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유진 피터슨 지음 | IVP
30년 전 이스라엘은 블레셋인들에게 법궤를 빼앗긴 적이 있다(삼상 4-7장). 다윗이 왕이 되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통치권 확립 작업이 끝나자, 새로운 수도로 법궤를 가져오게 한다. 그런데 법궤를 되찾아오는 길에 웃사는 죽었고 다윗은 춤췄다. 법궤는 죽게 하는 계기이기도 하고 춤추게 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법궤 수도원 : 몇 년 전, 나는 아내와 몇몇 친구들과 함께 다윗이 살았던 고장에서 하루를 보낸 적이 있다. 우리가 서 있던 곳은, 30년 동안 법궤가 유배되었던 아비나답 제사장 집이었다. 우리가 서 있던 곳은 다윗이 통치와 예배의 새로운 중심지 예루살렘으로 법궤를 모셔가기 위해 왔던 곳이다. 우리는 성경을 꺼내어 함께 사무엘하 6장을 읽었다. 그리고 예배에 대해서, 또 예배하기 위해 우리 각자가 걸어온 길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의 발 아래에 엎드려 경배하자! : 그리고 나서 우리는 본문 이야기와 밀접하게 관련된 다윗의 시편, 시편 132편을 가지고 함께 기도했다. (시 132편 본문 생략)
법궤 : 예루살렘으로 옮겨진 법궤는 이스라엘과 유다 지파들을, 다윗의 통치뿐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리심 밑에 모으는 구심체가 될 것이다. 아비나답의 두 아들 웃사와 아히오가 짐수레에 법궤를 실어 나르던 중에 수레가 한쪽으로 기울었고 법궤가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웃사는 법궤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반사적으로 손을 갖다 대었다. 그 순간 그는 쓰러져 죽었다.
웃사의 죽음 : 웃사는 왜 죽었을까? 왜 하나님은, 그를 치셨을까? 수세기에 걸쳐 반복해서 등장한 한 가지 통찰이 있다. 주제넘게 하나님 관리책임자 행세를 하려 들면 죽게 된다는 것이다. 웃사는 하나님을 책임 관리하는 담당자였으며 계속해서 담당자 자리에 있고자 했다. 그는 그가 원하는 곳에 하나님을 집어넣고 계속 가두어 놓고자 한다. 이러한 삶의 최종 결과는 죽음이다.
다윗의 춤 : 왜 다윗은 춤을 추었을까? 다윗은 하나님에 관해 웃사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던 무언가를 알았던 것이다. 다윗은 결코 하나님 관리 책임자 행세를 하지 않았다. 다윗은 하나님께 화를 내었지만 죽지 않았다. 적어도 그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했던 것이다. 그는 그저 경배하며 살아계신 하나님께 반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갈의 조롱 : 다윗의 아내 미갈은 다윗이 법궤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를 업신여겼다. 왜 좀더 왕다운 품위를 지키지 못하는 것일까? 미갈에게 하나님은 단지 사회적 편의 장치, 정치적 지지물에 불과했다. 그러나 다윗은 신경 쓰지 않았다.다윗은 거침없이 전진했다. 하나님이 통치자인 것이다. 다윗은 보통 의미로서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왕이심을 증거하는 자로서의 왕이다. 다윗은 자신의 보좌를 하나님의 통치를 전하는 강단으로 사용한다. 다윗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에 대한 이미지와 확신이 흠뻑 배어 있다.
하나님께 '집'을 지어 드리기로 결심한 다윗 : 다윗은 자신에게 복을 주셨고 약속을 이루셨으며 정의롭게 심판하셨던 하나님께 벅차오르는 감사를 느꼈다. 그는 그토록 많은 것을 주신 하나님을 위해서, 성소를 지어 드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단에게, '하나님을 위한 다윗의 건축계획'이 '다윗을 위한 하나님의 건축계획'에 방해가 됨을 보여 주셨다.
앉은 다윗 : "다윗 왕이 성막으로 들어가서, 주 앞에 꿇어앉아….(삼하 7:18)" 다윗은 하나님 앞에 앉아서 왕으로서의 주도권을 포기하고 권세를 내려놓고 권좌에서 내려와 그의 왕이신 하나님 앞에 잠잠히 그리고 겸손히 나아갔다.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 가운데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계획을 품었던 다윗. 그런 다윗을 멈춰 세운다는 것은 마치 한 무리의 도망치는 말을 따라잡아 멈춰 세우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나단은 그를 멈춰 세웠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다윗은 자신을 멈춰 세우시는 하나님께 순종했다.
전략적으로 '아무 일도 안 하기' : 때로는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앉았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차리는 것, 자신의 계획 대신 하나님의 계획을 따르는 것, 자신의 권위와 힘으로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내는 왕이기를 포기하고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주권에 참으로 순종하는 왕이기를 선택한 것이었다.므비보셋은 다윗과 가장 절친했던 친구 요나단의 아들이다. 다윗 이야기에서 므비보셋의 이름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삶에 헌신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법을 전해 준다.
므비보셋(1) : 사울 왕과 요나단 왕자가 길보아 산에서 블레셋인의 손에 죽었다는 소식이 전달되었다. 므비보셋의 유모는 당시 다섯 살이던 아기를 업고 허겁지겁 달려가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그 후로 므비보셋은 다시는 걷지 못하는 절름발이로 자라났다. 므비보셋은 그 때부터 세상을 향한 원한 속에 갇혀 자신의 참된 정체성과 자신이 처한 삶의 한계 문제를 회피하는 데 익숙했다. 그에게 있어서 그토록 험악하고 비열하고 무정한 세상은 곧 다윗의 얼굴이기도 했다.
므비보셋(2) : 이제 므비보셋은 성인이고, 여전히 지독한 불구였다. 그런데 어느 날 낯선 사람들이 찾아와 다윗 앞에 출두하라는 명령에 그는 공포밖에 느낄 수 없었다. 다윗의 궁전으로 인도된 므비보셋에게 다윗은 이름을 불러주며 그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일전에 요나단과 맺었던 맹세대로, 므비보셋에게 조부 사울의 모든 소유지를 넘겨주고 사울의 종이었던 시바로 하여금 돌보게끔 한다. 그는 므비보셋을 가족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였고, 매일 세 끼 식사로 사랑을 더욱 굳건하게 한다. 이것이 관대하게 아낌없이 넘치도록 내어주는 사랑이다.
므비보셋(3) : 세 번째 므비보셋 이야기는 여러 해 후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던 기간(삼하 16-19장)에 나온다. 압살롬의 반란으로 다윗은 몇몇 충성스러운 신하들만을 거느린 채, 예루살렘에서 탈출한다. 므비보셋의 하인인 시바는 그 탈출의 밤에 자신의 상전 므비보셋이 왕이 될 기회를 포착하고자 배신했다고 이야기한다(삼하 16:1-4). 그 후 승리의 재입성을 하는 다윗에게 므비보셋은 시바가 자신을 배신하는 바람에 제대로 걷지 못하는 자기로서는 꼼짝 못하고 있었다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삼하 19:24-30). 그런데 이 두 이야기에 대해 다윗은 뜻밖의 반응을 보인다. 다윗은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를 따지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저 두 사람 모두를 자신의 도시와 집으로 다시 받아들였다. 그는 므비보셋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한다.다윗과 관련해서 결코 잊지 못하는 두 이름이 있다. 하나는 거인 골리앗이고 또 하나는 여인 밧세바다. 그 둘은 모두 다윗을 일종의 시험장, 곧 그의 속마음이 어떠한지를 드러내는 만남의 자리로 데려간다. 골리앗과의 만남은 다윗이 기도의 사람이었음을 드러내주며, 다윗은 밧세바와의 만남을 통해서, 기도하는 사람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게 된다.
죄짓는 다윗 : 봄이다. 다윗의 군대는 출전 중이다. 그러나 다윗은 뒤에 남았다. 집에 남았다는 것은 그의 영혼의 빈혈 증세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어느 날 오후 다윗은 궁전 옥상에서 우연히 한 여인이 목욕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녀는 너무도 아름답다. 그는 그녀를 데려오게 해서 잠자리를 같이 하고, 그 다음에는 내팽개치듯 그녀를 돌려보낸다. 그녀의 이름은 밧세바다. 그녀의 남편 우리아는 그 때 싸움터에 나가 있었다. 한 달쯤 지났을 때, 밧세바는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알고 다윗에게 전갈을 보낸다(삼하 11:5). 이제 문제를 다루는 데 능수능란해진 다윗은 이 일을 은폐하기 위해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불러들여 그에게 한 달의 휴가를 줌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그러나 계략이 먹혀들지 않자 우리아를 죽을 것이 확실한 전방에 배치시켜서 전사하게 한다. 애도의 기간이 끝나고, 다윗은 밧세바를 데려와 그녀와 결혼한다. 죄가 대부분 그렇듯이, 다윗의 죄 역시 은밀하고 점진적인 과정을 거친다. 죄를 짓고 또 짓고 있다는 사실에서 다윗과 우리가 서로 다를 바가 없다. 자신이 다윗과 동일한 부류의 죄인임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복음 이야기를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된다!
설교하는 나단 : 이 이야기의 복된 전환점은, 다윗의 목사 나단이 등장하여 그에게 설교를 들려줄 때다. 나단의 설교를 한 마디 한 마디 들을수록, 다윗은 점점 더 종교적이 되어간다. 애지중지하는 양을 잃은 가난한 사람에 대해서는 동정심을 느끼고 그 양을 빼앗은 부자에 대해서 분개한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복음이 정확히 초점을 맞춘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다. 바로 당신이. 이것이 바로 설교자들이 해야할 일이다. 나단은 이 예술의 명수였다.
'펠릭스 쿨파' : 복음을 아는 사람들은 "내가 주께 죄를 지었습니다."라는 선언이 실은 소망이 가득 담긴 선언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으로 가득찬 선언이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한 말로 여겨지는 라틴어 어구 '펠릭스 쿨파(felix culpa)'는 "오, 경사스런 죄여!(O happy sin!)"로 나의 죄를 인지하고 고백할 때에야 비로소 나를 나의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인지하고 응답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해야할 가장 주된 임무는 죄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범한 죄를 인지하는 것이다.
기도하는 다윗 :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다윗을 찾아온 나단은 그 날 그에게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회복시켜 주었고 동시에 비유 설교를 통해 죄에 대한 감각을 일깨워 주었다. 다윗의 마음은 녹아내렸다. 다윗은 나단의 힘있는 설교를 통해 밧세바와 간음하고 우리아를 죽인 표면적인 죄 이전에 자신이 하나님을 모독한 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윗의 시편 51편은 하나님을 다시 찾은 것에 대한 감동적인 고백의 시다. 다윗의 죄가 아무리 극악무도하다 해도,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을 훨씬 넘어선다.
예수님 : 나단 앞에 서 있는 다윗과 빌라도 앞에 서 있는 예수님. 내가 누구인지를 알 때,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 때, 하나님이 우리 앞에 개인으로 서신다. 진실하고 솔직하게 열린 개인으로. 이 개인적인 하나님이 나의 개인적인 죄를 직면하고 처리하신다. 나를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이끌어 주시면서.지금까지는 제삼자가 다윗에 대해 말했지만, 이제는 다윗이 직접 앞으로 나와서 자신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한다. 시편 18편은 생동감이 넘쳐흐르는 기도문이다. 이 시편만큼 다윗의 생명력이 약동하는 기도문도 없다.
"하나님은 나의 반석" : (시편 18편 2-7절 생략) 다윗의 삶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 한 가지를 고른다면, 그것은 하나님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을 생각했으며 하나님을 상상했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으며 하나님께 기도했다. 다윗은 은유로 기도했고 경험을 기도로 삼았으며 계시를 기도로 삼았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 그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그의 내면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되었다.
"가장 높으신 분께서 그 목소리를 높이셨다" : (8-20절 생략) 다윗은 이 시에서, 갈라져서 두 동강이 난 바다, 천둥으로 흔들리는 산의 모습을 상상해 낸다. 그는 이 이야기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있다. 다윗은 평상시 그답게 말들을 놀랍도록 멋지게 노래하며 기도하는 데 사용한다. 다윗이 시인이었다는 사실은 다윗이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만큼이나 우리가 참된 인간성을 회복하는 데 많은 의미를 준다.
"주께서 나에게 상을 내려 주시고" : ( 21-28절 생략) 그런데 이 시편의 분위기와 운율이 숙고하고 반추하고 명상하는 것으로 느닷없이 변한다. 변화를 일으키는 데는 우리의 여러 가지 행동들이 있다. 성품을 함양하고 결정을 내리고 습관을 기르고, 한 곳에 열중하고 계명에 순종하고 죄를 고백하는 일 같은 것 말이다. 물론 이런 일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장 커다란 부분은 아니지만 우리가 행동하고 생각하는 방식은 중요하다.
"주께서 나에게 싸우러 나갈 용기를 북돋우어 주시고" : (29-46절 생략) 이제 다윗은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을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구비시켰는지에 대해 증거하는 기도를 한다. 그러나 인간다운 삶의 정수로 제시되는 다윗의 삶의 여건이 전적으로 비인간적이라는 사실 그리고 다윗이 사람을 죽이는 그러한 전쟁에 정열적으로 참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것일까? 다윗이 살았던 문화적 여건은 상당부분 블레셋 문화와 가나안식 도덕관 - 폭력과 난잡한 성문화 - 이 지배적이었다. 우리는 다윗이 어떤 여건에서 살았는지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들은 바로 인간적 여건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낼 수 있는 유일한 여건이다.
"나의 구원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높여라!" : (47-51절 생략) 다윗이 탐험하고 부딪쳐 보지 않은 삶의 영역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항상, 적어도, 결국에는 그의 삶의 가장 큰 부분은 하나님이었다. 다윗의 삶은 하나님을 긍정하는 삶, 하나님께 긍정을 받는 삶, 드넓고 광대한 삶이었다. 다윗에게는 더 다듬어져야할 부분도 많았지만 성경은 그것들을 그의 오점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처해있는 상황으로 제시한다. 이는 먼저 선해져야 그 보상으로 하나님을 얻는다는 잘못된 생각을 반박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일단 그저 은혜로 하나님을 얻는다. 그러고 나서 평생동안 꾸준히 하나님의 방식으로 훈련받는다.이제 다윗은 죽는다. 죽음은 우리의 인간됨을 종결시킨다기보다는 입증해 준다. 따라서 참으로 사는 법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음에 대해 깊이 묵상하고 숙고해야 한다. 죽음을 부인하는 것은 삶을 회피하는 것이다.
다윗의 죽음 : 40년 전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에 대해 숭고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죽음을 자신의 존경과 사랑을 나타내 보이는 계기로 삼았다. 다윗처럼 참 삶의 길을 아는 사람들은 죽음의 문제를 회피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윗이 죽었을 때는, 숭고한 반응은 고사하고 애도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가 죽을 당시 집안은 온통 싸움판이었다. 그의 유언은 야비하고 무자비했다. 그것은 전에는 자비를 베풀어주었던, 오랜 숙적 시므이를 처형시키라는 명령이었다.
수넴 여인 아비삭 : 그러나 아비삭은 예외다. 아비삭은 다윗의 임종을 둘러싼 암흑과 혼란 속에서 빛나는 단 하나의 불빛이다. 나는 아비삭의 등장을 정치적 목적을 위해 활용되는 성적인 기능 정도로 축소시키는 것에 반대한다. 그녀는 그것을 훨씬 넘어서는 죽음의 신성함에 대한 증거이며, 죽어가는 다윗의 옆을 지키는 신성한 임재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죽어가면서 신하들, 아들 아도니야, 아내 밧세바에 의해 차례로 버림받는다. 그러나 그들이 다윗을 저버리는 와중에서도 아비삭만은 조용히 그리고 아름답게 다윗의 옆을 지키고 있다.
신하들, "젊은 처녀를 한 사람 구하자" : 신하들은 다윗의 죽음을, 해결해야 할 문제로 취급한다. 그들은 우선 이불을 더 많이 덮어주는 방법을 취한다. 그 방법이 통하지 않자 이번에는 그들은 이스라엘 골짜기의 수넴 마을에서 아비삭을 데려온다. 그러나 이 치료법 또한 성공하지 못한다. 다윗은 점점 하나의 문젯거리가 되었고 그만큼 인격체로 대접받지 못한다. 이는 통탄스러운 비인간적 대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아비삭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다윗 곁에 계속 남아 있다.
아도니야, "내가 왕이 되리라" : 아도니야는 다윗의 아들 중 가장 나이 많은 이로서 서열상 왕위 계승자다. 그러나 다윗이 오랜 기간 병석에 누워있으면서 쉽사리 죽지 않자, 마침내 아도니야는 완전