리 덜 발달된 것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양심이 선행된다. 그들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은 특정한 고통 하나뿐이다. 자신의 양심을 직시하는 고통, 자신의 죄성과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고통이다. 내가 보기에 인간의 악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심리 문제는 바로 여러 가지 특정한 형태로 나타나는 나르시시즘이다.
나르시즘과 자기의지 : 나르시시즘 또는 자아 도취는 여러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여기서는 에리히 프롬이 ‘악성 니르시시즘’이라고 불렀던 한 특정한 병적 변이 형태로 들어가려고 한다. 악성 나르시시즘의 특징은 복종할 줄 모르는 자기 의지에 있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자기 양심의 요구에 스스로를 굴복시킨다. 그러나 악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죄책감과 자기 의지 사이에 갈등이 일어날 때, 사라져야 하는 것은 언제나 죄책감이고 이기고 마는 것은 언제나 자기 의지다. 히틀러의 의지가 자기 자신의 의지였던 반면 예수님의 의지는 그의 아버지의 의지였다. 이 두 의지의 결정적인 차이는 ‘고집의 의지’냐 ‘순종의 의지’이냐 하는 데 있다. 이 복종할 줄 모르는 고집의 의지가 바로 악성 나르시시즘의 특성이다. 프롬은 인간 악의 기원을 하나의 발달 과정으로 보고 있다. 즉 우리는 악하게 지음받았거나 어쩔 수 없이 악해져 가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오랜 선택들을 통하여 오랜 시간 서서히 악해져 간다는 것이다.
3. 일상생활 속에 숨어 있는 악 - 무의식중에 다른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
정신질환과 악의 이름 짓기 : 이제 악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 하는 문제를 얘기해 보기로 하자. 과학은 악을 하나의 연구 주제로 이름 짓지 못하고 있고, 악의 이름은 정신 의학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다. 아직도 악의 이름 짓기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어떤 한 사람의 장애를 ‘정신 분열증’으로 이름 붙이느냐 ‘정신 신경증’으로 이름 붙이느냐에 따라 치료 및 처방의 상황에는 엄청난 차이가 뒤따르게 된다. 질병의 치료는 진단에서 시작되므로. 하지만 악이란 하나의 질환인가? 우리가 악을 질병으로 보는 것을 주저하는 데에는 또 다른 합리적인 이유 세 가지가 있다. 이 세 가지 이유 하나 하나가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은 하나의 정신 질환으로 간주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내 입장임을 우선 밝혀 두고 싶다. 이제 그 세 가지 이유가 각각 내재하고 있는 오류들을 파헤쳐 가면서 왜 악이 질환이어야 하는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첫 번째 이유는 고통이나 장애가 따르지 않는 한 그 어떤 것도 질병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아주 오래된 주장이면서도 여전히 강력하게 지지되고 있는 입장이다. 물론 우리 대부분은 어떤 식으로든 원하지 않는 고통을 느낄 때 바로 그 때문에 자기가 지금 아프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얘기해 온 ‘악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아프다고 규정하지 않는다. 나르시시즘에 빠져서 자기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잘못된 게 없고 오히려 자신은 심리적으로 완벽한 인간의 한 표본이라고 믿는 것이야말로 악한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이다. 만약 드러나는 고통과 스스로의 인정이 질병의 한 기준이 된다면, 이 악한 사람들이야말로 정신 질환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 될 것이다. 이 주장에는 엄청난 문제들이 있다. 어떤 사람이 정기 검진을 받았다. 혈압이 200/120으로 나왔다. 이럴 때 의사는 혈압을 떨어뜨리는 약을 처방해 주지 않아야 하는가? 고통이 없으니까 고혈압은 병이 아니라고 하면서 무슨 치명적인 병세가 나타날 때까지 그저 기다려야 하는가? 질병이란 그것이 악이든, 일시적 착란이든, 정신병이든, 당뇨병이든, 고혈압이든 그와 무관한 객관적인 실체이며, 따라서 주관적인 인정이나 인정 거부 등에 의해 규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울과 회의와 혼란과 절망을 고스란히 경험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감 있고 편안하고 자신에 만족하는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건강할 수 있다. 사실 고통을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보다 확실한 질병에 대한 정의다. 악한 사람들은 투사와 희생양 찾기(책임 전가)를 통하여 자신들의 고통을 남에게 떠넘김으로써 스스로 죄책감의 고통을 깨끗이 거부한다. 죄책감은 자신의 죄, 부적절성, 불완전성을 일깨워 주는 고통스러운 인식인 까닭에서다. 이로써 그들 자신은 고통이 없을는지 몰라도 대신 주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게 된다. 그들은 고통 유발자이다. 악한 사람들은 자기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병든 사회의 축소판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최고의 위치, 명령자의 위치에 있는 자로서 자신을 내보여야만 한다. 그들의 나르시시즘이 그것을 요구한다. 그러한 위장은 악한 사람들의 특징이다. 그들에게는 그 가면이 깨져 자신의 참 모습이 자신과 세상에 드러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다. 혹시 자신의 악과 직접 마주치게 되지나 않을까 싶어 그들은 끊임없이 공포에 휩싸인다. 그런 까닭에 나는 고통이라는 기준으로 질병 및 질환을 규정한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신체나 인성 구조 속에 인간으로서의 잠재력을 실천하지 못하게 하는 어떤 결함이 있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질병이나 질환의 규정 기준이라고 나는 믿는다.
두 번째 이유를 생각해 보자. 무의미한 운명에 의해 찾아온 불행한 사고, 나와는 상관없이 생겨난 저주 등이 우리가 흔히 질병에 대해 생각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거의 모든 질병들은 그런 생각에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그들의 상처와 질병이 생겨난 데는 그들 자신의 동기, 실패, 선택들이 아주 깊고 밀접하게 얽히고 설켜 있다. 이렇듯 이들 모두는 자신의 상태에 대하여 어느 정도는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다. 이 문제는 최근에 알콜 중독과 관련지어서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의학계뿐만 아니라 법조계도 가담이 되었는데, 결국 알콜 중독은 질병이라고 결론이 내려졌다. 때론 알콜 중독자들이 그 누구의 피해자도 아니고 자기 자신의 피해자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악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한 개인의 악은 어느 정도는 어린 시절의 환경, 부모의 죄, 유전적 기질로까지 원인이 추적될 수 있다. 그러나 악이란 언제나 자신이 내리는 선택이기도 하다. 정확히 말하면 일련의 선택들의 총집합이라 힐 수 있다.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나는 앞서 말한 정의를 지켜오고 있다. 즉 질병 내지 질환이란 우리의 신체나 인성 구조 속에 인간으로서 잠재력 실천을 막는 어떤 결함이 있는 상태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