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즐거워하라
래리 크랩 지음 | 두란노
하나님을 즐거워하라
래리 크랩 지음/윤난영 옮김
두란노/2003년 8월/263쪽/8,500원
제1부 무거운 리듬 - 인생, 무엇이 문제인가
1장 인생을 살아가는 법칙
우리 모두는 인생이 평탄하게 펼쳐지기를 원한다. 현재보다 미래가 좀 더 나아지고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이 소원이 목적이 되고 가장 소중한 것이 될 때 우리는 ‘조건을 만족시키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인과 법칙에 따라 살려고 한다. 그래서 ‘원하는 B를 얻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A가 있다’라고 믿고 싶어한다. 우리 삶이 더 나아질 수 있는 원리를 발견하고 따르는 것에 전념하게 되는 것이다.
때로는 그 원리가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당신은 청소년기에 있는 딸이 임신했다고 고백했을 때 고함치기보다 평온을 지킴으로써 위기를 헤쳐 나가는 좋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또한 묵상 기도와 함께 성경을 읽으면서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만일 이러한 원리를 당신이 원하는 더 나은 삶을 위한 수단으로 받아들인다면 결국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이다.
성경은 인생의 원칙을 제공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이 마치 우리가 원하는 삶을 얻기 위한 인과 법칙을 가르쳐 주는 것처럼 여긴다. 인생에서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따라야 하는 원리를 제공한다고 믿는다. 이것이 성경이 인기가 많은 이유이자 성경을 읽으면서도 사람들이 바뀌지 않는 이유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형통한 인생을 살고자 할 때는, 세상 지혜를 따르든지 성경적 원리를 따르든지 결국 교만해지고 낙심하며, 또는 자기 만족이나 자기 증오에 빠지게 된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 부모가 자녀들을 꾸준히 경건하게 훈련하여 성공했다면 그 부모는 감사하기보다는 자랑스러움으로 교만해지기 쉬울 것이다. 그러한 교만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것이다.
2장 우리가 만든 삶의 방식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인생의 60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니 거의 반세기를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왔다. 오랫동안 나는 기독교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는 가장 좋은 시스템이라고 믿고 있었다. 올바르게 살면 깊은 평안을 즐길 수 있다고 믿었다. 자녀들은 우리를 존경할 것이고, 영혼은 새로워지고 쉼을 누리며, 사역은 만족스러워서 죽을 때까지 삶이 즐겁고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인과 법칙에 따라 살았던 것이다. 나는 인생이 형통하기를 원했으며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기꺼이 할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인과 법칙에 매여 사는 것은 심각한 잘못임을 성경은 특히 세 구절을 연결시켜 말씀하고 있다. 첫 번째 구절은 조건을 만족시키는 인과 법칙이 하나님으로부터 더 나은 삶의 축복을 얻는 기초를 제공하는 것처럼 말씀하신다.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신 29 : 9).” 두 번째 구절은 하나님이 이러한 인과 법칙을 무효화 시키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전의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히 7 : 18~19).” 이제 세 번째 구절을 살펴보자.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갈 4 : 3, 9).”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주는 ‘더 좋은 소망’보다 축복이 주는 ‘더 나은 삶’에 가치를 두어서, 삶의 형통을 위해 올바로 행해야 하는 부담을 갖고 방황하는 것을 책망하고 있다. 성령은 우리 각자가 세상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급진적인 순례의 길을 가도록 초청하신다. 비록 우리 영혼이 여전히 불결해 보일지라도 우리는 있는 모습 그대로 담대하고 두려움 없이 나아오도록 초청받았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에 자신을 내어 맡기며, 인생의 모든 환경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그분을 더 깊이 알아갈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이것이 성령의 새로운 길이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7 : 6).”는 말씀을 기억하라. 부담으로 인한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라!
3장 새로운 길이 열리다
엄격한 인과 법칙 아래의 삶은 실제로 불가능한 삶이다. 그러나 만일 누군가가 당신을 그 법칙에서 구해 주었다면(그 법이 불공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그것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또한 만일 행함이 아닌 ‘관계에 의한 신분 상승’으로 당신이 왕의 아들과 딸로서 살아가게 길을 열어 주었다면 당신은 그에게 깊이 감사할 것이다. 그를 더욱 가까이 하고 싶어할 것이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동화가 아니라 사실이다. 구원의 길이 열렸고 이것이 새로운 언약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언약에는 두 가지 어려움이 있다. 첫째, 우리 삶에 일어나는 것에 대해 주장하려는 주권을 포기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대로 하시도록 그를 신뢰해야 하는 것이 어렵고, 둘째, 그가 주시는 축복보다 하나님을 더 즐거워하기가 어렵다.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아 알 때까지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으로 인한 더 좋은 소망보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더 나은 삶의 축복을 좋아할 것이다. 더구나 신뢰하기보다는 주장하려는 인과 방식으로 되돌아온다.
갈라디아서의 ‘초등 학문(principles)'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문자적으로 ’연쇄‘ 혹은 ’연속‘이라는 의미가 있다. 일이 어떻게 되는지를 관찰할 수 있는 세상의 연쇄 반응은 하나님이 만드신 거룩한 공의에 근거한 연계성과는 다른 것이다. 세상의 초등 학문이라는 단어에서 바울은 인생을 자기 뜻대로 주관할 수 있다는 본성적인 의식 구조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모든 종교와 윤리적 시스템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유능한 삶을 위한 원리이다.
제2부 피곤한 세대 - 떠나야 할 길
4장 보이지 않는 벌레
에덴 동산 이후 사람들은 실제로는 남쪽으로 가고 있으면서 자신들이 북쪽으로 향하고 있다고 믿는 독특한 특성을 갖게 되었다. 우리가 하고 있는 것과 가고 있는 곳을 인식하는 도덕적 나침반이 심각하게 어긋난 것이다. 진지하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실제로는 옛 길을 가고 있으면서 새로운 길로 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지 않은가?
현대 기독교의 큰 비극은 생수의 웅덩이가 우리 영혼의 타오르는 모래 안에 갇혀서 부글거리고 있는데 그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내면에서 흘러넘치는 생수를 마시기 위해 영혼의 깊은 곳을 파헤치는 대신, 자기 기만과 형통한 삶을 위한 전략으로 그것을 덮어 버린다. 그래서 오염된 물을 마시면서도 그것이 깨끗한 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가짜 생수다. 그것은 우리를 바꿀 능력이 없다. 꿈이 깨졌을지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기 위해 인내하는 사람으로 우리를 바꾸지 못한다. 옛 길은 본성적인 자기 도취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며 일시적으로 기분을 좋게 할 뿐이다.
이것은 폭풍우가 오기 전까지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모래 위에 멋진 집을 지을 수 있다. 사과를 반짝반짝하게 잘 닦아서 이런 멋진 과일 안에는 벌레가 있을 수 없다고 당신에게 확신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어려움이 닥쳐오면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다. 이런 나는 누구일까? 나는 나 자신에게도 신비스러운 존재다. 어떤 때는 성령께서 내 안에 자유롭게 역사하셔서 기쁨과 영적인 능력이 충만하다. 그러나 또 어떤 때는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언짢고 불신에서 오는 절망에 빠진다. 그럴 때는 내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쾌락을 찾고자 하는 유혹을 받는다. 나는 새로운 길을 따라 살고 싶다. 그러나 어떤 길이 새로운 길인지 확실하지 않으므로 영혼의 좀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
5장 어리석은 열심
옛 생활의 길을 따라 살고자 하는 선택은 종종 순진해 보이고 심지어는 의롭게 보이기도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는 악을 선이라고 하고 선을 악이라고 부를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사야는 하나님 말씀을 이와 같이 대언했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사 5 : 20).”
현대 교회에는 현대화된 유대주의 사고가 침투해 있다. 바울이 살던 시대에 특히 갈라디아 교회에서는 어떤 교사들이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인정하면서도,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완전한 표준에 도달하기 위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덧붙였다. 그들은 옛 생활 방식을 오히려 격려한 것이다. 그러나 믿음으로냐 율법을 행함으로냐는 중요한 논쟁점이다. 그 어느 시기에도, 심지어는 모세의 시대에도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의 호의를 얻은 사람은 없다.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 모세와 다윗, 요나, 롯 모두 마찬가지였다. 구약의 어떤 성자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에 합당할 만큼 충분한 자격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바울은 영적 성장에 대해 잘못된 개념을 갖고 있던 갈라디아 교인들을 책망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갈 3 : 1~5).”
나는 우리의 중독증을 이해한다. 우리 안에는 깊은 열망이 있다. 우리는 열심은 있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단편적인 생각으로 우리는 지루함을 피하고 생동감을 느끼고 싶어 열심히 옛 생활 방식대로 산다. 우리가 지칠 때 안도감을 줄 만한 것을 위해 사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서 가장 큰 축복을 빼앗아 가고 무거운 짐이 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가?
6장 살아있는 거짓의 용
우리는 머리가 세 개 달린 용 가까이 살고 있다. 우리 주위의 세상, 우리를 삼키려 배회하는 마귀, 우리 안에 있는 육체가 그것이다. 용이 으르렁거릴 때마다 화산이 폭발하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때는 저녁 시간에 방문한 친구 같을 수도 있다. 원수인 마귀는 우리 삶에서 얻을 수 있는 좋은 것에 대해 감탄할 정도로 속삭인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것을 얻을 수 있는지 조건을 만족시키는 것에 집중하도록 한다. 우리의 유익에 관심을 기울이는 친근하고 좋은 의도인 것처럼 보인다. 더구나 종교적인 용어를 많이 사용해서,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행할 수 있는 것이나 그가 우리에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 주로 말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주권자이신 주님으로 생각하지 않고, 단지 도움을 주는 친구로서 인식하게 만든다.
바울은 용을 잊어버리는 실수를 하지 않았다. 천국에서 느낄 수 있으리라 약속된 좋은 것을 현세에서 누리길 원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전하는 바울의 말을 들어 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 4 : 8, 9).”라고 말하고 있다. 인생이 즐거울 것이라는 모든 소망을 포기하고 인정하면 인생을 자기 뜻대로 주관하려는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다. 바울은 하나님을 이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기 위해 살았다. 그것은 언젠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할 만큼 하나님께 지금보다 훨씬 더 가까이 나아갈 것임을 의미한 것이다.
몇 달 전 오후 3시에 나는 이를 닦고 있었다. 왜 뜬금없이 이를 닦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그때 생각지도 않게 나는 다른 세계로 걸어 들어갔다. 이를 닦는 것이 희미해지고 깊은 심령에 분명한 음성이 들렸다. 성령께서 “네가 알기 원하는 것을 말해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이 ‘다른 세계’는 15초 정도 지속되었으며 나는 얼른 아래층에 있는 내가 좋아하는 의자 곁에 가서 무릎을 꿇고 성경을 펴고 음성을 듣고자 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세 시간 동안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령의 음성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아침, 나는 5시 30분쯤에 일어나서 의자에 앉았다. 로마서 7장 6절을 펴 읽으면서 바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묵상하고 있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서 벗어났으므로 성령의 새로운 길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씀이었다. 나는 더 이상 의문의 묵은 것(옛 길)으로 살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관주에 적힌 히브리서 7장 18절과 19절을 폈다. 그런데 평소에는 익숙했던 단어가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전엣 계명(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도록 올바르게 행하는 옛 길)이 연약하여 무익하므로 폐하고.” 내 심장이 뛰었다. 계속 읽어 나갔다.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나는 크게 외쳤다. “바로 이거야!” 나는 기쁨과 소망으로 외쳤다. 나의 깊은 영혼이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나는 눈을 감고 듣기를 원했다. 나의 영혼 가운데 울리는 천국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들으며 부활한 나사로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래리, 새로운 삶의 길이 있단다. 너는 50년 동안 내 거룩함에 참여하려고 했지. 그러나 수년 동안 너는 옛 언약의 값싼 방식대로 살아왔구나. 성령은 지금도 네게 말하고 있단다. 네 형제의 죽음, 네 몸의 암, 네 어머니의 치매, 인간관계의 갈등, 상한 심령 등 이 세상에 환멸을 느끼도록 만드는 어려움을 통해서 말이다. 성령은 이 악한 세대에 축복받는 더 나은 삶에 목적을 두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며, 진정한 기쁨은 나를 아는 것에 있음을 계속 말하고 있단다. 나를 아는 것을 추구하면 더 나은 삶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기 바란다. 이제 내 피로 열어 준 새 길로 가야 할 때이다. 래리, 옛 길에서 나와서 함께 가자!”
몇 달 후 나는 가까운 친구에게 그날의 체험을 나누었다. 우리는 내 방에 함께 앉아 시간을 보냈다. 그는 나를 그의 동굴로 초대했다. 그 어두운 공간에는 그가 받은 축복들을 보여 주기에 충분한 작은 램프가 있었다. 그러나 인생에 환멸을 느끼고 있던 그는 인생이 진정한 기쁨을 줄 것이라는 희망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그는 대신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발견했다. 그러나 아직은 여전히 세마포로 감겨 있는 나사로와 같았다. 그는 가족을 실망시킬 것을 두려워했고,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느낌과 갈등했으며, 그의 일이 하찮은 것처럼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곧 그 친구의 심령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꽁꽁 묶였던 것이 풀리고 있었다. 나는 소망의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이제 때가 되었어.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갈급함에 목마를 때가 되었어. 바로 새로운 길로 살아야 할 때란 말이야!”
7장 빗나간 소원
우리는 모두 옛 길이든 새로운 길이든 어느 한 길을 걷고 있다. 그리스도를 따랐던 어거스틴도 같은 말을 했다. 어거스틴은 더 나은 삶을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는 또한 하나님 이외에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만족시킬 수 없는 영혼의 허무함을 알았다. 그 허무함은 절제할 수 없는 성적 쾌락으로 그를 유혹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리는 더 좋은 소망을 추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는 성적 쾌락보다 더 큰 기쁨을 발견했다. 이 기쁨 외에는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