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헨리 나우웬 지음 | IVP
머리말 - 우정이 시작되다이 책은 오랜 우정의 열매이다. 십여 년 전 예일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였다. 한 청년이 뉴욕 타임즈에 들어갈 기사를 쓰기 위해 나를 인터뷰하러 사무실로 찾아왔다. 30분 가량 우리 둘 다 별 관심이 없는 질문과 응답이 오가고 인터뷰는 끝났다. 그가 막 노트를 가방에 넣고 의례적으로 "감사합니다."라고 했을 때, 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어때요, 하는 일이 마음에 듭니까?" 놀랍게도 그는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아뇨, 그저 직업이니까요." "싫다면 왜 그 일을 하죠?" "물론 돈 때문이죠."
문득 나는 그가 자신의 꿈을 포기하기 직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마치 원하지도 않는 일을 하도록 강요하는 사회의 쇠창살 속에 갇혀 있는 죄수 같았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연민과 사랑을 느꼈다. 그의 예리함, 자신에 대한 솔직함, 사심 없이 나를 믿어 주는 것을 볼 때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님을 알았다. 우리 사이에 일어났던 일은, 예수님이 부자 청년을 보시고 '사랑으로 가득하셨을(막 10:21)' 때 일어났던 일과 아주 흡사한 것 같았다. 나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를 억눌린 상태에서 풀어 주고, 그가 자신의 가슴속 깊은 욕구를 성취할 방법을 발견하도록 돕고 싶은 열망이 강하게 용솟음침을 느꼈다.
몇 달 후 프레드는 나의 권유에 따라 예일 신학교로 왔고, 소설을 쓰기 위해 애쓰면서 일 년을 보냈다. 우리는 친한 친구가 되었고, 여러 해가 지난 오늘날 나는 그 우정의 결과로 이 책을 쓰고 있다. 우정이 시작될 때부터 우리는 서로의 종교적 배경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프레드는 나를 카톨릭 사제로 존경했고, 반면 나는 그의 세속적 유대교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둘 다 나이가 들고 성공, 경력, 명성, 돈, 시간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자, 우리 관계의 중심에는 의미와 목적의 문제가 자리잡게 되었다. 차이점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었고, 유사점은 더 분명해졌다. 우정이 깊어지고 견고해짐에 따라, 영적으로 같은 기반을 갖고자 하는 열망은 더욱 뚜렷해졌다. 유태인인 그는, 명백히 기독교적인 용어나 오랜 교회 생활에 근거를 둔 말로는 위로나 도움을 전혀 얻을 수 없었다.
프레드의 친구들을 알게 되고 점차 그들의 흥미와 관심에 공감하게 됨에 따라, 나는 세속화된 사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영성에 대해 말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그의 말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그와 그의 친구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영성에 대해 무언가를 말해야 한다는 그의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교수님은 뭔가 하실 말씀이 있습니다." 프레드는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가장 깊은 갈망에 대해, 우리의 수많은 소원과 희망에 대해 이야기해 주십시오. 생존 전략에 대해서가 아니라 신뢰에 대해서, 정서적 욕구를 채우는 새로운 방법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해 주십시오. 변화무쌍한 우리의 관점보다 더 큰 비전에 대해, 대중 매체의 소음보다 더 깊이 있는 목소리에 대해 들려주십시오. 그렇습니다. 우리들보다 위대한 그 무엇이나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해 주십시오….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해 주십시오."
나는 개인적인 편지를 쓰듯이 직접적으로 말하려고 결심했다. 나는 프레드와 그의 친구들에게 관심을 집중함으로써만 마음속에 있는 것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었다. 우리 시대와 사회의 중요한 모든 문제를 다룰 수는 없지만 생명, 빛, 진리를 깊이 추구해 나가는 길동무로서 내가 알고 사랑하게 된 친한 친구에게 편지를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적 추구에 대해 '경청하기를', 또 여기에 동참하기를 소망한다.
사랑받는 자가 되다자네가 자네와 자네 친구들을 위해 영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를 써 달라고 한 이후로, 나는 자네가 내 편지를 다 읽었을 때 정말 꼭 기억하길 바라는 한마디가 있는지 계속 생각해 보았네. 지난 한 해 동안 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그 특별한 단어가 서서히 떠올랐지. 바로 '사랑받는 자'라는 단어였네. 난 그 단어가 자네와 자네 친구들을 위해 내게 주어진 단어라고 확신하고 있네.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로, 나사렛 예수의 세례 이야기에서 이 단어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6-17)."
수년 동안 이 말씀을 읽고 설교도 하고 강의도 했지만, 이 말씀이 내가 속해 있던 종교의 한계를 넘어서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우리가 뉴욕에서 대화를 나눈 이후였지. 수많은 대화 덕분에 난 이런 확신을 갖게 되었네.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라는 이 말은 모든 인류를 향한 가장 깊은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지.
프레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네가 사랑만이 지닐 수 있는 온유함과 능력으로 자네에게 주어지는 이 말씀을 듣게 되는 것뿐이네. 나의 유일한 소망은 자네의 존재 구석구석에서 이 말씀이 울려 퍼지게 되는 것이네. 자네에 대한 우정으로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물은, 자네가 사랑받는 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네. 또 나는 그 사실을 나의 것으로 주장할 수 있을 때에만 그것을 자네에게 선물로 줄 수 있네. 우정이란 게 무엇인가? 우리가 사랑받는 자가 되었다는 선물을 서로 나누는 것이 아니겠는가?
정반대의 목소리로 가득한 세상에서 그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닐 걸세. 우리가 가치 없고 사랑스럽지 못하다는 목소리를 믿게 될 때, 성공, 명예, 권력은 쉽게 매력적인 해결책으로 다가오지. 그러나 진짜 함정은 자기 거부일세. 아마도 자네는 자기 거부보다도 교만이라는 유혹에 더 빠지기 쉽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네. 그러나 사실 교만이란 것도 자기 거부라는 동전의 다른 면이 아니겠는가? 영적인 삶의 가장 큰 적은 바로 자기 거부일세. 그것이 우리를 '사랑받는' 자로 부르신 거룩한 목소리를 부인하게 하기 때문이지. 사랑받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 존재의 핵심 진리를 표현한 것이네.
자네를 사랑받는 자로 부르신 그 목소리에 아주 세심하게 귀기울이는 순간마다, 자네는 더 오래 그리고 더 깊게 그 목소리를 듣고 싶어하는 내면의 욕망을 발견하게 될 걸세. 그것은 사막에서 샘을 발견한 것과도 같지. 일단 물기가 있는 땅을 접하게 되면 더 깊이 파고 싶어하지 않겠는가? 난 요즘 파고 들어가는 일을 하고 있네. 그리고 이제 막 건조한 사막을 뚫고 솟아나는 작은 물줄기를 발견했네. 나는 계속 파 들어가는 작업을 해야만 하네. 그 작은 물줄기는 사막 같은 내 삶 안에 깊숙이 숨어 있는 거대한 저수지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이지. 우리 삶에는 아주 거대한 모래더미가 있을지도 모르네. 그러나 우리의 갈증을 해갈시키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그분이, 우리가 그 모래를 제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걸세.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물을 발견하고자 하고 그 물을 마시고자 하는 강한 열망뿐이네.
이제 더 이상 자네를 복잡하게 만들뿐인 탐색 작업에 말려들 필요가 없음을 확신시켜 주고 싶네. 자넨 교묘한 세상의 희생자가 되어서도 안 되고 어떤 종류의 중독에 빠져서도 안 되네. 자네는 지금 진정한 내면의 자유를 향해 팔을 뻗어 그것을 더 확실하게 발견하기로 결심해야 하네.
자네가 사랑받는 자로서의 여행을 시작하겠다는 의사가 있다면, 자네에게 할 말이 더욱 많네. 영적인 삶의 여정은 결단을 요구할 뿐 아니라, 건너갈 지형에 대한 지식도 필요로 하기 때문이지. 난 자네가 우리의 영적 선조들처럼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방황하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네. 또 내가 머물렀던 것만큼 그 곳에 머물게 하고 싶지도 않네. 자넨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가장 귀한 친구가 아닌가! 누구나 스스로 배워야 하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가 저질렀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해줄 수는 있다고 믿네. 영적 생활의 지형에 대해서는 안내가 필요하네. 나는 이제부터 자네의 안내자가 되고 싶네. 따라가는 일에 계속해서 흥미를 느끼기 바라네.
사랑받는 자가 되어 가다자넨 실용주의적인 기질이 다분하니까, 우리가 어떻게 사랑받는 자가 된 상태에서 온전히 사랑받는 자가 되어 갈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하겠지. 이건 아주 중요한 질문이네. 이 질문이 우리를 낭만주의나 이상주의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일상생활의 아주 구체적인 부분을 다루게 하니까 말일세. 사랑받는 자가 되어 가는 것이란, 실제로 매시간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일상사 속으로 그 계시된 진리를 붙잡는 것이네. 우리 내면의 가장 깊숙한 곳에 우리가 사랑받는 자가 되었다는 진리가 자리잡고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 진리를 온전히 주장함으로써 가장 큰 즐거움과 평화가 생겨난다면, 그것은 우리가 먹고 마시고 말하고 사랑하고 놀고 또 일하는 와중에서 생생하고 실제적으로 드러나게 되지.
사랑의 성령께서 어떻게 우리가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분투에서 역사하시며, 우리가 어떻게 이 역사를 확인하는 훈련을 개발하고 행동으로 그에 반응할 수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나는 '선택받은(taken), 축복받은(blessed), 상처받은(broken), 나누어주는(given)'이라는 네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도움이 됨을 알게 되었네. 내가 이 단어를 선택한 이유는, 이것들이 내 존재에 아주 깊이 새겨졌을 뿐만 아니라, 이것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가 되어가는 방법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네.
1. 선택받은 자사랑받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붙잡힌 존재가 되었음을 주장해야만 하네. 영적인 삶의 첫 단계는, 우리의 전 존재가 이미 붙잡힌 바 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네. 거절과 거부로 둘러싸여 있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놓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영적 투쟁이기도 한 이 투쟁을 위해 어떤 지침이 있을까?
첫째, 자네는 자네에 대한 세상의 거짓된 속삭임을 계속해서 밝혀야 하네. "이 느낌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이건 나 자신에 대한 진리가 아니야. 나는 날 귀히 여기셔서 영원 전부터 사랑받는 자로 부르시고 그 영원한 품에 안전하게 품고 계신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녀야."
두 번째로는, 자네에 대한 진리를 말해 주고, 선택받은 자라는 자네의 가장 근본적인 정체성을 상기시켜 주는 장소와 사람들을 계속해서 찾아야 하네. 또한 삶과 말씀을 통해 우리를 그 진리로 돌아오게 하는 역사상의 수많은 사람에게 귀를 기울여야 하네.
세 번째로, 자네가 선택받은 사실을 계속해서 감사해야 하네. 감사는 자네가 '우연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받은 존재라는 의식을 심화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네. 사랑이 사랑을 낳듯이 감사는 감사를 낳지.
내 경우, 이 세 가지 지침은 선택받은 자로 살기 위한 영적 훈련이었네. 마음의 훈련을 계속했을 때, 나는 나의 그늘을 뛰어넘어 나의 진리에서 나오는 빛으로 들어갈 수 있었네. 또한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역시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은 열망을 곧 발견하게 되었지. 다른 사람들 역시 선택받았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는 것, 그건 선택받은 사실이 주는 커다란 기쁨이네.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신뢰하기만 하면, 다른 사람들의 귀중함도, 하나님 마음속에 있는 그들의 독특한 자리도 인식할 수 있게 되네. 우정이란 서로가 선택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하나님이 귀히 보시는 존재라는 사실을 서로 확인하는 것이네.
선택받았다는 것은 사랑받는 자가 되는 일의 토대가 된다네. 선택받았음을 주장하는 것은 평생에 걸쳐 일어나는 투쟁이지만 또한 전 인생의 기쁨이기도 하지. 우리가 그 사실을 더 깊이 주장할수록 사랑받는 자의 다른 측면을 더 쉽게 발견할 수 있네. 우리에게 부어지는 축복 말일세.
2. 축복받은 자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인 우리는 축복받은 사람들이네. 누군가를 축복한다는 것은 칭찬과 비난의 구분을, 미덕과 악덕의 구분을, 선행과 악행의 구분을 넘어서는 것이지. 그것은 다른 사람의 근본적인 선함에 다가가는 것이며, 그가 사랑받는 자 되었음을 일깨워 주는 것이네. 우리가 서로에게 주는 축복은 영원 전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복을 표현하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진정한 자아에 대한 가장 심오한 확증이네. 선택받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네. 우리는 또한 계속되는 축복을 필요로 하네. 우리는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그분은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않고 오히려 삶의 순간마다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새로운 방식으로 듣게 해주는 축복을 말일세.
예수님도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고 나서 축복의 음성을 들으셨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말이 바로 축복이지.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찬양과 비난, 사랑과 저주 가운데서 예수님을 지탱시켜 준 것이네.
보통 저주받고 있다고 느끼는 기분은 축복받고 있다는 기분보다 더 쉽게 생기는 법이지. 그리고 그러한 감정을 계속 키워 내기에 충분한 논거들도 찾을 수 있네. 우리는 내면에서 우리 자신이 악하고, 나쁘고, 썩었고, 가치 없고, 쓸모 없다고 하는 소리, 질병과 죽음으로 끝나 버릴 운명에 불과하다고 하는 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네. 그러나 이러한 시끄럽고, 난폭하고, 소란스러운 저주들은 진리가 아니네. 그것들은 거짓말이지. 믿기 쉬운 거짓말, 그러나 분명히 거짓말이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축복을 듣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축복받았다는 사실이 단지 감상이 아니라 일상 생활을 형성하는 진리라면, 우리는 분명하게 이 축복을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어야 하네. 이제 자네가 축복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도록 두 가지 제안을 하겠네. 그것은 기도 그리고 함께 거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네.
나에게는 기도가 축복의 음성에 귀기울이는 점점 더 좋은 방법이 되고 있네. 그것은 고된 훈련이네. 마음 깊숙한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귀기울이기 위해 오랫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 본 적이 있나? 우리 세계의 소리를 넘어서 침묵 속으로 들어가기가 쉬운 일은 아니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고독을 감싸 안고 침묵과 친구가 되려 한다면 그 축복의 목소리를 알게 될 걸세. 나는 환청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귀, 내적인 마음의 귀로 들을 수 있는 목소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네. 하루에 30분씩 사랑의 음성에 귀기울이는 훈련을 지속해 나간다면, 서서히 자네가 의식하지도 못하는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할 걸세.
그리고 두 번째로 제안하는 것은, 함께 거하는 삶을 계발하라는 것이네. 거리에서 우리를 멈춰 서게 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축복, 새 생명에 대해 알려주는 신선한 꽃과 나무들의 축복, 음악, 미술, 조각, 건축의 축복 등.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큰 축복도 있네. 바로 감사, 격려, 애정, 사랑의 말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는 축복이지. 우리는 그 축복들에게 다가가야 하고 그것들을 받아들여야 하네. 그것들은, 은밀하게 숨어 있는 목소리를 부드럽게 기억나게 하지. 우리의 이름을 부르고 우리에 대해 좋은 것을 말씀해 주시는 그분의 목소리를 말일세.
우리가 축복받았음을 주장하는 것은 항상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싶은 깊은 욕망으로 이어진다네. 축복받은 사람의 특징은 그들이 어디를 가든, 항상 축복의 말을 한다는 것이네. 자네가 축복받았다는 사실에 접하게 될 때, 다른 사람을 축복하거나, 그들의 장점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그들의 아름다움과 진실함을 이끌어내는 일이 얼마나 쉬워지는지 알면 놀랄 걸세. 축복받은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을 축복하네. 내면에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고 우리를 축복하는 목소리를 들을 때, 어둠은 더 이상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지 못하네. 우리를 사랑받는 자로 부르신 그 목소리가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단어들을 알게 하실 것이고, 그들도 우리와 동일하게 축복받은 존재임을 보여 주실 걸세. 우리가 진정으로 이 진리를 소유한다면, 우리는 열린 눈을 가지고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볼 수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