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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란 무엇인가

김세윤 지음 | 두란노
복음이란 무엇인가

김세윤 지음

두란노/ 2003년 4월 / 213쪽 / 7,000원



1부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



1장 하나님 나라의 이해를 위한 배경과 전제

1. 구약과 유대교적 배경

우선 '하나님의 나라' 혹은 '하늘나라(마태복음 판)'라는 말은 고정된 표현으로서는 복음서들에 흔히 나오고, 복음서 용어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문서들에는 종종 등장합니다. 반면, 이 표현은 구약에는 나오지 않고 유대문서에도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은 구약과 유대교에 존재하고 있던 개념으로 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리시고 온 땅을 다스리신다는 사상은 구약과 유대교의 한 중심사상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에 의와 평화, 자유와 풍요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구약에는 하나님은 “왕이시다."라는 명사적 표현과 하나님이 “다스리시다.”라는 동사적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이따금 ‘그의 나라’라는 말이 나오기도 합니다. 특히 다니엘 2장과 7장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매우 중요한 배경을 제공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내용적으로 구약과 유대교에 배경을 두고 있습니다.

2.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있어서 네 가지 전제들

① 창조사상 -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자로서 온 우주의 통치자, 곧 왕이십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후에 하늘을 자신의 거처지로 삼고 땅에 아담을 자신의 대리자로 세우셨습니다. 이는 인간을 자신의 ‘대리자’로 세웠다는 뜻입니다(창1:28). 그러므로 아담은 하나님의 부왕(副王)입니다.

② 타락사상 - 타락의 핵심은 하나님의 부왕인 아담이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 것입니다. 아담이 스스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고 땅을 통치하려 하므로 땅 위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단은 아담에게 자기 스스로 하나님같이 되도록 아담의 자기주장 의지를 충동했습니다(창3:5). 그 결과 아담은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나 사단의 통치 아래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스스로 신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생명을 확보하려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신학적 용어로 ‘교만’이라고 합니다. 창조주에게 의존/순종하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자신의 삶을 주관하고, 자신의 내재적 자원으로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확보하려는 이 교만은 아담(인간)이 자신의 창조주에게 등을 돌리는 행위요 그와의 관계를 단절하는 행위였습니다. 신학은 이것을 ‘죄’라고 합니다. 하나님 같이 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죄의 본질입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을 덕 입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내재의 자원에 스스로 갇히게 되었습니다(참조 롬1:24, 26, 28).

인간은 영원하지도 무소부재하지도 않은 존재입니다. 인간은 시간 속의 존재이기 때문에 변화에 속박되어 있고, 그러기에 늙고, 쇠약해지고, 병들고, 죽는 것입니다. 또한 장소의 제약 속에 갇혀 있기에 부자유합니다. 아울러 지혜와 능력이 부족해서 불안하고 모든 문제들 속에 빠집니다. 사랑이 부족하기에 갈등이 있습니다. 이렇게 불안, 병고, 압제, 빈곤, 갈등, 죽음 등 모든 형태의 고난이 결국 인간의 유한성 곧 결핍성에서 비롯됩니다. 고난은 죽음의 증상입니다. 실존의 모든 형태의 고난은 죽음의 증상들입니다. 생명의 근원인 창조주로부터 격리된 결과로 죽음이라는 병에 걸리게 된 것입니다.

구원은 이 죽음의 권세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죽음의 증상들과 고난이 더 이상 없는 온전한 삶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지금의 우리의 실존을 죽음의 권세 아래 있고 죽음병에 걸린 것이라는 관점에서 말할 때 구원은 단순히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 또는 ‘생명’을 얻는 것이라 말합니다(예 : 요5:21~29). 그러나 성경이 지금 우리의 실존을 죽음의 권세 아래 있기는 해도 살아있는 것으로 보는 관점에서 말할 때는 구원을 현재적 삶과 구분하여 ‘영생’이라 합니다(예 : 요5:24). ‘영생’이란 원래 히브리어 ‘오는 세대(세상)의 삶’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을 다시 현대어로 번역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 뜻은 단지 시간적으로만 끝없이 길어진 영원한 삶이라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오는 세대’, 곧 구원의 시대의 삶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나라에서의 삶이란 뜻으로서,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으로 이루어지는 삶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영생’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적(神的)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론하건데, 자만의 삶을 살려고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 인간(아담)이 사단의 통치 아래 떨어져 죽음에 처해 있다는 것과 그러기에 그들이 다시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회복되어 사랑의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주심을 덕 입어 살아야 한다는 것이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한 전제입니다.

③ 언약사상 - 하나님나라 선포의 세 번째 배경은 의의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로 작정하고 구원의 행동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에서는 언약사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언약’이란 하나님이 한 무리의 사람들을 선택해서 그들에게 하나님 노릇해주시기를 약속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가 나의 백성이다.”는 언약형식으로 표현됩니다.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인도하시고 복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들만을 위해서였습니까? 선지자 이사야 등이 갈파하듯이, 그것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빛(하나님의 계시)’과 ‘구원’의 전달자로 삼아서 온 인류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알도록 하고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예 : 사42장, 46장, 49장). 이러한 언약관계는 야훼 하나님이 ‘왕’이시고, 이스라엘이 그의 ‘백성’으로 하나님이 ‘아비’이시고, 이스라엘이 그의 ‘아들(맏아들)’로, 또 하나님이 ‘목자’이시고, 이스라엘이 그의 ‘양떼’, 하나님이 ‘신랑’이시고, 이스라엘은 그의 사랑하는 ‘신부’라는 여러 가지 그림언어들을 사용하여 표현되었습니다.

④ 종말사상 - 마지막 전제는 하나님 노릇해주시기로 약속한 하나님이 드디어 이 세상에 오셔서 악의 세력을 심판하시고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리라는 종말 사상입니다. 하나님의 오심은 사단이 죄악과 죽음으로 통치하는 이 세대의 ‘종말’을 의미하며, 하나님이 의와 생명으로 통치하는 새 세대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살핀 구약과 유대교의 이 네 가지 전제들을 배경으로 이제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장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

1. 가까운 장래에 올 하나님 나라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곧 올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때가 차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마4:17).”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임박한 하나님 나라가 더 빨리 오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른바 ‘주기도문(마6:9-13, 눅11:2-4)’은 하나님 나라 복음을 가장 잘 요약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의미심장하게 부른 후에 사실상 세 가지 청원을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우리도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하겠나이다).” 이 세 청원들 중 가장 근본적인 것은 물론 첫 번째 청원입니다. 둘째와 셋째, 곧 일용할 양식의 공급과 죄 용서는 첫째, 즉 하나님 나라가 오는 결과로 주어지는 복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오도록, 그리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양식을 공급받고 죄의 용서를 받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6장의 산상수훈에 나타나는 주기도문 강해는 바로 이 세 마디를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는 먼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죄 용서를 받는 사람은 이웃을 용서해야 함을 강조합니다(마6:14-15). 이것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우리도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하겠나이다).” 청원에 대한 주해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등의 삶의 근본적 필요들에 대한 실존적 불안에서 재물을 많이 쌓아 그것으로부터 안녕과 행복을 얻으려는 태도, 곧 맘몬(재물)에 대한 우상 숭배를 심각하게 경고합니다. 맘몬이즘은 사단의 통치의 가장 절실한 표현입니다. 예수는 새도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입히시는 자애로운 창조주 하나님의 아빠 노릇에 의지하는 자세, 하루하루 그날을 위한 양식을 구하는 자세로 살라고 가르칩니다(마6:25-32). 예수는 주기도문에 대한 이러한 강해를 다음과 같이 결론 맺습니다. “먼저 그(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들도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마6:33).”

여기서 우리는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해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나라”는 주로 하나님의 다스리심이라는 역동적 의미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즉 사단의 통치를 대치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의 옴은 아담적 숙명이 뒤집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의 용서와 결핍으로부터의 해방으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로 회복됩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됨은 이웃과도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됨으로써 인간들은 “의인들”이 되고 그들의 사회는 샬롬(화평/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2. 예수의 하나님 나라 묘사의 특징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의 것들을 사용하여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것들과 이 세상의 것들을 직접 동일시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구체성을 피하여 비유로 말합니다. 예수가 묵시문학의 환상적인 언어와 랍비문학의 물질적 언어를 피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을 보호하면서 그것의 신학적인 뜻에 집중하고자 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뜻을 존중하여,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을 생각할 때 묵시문학적 신비주의에 빠지는 것도 경계해야 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 이루어질 어떤 물질적 체계로 생각하는 것도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초월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것들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에 불과하지 그것의 실체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비유들의 신학적인 의미에 집중해야지 그것들을 물질적인 것들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주로 잔치의 비유, 특히 혼인잔치의 비유를 통해 묘사했습니다. 잔치는 풍요함, 만족, 기쁨, 사랑 등을 상징합니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잔치” 비유로 그리면서 설명하려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은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으로 이루어지는 삶,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삶, 하나님적 생명, 곧 “영생”입니다. 예수는 또한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음”의 비유로도 표현했는데,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 사단의 나라에서 우리의 결핍으로부터 해방되고 창조주의 무한한 부요함을 상속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실현

․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다.”

하나님 나라가 아주 가까운 장래에 오리라고 선포한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벌써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실현되고 있음을 또한 강조했습니다. 누가복음 11:14~22을 보면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는“하나님의 손가락”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눅11:20). 마태복음에서는 “하나님의 영으로”, 즉 성령에 힘입어 쫓아냈다고 말합니다(마12:28). 즉 예수는 자신이 초월 하나님의 내재에 작용하시는 힘으로 귀신을 쫓아내서 귀신들린 사람들을 사단의 손아귀에서 해방시키고 치유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자신이 사단의 왕국(집안)에 포로로 잡힌 사람들을 해방하고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사단의 나라에 침투하여 사단을 “묶었기” 때문이라고 암시합니다. 이것은 예수가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을 때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소명을 받고 하나님의 영을 힘입은 후 사단과의 첫 대결에서 이기신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시험기사: 막1:12~13, 마4:1~11; 눅4:1~13). 예수는 자신의 사역 전 과정을 사단과의 투쟁과정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를 줄곧 시험하여 아담과 같이 자신의 통치 아래로 떨어뜨리려 한 사단은 드디어 십자가에서 예수에게 자신의 최후의 무기인 죽음으로 공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부활시켜서 사단을 이기게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은 전쟁을 결판낸 승리의 날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치유를 병행시켰습니다. 예수의 치유는 그가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실재가 되게 하는 사건입니다.

․ 하나님 나라와 치유에 대한 올바른 이해

오늘 우리의 복음 선포에도 항상 치유가 일어나야 합니다. 보통 신자들은 하나님의 치유를 육신의 병고 제거에만 국한해서 이해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치유는 육신의 병고 제거뿐만 아니라, 갈등의 제거, 경제적 빈곤의 제거, 정치적 억압의 제거 등과 같이 포괄적으로 나타납니다. 죄인들을 회개시켜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하고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이웃과 샬롬의 상태 속에서 살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사랑의 이중 계명(하나님에 대한 혼신을 다한 사랑 그리고 내 몸 같은 이웃에 대한 사랑)의 요구로 옵니다. 우리가 사랑의 이중계명을 지킬 때, 만인의 인권도 보장되고, 사회적/경제적 정의도 일어나고, 평화와 자유도 확대되어 우리의 삶이 건전해지고 또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현재적 모습이고, 하나님 나라의 치유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로지 성령의 역사에 힘입어서만 사랑의 이중계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임한 하나님의 통치가 성령의 힘으로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어떻게 죽음의 세력을 몰아내고 생명을 일으키는지(우리의 삶을 ‘치유’하는지)에 관심을 가지면, 우리의 신앙은 오순절 신학과 같이 오로지 질병을 ‘기적적’으로 제거하는 것만 추구하는 나머지 미신화하는 것도 피하고, 전통적 개혁신학과 같이 추상화되고 관념화되어버리는 것도 피할 수 있습니다. 누가 과연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영의 역사를 제한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감히 이제는 성령이 더 이상 우리의 심신의 ‘기적적’ 치유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반면에, 누가 감히 성령은 오로지 심신의 영역에서만, 기도와 안수를 통해서만, 그리고 ‘기적적으로’만 역사하신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의사의 투약과 수술을 통한 치유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역사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일반계시와 일반은총을 통해 심지어 불신자 의사도 사용하십니다.

․ 안식일에 치유하심

“왜 예수는 그의 반대자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에 치유를 하려고 하였을까?” 예수는 사단의 통치 이전의 생명의 충만함 가운데서 있었던 태초의 안식을 기념하며 사단의 통치가 종식되는 종말, 곧 새 창조 때 생명의 충만 가운데 있을 안식을 희구하는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함으로써 이제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가 극복되고 하나님의 구원 통치가 시작되어 드디어 진정한 안식이 있게 되었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곧 종말에 진정한 안식을 가져올 하나님의 나라(통치)가 벌써 시작되어 (질병으로 그 증상을 나타내는) 죽음이 극복되고 생명이 일으켜지게 되었다는 것을 시위하고자 한 것입니다.



3장 하나님 나라는 언제 오는가?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완전히 옴은 미래의 사건이지만 현재에 벌써 실현되기 시작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다수의 학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출범’과 ‘완성’의 구도로 설명합니다. 즉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온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오심으로 하나님의 통치는 이미 실현되기 시작하여, 미래의 ‘완성’을 향하여 벌써 ‘출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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